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9권 09화
나는 곧 사신지혼의 운용법대로 세쓰의 마력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첫 단계에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응? 사신지혼의 근본이 되는 내공심법은 구궁파천뢰…… 그 구궁파천뢰의 운용에 필요한 것은 뇌정(雷精)을 몸 안에 유동(流動)시키는 건데……?’
어째서 세쓰를 통해서 뇌정을 움직일 수가 없는 거지?
나는 뇌정을 만들어서 세쓰를 타고 움직이게 만들려 했지만, 전혀 되지 않았다. 뇌정은 그냥 평상시처럼 기맥(氣脈)으로 흘러 들어가서 구궁파천뢰로서 움직일 뿐이었다. 세쓰는 마치 처음부터 뇌정의 기운을 무시하듯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더욱 정확했다.
이래서야 구궁파천뢰 자체를 운기(運氣)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유를 모르겠군. 왜 뇌정이 세쓰로 들어가지 않는 걸까?’
삼재심법이나 뇌룡일기공을 연마할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어째서 구궁파천뢰는 세쓰의 방식으로 수련이 안 되는 거지?
나는 심도있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밤낮 내내 온갖 수련과 명상을 해본 후, 수백 년 이상 기공수련을 해왔던 경험으로 무엇이 잘못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다른 내공심법은 그냥 대기중의 기(氣)를 바로 흡수하는 거지만 구궁파천뢰는 뇌정의 형태로 한 번 가공을 한 다음에 받아들이기 때문이구나.”
다른 온갖 내공심법을 다 시도해본 결과 나온 결론!
구궁파천뢰 자체가 초대종사 초무린의 천랑뇌신결(天朗雷神決)과 팔황경천신공(八荒驚天神功)을 근간으로 하여 뇌정을 몸 안에서 돌아다니게 하는 괴악한 수련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사실 초대종사 초무린조차도 그냥 평범하게 천랑뇌신결과 팔황경천신공을 연마했을 뿐, 거기에서 또다시 뇌정의 수련법을 파생시킨 것은 후대의 뇌신류 종사들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 구궁파천뢰는 무림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특이한 심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몰라도 세쓰는 대기중에 있던 기를 1차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흐름대로 움직이는 건 잘 하지만 뇌정을 흡수시켜서 몸이 반응하게끔 만드는 2차적 방식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듯했다. 무당파의 내공이나 내가 알고 있던 구궁파천뢰 이외의 모든 내공은 별 상관없이 세쓰로 운기 가능하다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렇다면 왜 뇌정을 가공해서 받아들이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문제인데…….’
나는 기경혈맥(氣經血脈)과 세쓰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 다 힘이 지나가는 통로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자는 생명체가 생득(生得)하는 것이었고 세쓰는 전뇌자가 인위적으로 이식해준 세계수의 뿌리라는 점이 달랐다. 나는 그 차이점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며칠이 지나서 문득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세쓰로 내공심법을 운용할 때 기(氣)가 지나가는 통로와 전혀 중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뇌정을 몸 안으로 출입시킨다면…….”
그 통로가 중복되어 버리는 거 아닐까?
그래서 세쓰는 기(氣)과 마력(魔力)이 혼입(混入)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뇌정을 원천차단하는 거 아닐까?
나는 왜인지 이게 제일 그럴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서 생각을 좀 더 확장해나갔다.
“……맞아. 세쓰를 통해 내공심법처럼 마력을 수련해서 생명력을 축적할 수 있지만…… 사실 세쓰는 그저 마력을 가공하는 것일 뿐 기(氣)와는 크게 상관없어. 기와 마력이 섞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니까 미리 차단하는 거겠군.”
그럼 안 좋은 일이라는 게 뭐지?
‘그러고 보니 기와 마력을 섞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군.’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여태껏 기공만 쓰면 썼지 마력과 함께 써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순수한 힘 덩어리를 섞어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지라, 나는 한 번 호기심을 해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웅!!
나는 한쪽 손에 내공을 끌어내어 유형화(有形化)된 기단(氣團)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에는 세쓰를 통해 마력을 돋우어서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내었다.
“…….”
나는 잠시동안 양손에 뭉쳐 있는 기운들을 응시하다가 합장을 하듯이 하나로 합쳐 보았다.
번쩍
쿠콰콰쾅
“크아아아아아악.”
살려줘!!!
