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644화 (1,543/1,615)

전생검신 87권 13화

나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전륜성왕의 방 안이다…… 그렇다는 건…….’

나는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전륜성왕을 쳐다보았고, 내 원래 모습을 하고 있던 전륜성왕은 마치 짐작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네 기억은 모두 읽었다. 망량선사가 너를 다시금 이 [큰 굴레]의 과거로 보낸 것이구나.”

“……이럴 땐 편하군요. 흑요석을 사용하는데 제약이 있어서 다른 동료들에게는 이제 일일이 설명해야 해서 귀찮았는데.”

내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리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그대는 흑요석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군. 그게 옳은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전륜성왕이 심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큰 굴레]를 되돌아온 그대에게 흑요석의 술법이 금지된 연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잘은 모르겠는데요…….”

“그대가 복희에게 흑요석의 술수로 기억을 전송하려 했으나 실패했었고 그 반발력으로 선지자의 행성과 왕실이 폭발했지. 복희는 그 일을 해석하기를 허공록과 연결된 은밀한 아카이브에 인과율의 모순이 닿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네. 그리고 흑요석의 제약을 풀기 위해서는 허공록에 접속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고.”

“……아, 그랬었죠.”

전륜성왕이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하자 나는 그제서야 기억이 선명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륜성왕의 말이 이어졌다.

“내 가정이 사실이라 한다면…… 백웅, 그대는 이 과정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가?”

“이상함이라뇨?”

“흑요석의 술법은 인위적(人爲的)으로 금제를 당했다는 것. 그것부터가 맹점이다.”

“그게 뭐가 이상합니까?”

“달리 말하자면 그대와 허공록 사이에 계약이 맺어지지 않았다면, 흑요석의 술법은 충분히 [큰 굴레]를 무시하고 넘어와서 기억을 전송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격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경계가 바로 [큰 굴레]인데 ‘기억(記憶)’이라는 무형의 매질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

어?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내가 놀라워하자 전륜성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 흑요석의 술법은 선지자 일족의 아카이브를 통해 허공록과 직접 이어져 있는 술법인 것이다. 그대는 별생각 없이 썼던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우주에서 손꼽히는 대단한 술법이라 할 수 있지. 외신인 전지자의 권능을 간접적으로 빌려 쓰는 것이나 다름없지않느냐?”

“……!!”

“허나…… 이는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대는 이참에 흑요석에 의존하는 걸 가능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겁니까? 그렇게 강력한 술법이라면 도리어 앞으로도 제약을 풀고 열심히 쓰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내가 반문하자 전륜성왕이 약간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웅이여. 그대는 정보의 관리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아카이브를 관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애초에 그대는 ‘기억’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가?”

“……?”

“그대는 아직도 어설프다. 말로는 모든 걸 의심하겠다 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불편한 상황을 상정하지 않다니.”

탄식하듯 말하던 전륜성왕이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백웅이여! 흉신이 말한 대로 이 싸움의 범위가 전지와 전능에 걸쳐 있다면…… 부외자(部外者)도 방외인(方外人)도 존재할 수가 없노라. 그야말로 모든 이의 운명이 걸려 있는데 어찌 제삼자로서 목적 없이 관조하는 게 가능하겠느냐? 아무런 목적 없이 그대에게 조력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말거라!”

“…….”

나는 언뜻 전륜성왕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무척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륜성왕의 말을 곱씹어보다가 문득 그에게 말했다.

“전륜성왕께서도 목적을 가지고 제게 협력하고 있으시죠. 차라리 목적이 확실하다면 다행이란 겁니까?”

“해석은 그대의 몫이다. 허나 정작 내가 묻고 싶군.”

전륜성왕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야말로 목적이 확실한가? 무엇을 위해 전생하고 있나.”

“…….”

갑자기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렇게 확 정곡을 찌르니까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목적이라는 건 결과 아니겠습니까? 결과보다는 과정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재밌는 얘기군. 목적 없는 삶을 옹호하기 위한 변명은 아니고?”

“……변명이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마주치는 모두가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내게 삶의 목적을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느냐고……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살든 간에…… 몇 번을 전생하든 간에…… 이건 나의 삶(生)입니다.”

“…….”

