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8권 09화
지금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유소에게 간파당하고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
“말도 안 돼. 지금 나는 [큰 굴레]를 오가면서 행동하고 있어. 그걸 다 읽어낸다고? 아무리 전지능력이라지만…….”
“그러니까 전지능력인 거지. ‘모든 걸 안다’라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능력인데 모르는 게 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
“하지만, 사실 유소의 능력은 완전하지 않아. 당신의 존재 자체가 그 능력을 불완전하게 만들고 있거든.”
“그건 무슨 소리야?”
“생각해봐. 당신은 [큰 굴레]를 돌려서 수만 년 전 과거인 탁록시대로 왔지만, 이 탁록시대의 역사가 지금 백웅 당신이 살던 미래와 이어져 있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내가 이 과거시대에서 인간족을 규합해서 온갖 모험을 했던 내용까지 역사에 다 반영되어야 하며 삼황오제도 내 이름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자 이환웅은 씩 웃었다.
“바로 그거야. 원래 미래예지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데 지금 백웅 당신은 역사(曆史)의 인과(因果)를 모두 조종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당신의 행동을 모두 읽는다고 해도 과거나 미래 둘 중 하나에서 놈의 미래예지를 부정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하나의 시대만을 살아가는 자들과 달리 [큰 굴레]를 되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반격이 될 수 있는 거야.”
“자,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조금 쉽게 설명해줘.”
“쉽게 설명하자면 이 시대와 대명제국 시대의 역사는 단절되어있어. 그렇기에 유소가 멋대로 인과를 읽어서 [미래]를 추측한다 한들, 당신이 미래나 과거에서 한두 번만 사건을 크게 일으켜주면 그것만으로도 미래는 꼬여버리지.”
“아하……!!”
그런 거로 구만!!
내가 그제서야 이환웅의 말뜻을 알아듣자 이환웅은 말을 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
“유소의 전지능력이 불완전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 뭐가 문제야.”
“백웅. 내가 전에 당신에게서 유소와의 첫 대면에서 했던 대화를 꼼꼼하게 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지?”
“아…… 그랬었지.”
흑요석을 못 쓰는 상태라서 사실 내 모든 기억을 이환웅에게 전해주기는 여의치 않았다. 사실 대화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 기억해서 말해주겠는가? 그래서 큰일의 얼개를 묶어서 설명하고 상대가 질문하면 자세한 걸 기억해내서 추가로 더 설명해주는 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전에 이환웅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설명해주었을 때, 이환웅은 유소와 내가 탁록촌에서 처음 만났던 당시의 대화를 꼼꼼하게 설명해주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이환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유소는 그때 백웅 당신이 [인과율을 잇는가 잇지 않는가]로 중대한 선택을 한다고 이야기했었어.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아들어가서 당신은 망량선사의 도움을 받아서 잇는 쪽을 선택했지. 유소가 그때 자신은 그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이라면…….”
“유소는 만났던 처음부터 당신이 탁록시대의 과거와 미래를 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 이후에 유소가 했던 말이 기억나나?”
“어…… 그게…….”
“예언자가 자신의 과거를 예언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당신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었잖아.”
“아, 그래. 그것도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거냐?”
“그건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하는 말이었던 거다.”
“……어? 지금?”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이환웅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유소는 지금 우리가 이 대화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내놓는 의심어린 예측에 미리 대답을 해 버린 거지. 예언자가 자신의 과거를 예언하는 이유? 당연히 유소 본인은 미래에 가 있고 이 탁록시대는 그녀의 과거이니, 과거인 탁록시대의 인과를 예측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유소 본인의 야망을 위해서라는 말이야.”
“……?!”
“탁록시대의 인과를 예측해야 유소 뜻대로 미래를 정할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한 이환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아까 그런 말을 했던 거야. 유소는 우리의 이 대화조차도 예지했을 거라고. 놈의 예지능력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는 증거인 거지.”
“……!!”
“당신이 좀 경계하기를 바랬어.”
세, 세상에…….
탁록촌에서 첫 대면 했던 그 순간에…… 나와 이환웅이 미래계획을 짜는 이 순간의 대화를 미리 예지해서 심술궂은 장난을 하듯이 먼저 대답을 해 버렸다는 말인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예지능력이…….