후두둑
나는 피칠갑을 한 채 바닥을 나뒹굴며 발버둥쳤다. 방금 전에 코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지면서 난데없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양팔은 사라져 있었고 상반신과 하반신도 거의 다 터져서 거의 고깃덩어리나 다름없게 변해 있었지만 그나마 뇌와 심장을 보호해서 즉사는 면한 듯했다. 그리고 하늘에 희뿌연 기둥 같은 게 생긴 게 보였는데 아무래도 버섯구름의 흔적인 듯했다.
‘씨발……!!’
나는 몸이 너덜너덜해져서 이대로라면 숨 몇 번 쉬는 사이에 그대로 절명할 거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급히 신력을 써서 내 몸을 회복했다.
슈욱
“허억, 허억, 허억…….”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미, 미친…… 분명…… 호신강기를 최대로 끌어올려서 대비했는데 어떻게…….”
방금 전에 나는 이런 일도 생길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 광대한 내공을 몽땅 끌어올려서 최대한 호신강기를 쳤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호신강기의 방어력을 넘지는 못할 거라 여기고 술법방어나 신력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간신히 절명만 피한 채 몸이 갈가리 찢어진 것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신지경에 이른 내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최대로 끌어올린다면 백련교주의 공격에도 이제는 무난히 버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벽력탄이 코앞에서 터져도 어떻게든 몸을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피해를 입다니!
나는 정신을 차린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미 지형이 바뀌어서 지평선 너머까지 모조리 폐허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약 반경 팔십 리 정도가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있던 것은 지형지물은 물론이고 마물까지도 남김없이 소멸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걸 보자 지금의 폭발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단순 파괴력만으로는 대웅제국 시대의 핵폭탄…… 아니 그 이상인가.”
그렇다. 이 파괴력을 비유할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핵폭탄! 과거 천우진이 기겁을 하며 기계로 변한 팔부신중 긴나라를 두려워했던 것도 놈이 핵폭탄을 내장해서 자폭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보았던 핵폭탄의 위력과 지금의 위력을 내심 머릿속에서 비교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것보다 더 강하다. 이 폭발은 방금 물리적 파괴 뿐만이 아니라 내 기막(氣幕)을 단숨에 찢어 버렸어.’
기와 마력이 섞였을 때 그 폭발이 지닌 성질은 기력방어를 관통하는 성질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마도 술법방어 또한 관통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차마 또다시 방금전처럼 몸이 찢겨나가는 것을 감수하기는 힘들었기에 나는 굳이 직접 시험해보진 않았다.
“기와 마력이 섞이면 무척 위험하군. 에너지의 폭발이라서 그런가…….”
세쓰 또한 세계수의 뿌리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성질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거부한 게 아닐까? 나는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이상하네? 기를 쓰는 무인(武人)과 마력을 쓰는 마도사(魔道師)가 싸우는 일도 많은데 왜 그럴 때는 터지지 않고 이번에만 터진 거지?’
나는 전생하면서 그런 경우를 숱하게 겪었다.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토벌하러 간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 기공과 마력이 부딪힌다고 이번 같은 폭발이 일어나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모순점에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했는데 잠시 후 뭔가를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적대적인 흐름으로 부딪히면 폭발하지 않지만 동일한 힘을 소유한 자가 두 개의 힘을 융합(融合)시키려고 하면 얘기가 다른 걸까?”
이렇게 가정하면 말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경우 또 하나의 의문점이 파생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기준이 애매하지 않나? 힘이 반목하는지 융합하려는지 어떻게 구분되는 거지? 대체 무엇이 기준이길래…….’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이 의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나는 계속 고민하던 중 문득 무척이나 원론적인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氣)라는 건 대체 뭐지?
“…….”
여태껏 생각도 의심도 하지 않았던 절대명제였다. 전생하기 전부터 기(氣)의 존재는 내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군.’
세쓰를 통해 유입되는 마력이라는 건 세계수 세피로트에서 소환되는 힘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이 있었다.
그러나 기라는 건 무엇인가?
나는 내가 이 경지에 오르도록 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기(氣)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당연한 듯이 온 세계의 우주홍황(宇宙洪荒)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인가?’
사실 내가 만나보았던 그 어떠한 자도 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없는 듯했다. 무림인들은 그저 내공심법을 수단으로 무술에 덧대는 힘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고 상위존재나 신격들은 하찮은 힘으로 대했다. 그리고 무림의 종사들도 기를 연마하는 법은 알고 있으되 기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공기와 같이 숨 쉬는 동안 언제든 느낄 수 있으며 세상의 만물에 깃들어있는 것인데 도대체 왜 기의 정체를 궁금해할 것인가? 도리어 이런 식으로 궁금증을 느끼는 게 더 이상한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기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의문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나 초능력 같은 별개의 초상능력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기라고 하는 힘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가 세상 만물에 퍼져 있는 것은 당연해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아.’
