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9권 17화
현실세계로 탁록시대의 동료를 한 명 소환할 수 있다고?!
나는 망량선사의 말에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런 게 가능한 거냐?”
[싫다면 말해라. 안 해도 된다.]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이번에 모아온 연기가 그저 소멸될 뿐이다.]
“……!!”
나는 망량선사의 대답에서 어찌 된 상황인지를 눈치챘다.
‘……이번에 동료소환권을 안 쓰고 연기를 모았다가 다음에 더 많은 동료를 불러오는 건 안 통하는 거구나!’
무조건 동료를 소환해 오는 게 이득이다!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챘지만, 여전히 미심쩍어서 말했다.
“더 많은 연기를 모으면 더 많은 동료를 소환할 수도 있나?”
[가능하다.]
나는 망량선사의 대답에 어리둥절해했다.
“어? 그게 가능하면 왜 이번에 소환가능한 건 한 명뿐이라고 하는 거냐. 내가 연기를 많이 모아왔다면서?”
[연(緣)이 이어진 게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직 세계의 연결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 명 이상을 불러올 경우 세계의 존립이 위험하므로 한 명으로 제약했다.]
“흠…… 그런 건가.”
[누구를 불러올 것인지 말해라.]
“…….”
탁록시대의 동료 중에 누구를 불러오는 게 좋을까?
나는 그 말에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명의 동료들이 있었고 다들 쓸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누구 한 명이 제일 좋다고 확신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고민하던 중 입을 열었다.
“……유망!!”
당연히 지금 탁록시대의 동료 중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건 유망이다! 거신족의 최고위 장로이자 그 진짜배기 무력은 설령 삼황오제의 본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 현세에 유망만큼 강한 존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 유망을 불러온다면 틀림없이 굉장히 이득을 볼 수 있으리라!
‘뭣보다 유망만큼 강한 동료가 있다면 스사노오 토벌 때도 무척 쓸만하겠지!’
유망 혼자서 스사노오의 본체를 썰어 버릴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자 망량선사의 대답은 의외였다.
[불가(不可).]
“……?!”
나는 크게 놀라서 외쳤다.
“아, 아니 왜!! 이유가 뭐야!”
내 질문에 망량선사는 나를 묘이(妙異)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유망은 네 동료라고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너와의 인연보다 신농(神農)에게 바치는 충성심이 100배는 강하기 때문이다.]
“……!!”
[설명하는 걸 깜박했지만 너보다 훨씬 우선순위로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있다면 그런 존재는 소환이 불가능하다.]
“이런 젠장 할…….”
설마 그런 제약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확실히 유망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어울려주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염제 신농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그저 자유로운 성정이라서 나와 놀아줬을 뿐…… 그는 신농과 나 중에 택하라면 무조건 신농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유망이 예외적인 경우일 뿐 대부분은 소환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유망 외의 다른 동료들 중에 고르라니 아까처럼 또다시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환웅의 계책대로라면 내가 현실에서 해야 하는 일도 꽤 많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부른 동료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야만 한다…… 다음 번에 또 소환하는 걸 믿고 가기에는 현세에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
과연 적재적소에 잘 써먹을 수 있을 만큼 괜찮은 동료라면 누구일까……?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말했다.
“유소……는 안 될까?”
[탁록의 시대에 존재치 않을 뿐만 아니라 네 동료도 아니다.]
“……역시 그렇지?”
에잉…… 좋은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잘만 하면 흑막 유소를 한 번에 때려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응? 그러고 보니 유소와 달리 소녀(素女)는 [무한]의 권능을 갖고 있으니…… 현세에서 엄청나게 도움이 될지도?’
