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7권 11화
이환웅이 말했다.
“패왕 아지다하카와의 경기는 이틀 후야.”
“이틀 후라…….”
“그때까지 몸을 풀어두던가, 아니면 아직 아쉬운 일이 있다면 하루안에 정리를 해 두던가…….”
“…….”
나는 이환웅의 조언을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하루만에 처리해야 할 만한 일이 있던가?
하지만 방금 전까지 아지다하카와의 결투도 잠시 까먹고 있었던 내게 [큰 굴레]의 과거사가 한 번에 확 와 닿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간선을 마구 건너뛰면서 헷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수 없이 이환웅에게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말해줘. 지금은 헷갈려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몇 가지 있긴 한데…….”
“뭔데?”
“하지 마.”
“……?”
뜻밖의 한마디에 내가 멍해져 있자 이환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모레 있을 아지다하카와의 전투는 당신의 무술경지를 높이기 위한 중대한 일전 아닌가? 아무리 다른 일이 중대하더라도 그것보다 중요할 순 없지. 생각도 나지 않는 일들을 억지로 생각해내려 힘 빼지 말고 차라리 다른 일은 다 잊어버리고 하루 동안 몸 상태를 최고로 만들어두는 게 훨씬 나아.”
“음, 그렇군.”
“그리고 또 하나. 이건 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대답해줄 수 있을까?”
“뭐지?”
타악
이환웅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마한 책을 접으며 말했다.
“당신은 신역의 고수와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가 겨루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나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나는 그동안의 무예 경험을 살리며 최대한 생각을 했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왜 모르겠다는 거지? 신역이란 마음의 검, 무형검 같은 전설의 경지를 난무할 수 있으니 당연히 신역이 천의무봉을 이기는 게 아닌가?”
“그게…….”
나는 무겁게 대꾸했다.
“나는 전생하면서 아마 무림의 그 누구보다도 천의무봉을 많이 보고 연구해 왔다. 그리고 놈의 천의무봉은 다른 절대지경과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어. 한계치 자체가 다른 절대지경과 달라.”
“그래봤자 심천무량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지는 거 아니었나?”
“……달리 말하면 하은천의 순수한 내공이 심천무량을 감당할 수준이 된다면 그런 파해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거든. 하은천의 내공도 굉장하긴 했지만, 무한의 내공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었으니까.”
“호오.”
“마찬가지로 신역절기도 힘의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통상적인 천의무봉을 뚫을 수 있는 것일 뿐 만일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환웅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렇군. 십이율주 하은천의 역량이 신급에 이르기만 한다면 아직까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천의무봉을 파해할 무공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 거군?”
“……그래.”
“굉장히 천의무봉을 고평가하는군. 나는 왠지 당신이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안다고?”
내 반문에 이환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에 여동빈이 수련 도중에 당신에게 했던 말은 나도 흑요석을 통해서 알고 있거든.”
“뭐?”
“마음이 없이 기계적인 이성만으로 최적의 움직임을 따를 수 있는 무예의 경지가 있다면 그게 자연체보다 궁극적으로 나은 것인가…… 였던가.”
“……!!”
흠칫
이환웅이 단숨에 핵심을 짚어내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과연 천재는 천재인가?’
그 수많은 흑요석의 기억 중에서 가장 요점이 되는 걸 바로 짚어내는 건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환웅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신역의 초고수가 마음의 검을 운용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武)의 영역인 이상 ‘움직임(動)’은 있어야만 하지. 그게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진동(振動)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진적(眞寂)이라 할 수는 없게 않겠나?”
“…….”
“하지만 천의무봉이 정말로 신역의 경지에 닿을 정도로 진화한다면…… 그때의 천의무봉은…… 심동(心動)조차도 최적화하여 기계적으로 대응해 막아낼 수 있다. 여동빈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런 거겠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이환웅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으득하고 악물었다.
“심검(心劍)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역사상 셀 수 없는 무인들이 자기의 평생을, 모든 것을 버려가며 고련(苦練)했어! 그 궁구(窮求)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심검인데…… 고작해야 강인공지능의 계산력으로 최적화하는 것만으로 심검을 받아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버럭하자 이환웅은 잠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핫하고 평정심을 되찾자 이환웅이 말했다.
“화를 낼 필요가 없잖아? 그냥 천의무봉의 한계점을 따져보자는 것뿐이었는데.”
“…….”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하나야. 사실 그렇게 말하는 본인조차도 천의무봉에 그럴 가능성이 존재하는 걸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무예가 과학의 힘에 따라잡힌다는 걸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동시에 신역의 역량을 지니고 있기에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젠장…… 무슨…….”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윽고 머리가 맑아지자 이환웅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는 천의무봉이 능히 심검을 대적할 수 있을까 봐 두렵다.”
