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9화
나는 과거 수련세계에서 수보리를 통해서 [공존의 가면]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세 가지 양상이 일어나지.]
[지배, 파괴, 공존.]
[공존은 뭐요?]
[그건 무척 희귀한 현상인데 가면과 상대가 서로를 인정하여 자아를 각자 유지한 채 힘을 공유하는데 동의하는 현상일세. 이 경우 둘의 힘이 몇 제곱이나 증폭되어서 훨씬 강력해지게 되지.]
[아난(阿難). 내가 알기로는 그가 전 우주에서 유일하게 합일한 열반(涅槃)의 가면일세.]
수보리는 사실 가면의 종류를 설명해줄 때 외에는 더 이상 아난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느꼈지만 수보리 본인이 아난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무척 꺼림칙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지금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강할 줄은…….’
스스로 술수를 연마하여 옥황상제에도 대적할 만한 초월자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수보리 - 그 수보리조차 눈앞에 있는 열반의 가면, 아난이 지닌 힘에 비하면 무척 하찮은 힘의 소유자였다. 본디 수보리의 역량이 아난보다 뛰어났을 터인데 한순간에 추월당했을 거라 생각하면 수보리 입장에서 아난은 언급하기 껄끄러운 존재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기 싸움에서는 더더욱 지고 싶지 않다. 어디서 이런 괴물딱지가 튀어나왔는지 몰라도 나 또한 전생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아난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은 미치광이냐? 대체 왜 석가세존에 대한 불경을 내게 묻는 것이냐!]
나는 아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외쳤다.
[수보리가 말하기를 석가세존은 신(神)이 아니라 했다! 법리(法理)이며 공(空)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순환이 부처이며 그렇기에 외신에 버금가는 존재라 했는데, 고작 이딴 유적에 침범하는 게 석가세존에 불경스러운 짓이라는 거냐? [큰 굴레]가 그렇게 하찮은 존재란 말이냐!!]
“…….”
내 외침에 아난은 가면 안에서 섬뜩한 눈빛을 피워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다만 그 눈빛에는 살기가 여전히 맺혀 있으되 약간의 심유함이 느껴졌다. 아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수보리가 진실로 중요한 걸 이야기하지 않았구나.”
[뭐?]
“인간으로서의 석가세존과 깨달음을 얻으신 그분께서 승화(昇華)한 그 [굴레]는 유별(有別)한 것. 나는 [큰 굴레]가 아닌 석가세존에 대한 불경을 징치할 것이다.”
[……?!]
이 새끼 존나 억지 쓰네!!
내가 기가 막혀서 한소리 하려는 순간 아난이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만물(萬物)이 위신(僞神)이며 위정(僞精)이며 위조(僞造)이다. 끊임없이 거짓을 창생(蒼生)하여 거짓된 굴레를 반복하는 너보다 불경(不敬)한 존재는 존재치 않으니, 이 자리에서 네 최후를 맞이하라.”
달각!
아난의 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틀림없이 그것은 필살의 일격을 머금고 있는 절기가 발동되는 준비일 것이리라.
[씨발!! 네가 뭔데 나를 심판하느냐? 그런 네놈은 [가면]이 아니냐!!]
나는 아난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개자식아. 너는 지금 당장에라도 니알라토텝한테 들키면 몸을 뺏기고 가면을 흡수당할 텐데 고작 니알라토텝의 졸개에 불과한 네가 뭘 잘났다고 불경을 논하느냐고!!]
“…….”
그 말에 당장에라도 덮쳐 오려 하던 아난이 멈칫했다. 아난은 한층 무거워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전생자여. 그리 말한다면 보여주마…… 내가 네놈을 단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촤라라락
갑자기 아난이 다시 쌍염주를 소환하더니 합장을 했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내가 깜짝 놀랄만한 한마디를 했다.
“[기어오는 혼돈]이여…… 이 자리에 나타나거라!!”
……?!
어…… 어?! 진짜?!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나는 놈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심 저게 그냥 나를 겁먹게 하려는 허세일 거라고 생각한 탓도 컸다.
그리고 잠시 후, 흑백의 쌍염주가 가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쌍염주에서 흘러나온 빛이 허공에 거대한 어둠의 소환진을 만들어내었고 그 소환진에서 잠시 후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쯔으으으
끄아아아아악 - !!
끔찍한 비명이 환청처럼 울려 퍼지며 시꺼먼 어둠이 뭉쳐 있는 덩어리에 수많은 가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그 어둠에 천사의 하늘거리는 날개가 매달려 있었으며 몸뚱이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눈동자가 달려 있는 - 악몽에서 볼 법한 무시무시한 존재가 그 소환진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것 또한 그저 내가 묘사할 수 있는 한도일 뿐 저 존재가 모습을 다 드러내면 얼마나 끔찍할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츠으으
그리고 잠시 후 그 존재가 어느 정도 몸을 소환진에서 삐져나왔을 때 존재가 몸에 붙이고 있던 가면 중 한 개가 촉수 같은 검은 덩어리와 함께 몸을 쭉 늘였다. 그리고 쭉 늘여져서 내 코앞까지 온 가면이 잠시 후 달그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간만이구나, 전생자. 전에 내가 했던 부탁은 기억하고 있겠지?]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니알라토텝…….]
틀림없다. 이 존재감을 착각할 수가 없다. 생긴 건 전혀 비슷하지 않지만 천암비서의 세계 내에서 마주쳤던 그 니알라토텝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틀림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몸뚱이가 달라졌는데 날 알아봤느냐 하는 건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눈앞의 니알라토텝은 절대적 존재니까. 나는 멍하니 있다가 대꾸했다.
