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7권 19화
[그런가.]
아지다하카는 내공을 쓰지 않겠다는 내 말에 그리 놀라지도 않은 듯했다. 그러더니 곧장 검을 역수로 잡는 기이한 자세를 취하였다.
아르겔도 검제(劍帝) 불멸외천기(不滅外千機)
제사백십일식(第四百十一式)
혈궁칠월(血穹漆月)
쿠구구구!!
그러자 역수로 잡은 검에서 육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가공할 혈기(血氣)가 맺히기 시작했다. 저것이 유형화된 강기가 현실에 드러나서 몇 겹이나 응축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혈궁칠월의 위력을 저절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고, 저게 여태 만났던 절세고수들의 필살기에 못지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지다하카가 아무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감은 잡은 것 같군. 그대가 정말 신역의 경지인지를 증명해보라!!]
투확!
다음 순간 아지다하카가 허공에 일참(一斬)을 뿌렸고 그와 동시에 대회장 전체를 가득 메우는 듯한 거대한 핏빛 기운이 검강(劍罡)을 만들었다. 그 검강이 아주 찰나의 순간에 몇 겹이나 겹쳐져서 아까와 같은 오색 빛무리로 변화하는 것을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오색의 빛무리…… 저건 아지다하카가 얻은 깨달음의 경지다!’
저것 자체가 뭐라고 이름 지어져 있는지 모르는 또 다른 절대지경일 가능성이 높다!
즉 아까부터 나는 이미 중첩된 절대지경의 검식(劍式)을 상대하고 있었으리라. 지상의 무인 중에서 이런 미친 짓을 할 줄 아는 자는 없었으니, 기술적으로 볼 때 이만큼 완성된 존재는 미래의 아수라 외에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구궁파천뢰 사신지혼 덕에 내공은 무조건 내가 앞선다. 힘만으로 친다면 못 당해낼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당장에라도 전신내공을 뿜어내어 아지다하카보다 우월한 내공으로 받아내고 싶어졌다.
‘…… 안 돼. 이미 나는 내공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당연히 통상적인 방법으로 아지다하카의 기술을 상대하려 하면 그 순간 되치기를 당해서 내게 불리한 그림만 계속되리라.
솔직히 고수로서 상대에게 기술로 밀려서 힘으로만 상대해야 한다는 것 또한 또 다른 굴욕!
나는 생을 이어나가기 위하여 그 굴욕을 늘 감내하고 있었지만, 오늘마저도 감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武)의 대결이란 본디 상대를 기술로도 꺾으려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끈
나는 내면에서 반골기질이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어차피 잘못되어도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나는 이 자리에서 차라리 기술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한이 있어도 내가 했던 맹세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여 자연체 상태에서 상대의 [흐름]을 읽으려 했다.
스스스
역시나 자연스럽게 읽힌다. 아까 사신지혼을 쓰며 요란하게 싸웠을 때 이상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 흐름 속에서 나는 마치 광풍 앞의 민들레 씨앗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힘을 느끼되 그 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줏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액면 상으로는 내가 한없이 불리해 보였고 당장 스치기만 해도 혈궁칠월에 즉사할 것 같았지만 나는 끝까지 초조해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번쩍!!
다음 순간 혈궁칠월이 뇌신지혼에 준하는 속도로 날아들어서 사방천지를 박살 내었다. 역시나 전조가 긴 기술인 만큼 한 번 발현되면 그 위력과 속도가 어마어마한 절대지경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콰과과광
온통 사방이 부서졌지만 나는 그 가운데에서 [흐름]을 제대로 읽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내공을 아예 쓰지 않은 상태로도 도리어 상대의 힘을 내 안으로 흡수하는 듯한 느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고, 칠보(七步)을 나아갔을 때 충분히 아지다하카가 사정거리로 들어왔음을 느끼고는 뛰어들었다.
암야참(暗夜斬)
까가강!!
“……!!”
내가 온갖 적수들을 한 방에 묻어 버렸던 암야참을 날렸지만 아지다하카는 마치 그걸 예측했다는 듯 가볍게 허공에서 검을 부딪혀 막아내었다. 너무 잘 막아서 내가 허탈해질 지경이었고 아지다하카는 검을 맞댄 채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흔한 절대지경의 고수였다면 [흐름]을 파악한 그대의 반격에 여기서 끝났겠지. 허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대뿐만이 아니다.]
“…….”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끼기긱
반보(半步)를 슬그머니 앞으로 내밀며 무게중심을 변화시킨다. 내가 간격을 바꾸려 하자 아지다하카는 유연하게 무게중심을 따라 받으면서 자기한테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려 했다. 아주 오랜만에 겪는 초근접의 검합(劍合) 속에서 나는 상대방과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수 싸움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뻐엉!