“내 삶에 목적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눈앞의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신념이 바뀐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내 자신의 삶이라는 걸 인지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것이 처음으로 암야참의 경지를 깨달았을 때 느낀 점이었다.

“삶이란 그저 맹목적일 수만은 없다는 얘기인가?”

“그럴지도요.”

전륜성왕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그런 전륜성왕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러더니 전륜성왕이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는 처음부터 황제의 이념과는 맞지 않는 자였군…….”

“……?”

무슨 말이지?

내가 어리둥절할 때 전륜성왕이 말을 이었다.

“삶이란 죽음이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오늘 이 자리에서 얻어가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휘리리릭!!

갑자기 다음 순간, 나는 암풍(暗風)에 시야가 휘말리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전륜성왕과 함께 황량하고 어두운 사막 위에 와 있었다. 나는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기에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절연사막(絶緣死漠)……!!”

신(神)조차도 신력을 봉인당하며 전우주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태초의 재앙!

전륜성왕이 탄생한 이 마경(魔境)에 다시 올 줄은 몰랐기에 내가 긴장하고 있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한 그대라면 이제 절연(絶緣)의 힘을 수련할 수도 있겠지.”

앗?!

나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절연의 힘!

삿갓의 무사가 쓰는 그 절대적인 죽음의 힘을 나 또한 쓸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인가?!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채고는 전륜성왕에게 말했다.

“……절연의 권능을 제게 수련시켜 주기 위해서는 일단 중용(中庸)으로서 혼돈과 질서를 모두 베어 버리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제가 황제의 제안을 들어보고 온 다음에 그 맹세를 할지 말지 정하기로 했었고요.”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절연의 권능을 가르쳐 주신다니…… 마음이 바뀌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대가 흉신을 만났기 때문이다.”

“네?”

이게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전륜성왕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기억에 따르면 흉신은 이 판이 빠르게 진행되어 끝나기를 원하고 있다. 이미 그를 구속하던 봉인도 어느 정도 풀려 버렸지.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달리 그대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강대해진 삿갓의 무사와 마주쳐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나는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흉신의 봉인이 풀린 게 그 정도의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전륜성왕에게 말했다.

“흉신 그놈이 삿갓무사를 키워주고 있단 말입니까?”

“그런 건 알 수가 없다. 허나 흉신은 단일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종말의 원리이자 축이니, 종말의 집행자가 강해질수록 그대 전생자의 운명이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흉신은 그대의 전생횟수와 기간을 줄이게 될 게 분명하다.”

“으윽……!!”

“흑웅 또한 그걸 감지하고 그대가 이 시대에서 얻어야 할 가장 소중한 자산이 본좌의 절연(絶緣)이라 생각해서 급하게 그대를 쳐 죽여서 내게 보냈나 보군. 절연을 얻을 수 있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

흑웅이 거기까지 깊게 생각했던 거란 말인가?

스윽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전륜성왕이 앞으로 손을 뻗어서 내 얼굴을 가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전륜성왕은 그 상태로 천천히 말했다.

“본좌가 지금 손을 뻗은 것은 [삶]인가 [죽음]인가?”

나는 그 말을 듣자 예전에 전륜성왕이 내게 절연을 설명해줬던 그때의 상황이 기억났다.

나는 뚫어져라 전륜성왕의 손을 보다가 말했다.

“아직 저는 그걸 인식(認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 인식 너머에서 상대를 해(害)하여 인과를 단절시키는 것이 바로 절연이지.”

“…….”

“절연의 힘을 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절연사막에 존재하는 사악한 망집과 원한의 힘을 버텨내야 한다. 어디 버텨내 보겠는가?”

“해 보겠습니다.”

“좋다. 어디 내가 지닌 절연사막의 기운을 받아 보거라.”

후와아악!!

다음 순간, 전륜성왕의 손을 통해 거대한 흑암의 기운이 분출되더니 내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나는 그 기운에 둘러싸인 순간 엄청난 기세로 신력이 갉아 먹히는 것을 느꼈고 단숨에 저항할 힘도 사라지는 걸 알아차렸다.

‘으…… 으으윽……!! 괴롭다. 하지만 그래도 근성으로……!!’

