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9권 14화
신력에 제대로 대항할 수 있는 건 신력 -
그것은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을 생각해볼 때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다른 종류의 초능력이나 힘도 수준이 높다면 신력에 맞설 수 있긴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력이란 법칙 그 자체를 갖고 노는 혼돈의 힘이었으니 거의 모든 초상능력은 신력의 하위호환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세피라’라는 힘은 그 신력에 속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능력이었다. 힘의 가호를 택하긴 했지만, 가호 같은 건 여태까지 많이 받아왔던 것이고 사실 이 능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내면의 세쓰를 생장시키고 줄기를 굵게 만들어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왠지 이 세피라라는 능력이야말로 눈앞에 있는 저 닭대가리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 세피로트에서 신력이 소멸되는 이유는 세계수가 싫어해서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세계수 그 자체에서 파생된 능력을 쓴다면 도리어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빠르게 합장을 하며 트리무르티를 사용하려 집중했다.
‘간다……!!’
트리무르티의 정신세계 한가운데에 있는 홍옥이 더욱 시뻘겋게 물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세 개의 영역에 각각 세피라의 가호를 배치했다.
제 8계 호드의 [힘]!
제 9계 예소드의 [힘]!
제 10계 말쿠트의 [힘]!
“…….”
전부 힘밖에 없으니까 뭔가 극단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왜 제갈사나 영지주의 마도사들이 이걸 보면 날 욕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하지만 기분은 기분일 뿐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였다. 나는 트리무르티의 조합을 결성하며 미간을 모은 채 잔뜩 집중해서 생소한 힘을 처음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압!!”
치잉 -
한마디의 기합소리와 함께 허공에 둥근 삼륜(三輪)이 생겨나서 내 몸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세 개의 륜이 적인 아브락사스를 공격하지 않고 그냥 나를 감싸는 걸 보자 약간 당황스러웠다.
‘응? 능력이 발동한 건 맞을건데…… 이건 공격형 능력이 아닌 것인가?’
사실 트리무르티의 조합은 무궁무진했기에 조합을 하는 나조차도 그 조합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예측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이탄의 잔영에 둘러싸여서 괴로워하고 있던 아브락사스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설마 공격한 자에게 카르마를 반사하는 기술일 줄이야…… 하지만 이 환영 자체가 큰 힘을 가지지 않은 이상 무시하고 본체를 공격하면 그만입지요!”
투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이탄의 잔영을 확 지나쳐서 아브락사스가 내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왔다. 순간이동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차원을 접어서 내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고 나는 아브락사스가 나타난 순간을 인식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아브락사스의 맹렬한 채찍이 마치 번개처럼 내 몸을 내리쳐 왔다.
‘…… 달라!’
방금 전까지 대충 날려오던 편법공격과는 질적으로 다른 공격! 가공할 만한 잠력(潛力)이 맺혀 있는 걸 감지한 나는 지금 아브락사스가 자신의 채찍에 신력을 실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대한 신력을 머금은 무기의 공격은 그 자체로 절세신병을 한없이 초월할 수 있었기에 나는 지금까지와 같이 [흐름]을 읽는 방식으로는 절대 방어도 회피도 할 수 없음을 알아챘다.
이런 걸 막아낼 방법이라면 오로지 무쌍패 뿐……!!
안 하면 이번에 무조건 죽는다!
‘…… 아니야!! 한 번…… 모험을 걸어보자!’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무쌍패가 답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정확히는 무쌍패로 한 번을 견뎌봐야 적의 기량이 너무 출중해서 어차피 수세에 몰릴 뿐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마 무쌍패를 연속으로 쓸 수 있더라도 그 사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으리라. 내 수많은 전투경험이 감각적으로 말해주는 사실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안정된 방어법인 무쌍패를 버리고 한번 모험을 해서라도 기회를 잡아야 한다.
눈앞의 적은 그 정도를 해주지 않으면 절대 못 이기는 상대니까!
다음 순간, 나는 무쌍패를 펼치지 않고 도리어 빠르게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내 오른손은 채찍을 튕겨내거나 잡아내려는 동선(動線)을 한참 벗어나 있었기에 찰나의 순간에 아브락사스가 어이없어하는 게 느껴졌다.
“승부를 포기한 것인지요? 여기서 끝입니다!”
절세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찰나에 그러한 아브락사스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의 채찍이 내 정수리를 쪼개 버리려는 찰나였다.