사실 여동빈에게 그 얘기를 들었던 당시에는 어째서 능히 심검을 시전할 수 있는 절대고수인 여동빈이 천의무봉을 신경 쓰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수많은 모험과 경험을 거치며 신역의 역량을 갖게 되자, 이제야 비로소 여동빈이 ‘무엇’을 신경 썼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환웅이 말했다.
“천의무봉은 절대지경의 무공이지만 절대지경이 아니지. 이론상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하며 연산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발동되는 절대지경…… 과학으로 비유하자면 라플라스의 악마 같은 성질을 갖고 있어.”
“…….”
“그렇기에 무(武)의 이상으로 꼽히는 최적(最適)의 동작에 무한히 가까워져 있으며 이는 그 어떤 무공으로도 대적할 수 없는 천의무봉만의 사기적인 특성이지. 나는 최근까지 천의무봉을 연마하며 그 사실을 깨달았어. 당신 말대로 ‘힘’으로 깨부수는 건 가능하지만 동시에 천의무봉의 소유자가 그 힘의 근처까지만 접근해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리거든. 당신의 해석이 옳아.”
역시 이 녀석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물어봤던 걸까?
나는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환웅은 느긋하게 바깥의 투기장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백웅. 그렇다면 ‘마음’조차도 계산하여 최적화시킨 무(武)에 대적할 수 있는 경지는 대체 무엇일까?”
“……?!”
“검선 여동빈이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건 그걸 거야. 차가운 기계가 전지(全知)에 도달하여 마음조차도 읽어낼 수 있다면 그걸 능가하는 무예의 경지가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아, 아니…… 그건…….”
나는 잠시동안 혼란스러워서 어버버했다. 하지만 잠시 후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다. 아직 심검도 얻지 못했는데 그걸 어찌 안단 말이냐? 그리고…… 여동빈은 그걸 왜 내게 생각해보라고 화두로 던져준 거지?”
“나는 알 것 같은데.”
“뭐?”
“간단한 얘기지. 여동빈의 직감으로 볼 때 전생자인 당신은 언젠가 신역의 경지에 필적하는 천의무봉의 소유자와 겨루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때마냥 심검의 경지로 대적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부터 알아서 그다음의 경지를 생각하라고 한 거지.”
“…….”
“뭐야? 왜 갑자기 살기 어린 눈빛이지? 날 죽이려고? 크큭.”
이환웅이 능청스레 웃었지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장난 그만해. 그런다고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인 건 알고 있으니까.”
“왜? 내가 미래에 십이율주가 된다면서? 지금 미리 싹을 잘라 버리면 편할걸.”
“나는 오랫동안 전생을 해와서 알아. 언젠가 그런 존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잡한 인과를 거쳤기 때문일 거고, 그건 신조차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인과율을 미리 차단한다는 건 오만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
“……호오, 과연 30번이나 전생한 전생자인가? 말에서 현기가 느껴지는군.”
키득거리던 이환웅이 말했다.
“백웅. 어찌 됐든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고 현재 무술의 스승이기도 해. 그러니 내가 천의무봉을 수련하며 알아낸 아주 귀중한 단서를 지금 말해줄게.”
“뭐? 단서?”
“그래. 나중에 그런 놈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잘 들으라구…….”
이환웅의 말에 나는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잠시 후 이환웅의 입이 열렸다.
“내가 심장에 갖고 있는 강인공지능인 메피스토는 전지(全知)가 가능하다는 전제로 주변의 모든 데이터를 읽어들이고, 그 데이터에 최적화시켜서 최고의 움직임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줘. 바로 그게 절대지경인 천의무봉이지. 하지만…… 해석되지 않는 null이 가끔씩 발생하는 경우가 있어.”
나는 이환웅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null? 그게 뭐지?”
“아스키코드 0번에 있는 표현이지. 말 그대로 0이야. 더 쉽게 말하자면 무(無)이자 공(空)이라고 할 수 있지.”
아스키코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기에 대꾸했다.
“모든 데이터를 읽는다면서 왜 무(無)가 발생하는 거냐?”
“음…… 아무리 모든 데이터가 있더라도 그걸 해석하는 강인공지능은 유한한 존재야. 그래서 세상을 해석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한 이환웅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혹시 기초적인 데이터해석이 0과 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알고 있어?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수체계가 가장 데이터전달에 효율적이기 때문이었어. 물론 이후에는 이진법을 넘어선 체계가 나오고 더욱 발전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초는 이진수였지. 근데 0과 1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무슨 뜻일 거 같아.”
“잘 모르겠는데…….”
“0은 무(無)이고 1은 유(有)야. 즉 ‘존재’와 ‘비존재’로 세상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시각이지. 하지만 이 해석에는 한계점이 있어.”
“어떤 한계점인데?”
