전생검신 91권 02화
제갈사의 말은 결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남극선옹의 가면을 썼을 때 나는 완전히 자아를 먹혔으며 내가 ‘백웅’이었다는 건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내 자아가 일깨워진 것은 상대하던 태공망이 내 정체를 눈치채고 지속적으로 질문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런 게 없었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내가 남극선옹인 줄 알았을 것이리라.
‘……츠쿠요미가 만일에 내 자아를 먹는다면 남극선옹 때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아. 태공망은 내 진짜 정체를 보고 싶어서 나를 추궁했지만, 복희는 이미 전후 사정을 알기 때문에 굳이 볼 이유가 없어.’
상대의 도움이 없다면 과연 나 스스로 자아를 깨닫는 게 가능할 것인가?
솔직히 아무런 확신도 보장도 없었다.
제갈사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하며 지금 츠쿠요미의 가면을 쓰는 게 엄청난 도박임을 내게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
하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 복희에게 정상적인 수단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이대로 패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야만 했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죽음으로써 다음 회차로 회피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외신 반고가 내 전생을 막고 있기 때문에 회피가 불가능한 게 너무 컸다.
‘각오를 하자!’
나는 각오를 다진 채 제갈사에게 말했다.
[해 보자! 어떻게 되든 나는 감수하겠어.]
[좋은 각오군. 그래도 안전장치가 아예 없지는 않으니 걱정 말아라.]
[어? 혹시 내가 가면에 잠식된 후에도 뭔가 자아를 되찾을 수단이 있는 거냐?]
[…… 확실치는 않다.]
이윽고 제갈사가 내게 그 ‘방법’을 이야기했고, 나는 제갈사가 망설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말은 되지만 하나하나가 도박 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갈사가 기책의 대가라지만 모든 게 걸려 있는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도박 수만 진언하는 게 그리 내키는 일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책사인 제갈사를 믿어주는 게 바로 내 역할이다…….’
책사를 믿어주지 못하는 놈이 이길 자격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번민하지 않고 제갈사에게 말했다.
[걱정 마. 잘 되겠지!]
[크크큭…… 그러기를 바라마.]
[가자!]
나는 잠시 후 복희를 노려보며 서서히 내 품속에 손을 뻗어 가면을 꺼냈다.
지잉…… 지잉…….
흑과 백으로 물들어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츠쿠요미의 가면을 본 복희가 흠칫했다.
[…… 아니…… 츠쿠요미의 가면인가? 정말 그걸 쓸 생각인가?]
“…….”
[그것 또한 영겁의 소멸인 것은 마찬가지일터. 자네가 그 강대한 전생자의 업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복희는 과연 현룡답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단숨에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각오를 다졌기에 속으로 더욱 결의를 다지며 말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뭅니다. 지금까지 실컷 위세를 과시하셨으니 쥐가 물면 얼마나 아픈지 깨달을 때가 되었지요!”
복희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정녕 그래야겠나……? 그대가 전생의 능력만 포기한다면 나는 그대와 동료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해 줄 생각이네만.]
“타협은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아무리 그대에게 전생자의 결의가 있다 하더라도 검신이라는 꿈이 모든 걸 걸고 도박할 정도의 꿈이란 말인가.]
“…….”
꿈이라…….
나는 그 단어를 잠시 되뇌었다. 사실 복희의 말대로 아직까지 검신이라는 목표는 절실하다기보다는 이제야 지향점으로 삼은 정도였다.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의 꿈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꿈이 확실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모든 이가…… 확실치 않은 현재를 걸어가면서 막연히 미래를 꿈꾸고 있을 뿐이고 저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저도 제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 아직도 번민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 해서…… 꿈을 꿀 기회마저 포기할 수는 없는 겁니다. 살다 보니 진공가향 대신 검신의 꿈을 생각하게 된 것처럼…… 언젠가는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는 거겠지요. 복희 님께서는 제게 그 기회를 전부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진 복희의 말은 내 마음속을 크게 진탕시켰다.
[그 꿈의 종착역이 결국 절망이라면 어찌할 셈인가? 자네는 그냥 내게 지금 이 순간 능력을 양도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겠지.]
“…….”
[모든 꿈이 좋게 끝나는 건 아닐세. 악몽은 언제나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지.]
갑작스레 정곡을 찔린 것 같다. 그 정도로 복희의 말은 내 심중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정말 그런 경우가 올 것 같은 강한 전생자의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애써 내 직감을 부정하며 천천히 가면을 든 손을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그 후회조차도 제 인생입니다……!!”