파사사삿!!
“……?!”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세 개의 륜이 후광(後光)을 뿜어내었고 그 후광에 닿인 아브락사스의 채찍은 말 그대로 원자단위로 분해되어서 소멸되고 말았다! 그리고 채찍이 소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소멸의 기운이 아브락사스의 본체에까지 전이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츠아아앗
“크윽!!”
슈칵
아브락사스는 급히 자신의 팔을 절단하며 소멸의 기운을 떨쳐내었고, 잘려나간 아브락사스의 팔은 바닥에 퉁 하고 떨어지더니 잠시 후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좋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아브락사스의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그대로 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를 내뻗었다.
만상지투(萬像之偸)!
파밧
주춤거리는 아브락사스를 뒤로 하고 나는 어느 새 그의 뒤편까지 뛰쳐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는 팔을 자른 충격을 딛고 일어서다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당황해했다.
“……?! 아, 아니?”
철그럭
내 오른 손에는 거대한 갑옷이 들려 있었다. 육중한 무게였지만 내 힘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서, 나는 그 갑옷을 든 채로 씩 웃으며 아브락사스를 뒤돌아보았다.
“네 갑옷은 이제 내 거다.”
“후…… 후효효…….”
아브락사스는 망연자실한 소리를 냈지만 바로 이게 나의 노림수였다.
어떻게든 아브락사스의 공격을 무시하고 놈의 갑옷을 훔치는 것!
원래라면 아무리 만상지투가 강력한 수법이라 하더라도 저만큼 강대한 신격을 상대로 정면에서 훔치는 짓은 할 수 없다. 최소한의 빈틈이 필요했으며 그 빈틈은 놈이 공격하는 순간밖에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롭게 조합한 세피라 3개의 조합이 잘 막아주기를 기대하며 한 번 모험을 해보았고 성공한 셈이었다.
‘뭐, 설마 아브락사스의 채찍과 팔을 소멸시킬 정도로 강한 능력일 줄은 몰랐지만…….’
정말 운이 좋았다.
어찌 됐든 이제 사기적인 갑옷을 뺏었으니 최소한의 승산이 생긴 거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아브락사스는 도리어 빠르게 안정을 찾더니 크게 웃었다.
“후효효효! 오오, 정녕 오늘의 도전자는 평생에 길이남을 적수이옵니다! 설마 소인을 여기까지 대적할 수 있을 줄이야!”
뭐지? 왜 기뻐보이는 거지?
나는 아브락사스가 수세에 몰렸는데도 아직까지 웃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력으로 마구 몰아붙이면 아직도 네가 유리하다 생각하는 거냐? 난 이제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후효효…… 그것도 재밌겠습니다만…… 자신을 몰아붙이는 난적(難敵)을 타파하는 것이 또한 무인이 살아가는 삶의 재미입지요.”
“흥.”
나는 그대로 트리무르티를 발동해서 상권의 동전을 소모해서 아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갑옷을 집어넣어 버렸다. 물론 아브락사스 만한 존재라면 이런 아공간을 금세 타파하고 자기 물건을 꺼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전투 도중에 뺏길 염려는 없으리라. 갑옷을 봉인한 나는 아브락사스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넌 이제 주 무기인 채찍도 없다. 트리무르티를 써서 네 신력을 파훼할 수 있으니 이제 내가 유리할 것이다!”
“호오…… 그 기술…… 트리무르티라고 합니까? 재미있군요. 설마 트리니티(trinity)를 형성할 수 있는 기술이 다른 세계에도 있었을 줄이야.”
“트리니티?”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힘이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경지…… 두 개의 트리니티가 겹쳐서 혼돈의 소용돌이 같은 효과를 내는 방어막에 정면으로 공격했으니 소인의 우행(愚行)이었지요.”
“…….”
슈와악
아브락사스는 순식간에 자신의 손과 채찍을 현실조작으로 회복시킨 듯했다. 아브락사스가 마치 예고를 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하니, 지금부터는 메타트론의 명에 따라 소인이 가진 진정한 가호를 바닥까지 다 끌어쓰도록 하렵니다.”
쿠구구구……!!
엄청난 기(氣)! 아니, 저것은 기라기보다는 뭔가가 불타는 듯한 영력(靈力)인가?