왜냐하면 마력이나 술법, 초능력 같은 다른 종류의 초상능력들은 특정한 개체의 힘을 빌리거나 특수한 방법을 써야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는 비록 다른 초상능력에 비해 약하다 할지라도 말 그대로 전 우주에 퍼져 있는 힘이었고 외계종족도 수련하곤 했다. 심지어 초상적 존재들에게도 당연한 듯이 존재하는 게 기운(氣運)이었던 것이다.
무한의 마력을 지닌 세계수 세피로트 조차도 마력을 전 세계에 퍼뜨리지는 못하는데, 기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전 우주에 퍼져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거기서부터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한의 마력이라고 하는 표현은 몰라도 무한의 기(氣)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막대무비(莫大無比)한 것이 바로 기! 나는 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외계종족도…… 신격도 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단전과 혈맥에 구애받는 능력이 아니라 그저 어디에나 있기 때문…… 그렇다면 기라고 하는 것은 생명력 그 자체인가?’
나는 기와 생명력을 동일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건 아니군.’
그러나 이윽고 그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공의 고수라 해도 그 기에 상응하는 막대한 생명력을 꼭 갖고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기는 생명력을 끌어당기는 매개체 같은 역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쓰가 내공심법의 형식으로 운용되었을 때 생명력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리라.
또한 기는 의념과도 다르다. 의념은 마음과 의지에서 비롯되는 방향성인데, 엄청난 기를 갖고 있어도 의념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저 의념이 더 상위능력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기와 의념이 구별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기는 무엇이길래 마력, 의념, 과학, 초능력 등 온갖 능력이나 법칙과는 상관없이 어디에나 퍼져 있는 것일까?
심지어 외우주에 가도 언제나 기를 느낄 수 있었던 나는 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백련교주에게서 들었던 한마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태허(太虛)란 기(氣)를 일컫는 말이다. 태허즉기(太虛卽氣), 기가 흩어진 모습이 바로 태허인 셈.]
……!!
태허즉기!
나는 어째서인지 그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氣)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태허라는 존재는 결코 빠질 수가 없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부터 기억을 더듬다가 또다시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인과율이란 인(因)이 있으니 과(果)가 있다는 뜻이지. 인과가 이어진 상태, 그리고 인과를 잇는 끈. 그것을 바로 인연(因然)이라고 하며 모든 것은 인연 내에서 생멸(生滅)한다.]
[태허는 평상시에는 기(氣)로 존재하지만 분해되면 ‘인과율의 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과거에 망량선사에게서 혼돈과 태허를 융합하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할 때 들었던 대답!
그 당시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너무 어려워서 못 알아들었지만 나는 지금 신역의 경지를 밟고 있어서인지 그때의 말이 왠지 조금씩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태허란 기의 본체이다. 또한 인과율의 끈이기도 한 것인데…… 그렇다면 기(氣)는 사실……?’
감이 잡힐락말락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잘 알 수가 없었기에 계속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망량선사가 이야기해 주었던 게 또다시 떠올랐다.
[첫째. 너희 스스로 보유한 혼돈을 느끼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기(氣)를 근원소의 경지까지 분해해서 태허(太虛)로 만들고, 그 태허를 느끼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융합하는 순간의 거대한 공(空)을 버텨낼만한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혼돈은 기를 분해하는 성질이 있다. 압도적인 혼돈을 응축시키면 그 공간에서는 기가 소멸되며 가장 작은 본질인 태허만이 남을 것이다.]
혼돈과 태허를 융합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론!
나는 그 때 들었던 방법을 하나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 혼돈이라 하면 신력을 말하는 거겠지? 일단 나는 지금 신력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첫 번째 조건은 통과했다.’
나는 두 번째 조건도 생각해보았다.
‘기를 근원소의 경지까지 분해해서 태허로 만들고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이건…… 가능할지도.’
나는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을 생각해보았다.
‘융합하는 순간의 거대한 공(空)을 버텨내는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흐음…….’
방금 전에 일어났던 기와 마력의 융합으로 인한 폭발이 설마 공(空)인가?