달칵!!
그리고 나는 츠쿠요미의 가면을 썼다.
***
아주 긴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시작이 아닌 종말이었으며…….
끝나지 않는 후회일 뿐이었다.
‘이건 누구의 꿈이지?’
나는 희미한 이성을 유지한 채 몽환(夢幻)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 그 희미한 몽환 속에서, 어느덧 내가 수면(水面) 위를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찰박…….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면 위로 둥근 파문이 퍼져나간다. 파문이 퍼져나가면서 머릿속에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가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난 건가? 그것도 과거로 되돌아왔어?]
그 목소리는 무척 낯설었다. 내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렇군…… 이 책에…… 피가 묻은 것 때문인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하하하하. 이거 아주 좋군.]
찰박…….
찰박…….
[…… 또다시 시작이라고? 그럼 3회차인데…… 설마 이 책으로 회귀할 수 있는 횟수는 무제한인 건가.]
[이번엔 실수하지 않겠어.]
[저번 회차보다 더 빨리…… 힘을 쌓아주지.]
찰박…….
찰박…….
[이 세상에 신(神)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군.]
[그럼 이 책도 신이 만든 것인가?]
[…… 아무래도 좋아. 더 힘을 쌓으면 될 뿐이다.]
찰박…….
[이제 마왕 정도는 이길 수 있지만…….]
[…….]
[힘이 부족하군. [옛 지배자]라는 것들은 너무 강해.]
[책의 도움을 빌려야겠어. 내 장점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해.]
[책이여, 계약하자.]
나는 계속 한 걸음을 내딛던 중,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전생한 횟수가 중요하다면 그 횟수를 활용해주지.]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의 기억을 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츠쿠요미.
전생자 츠쿠요미의 기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이 물이 바로 츠쿠요미의 기억…… 인가?’
나는 애써서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려 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멍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십만 번 베기를 할 때 정신이 혼탁한 지경까지 갔었던 것처럼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야 돼…… 이놈의 기억에 휩쓸리면 나 자신이 사라진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다. 여기서 못 버티면 모든 걸 잃고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내 앞에서 물기둥이 치솟으며 무언가 기이한 존재가 출현하는 게 보였다.
촤아아악!!
물기둥과 함께 나타난 그 존재는 잠시 후 형상을 취하였다.
나는 그 형상을 보는 순간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이…… 이런 젠장……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거야?
내가 혼란스러워하던 바로 그때 눈앞에 나타난 존재가 나직이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구나…….]
“…….”
[우리 일족이 일개 관조자로 남기에는, 그대가 너무 깊은 곳까지 발을 들인 게 아닌가 싶구나.]
졸린다.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수마(垂魔)가 덮쳐오는 가운데 나는 혼탁한 눈을 뜨며 간신히 말했다.
“선…… 선지자. 네가 어째서 여기에…….”
그랬다.
내 눈앞에 출현한 것은 바로 마도왕 선지자였다.
내가 츠쿠요미의 가면을 써서 놈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중인데 어째서 저놈이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
선지자는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입을 열지 말라. 이미 그대는 아카이브에 들어와 버렸고, 그대의 모든 행위가 기록되고 있다.]
“뭐……?”
[제발……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 그 빌어먹을 목걸이…… 이런 운명의 장난이…….]
목걸이?
씹어뱉듯 말한 선지자가 나를 쳐다보길래 나도 내 가슴팍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어느새 새까만 빛을 내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아, 이건……?’
흑요석 목걸이?
선지자가 서서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께서…… 더 이상…… 이곳을 주시하게끔 하지 말란 말이다…….]
나는 선지자가 바라본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
아주 멀리에 새하얗고 거대한 손이 있었다.
***
…….
하…… 하하…….
정말로……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믿겨지지 않아서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혼돈 속에서 영겁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저 절망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삶을 되찾다니!!
내가 웃고 있자 앞에 있던 복희가 말했다.
[츠쿠요미인가…….]
나는 복희의 말에 만면의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대꾸했다.
“다시 봐서 반갑군요, 복희. 정말로 반갑습니다.”
[…….]
“왜 떨떠름해 보이지요? 하하하…… 저는 무척 반가운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복희는 여전히 침묵했다.
백웅의 몸을 차지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 주시하다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하긴…… 먼저 약속을 어긴 건 그쪽이지요? 본디 백웅을 내가 제압한 후에 반고 소환 의식을 진행하기로 했으면서 전투 중에 이미 진행을 해버리다니.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승자를 반고의 힘으로 제압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내 말에 복희가 대꾸했다.