삼황오제조차 소녀의 권능을 탐내서 서로 다툴 정도이니 현세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세계의 균형을 깨버릴 정도로 엄청난 활용도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윽고 직감적으로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소녀가 일단은 나의 동료라지만 흑막 유소와는 동일한 영혼을 지니고 있는 관계이다. 만일에 현세로 소녀를 데려왔다가 유소가 모종의 수단을 써서 소녀의 능력을 취하기라도 한다면 유소는 단숨에 전지와 전능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도리어 소녀는 절대로 현세로 데려와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내 억측일 수도 있지만 그 두 자매의 사기적인 권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할 만 했다. 전생을 빨리 하려는 것도 유소를 경계하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하면 소녀를 현세로 불러오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으음…… 뭔가 마땅한 녀석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이환웅을 데려오면 책사로서 쓸 만하겠지만 사실 이환웅 말고도 현세에 책사는 많다. 제갈가문의 책사들뿐만 아니라 머리 좀 쓴다는 인간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그저 조언자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환웅은 탁록시대에 남아서 다른 동료들을 통제해줘야 했기에 그를 데려오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건달파 또한 마찬가지다. 마왕으로써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마왕급의 힘을 지닌 동료도 현세에 있었다. 천계의 제천대성 같은 존재들한테 도움받을 수 있는 것이다. 뭣보다 앞으로 신적 존재들이 본격적으로 부상하며 [옛 지배자]의 본체와도 싸워야 할 텐데 건달파 정도의 힘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단 현세의 아수라나 미호부터가 혼자서 건달파를 이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불러오면 좋은 거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중얼거렸다.
“흑웅은 안 될까?”
[그건 네 동료가 아니라 또 하나의 너 자신이나 다름없는 음신(陰身)이다. 불가하다.]
“쳇…….”
역시 동료가 아니라 또 다른 나 자신이라고 판정해 버리는 건가?
흑웅만 불러올 수 있다면 신력도 맘대로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꼼수가 안 먹히니 아쉬웠다.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전륜성왕이나 복희…….는 안 될까?”
[…….]
잠시 후 흑묘 망량선사는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윽! 역시 양심이 없었나……?!
나는 움찔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렇겠지? 근데 이유라도 좀 말해줘…….”
[그들은 [큰 굴레]의 역사에서 거대한 비중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또한 탁록시대에는 살아 있으나 미래에는 소멸하거나 봉인되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미래로 불러 올 경우 존재 자체가 모순인 그들을 소환했을 때 생겨나는 인과율의 파괴적인 혼돈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예 그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면 모를까.]
“응?”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망량선사가 말했다.
[선택을 하기 힘든 것 같으니 한 가지를 더 알려주겠다. 불러온 동료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강해져서 소환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격(格)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나는 뜻밖의 좋은 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오?! 진짜냐?!”
[충분한 이유가 있지. 이제 누구든지 간에 선택을 해라.]
“흠.”
망량선사의 독촉에 나는 끙 하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놈의 망량선사는 내가 너무 오래 고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기색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후 나는 고민을 끝내고는 외쳤다.
“……마음을 정했어!! 나는……!!”
좀 과한 것 같은데, 이번에도 무리일까?!
내게서 소환할 동료의 이름을 들은 망량선사가 나직이 대답했다.
[좋다…….]
“되, 되는 거냐!!”
나는 도리어 그런 망량선사의 반응에 놀라고 말았다. 아까처럼 그냥 되나 안 되나 시험해본 것뿐인데 된다고!
망량선사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자라면 그다지 인과율에 모순될 건 없지…… 한 번 경계를 [넘어 버린] 것도 큰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너 스스로 그의 봉인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잠시 후 저편의 오솔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걸어오던 자는 나를 가볍게 지나쳐서 반대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나는 갑자기 무시당하자 당황스러웠다.
“어?!”
같이 가는 거 아니었나?!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인과율의 부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이치에 맞추기 위해 저 녀석은 현세에서 너와 합류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보게 되겠지.]
망량선사의 그 말과 함께 나는 점차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감기며 격렬한 수마가 덮쳐오자 망량선사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이런…… 혼돈의 재능인가…… 뜻하지 않게 한 명이 추가되었구나.]
***
…….