나는 문득 그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기가 분해되어서 태허가 되지도 않았고, 마력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혼돈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냥 그건 폭발사고였을 뿐이야.’
그렇다면 지금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조건이 아닐까?
“압도적인 혼돈을 응축시키면 기가 소멸되며 태허가 생겨난다.”
이건 지금 상황에서 충분히 해볼만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혼돈 그 자체가 신력인데, 나는 지금 상위신에 버금가는 강대한 신력을 갖고 있으니까!
우웅!
나는 나도 모르게 모든 신력을 끌어올려서 손 위의 한 점에 집중하며 응축시키려고 했다. 여태껏 모았던 모든 신성(神聖)이 단숨에 압축되는 느낌과 함께 그 응축지점에 내 모든 신경이 쏠렸다. 그리고 신력이 충분히 모였을 때 나는 이미 모여 있던 신력을 더더욱 내 의지력으로 눌러서 찌그러뜨리려고 했다.
우드드득……!!
신력이 잔뜩 찌그러지면서 힘이 더더욱 눌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신력이 반발하는 느낌 때문에 혈맥 하나하나가 찌릿거리는 걸 느꼈지만 일단 참으면서 계속 응축시켰다.
‘조금만 더……!!’
태허를 얻고 말 것이다. 그리고 태허로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도 도달하고 싶어……!!
그리고 태허로 구할 수 있는 다른 동료들도 구하고 말 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 신력을 응축시켰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가슴이 두근하면서 내 몸에서 새하얀 빛이 흩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내 마음, 내 의지가 어디론가 가는 [길]을 열어 버린 것만 같다.
쏴아아
‘이 빛은 뭐지……?’
나는 멍하니 내 몸에서 쏟아지는 잔광(殘光)을 쳐다보았는데, 그 때 응축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신력이 이상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츄와아악!
갑작스럽게 무형의 혼돈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날뛰면서 온갖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보아도 생기가 넘치는 또 하나의 생명이었기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
시, 신력이 살아 있다?! 뭐지?!
나는 당황해서 더욱 강한 의지력으로 신력을 억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날뛰고 있던 혼돈은 그 움직임이 크게 움츠러드는 듯하다가 갑자기 발광하듯이 기다란 촉수 같은 걸 뻗어서 나를 공격했다.
키아악!!
멈칫
하지만 차마 나를 찌르지는 못하는지 그 촉수는 내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도저히 알 수 없는 불확정적인 온갖 형태로 변화하면서 발광을 반복했다. 나는 이런 현상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했는데, 이윽고 그 공간 자체가 크게 찢어지더니 시꺼멓게 물들기 시작했다.
투콱!
나는 갑작스럽게 내면에서 뭔가가 크게 한뭉텅이 뜯겨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시꺼멓게 물든 조그마한 공간에서 확 하고 하나의 ‘끝’이 느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
‘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저 시꺼먼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의 종말!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것을 직감하고는 그곳에 손을 뻗어보려 했는데 그 순간 익숙한 광경이 눈에 비쳤다.
혼연(混然)!
한도 끝도 없는 안개의 세계!
나는 그 세상을 눈에 담았는데 그 때 어지럼증을 느끼며 집중력이 크게 흩어졌고, 잠시 후 그 시꺼먼 구멍이 닫혔다.
“크…… 윽…… 뭐지?”
방금 전에 혼돈 그자체라 할 수 있는 신력을 압축해서 태허를 얻으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다가 문득 내게 남아 있는 신력의 양을 점검해보고는 어떤 재앙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헉!!! 주, 줄어들었다?!”
신력의 절대량이 줄어들었다! 전체 양에 비하면 크지 않은 양이긴 하지만 최소한 전욱의 동상을 10번 정도는 반복해서 얻어줘야만 하는 양인 것 같은데 그 양이 통째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나는 한 번 얻어낸 신력이 줄어드는 일을 처음 겪었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무래도 방금 전 어지럼증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신력을 잃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내가 거기로 발을 뻗어서 안으로 들어갔다면…… 대부분의 신력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신력이 뭉텅이로 뜯겨져 나가는 기분은 악몽처럼 실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방금 전…… 그…… 혼연…… 안개…… 설마…….’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혼연이 안개처럼 퍼져 있는 장소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옥좌]……!!”
어쩌면…… 혼돈과 태허가 만나서 생기는 쌍소멸로 인해 ‘끈’이 출현하고…… 그 ‘끈’이라는 게 인과율 그 자체라면…….