“예를 들어서 인류문명이 흉신에게 멸망해서 사라졌다. 이것은 무(無)이니까 0이지? 그런데 인류문명이 애초에 지구상에 등장조차 한 적이 없는 경우 이것 또한 무(無)이니 0이야. 이 두 가지 경우가 같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다르지. 그게 어떻게 같겠냐고.”
“그래. 너무 단순화시켜서 얘기했지만 사실 이건 아무리 강인공지능이라 하더라도 무(無)와 공(空)을 구분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는 얘기야. 0과 null은 같아 보이지만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이지.”
“…….”
대체 뭔 소리야? 나는 이환웅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이해를 잘 못 하는 기색이었지만 이환웅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할 말을 이어나갔다.
“내 스승인 나일라토프는 늘 이런 얘기를 했어. 이 우주를 창조한 창조신이 존재하며 그 신이 이 세계를 코딩했다면 반드시 null의 존재를 넣을 수밖에 없다고.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값이라는 게 이 우주에는 무조건 존재한다는 거야.”
“……?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흐음, 그러니까 말이지…… 아무리 평온한 상태라 하더라도 존재가 중첩될 확률이란 게 존재한다는 거야. 강인공지능인 메피스토라지만 그 확률은 계산 못 하는 거고. 뭐, 구골(googol)급 확률이지만 완전무결은 아니란 거지.”
“엉? 존재가 중첩된다고? 왜 그렇게 되는데?”
“흐흐, 어떤 느낌인지 직접 보여주지.”
치지지징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이환웅의 몸에서 푸른 번개 같은 게 일어났다. 그리고 이환웅의 눈 또한 완전히 새파랗게 변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무엇인지 기억났다.
‘예전에 이환웅이 유망에게 대적할 때 저 술수를 사용했어!’
양자술식(量子術式)
스핀 네트워크 (spin network)
이환웅은 순간 자신의 두 주먹을 크게 말아쥐는 것처럼 보였다.
슈뢰딩거 온 더 루프(Schrödinger on the loop)
피피핑……!!
“……!!”
다음 순간, 이환웅의 몸이 두 개로 분리되어 시퍼런 이환웅의 분신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이환웅의 분신이 갑자기 내게 돌격해서 공격해오는 것이었다.
‘뇌신권?’
이환웅이 뇌신권을 써서 일격을 날려오자 나는 가볍게 방어초식을 써서 이환웅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이환웅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으려고 갖다 대자마자 이환웅의 주먹은 내 몸을 완전히 투과해서 뚫고 들어왔다!
‘뭐야?!’
의념까지 실어서 막으려 했기에 난데없이 이환웅의 분신 공격이 내 방어를 투과하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윽고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서 추격타를 피했고 되레 일장을 날려서 분신을 타격했다.
꾸웅
내 뇌령인(雷靈印)을 맞은 이환웅의 분신이 텅하고 튕겨 나갔다. 하지만 잠깐 튕겨 나가나 싶더니 이번엔 아예 기운을 소멸시키며 허공에서 번개를 뿜어냈다.
번쩍!!
“엉?!”
저게 돼?! 크기를 축소시켰다지만, 분명 위력 하나만큼은 성체 용족도 일격에 잡을 만큼 강한데!
내가 당황하자 이환웅이 그제서야 공격을 멈추며 씩 웃었다.
“어때? 재밌는 기술이지?”
“그거 유망과 싸울 때도 썼던 거 같은데 대체 무슨 분신술이냐? 어떻게 내 방어를 관통할 수 있는 거지?”
“이건 분신술이 아냐.”
“분신술이 아니라고?”
“보통의 분신술은 기(氣)나 의념(意念)을 고도로 뭉쳐서 쓰거나 혹은 술법을 이용해서 환영분신을 만드는 거지. 하지만 말이야…… 이 기술은 기, 의념, 술법 중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았어.”
이환웅은 자기 옆에 서 있는 시퍼런 분신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존재할 확률을 인위적으로 양자중첩시켜서 만들어낸 존재야. 즉, 이건 또 다른 나 자신이란 거지.”
“……?!”
“그러므로 이건 분신이 아닌 또 하나의 본체이기도 해. 재밌지?”
“뭐야?! 그런 기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정말 말도 안 된다! 내가 기술의 원리를 듣고 경악하자 이환웅이 키득거렸다.
“가능해. 메피스토의 연산력은 양자중첩을 조작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거든. 그리고 이런 중첩상태에 존재하는 것들은 통상적인 외력을 거의 다 무시할 수 있는 통합체(Unitary body)라고 불려. 웬만한 차원결계도 다 무시할 수 있지. 다만 유망처럼 우주적인 존재들이 퍼붓는 미친 수준의 파워는 감당이 안 되긴 하지만 필멸자 수준에서는 쓸 만해.”
“으음! 설마 방금 내 뇌령인을 흡수한 것도…….”