하지만 고작해야 숨을 열 번 쉴 시간, 그사이에 나는 모든 근성조차 사라지며 맥이 풀리는 것을 깨달았다.

‘…… 못 해!! 으아아악.’

십만 번 베기도 버텨냈던 내 근성이지만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존재 그 자체를 찢어 버리고 먹어치우는 듯한 극악한 상실감은 근성이나 정신력으로 버티는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 버리고 있었다.

풀썩!!

“커헉…… 큭…… 으으윽…….”

나는 전신의 힘이 사라진 채 고통만이 남아서 그 자리에서 지렁이처럼 비비적거렸다. 마치 뇌의 절반이 웬 벌레한테 뜯어먹혀서 지금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땅 위를 꿈틀거리고 있자 전륜성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이 원념(怨念)이 얼마나 악독한지 알겠는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고문도 이 뒤틀린 원념이 영혼을 찢어발기는 것보다 아플 수는 없다.”

“흐악…… 아아아악!!”

뿌드드득

내가 비명을 지르며 내 얼굴 가죽을 스스로 뜯어내기 시작하자 전륜성왕이 별수 없다는 듯 갑자기 내 머리통에 손을 얹어서 힘을 불어넣었다.

우웅

“흐어.”

얼굴가죽을 반쯤 뜯어내서 피칠갑이 되어 있던 나는 그제서야 광증(狂症)에서 벗어났다. 나도 잘 몰랐지만, 어느새 나는 내 눈깔을 스스로 뽑아 버린 듯했다. 내가 광증에서 벗어나서 멍하니 있자 전륜성왕이 차갑게 말했다.

“그대, 이 고통과 원한을 이해하여 자비(慈悲)로 감쌀 자신이 있는가?”

“…….”

나는 급히 신력으로 내 몸을 치료하고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못합니다. 이건…… 정신력으로 어떻게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단언할 수 있다.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 대단한 정신력을 지닌 자라고 해도 방금 전의 고통은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다. 30번이나 전생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썰려 죽으면서 온갖 고통을 느껴본 나였지만 절연사막의 악독한 기운은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그렇다. 이게 바로 절연사막인 것이지. 전 우주의 죽음이 뭉쳐 있는 대지의 기운이다.”

그러나 이어진 전륜성왕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러나 [큰 굴레]의 가르침만큼은 대자대비(大慈大悲)로서 이 절연의 기운을 통제하여 다룰 수 있게 만든다. 본좌는 그 섭리를 터득했기에 절연의 권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큰 굴레]의 가르침이라구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론이 아니라 체감으로 무색(無色)의 법리(法理)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짤막하게 이야기한 전륜성왕은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 자비심(慈悲心)의 근본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자비요? 어…… 그거야 따뜻하고 착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자비심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심이란 애념(愛念)과 민념(愍念)이니, 그 마음을 발현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무아(無我)라고 할 수 있다.”

“무아?”

자기자신이 없다고?

왜 그런 것이지?

내가 어리둥절해 할 때 전륜성왕이 말했다.

“그대와 내가 서로의 이득을 위해 서로를 도와주는 것은 자비가 아닌 거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악(巨惡)끼리도 충분히 연민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도울 수가 있으니 단순한 정심(情心)만으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결국 인과를 깨닫기 위해서는 아(我)를 버릴 수밖에 없음이다.”

“아를 버린다는 것은 자의식을…… 자아를 버린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지 않습니까?”

“아(我)를 유지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지 아는가?”

“…….”

“아(我)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기심(利己心)이다. 이기심으로 인한 그 어떠한 정애(情愛)도 이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진정한 이타(利他)가 될 수 없는 것. 그리고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이기심은 결국 악(惡)과 혼돈(混沌)의 근원이 되기에, 이기심을 버리고자 하면 결국 자아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를 버리면 대체 뭐가 남습니까?”

“후후.”

전륜성왕은 뭔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일전에 그대와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토론한 적이 있었지. 그리고 [죽음]이란 그대의 자아가 어디까지를 죽음인가 인식(認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랬었죠.”

이어진 전륜성왕의 말에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렇다면, 전생자인 그대의 자아란 것이 아예 사라지는 공(空)의 상태가 된다면 [죽음]을 진정으로 초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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