끈의 인과율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지금 내가 생각한 대로라면 분명 나는 또 하나의 [길]을 손에 넣은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방금 전에 옥좌의 편린을 눈으로 목격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곳에는 백련교주를 비롯해서 망집에 휩싸인 [파수병]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나는 아마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지금까지 전생하면서 모은 대부분의 신력을 잃어버리게 되리라! 아니, 전부 잃어버릴 수도 있다!
“…….”
나는 옥좌의 파수병이 된 백련교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 또한 생전에는 쓸 수 없었던 힘이지만 파수병이 되어 혼연덩어리가 되자 비슷한 걸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백련교주의 말대로라면 그 옥좌의 공간에서는 신력이 모조리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진입하는 대가로 모든 신력을 바친다 하더라도 사실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 공간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혼연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면 지금 당장 옥좌로 넘어가도 되겠지만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번 생에서 적들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했어. 신력을 다 써서 옥좌로 간다한들 옥좌 너머에 있을 진정한 적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아직은 신력을 다 내던져 버릴 때가 아니었다. 신력이라는 건 극도로 얻기 어려운 힘이라서 한 번 포기했다가는 또다시 몇십 번을 전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나는 방금 전에 일어난 현상의 이유가 신경 쓰였다.
원래 혼돈과 태허가 융합하면 쌍소멸하여 ‘끈’이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원래 옥좌로 가는 통로가 만들어지게 되어 있는 걸까? 다른 경우는 없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어떤게 문제였는지를 깨달았다.
“……다른 동료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방금 전에 혼돈을 압축시킬 때 나는 태허로 다른 동료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설마 인과율의 ‘끈’이 내 의지를 받아들여서 신력을 대가로 [옥좌]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준 것인가?
하지만 대가로 바쳐지는 신력 그 자체는 혼돈으로써 혼연에 먹히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방금 나를 공격한 것이고?
“…….”
‘의지’로구나.
태허의 끈을 다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의 의지, 즉 [마음]이라는 것이구나!
나는 이게 의외로 큰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불확실한 이론적 실체만 가득하던 [태허]의 실질적 사용법을 확실히 하나 깨달은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깐. 그런데 망량선사가 말한 세 번째 조건의 공(空)은 뭐지? 강인한 정신력이라…….’
아!
어지럼증!
방금 전 백전연마의 내 정신력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어지럼증 때문에 집중력이 다 흩어진 게 느껴졌었다. 그것은 아마 혼돈과 태허의 쌍소멸이라는 엄청난 현상이 일어나면서 한순간 거대한 공허가 발생하게 되고, 그 공허 때문에 내 정신이 크게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리라. 나는 이로써 공(空)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 것 같았다.
‘지금보다 더 강인한…… 마치 신(神) 그 자체가 된 듯한 절대적인 정신력이 필요하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정신력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군…….’
나는 어쩌면 이 세 번째 공의 조건이 가장 까다로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십만 번 베기 수련도 견뎌냈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나로서도 방금 전 집중력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만 하더라도 인류 중에 최정상급이라 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갖고 있을 텐데 이 이상으로 어떻게 정신력을 키워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의념천주를 더 키워? 아니…… 그건 불가능한데…… 이 이상의 정신력을 어떻게 얻지?’
의념 그 자체로 신이 될 법한 수준이라…….
그런 게 있을까…….
나는 방금 전에 수련으로 얻어낸 성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핫 하고 깨달았다.
“이런. 어느 새 엉뚱한 데로 빠졌잖아? 세쓰를 구궁파천뢰로 수련하려다가 언제 여기까지…….”
물론 이것도 나쁘지 않은 성과였지만 정작 세쓰를 수련해서 빠르게 생명력을 얻으려고 하는 목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에 나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손을 휘둘러서 주변의 파괴된 지형을 다시 신력으로 복구했다.
슈욱
그리고 신력으로 지형을 복구한 순간, 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응? 그러고 보니 세쓰에 신력 그 자체를 먹여주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는 마력을 응축시켜서 생명력으로 변환시켰는데, 더욱 상위자원이라 할 수 있는 신력을 먹으면 어떻게 되지?
나는 호기심에 세쓰의 줄기에 바로 신력을 불어넣어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듯한 반응!
나는 세쓰가 일말의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알 수가 있었다.
‘…… 그렇군. 세쓰는 세계수의 뿌리니까 세계수의 식성과 같을 거야. 세계수는 생명력을 좋아하지만, 신력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 거구만.’