[너야말로 전지 능력으로 이미 내 계책을 읽고 있었겠지. 허나 한마디 제재조차 하지 않았던 건 너 또한 무언가 내게 반격할 속셈이 있었던 게 아니겠나.]
“후후. 뻔한 이야기를…….”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복희, 당신이 백웅에게 내 가면을 쓰지 말 것을 종용한 것도 사실 나를 맞닥뜨리는 게 두려워서는 아니었습니까? 나는 이미 당신의 패를 보았지만, 당신은 아직 내 패를 모르니까요…….”
[…….]
“뭐, 좋습니다. 저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으니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하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지로 복희를 가리켰다.
“어차피 겁(劫)을 쓸 수 있는 이상 내가 이길 테니까.”
몇겁까지 쓸 수 있을까?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백웅은 30번 전생했다고 했었지.’
삼겁에는 27번의 전생이 필요하므로 딱이었다. 물론 백웅의 전생횟수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사겁(四劫)의 능력 또한 내가 원한다면 사용 가능할 것이다. 역량에 따라 원래 쓸 수 없는 경지를 끌어쓸 수 있는 게 바로 내가 개발한 윤회지법의 장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해서 윤회지법을 끌어올려 보았다.
그러고는 깜짝 놀랐다.
‘……?!’
이게 뭐지?
어째서 윤회지법의 경계가 십이겁(十二劫)까지 다 열려 있는 거냐?
‘말도 안 돼. 십이겁은 나조차도 이루지 못했건만…….’
백웅 이놈이 나를 속인 건가? 30번 전생했다고 말해놓고서는 사실 그 몇 배를 환생했다는 거냐?
…… 아니, 나의 전생 횟수도 최소 3000번은 넘었다. 그런데도 십이겁은 성취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업(業)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
흐음, 깊게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눈앞의 삼황부터 때려눕혀 볼까.
‘처음 생각대로 삼겁으로 가보자.’
윤회지법(輪回之法)
제삼겁(第三劫)
천봉주인(天封呪印)!
다음 순간 내 검지에서는 윤회지법 제삼겁의 권능이 빛의 광선처럼 뻗어 나가서 그대로 복희를 공격했다. 그리고 복희를 보호하려는 듯 옆에 있던 여와가 신력으로 권능의 방패를 써서 복희 앞을 가로막는 게 느껴졌다.
‘후후.’
나는 여와의 시도가 같잖아서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천봉주인과 여와의 방패가 부딪히는 순간 여와가 휘청거렸다.
[크으으윽!!]
치지지직
갑자기 여와의 전신에 주문(呪文)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돋아나면서 그녀의 신체(神體)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복희가 중얼거렸다.
[방어를 무시하고 신력의 근원을 갉아먹는 주술인가. 하지만 무척 집요하고 악독하구나…….]
과연 복희다. 내 윤회지법의 본질을 단숨에 통찰한 걸 보면 이 우주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건 맞다.
물론 내 앞에서는 무의미하지만.
“해주(解呪)할 수 있을까요? 남매간의 두터운 정을 보고 싶군요.”
[그럴 필요 없다. 여와는 내가 걱정해줄 존재가 아니니까.]
“흐음?”
꿀럭…… 꿀럭…….
푸화악!!
다음 순간, 여와의 전신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갑작스럽게 허물을 벗고 몸뚱이가 그 허물에서 튀어 나왔다. 그리고 천봉주인의 주술은 허물 째로 소멸되었기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오, 저런 일도 할 수 있군요. 과연 삼황입니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하시죠.”
[무척 짜증 나는 말투로군…….]
내가 정중하게 말했음에도 복희는 불쾌하다는 듯 툭 하고 내뱉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아까부터 네가 말하는 게 이상하구나, 츠쿠요미.]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백웅은 30번 전생하는 동안에 우리 삼황오제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알아내었다. 너는 백웅보다 몇 곱절 이상 전생한 자일 텐데 여와의 기술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하는구나.]
“…….”
[네가 신격 츠쿠요미일 때도 이상했다. 우리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전지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 같았지. 설마 너는…….]
후후…… 복희가 머리가 좋다더니 정말이었구나.
겨우 그만한 대화로 거기까지 알아챘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입니다, 복희.”
나는 씩 웃으면서 내게 있어서는 당연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내가 전생할 때 삼황오제 같은 건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대체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