나는 정신을 차리며 깨어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오랜만에 기계 신체가 느껴졌다.
철그럭…….
기(氣)도 신력도 쓸 수 없는 이 몸.
나는 한 번 목소리를 내 보았다.
[아아. 아. 목소리는 잘 나오네.]
기계음이긴 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간만에 다시 기계의 몸으로 활동하게 되니 신선한 기분이 든 것이다. 다만 이 몸에는 이븐 시나의 기술이 깃들어 있기에 기계의 몸에 용(龍)의 단전이 잠재되어 있어서 아마 익숙해지면 기력(氣力)도 쓸 수 있게 되긴 하리라.
‘사룡(死龍)의 힘을 좀 더 소화시키는 게 이 몸의 과제였던가…….’
내가 현실세계의 몸에 익숙해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망량선사의 인도에 따라 여기까지 왔다.”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낯설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디서 들은 목소리였지?’
무척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내가 그쪽을 쳐다보자, 거기에는 웬 금발벽안의 미청년이 앉아 있었다.
중성적인 느낌이 들지만,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그 미청년은 유럽 특유의 귀족(貴族) 복장을 하고 있어서 영락없는 서방열국의 고위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중원이라기보다는 서방 수호자의 근거지라서 꽤나 서방에 가까웠으므로 저런 인간도 충분히 있을 만했다.
하지만 대번에 나를 아는 척 하는 그 미청년의 정체가 애매모호해서 잘 알 수가 없었다.
‘누구지……? 어디서 본 얼굴인데…….’
내가 긴가민가해서 금발벽안의 미청년을 쳐다보자, 그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설마 내가 역사 속에서 그렇게 유명한 존재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어쩌면 네가 전생(轉生)하는 그 시점에도 나는 세계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있었을지도.”
무척 유창한 중원어였다. 도저히 서양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유창했기에 나는 약간 놀랐다.
[…… 누구냐?]
나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부른 건 네가 아닐 텐데…….]
상대의 정체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절대 내가 부른 동료는 저 녀석이 아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마 그렇겠지?”
금발벽안의 미청년은 싱긋 웃더니 문득 자신이 갖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서 슬그머니 발검(發劍)했다.
‘지팡이 칼?’
무기로서는 무척 약한 편이지만 서방에서는 귀족들의 호신용으로 유행한다는 그 칼 -
그 지팡이 칼의 날은 무척 가녀렸고 마치 유리와 같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팡이 칼의 날을 쳐다보고 있던 미청년이 그 지팡이 칼을 땅에 꽂았다.
후왓!!
그 순간, 나는 내가 앉아있던 침상의 주변의 공간이 완전히 뒤바뀌면서 눈앞의 금발벽안의 청년을 정점으로 원탁(圓卓)이 나타나 있었다. 나 또한 어느새 원탁에 앉아 있었고 다른 세 명의 사람이 원탁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금발벽안의 청년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파우스트…… 아서 왕…… 베루스!]
그랬다. 파우스트는 예전에 봤을 때처럼 마치 부리가 나 있는 듯한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금갑의 청년기사, 아서 펜드래곤 왕은 엑스칼리버를 장비한 채 앉아 있었다. 또한 베루스는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나와 인연이 있는 존재였다.
나는 일전의 경험으로 인해 그들의 공통점을 순식간에 알아챌 수 있었다.
‘조디악 멤버!’
서방의 인류 비밀결사!
내 시선이 빠르게 금발벽안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정말 처음 보는데?! 저 녀석도 조디악 멤버라고?’
총 13명이 존재하는 조디악 멤버의 면면은 대충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금발벽안의 청년은 정말 처음 보는 자였다. 그러자 금발벽안의 청년이 말했다.
“네게 도움 될 만한 녀석들만 빠르게 모아왔다. 네 책사들 말로는 대충 다 아는 얼굴이라더군.”
[너는…… 누구냐? 어떻게 조디악 멤버를…….]