세계수의 공간인 세피라에서 세계수가 모든 신력을 분해해 버린다는 걸 보면, 세계수는 신력에 대해 커다란 거부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세쓰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력을 먹인다 하더라도 그걸 공양받은 세계수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특이한 일이었다. 세계수야말로 무한의 마력을 지닌 존재인데, 같은 혼돈이라 할 수 있는 신력은 싫어하다니?
어쩌면 신력 그 자체에도 비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차 생각이 길어지자 머리를 크게 털었다.
“후우. 더 이상 곁가지로 빠지지 말고…… 그래서 결론은…… 뇌정을 세쓰로 넣지 못하는 이유는 기와 마력의 혼입 때문에 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이란 건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
…….
음…… 그렇군…… 내가 자꾸 수련하다가 곁가지로 빠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아…….
어려워보이는 문제가 있으면 딴생각을 하기 때문이군……!!
“씨발!! 모르겠다.”
나는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말았다. 생전 처음 겪는 수련인 데다가 이론도 온전치 못하니 어떻게 해결법을 찾겠는가? 애초에 세쓰를 통해 뇌정을 수련한다는 것 자체도 그 어떠한 존재도 겪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수련법이었다. 이런 걸 하루아침에 깨달을 정도의 천재라면 애초에 내가 여기 있지도 않을 것이다.
구궁파천뢰로 세쓰를 돌리는 건 나중에 방법을 찾아보지 뭐!
“간다……!!”
구오오오
나는 잠시 후 뇌룡일기공으로 계속해서 생명력의 결실을 쌓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이를 악물었다.
“뇌룡일기공…… 대주천 100번!!”
머리가 안 따라주면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다!
쿠와아아앗
꿀꺽
쿠와아아앗
꿀꺽
어? 100번 넘었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니까 좀만 더!!
…….
이거 정말 귀찮네!
그래도 안 되면 될 때까지!
…….
나는 뇌룡일기공으로 반복수련을 해서 계속 생명력이 쌓일 때마다 먹기를 반복했고, 그렇게 약 250여 번의 대주천 수련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몸에 반응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번쩍
나는 정신을 들고 보니 세피로트의 세계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발밑에서 커다란 나무뿌리가 올라오더니 서서히 내 몸뚱이를 위쪽으로 옮겨주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쿠구구구
나는 새하얀 원의 표식에 힘없이 손을 뻗어서 눌렀고, 그러자 지난번에 봤던 것처럼 새하얀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2번째 세피라인 예소드(yesod)에 온 것을 환영하오, 수행자여.]
“…….”
나는 눈을 들어서 내 앞에 있는 시험관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세라핌이 아니네…….”
쏴아아
그랬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불꽃의 뱀인 세라핌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 청량한 물빛과 함께 신비로운 은광(銀光)으로 이루어진 존재였으며 많은 날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인간의 형태라기 보다는 좀 더 이질적인 외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니, 웬만하면 저걸 괴물이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고풍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존재가 말했다.
[나는 대천사 가브리엘. 세피로트 칠천(七天)의 지배자 중 한 명이오.]
“가브리엘……?”
[예소드의 시험을 받겠소?]
“…….”
나는 너무 힘이 빠져서 털썩 하고 그 자리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뇌룡일기공이라지만 대주천을 너무 많이 해서……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
아무리 무한의 체력이라지만 기공의 대주천은 강한 정신력의 소모를 동반했다. 체력과는 달리 정신력부터 먼저 소모되었기에 수백 번이나 연속해서 대주천을 돌린 것은 다른 의미로 벅찬 짓이었다. 하물며 뇌룡일기공은 삼재심법처럼 단순하지 않고 수십 개의 요혈을 거치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파김치가 다 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에 가브리엘에게 휴식을 요청했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헌데 나 가브리엘은 그대에게 묻고싶은 게 있소.]
“뭔데?”
[당신은 정말 사이탄의 이름을 가지고 있소?]
“……그렇다만.”
아무래도 치천사 세라핌이 이 천사세계에 소문을 다 내버린 모양이었다.
[앞으로 사이탄을 부활시킬 것이오?]
“그건 왜 묻는 건데?”
내가 드러누운 채로 반문하자 가브리엘이 말했다.
[사이탄을 부활시키지 마시오. 이 자리에서 이름을 걸고 그 사실을 맹세한다면 그 대가로 즉시 세피라 5계에 올려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