아지다하카는 더 이상은 수 싸움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갑자기 발차기를 날려서 내 명치를 차서 날렸다. 나는 화경(化經)으로 그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며 뒤로 날아갔고 도리어 반발력을 이용해 다시금 아지다하카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아지다하카는 갑자기 자신의 몸 주위에 열여섯 개나 되는 어검(御劍)을 만들어내더니 단숨에 나를 향해 날렸다.
퓨뷰븅
원래 나라면 이 정도 어검은 굳이 피하지도 않고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몸에 둘러서 다 막아내며 돌진했으리라. 내게는 충분히 그 정도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열여섯 개의 어검을 하나하나 의념으로 감지한 후 그 궤도를 읽어서 최적의 회피방법을 알아내었고 이윽고 삼보(三步)의 묘리를 이용해서 유연하게 제자리에서 회피했다.
그러고는 다시 접근해서 암야참(暗夜斬)을 날렸다. 두 번째 암야참을 맞이한 아지다하카는 아까처럼 가볍게 막아냈다.
까앙!!
다시 검을 맞대는 형상에서 아지다하카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술에서 망설임이 사라졌구나!]
“훗, 평가질이라니…… 네가 나보다 고수라 생각하는 거냐?”
[아니…… 허나 찰나 간에 미혹을 떨쳐내다니…… 최근에 좋은 스승이라도 만났던 모양이군.]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내 무예의 너머에서 아수라의 존재까지 느끼다니 과연 검성이라는 칭호를 쓸 만했다.
타닷
이번에는 아지다하카가 먼저 검을 떼고 알아서 물러섰다. 아지다하카는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대가 아직 그 사신지혼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역량이 아닌걸 알아챈 듯하구나. 그리고 내공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념(意念)으로 정밀하게 통솔할 수 있다니…… 앞서 했던 말을 사과하겠다.]
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사과는 받아주지.”
아지다하카의 말대로였다.
오랜만에 써 보는 사신지혼은 하나하나의 기술은 강력했지만, 아직 나는 그 기술을 제대로 연계해서 ‘하나의 강함’을 끌어내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력한 힘 덕분에 그냥 기술 없이 밀어붙여도 아지다하카를 상대하기엔 충분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무예의 전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신지혼은 좀 더 연구와 전투경험이 필요해. 너무 가능성이 넘치기 때문에 내 이해도가 떨어지는 거야!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힘’ 그 자체에 의존하는 걸 버리고자 내가 지닌 힘 중에서 내공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걸 떨쳐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내공을 의식적으로 쓰는 걸 포기하고 모든 걸 의념으로만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자 도리어 [흐름]은 더욱 잘 읽혔으며 원래 한 번 쓰고 지쳤을 암야참도 여러 번 쓸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물론 내공을 쓰지 않고 의념만으로 때웠기에 원래 둘이 융합되어서 얻게 되는 추가공격력이나 방어력을 죄다 포기한 셈이라 갑자기 약세를 자처한 셈이었지만 상대의 기술에 정확하게 대응만 할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정확한 지점에 정확한 힘만 집중한다면 사실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리고 힘의 제약을 걸자 비로소 나는 내가 갖고 있던 기술들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며 아지다하카의 검기에 뒤지지 않게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갑자기 족쇄를 풀고 자유로워진 느낌!
‘신기하군. 분명 내공을 쓰는 편이 객관적으로는 전력이 더욱 강력할 건데…… 통제되지 않는 힘을 버리니 도리어 내 전략이 더 민첩하고 충실해지다니.’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지금의 그대는 인정할 만한 고수다. 정말로 좌(座)에 오를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설마?
내가 혹시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아지다하카의 말이 이어졌다.
[진심으로 날리는 이 공격…… 어디 받아보라!!]
치치칭!!
갑자기 아지다하카의 전신에서 모든 기운이 소멸되더니 그의 머리 뒤편에서 무지갯빛 후광이 떠올랐다. 나는 저 후광이 기력이나 의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걸 직감했고, 알 수 없는 성스러움마저 느끼고는 당황했다.
‘신력? 아…… 아니야. 저건 전혀 다른 뭔가다.’
아지다하카는 주욱 검을 앞으로 뻗으며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듯한 검술의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그 한 동작 속에 모든 의념을 집중하던 아지다하카는 이윽고 의념마저도 거두어들이더니 완전한 무력(無力)에 들어갔다.
나는 그 순간 나 또한 모든 힘을 없애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지다하카의 지금까지의 변화는 그저 눈으로 좇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오감을 넘어선 경지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육감(六感)을 활성화시켰지만, 그걸로도 아지다하카의 기술을 느낄 수가 없자 조급하게 느껴졌다.