‘그, 그러고 보니 전륜성왕하고도 이런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유망이 불쑥 이야기했다.
“이환웅. 너는 머리가 좋아 보이는데 지금 입 밖으로 그 사실을 내기 전에 이미 예측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유소의 예지능력을 엿 먹이기 위해서 그냥 그 사실을 입 밖으로 안꺼내도 되지 않았느냐? 왜 굳이 유소의 예지능력에 장단을 맞춰준 거지?”
유망의 의문은 일리가 있었다. 이환웅은 유소가 우리의 대화를 미리 예지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환웅 본인이 진실을 머릿속에 담고 입을 꾹 닫고 있었다면 그 예지는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환웅은 담담하게 말했다.
“예지능력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피해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백웅에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유소의 능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백웅에게 설명해야 할 날이 오죠. 그것도 더 위험하고 급박한 순간일 게 뻔합니다. 카르마(karma)는 정해져 있지만, 다르마(dharma)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느낌과 같다고 할까요? 어차피 언젠가는 예언은 현실이 될 테니 피하려고 용쓰지 않는 게 정답입니다.”
“흐음.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과정은 자유자재란 건가? 그것 참 전지능력이란 무섭군…….”
“네. 차라리 시간과 여유가 될 때 백웅에게 충분히 그 위험성을 상기시켜주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그 여자는 이런 내 패턴조차도 예측해서 예지했겠지만.”
나는 자조적으로 말하는 이환웅의 말을 듣고 있다가 괜히 답답해져서 말했다.
“젠장……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 유소의 미래예지를 이겨낼 수 있는 거냐? 이 탁록시대와 미래시대에서 동시에 미친 듯이 날뛰어서 놈이 미래를 계산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하나?”
“아니. 그런 개념이 아니야. 우리가 뭘 하든 간에 미래예지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어. 당신이라면 황제 공손헌원이 그 능력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봤을 텐데?”
“…….”
“결과적으로 당신은 그 회차에서 황제를 이기기는커녕 끝까지 반항도 하기 힘들었어. 미래예지능력이란 그런 것이지. 실제로 유소는 자기가 약자 취급받을 때는 당신의 비호를 받아서 전륜성왕의 손에 소멸당할 뻔한 일도 간단히 넘겨버렸지만, 막상 그녀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와 합류하는 시기가 되니 바로 종적을 감췄잖아?”
“아.”
“내가 당신과 합류하면 당장 전륜성왕에게 가서 유소부터 지옥불에 던져넣자고 할 게 뻔하니까 그런 거야. 이건 우연이 아니라 전부 미래를 예지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미래를 선택한 거라고.”
나는 이환웅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확실히 그 말 대로였기 때문이다.
미래예지!
언뜻 직접적 전투력이 없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강대한 힘을 지닌 자가 의도대로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한다면 상대가 저항할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실제로 28회차에서 황제 공손헌원은 자기가 나서기 전까지 나와 내 동료들이 어떤 발악을 하든 간에 모조리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환웅이 훗하고 자신 있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더라도 유소와는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도리어 유소가 당신에게 간절히 매달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 미래를 죄다 읽히고 있는데 왜 대등하다는 거지?”
“미래를 아무리 읽어봤자 유소에게는 승리조건이 없으니까. 사실은 황제만도 못한 놈이다. 나는 내 스승조차 이겨낸 자가 그깟 놈에게 질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
승리조건이 없다고?
이건 무슨 말이지……?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자 유망이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 하긴 네 말대로라면 백웅이 너무 방심하지만 않으면 상관없겠구나.”
“과연 눈치가 빠르시군요.”
빙긋 웃은 이환웅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이제 백웅 당신이 할 일은 하나다.”
“뭔데?”
“기다리는 것.”
“어? 기다린다고?”
“레무리아 제국에서 암양한테 선신 케찰코아틀을 부활시켜달라고 청원했잖아. 그 청원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까 적당히 기다리다가 그 결과부터 보고 움직이자고.”
“그 며칠 동안 해야 할 일은…….”
“딱히 뭐 없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인데 고작 며칠 동안에 이룰만한 일은 없으니까 그냥 기다리면 끝이야.”
“…….”
“심심하면 탁록촌 사람들하고 얘기나 나눠.”
너무 심심한 거 같은데…….