금발벽안의 청년은 팔짱을 끼며 오연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조디악 멤버를 이끄는 수장(首長)이다. 동시에 서방에 잔류한 고대신들의 전권을 위임받은 존재이지.”
[……!!]
“백웅 너는 멀린이나 비비안도 아는 모양이던데 다른 녀석들은 꽤 바빠서 못 데려왔어.”
뭐?! 수장이 따로 있었다고?! 내 전생경험에 따르면 그런 거 없었는데?!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놈은 왠지 반가워하는 말투로 재잘댔다.
“너와 만나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었지. 만년쯤 전에는 천축대륙에 살다가 바이킹 놀이도 해보고, 로마제국과 위진남북조 시대에 황제도 잠깐 해봤고 천계 구경도 했던가? 최근에는 바이에른 대공(大公)을 해봤던가, 그래.”
[뭔 개소리야.]
금발벽안의 청년이 갑자기 웃기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꽤 높은 목소리로 킬킬거렸다.
“아하하…… 남장을 좀 했다고 정말 못 알아보는구나. 하긴 너와 내가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뭐……? 남장? 그럼 너는 여자라는…….]
“잘 봐.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
[…….]
나는 그를 집중해서 관찰했다. 그리고 한참 후, 어디서 봤던 얼굴인지를 기억해내었다.
[…… 서, 설마!!]
“알아차렸나 보군.”
나는 믿기지 않아서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도…… 동방삭?!]
따악!
그녀는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치며 싱글싱글 웃었다.
“맞다, 백웅! 삼천갑자(三千甲子) 만이로구나!”
[……!!]
삼천갑자 동방삭!
혼돈의 재능을 지니고 인류 태초의 여명부터 살아온 최초의 인간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멤피스 문명의 고대신들이 지닌 보물들을 훔치려고 했었고 명계의 추적을 피하기까지 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시에 동방삭은 탁록시대의 내 동료이자 내가 세운 주식회사의 초기 주주였다!
아, 아니 그런데 대체 어째서……?
나는 삼천갑자 동방삭이 난데없이 나타난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했다.
[말도 안 돼!! 망량선사한테 부탁해서 부른 건 네가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무슨 수로 탁록시대에서 현실에 나타난 거냐고!!]
정말로 내가 부른 건 동방삭이 아닌 다른 존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부르지도 못한 녀석이 어떻게 이 현실세계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내 재능이 뭔지 기억나나?”
동방삭의 물음에 나는 기억나는 대로 대답했다.
[무문(無門)의 재능. 네가 문이라고 인식하는 걸 뭐든 통과하는 혼돈의 재능이랬나…….]
“맞아. 나는 네가 명계의 거울 앞에서 [꿈]을 통해서 되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엿들어서 알고 있었거든.”
[…… 설마…….]
동방삭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를 몰래 따라가서 네가 잠든 직후 명경(冥鏡)을 [문]으로 인식해서 통과했을 뿐이야. 그랬더니…… 이렇게 된 거지.”
[…….]
나는 믿기지 않아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명경을 [문]으로 인식하고 통과했다고?’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아니…… [혼돈의 재능]이란 게 그런 영역까지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단 말이냐고?!
동방삭이 말했다.
“물론 이 시대로 곧장 온 건 아니야. 나는 이 [현실세계]의 과거 시점에 떨어진 것 같더군.”
[과거 시점……?]
“그래. 당연히 너를 포함한 탁록시절의 동료들은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동떨어진 [큰 굴레]가 아니라 [지금]과 이어진 과거였던 거지. 나는 연(緣)이 이어진 굴레로 들어온 거야.”
[…….]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 보이는군. 좀 더 쉽게 말해줄까…….”
동방삭의 이어진 말에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나는 탁록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만 년째 계속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수만 년 동안 너와 만날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망량선사의 인도에 따라 오늘 이 시간 이 장소에 온 거야. 이 시간 또한 오래전부터 망량선사에게 전해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