더 나아가서 칠감(七感)을 강하게 활성화시켰을 때 나는 겨우 아지다하카의 검(劍)이 자연(自然)의 태동(胎動)을 품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여전히 그 모든 변화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지다하카의 깨달음의 경지를 정면에서 마주치자 압박감 대신 경외감을 느꼈다.
‘틀림없다……!!’
이건 신역절기(神域絶技)가 분명하다!!
다음 순간 아지다하카의 검이 주욱 횡(橫)으로 휘둘러졌다.
아르겔도 검제(劍帝) 불멸외천기(不滅外千機)
제일식(第一式)
신역(神域)
항하사(恒河沙)
촤아아아
내 주변에 수많은 모래알갱이가 흩어진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인 걸까? 하지만 칠감을 극도로 올린 상태에서 착각은 있을 수가 없었고 이윽고 나는 기존 의념의 경지를 넘어선 차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알갱이 같은 검기(劍技)가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알갱이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어리둥절하다가 이윽고 뭔가를 알아채고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구름 같은 검기.
꽃잎 같은 검기.
흔히들 강호에서 쓰는 범위형 기술들은 다들 밀도와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갱이라고 하는 게 상징하는 밀도가 뭔가를 생각해보니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게 튀어나온 것이다.
사막……?!
츄아아악
이윽고 사풍(沙風)이 몰아침과 동시에 내 주변의 천지가 온통 사막에 뒤덮인 듯한 환영에 휩싸였다. 나는 이게 환영인지 실제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고, 절대지경의 기술들이 보여주는 의념과는 차원이 다른 검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아지다하카의 검은 그 사막의 환영을 정면으로 밀어내며 나를 향해 일도양단을 해왔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암야참(暗夜斬)으로 그 공세에 대응하려 하던 나는 잠시 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스칵
‘윽! 이런 절기는 처음…….’
암야참으로 베는 범위는 신역 항하사의 절기를 걷어 내었지만, 그 외의 모든 범위는 건재하다! 나는 암야참으로 단숨에 전방위를 베지 못하는 한 이걸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퍼버벅!!
나는 소용돌이치는 모래바람의 검기에 당해서 단숨에 피떡이 되어서 내동댕이쳐졌다. 내가 바닥을 구르다가 재빨리 일어서자 아지다하카가 감탄하듯 말했다.
[그 순간에 항하사를 상대로 모든 요혈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군. 어떻게 한 거지?]
“…….”
[나조차 알아볼 수 없는 방어절기라. 그대는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검호(劍豪)로군.]
아니 그러게…….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사실 방금 전에 암야참으로 되치기를 실패해서 영락없이 전신이 난도질당할 위기였는데 다행히 피륙의 상처로 끝나고 겉으로만 피를 철철 흘리는 걸로 끝난 것이다. 외상이 심해 보였지만 사실 고수들에게 있어서는 내상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감안 하면 나는 아주 잘 넘긴 셈이었다.
문제는 나 스스로도 어떻게 해서 항하사를 상대로 내공도 안 쓰고 버틴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결투하는 상대방한테 말하기도 뭣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그대만 한 고수가 여태 좌를 얻지 못한 게 조금 이해가 가지 않으나…… 이대로는 나의 승리다.]
“…….”
[그 암야참이라는 기술만으로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지다하카의 말은 진실이었다. 암야참은 분명히 신역절기에 못지않았지만, 그저 태생부터가 신역절기를 되치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자체적인 위력이나 특성은 거의 없다시피한 기술이었다. 그래서 통상적인 검술이 아닌 항하사 같은 신역절기를 상대로는 마치 쏟아지는 빗물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것만큼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음…… 지금이라도 내공을 써서 구궁파천뢰 사신지혼을 쓰면 어떻게든 될 테지만…….’
내공을 안 쓰기로 스스로 맹세한 걸 깰 순 없다. 게다가 무인의 자존심까지 걸려 있으니 여기서는 어떻게든 가진 기술만 가지고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내가 어떻게 방금 전에 무사했던 거지? 원래라면 항하사를 못 막은 시점에서 결판이 났을 텐데…….
‘분명 호체진기나 의념강기를 전혀 쓰지 않았어. 사실 썼다고 해도 보통 기술을 써봤자 신역절기를 상대로는 관통당했을 테지만…… 내가 어떻게 무사한 거지.’
…….
잠깐…….
신역절기를 상대로 멀쩡했다는 건……?
‘아!’
그 순간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
내 안에 뭔가 신역절기에 준하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