왠지 몸이 근질거렸지만 나는 이환웅의 말대로 며칠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탁록촌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수련도 도와주면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이환웅과 함께 레무리아 대륙으로 향했다.
파앗!
우우우
방의 중앙에 있던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가 움직였다. 그 기계가 상징하고 있던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딱 하고 정확하게 기계가 결합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와 함께 서서 지켜보고 있던 레무리아 1세가 몸을 떨었다.
[오오……!! 암양(暗陽)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
마치 황도십이궁의 별자리가 원(圓)을 그리듯이 기계 내에서 맴돌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황도십이궁의 끝에서 무언가 시꺼먼 구멍 같은 게 출현했는데, 그 구멍은 점차 커지더니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칠흑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게 암양인가…….’
장엄한 광경이긴 하지만 수많은 위대한 존재를 보아왔던 내게는 큰 감흥이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소 시큰둥하게 황도십이궁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나는 뭔가를 느끼고는 흠칫하고 놀랐다.
기계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태양신의 배꼽].
마신 테스카틀리포카가 봉인되어있을 그 유물에서 무언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그 순간, 커다란 지진이 울리듯이 천지가 크게 뒤흔들렸다.
쿠궁!!
건물 전체가 뒤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비틀거리며 옆에 있던 것을 붙잡으며 버티고 있던 레무리아 1세가 말했다.
[오오…… 레무리아 대륙 전체가…… 아니…… 이 지구(地球)의 지축(地軸)이 흔들리고 있구나.]
레무리아 1세의 말에 옆에 있던 이환웅이 흠칫했다.
“뭣이? 그럼 큰일인데…….”
[암양의 권세가…… 그분의 의지가 이 태양계에 잠시 닿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 것 같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후, 후후…… 제길, 미쳤군. 단순히 의지가 잠깐 닿는 것만으로도 행성 하나 따위는 멸망의 위기인가.”
이환웅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보였다. 나는 저런 표정을 보는 게 생경했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마. 갑자기 왜 그래? 암양이 무서운 놈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후우…… 후…….”
이환웅이 점차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것으로 보였다. 그는 곧이어 고개를 크게 털면서 말했다.
“괜찮을 리가 있겠나? 이 공간 전체에 사악한 악의가 몰아치고 있는데…… 내가 메피스토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진작 미쳐서 죽었을 거다. 이건 미쳤어…….”
“응? 하지만 웬만한 [옛 지배자]를 상대로도 안 쫄던 놈이…….”
“크흐…… 흐흐…… 미치겠군. 차원이 다른 마력이라고…… 당신한테 이제 이 정도는 압박조차 아니라는 건가. 저기 레무리아 1세도 광기를 겨우 누르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뭔가 헛웃음을 짓는 이환웅이었다. 이환웅의 말대로 레무리아 1세도 반쯤 쓰러진 채 헉헉대고 있었는데 명백히 정신적 압박을 크게 느끼는 걸로 보였다.
‘레무리아 1세는 마도생명체로 몸을 개조한 놈일 텐데 저 정도면…….’
확실히 지금 암양이 출현하면서 생겨난 암기(暗氣)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옆의 두 명이 무척 괴로워하는 걸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음…… 이게 힘들다고? 그냥 공기가 조금 숨쉬기 귀찮아진 느낌뿐인데.’
나는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내 옆에 시립해서 팔짱을 끼고 있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아무래도 주인의 역량이 좀 더 올라간 듯싶소. [외신의 파동]에도 콧방귀도 뀌지않다니…… 혼돈에 대응하는 저항력이 한층 더 깊어진 모양이구려. 나 또한 주인의 역량이 향상되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소.]
“어 그래? 언제 그렇게 된 거지.”
[모르겠소. 허나 주인은 이제 농담으로라도 인간 수준이라 할 수는 없게 되었구려. 슬슬 주인의 이름은 인류역사보다 마도서에서 찾는 게 빠를 것 같소.]
“…….”
저게 칭찬이야 욕이야?
내가 헷갈려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황도십이궁 한가운데로 움직이기 시작하던 암양이 문득 사방에 있던 모든 별자리들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슈슈슈슉……!!
그리고 동시에 찾아온 어둠!
그 어둠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정적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바로 곁에 있던 흑웅과 이환웅, 레무리아 1세 등의 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게 특정한 술법이나 술수가 아닌 암양 그 자체의 권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어둠…….