“그 정도 수준의 타격력 정도는 다 무시할 수 있단 거지. 뇌령인에 있는 뇌전도 흡수할 만하고.”
“…….”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환웅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탁록시대라서 약해 보이는 거지 원래 대명제국 시대에 갖다 놓으면 최상위권 아닐까……?’
내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환웅이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양자를 인위적으로 중첩시키는 것도 가능해. 근데 문제는 이걸 내가 원할 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무수한 데이터 중에는 구골의 확률로 자연중첩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는 거지. 메피스토는 그걸 읽을 수 없기에 아주 가끔 오류를 일으켜.”
“뭐야? 그러면 천의무봉이라 해도 완전무결은 아니란 소리냐?”
“이제야 이해했군. 바로 그거야.”
“흐음…… 그러면 그 천의무봉의 null이라는 오류를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 거지?”
이환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몰라. 사실 그냥 오류가 존재한다뿐이지 실제로 전투에서 천의무봉을 쓸 때는 그게 ‘실수’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발전한 적이 없어. 너무나 사소한 오류라서 금세 강인공지능의 연산력이 디버깅해서 없애 버리거든.”
“…….”
“실전에서는 사실상 0이지. 수천만 번의 전투 동안 수십억 번의 초식을 쓰더라도. 구골 분의 1이라는 확률은 그런 뜻이야.”
뭐야 그러면 의미 없단 건가?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이환웅이 씩 웃었다.
“그치만…… 지금의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지만…… 그 아주 미세한 오류를 해결하는 순간을 포착해 찌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절대초고수라면 뭔가 수가 있을지도?”
“음…….”
“뭐 아무튼 그렇단 거야. 나중에 큰 도움이 될걸.”
그렇게 말한 이환웅이 은하구절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대련이나 좀 하자고. 지금 당신은 미래의 기계 몸 상태가 아니니까 현재 몸에 다시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지.”
“……그거 좋지.”
나는 그 후 이환웅과 수련장으로 가서 대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련을 한창 하던 중에 이환웅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기계몸과 지금 몸은 엄청나게 다르군. 다른 짓 하면서 돌아다녔으면 절대로 제 역량을 내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체적인 조건을 보면 기계몸과 현재 몸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어쩐지 부자유 속에 갇힌 것 같다는 기묘한 감각이 내 머릿속을 사로잡은 것이다. 지금 몸이 수천 배는 더 무공시전에 유리한 게 뻔한데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이환웅과의 대련이 약 세 시진을 지나자 어느 정도 몸이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환웅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아난과의 싸움을 복기해보고 싶군.”
“알았어. 그러면 내일 정오까지 잊지 말고 나와.”
“그러지.”
나는 수련장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몇 시진이나 정적 속에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기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며 강대한 신력과 기력을 지니고 있는 최정점의 상태다. 지금 상태에서 그때의 아난과 싸웠다면 승패가 어땠을까?’
나는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아난의 모습을 그려내며 나 자신과 가상의 대련을 붙이기 시작했다. 무사시와 싸우기 전에도 썼던 이 수련방법은 실전만큼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상대와 싸울 때 승패의 윤곽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난과 가상으로 겨루고 있던 도중, 나는 허탈해져서 한숨을 토해냈다.
“……안 돼, 가늠이 되지 않는군.”
파스스 하며 머릿속의 아난이 대련상태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이 가상의 뇌내대련(腦內對練)이라는 건 상대의 역량을 9할 이상 파악한 상태에서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난은 나와 겨룰 때 자기 실력의 절반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가상의 아난을 상대로 싸워봤자 무의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상태가 아난을 상대로 더 유리한 게 사실일까?
나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고민을 한참 하다가 결국 조력자를 부르기로 했다.
“흑웅.”
쉬익!
다음 순간 칠흑의 음영이 내 눈앞에 출현했다. 마치 전욱이 인간계에 조그마한 모습으로 현신한 것만 같은 그 모습을 하고 있던 흑웅이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부르셨소? 주인.]
“아난과의 대결을 머릿속에서 가늠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답이 없다. 뭔가 방법이 없겠나?”
[…….]
흑웅은 내 이야기를 듣자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난은 어쩌면 우주검성 아지다하카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상대. 그런 상대를 가늠하려면 보통 방법으론 되지 않소.]
“어떻게 해야 하지?”
[주인의 의도대로 절대 초고수의 힘을 가늠하고자 한다면 지금으로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구려.]
스스스
갑자기 흑웅이 내 맞은편으로 이동하더니 현신(現身)했다. 조그마한 정령체 상태가 아니라 명백히 인간과 유사한 형태로 변신한 흑웅은 자신의 손 위에 암창(暗槍)을 소환하더니 말했다.
[준비하시오.]
“뭐?”
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갑작스럽게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주인. 나랑 계급장 떼고 한번 붙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