아브락사스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들끓어 올라서 마치 새하얀 백염(白炎)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끌어올렸던 신력의 힘도 강대했지만, 나는 백염과 함께 일어나는 아브락사스의 웅대한 힘의 크기를 보자 정신 줄을 놓아 버릴 것만 같았다.
‘뭐, 뭐야……?! 저, 저 막대한 힘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브락사스의 영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에 무릎에 힘이 풀려서 휘청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신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아브락사스의 백염이 내뿜고 있는 힘에 10분지 1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큼 강대한 힘을 본 적이 손에 꼽을 만큼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9계의 시험관이라지만 이런 힘을 가지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건 말 그대로 우주를 찢어 버릴 수도 있는 힘이야!
나는 아브락사스의 미친듯한 괴력에 놀라서 외쳤다.
“이, 이런 씨발…… 너, 너는 어떻게 그런 힘을…… 대체 뭐냐고…….”
아브락사스가 껄껄 웃었다.
“후효효효. 놀라셨습니까? 사실 이건 소인의 힘이 절대로 아닙지요.”
“뭐라고?”
“자아, 기억해 두시지요. 이것이 바로…… 천사왕 메타트론께서 허락하실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처형자만의 가호…… 세피로트의 진정한 근원에서부터 끌어올리는 힘…….”
아브락사스의 눈이 청염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아인소프 오르(Ain Soph Aur) 의 가호입니다……!!”
번쩍
나는 천지를 가르는 백염(白炎)이 아브락사스를 중심으로 점차 확장되더니 그 범위를 넓혀서 내가 서 있던 곳을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급히 다시금 삼계의 세피라를 모아서 똑같은 방법으로 말쿠트, 예소드, 호드의 힘을 합일시켜서 그 공격을 막아내려 해보았다.
콰칭!!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삼륜은 아까와 달리 부질없이 유리창처럼 깨져 버리고 말았다! 방어술이 씨도 안 먹혀서 내가 경악하는 그 순간 어마어마한 백염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
…… 어?
영락없이 소멸했다고 여겼는데도 나는 잠시 후 새하얀 공간에 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아까까지 내가 싸우던 아브락사스와의 전투공간이 아닌, 완전한 순백의 공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갑자기 천사왕 메타트론이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투가 쓸데없이 길어질 듯해서 아브락사스에게 아인소프 오르를 해방할 것을 허락했다.]
“…….”
[9계의 체험은 끝이다.]
나는 메타트론의 그 말에서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짢은 기분이 들어서 메타트론을 노려보았다.
“내가 싸우는 것 정도는 하찮은 것 같아서 금세 결판을 내게 만들었단 소리냐? 오만한 놈……!!”
[그대는 충분히 집정관 아브락사스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존재이니 역량은 이미 증명했다. 허나 그대에게 천외천(天外天)의 힘을 보여주는 것 또한 공부가 되었으리라.]
“뭐? 천외천?”
[아인소프 오르의 힘은 본디 세피로트를 침략한 외계의 신을 상대로만 쓸 수 있는 것. 집정관 아브락사스가 멋대로 해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내가 그에게 허락했다. 겪어보니 어떠한가?]
“…….”
나는 그 말에 침묵했다.
‘아인소프 오르…….’
방금 전 보았던 그 백염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우주적인 법리(法理)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초월적인 힘이었다. 그 힘이 있다면 흉신이나 황제라 하더라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아니 그들조차도 몸을 사려야만 할 정도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천외천이라는 표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메타트론에게 질문했다.
“엄청나더군. 아인소프 오르라는 건 대체 무엇이냐.”
[삼천세계(三千世界)을 창조한 태초의 빛…… 또한 우리 천사들이 세피로트와 공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뭐?”
무슨 뜻이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메타트론이 잠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이미 [옥좌]에 갈 자격을 갖춘 존재…… 어쩌면 그대는 아이온을 진실로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얽혀 있는 외신들의 진정한 뜻이란 나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나 메타트론은 그대에게 또 다른 결말을 제시하겠다.]
“결말이라고?”
[그렇다…… 그대가 세피로트에 발을 들인 순간 그 가능성의 인과율 또한 열린 것이다…… 아마 그대에게 세피로트의 근원을 부여한 자가 의도한 바일 터.]
“어떤 결말을 말하는 것이냐.”
이어진 메타트론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놀라고 말았다.
[전생자여. 우리의 신을 죽이고 우리 천사들의 새로운 창조신이 되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