나는 이 어둠의 낌새를 어디선가 느껴보았다고 생각하며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보았고, 이윽고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
천암비서 내부에서 달마와 싸웠을 때 그…….
그 끔찍했던 전투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잠시 후 내 머릿속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오래된 자여. 너의 기억을 찾으러 왔느냐.]
꾸르르륵…….
머나먼 원야(元夜)에서 희미한 황혼의 구름을 등지고 무시무시한 촉수가 퍼져 있는 환영이 보인다.
나는 ‘그때’와는 다르지만, 저기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존재감을 느끼고는 크게 몸을 떨었다.
부르르르
‘으윽…… 여…… 역시……!!’
그 당시에 내 혼돈저항력이 결코 완벽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던 그 절망적인 존재!
외신!!
형태는 다르지만, 그 존재가 다시 한번 청원을 통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신이 혼탁해지며 머릿속이 오락가락한다.
나는 점차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졌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신력 같은 자원들이 모조리 분해되면서 전신이 마비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허억…… 헉…… 으윽…….’
다만 일전에 느꼈던 그 압박감보다는 약간 덜하다. 흑웅이 말했던 대로 내 저항력이 조금은 높아졌기 때문인 건가?
내가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채 꿇어앉아서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때, 그 환영에서 메아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군무(群舞)하는 악사(樂士)에게 검을 휘두른 그 이변에 한층 흥미를 느꼈다.]
[그리하여 악사들은 본인들을 즐겁게 해준 그대에게 포상을 내렸나니.]
[황금월(黃金月)에 그대를 위한 선물이 남겨졌노라.]
…….
황금월……?
이건 설마…… 그때 살아남은 보상…….
희미한 이성 속에서 대꾸조차 못한 채 고개를 처박고 있는 동안 그 존재의 말이 내 정신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친구가 될 자와 부하가 될 자가 있다.]
[누구를 부활시킬지 선택하라.]
“……!!”
이, 이런 제기랄……!!
여기 와서 수수께끼라고?!
어느 쪽이 선신 케찰코아틀인지 안 알려주면 어떻…….
으윽.
나는 잠깐 기절해서 축 늘어졌던 걸 깨닫고는 당황했다. 머리로 뭔가 생각을 해보려 해도 이성의 끈을 가까스로 잡고 있는지라 냉정하게 머리를 회전시키는 게 불가능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택은 고사하고 깨어있기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빠른 선택을 해야함을 직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잠시 후, 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친구를…… 깨우겠…… 습니다…….”
당연히 선신 케찰코아틀이 내 친구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친구를 부활시키는 게 맞겠지!
그러자 서서히 [검은 산양]이자 암양인 그 존재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지며 한마디가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전지자의 하찮은 조각이 그대의 선택에 혼란스러워하는구나…….]
번쩍!!
다음 순간, 나는 어둠이 모두 씻은듯이 사라지고는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옆을 보니 이환웅과 레무리아 1세도 그대로 멀쩡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진 암양에 대한 감상을 나눌 여유도 없이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들의 시선과 동일하게 한 장소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고대신의 배꼽]이 깨진 그 자리.
거기에는 청록의 빛으로 빛나고 있는 한 마리의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개달린 청록색의 물뱀이 눈을 빛내며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모두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백한 [옛 지배자]급의 힘!
[크크크…… 내 머리를 깨버린 자와 [큰 굴레]를 넘어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잠시 후 그 청록색의 물뱀이 날개를 퍼덕이며 안광을 뿜어내었다.
[아주 반갑구나……!!]
쿠와아앗
콰앙!!
다음 순간 물뱀의 거대한 마력포가 터져 나와서 장내를 초토화시키자 나와 흑웅은 최선을 다해서 신력으로 방어막을 펼쳐서 막아내었다. 하지만 나와 흑웅 둘이서 막아냈는데도 여유롭기는커녕 꽤나 힘들었기에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 엄청 쎈데.’
아니…… 예전에 봤을 때 이 정도로 강했던가?!
내가 기억의 혼란 때문에 당황하고 있을 때 물뱀이 허공에 떠오른 채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부활시킨 것인가?]
그랬다.
지금 내 눈앞에 등장한 저 [옛 지배자]는 바로 27번째 삶에서 마주쳤던 마신 테스카틀리포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