[저기 있는 저놈…… 공존의 가면인데 안 잡아가냐.]
[…….]
그 말에 니알라토텝은 가면을 들고 뭔가 두리번거리는 형상을 취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 못 한 듯 허탕을 치고는 뭔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흐하하하하. 나는 ‘그것’을 볼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다. 재밌는 상황인 것 같은데 함께 즐기지 못해서 아쉽구나…….]
[뭐?]
[이쯤에서 관두지. 그럼 다음에는 더 재밌는 상황을 보여주도록…….]
파앗!!
다음 순간 니알라토텝과 함께 소환진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니알라토텝이 자기 의지로 되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멍하니 있자 아난이 말했다.
“공존하여 열반의 경지에 오른 가면은 더 이상 저놈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또한 보았다시피 놈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니, 이는 [큰 굴레]에 내 힘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
“지금도 보이고, 느껴지노라…… 그대가 [큰 굴레]에 역행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런 존재는 이 세상에 전생자 밖에 없으니…… 더 이상 자격을 따질 이유는 없으리라!!”
아난의 노호성과 함께 그는 갑자기 뛰어들더니 내게 일 장(一掌)을 날려왔다.
석가종문(釋迦宗門)
대여래신장(如來神掌)
꽈광!!
[크으으으윽!!]
나는 그 절기를 가까스로 모든 신력을 모아서 방어했지만, 그 순간 카필라 성의 유적을 뒷전으로 하고 내 몸이 멀리 지상의 지표면으로 치솟아 날려가는 걸 느꼈다. 지하에 있다가 너무 커다란 힘에 밀려나서 초음속으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슈우우웅
나는 계속 뒤로 날려가면서도 아직까지도 수백 장을 넘는 크기의 위력을 유지하는 장인(掌印)을 보자 기가 막혔다.
엄청난 기력을 머금은 장력!! 내가 인간의 몸일 때 가지고 있던 모든 내공을 실어서 날려도 이것과 비슷한 위력이 나올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했다. 내가 섬을 날릴 때 썼던 뇌령인조차도 지금의 대여래신장에는 훨씬 못 미칠 것 같았다. 인간이 낼 수 있는 무공위력을 이미 몇천 배 넘어선 것 같았다.
끼기기긱
‘으윽…… 젠장…… 그래도 해 볼 만 해!’
나는 있는 힘껏 대여래신장의 위력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했고 한참 후에야 그 위력이 감소되는 게 느껴졌다.
[후우, 끝났…… 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순간 주변 풍경이 아주 기이하다는 걸 느끼고는 당황했다. 밑으로는 거대한 지구(地球)가 보였고 근처를 둘러보면 어두운 별과 어둠이 가득한 성라(星羅)! 이제 보니 대여래신장에 밀려서 단숨에 성층권 너머로 튕겨나 갔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젠장 무슨 무공이 이렇게…….’
슈슉
그리고 그런 내 앞에 곧장 아난이 순간이동해서 나타났다.
천수관음권(千手觀音拳)
아난은 불문곡직하고 그대로 속사포처럼 양수 양족을 채찍처럼 날리며 내게 수백 번의 공격을 날렸다. 나는 아난의 공격속도가 그리 빠르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대충 날리는 공격이 아닌 무(武)의 묘리를 담고 있는 공격이라서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처맞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강철몸뚱이가 사정없이 우그러지는 걸 보니 나는 이대로라면 그대로 몸이 고철덩어리가 되어서 전투불능 상태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설마 땅도 없는 성층권에서 무공대결을 할 줄은 몰라서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으며 상황에 집중했다.
‘한번은 밀렸지만, 아직 해 볼 만 해.’
[흐름]을 느껴 본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최선의 한 수는……?
‘이거다!’
그리고 아난의 일권이 내 목젖을 바스러뜨리려 날아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의 권경(拳經)을 빗겨치며 되레 감아치듯이 아난을 팔꿈치로 찍었다. 펼치고 나서야 이게 뇌운유권(雷雲柔拳)의 필살초식 중 하나인 무룡운유(舞龍雲柔)의 초식이라는 게 기억났고, 내가 이성으로 생각하기 전에 자연스럽게 무룡운유의 초식연계가 시작되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차는 무릎 차기로 일격, 목을 잡고 균형을 흔들며 앞으로 더 파고드는 게 이격, 마지막으로 인중을 장저(掌低)로 내리치며 다시 무릎으로 적의 척추를 분쇄하는 삼격!
마치 물 흐르듯이 삼격(三擊)을 넣는 동안 아난은 거의 방어하지 못하고 급소에만 맞지 않게 몸을 뒤트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는 척추분쇄의 일격을 넣으려는 순간 아난은 재빨리 손을 끼워 넣어 내 무릎을 막아낸 후 되레 몸을 반회전하며 내 관자놀이에 발차기를 날렸다.
쩌억!
나 또한 아난의 발차기를 팔으로 막아내었다. 엄청난 기력이 담긴 발차기라서 원래 내 방어력으로는 절대 막을 수가 없었지만, 아난의 중심이 크게 불안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권법이란 화려한 장풍을 내뿜기보다는 이런 실전성있는 연계에서 필살의 위력이 나온다.
두웅…….
하지만 발차기를 막아냈을 때 그 충격이 아래로 향했기 때문일까? 내 몸은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따라서 추격하듯이 아난이 합장을 한 상태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지상에서라면 화살을 연상케 할 정도의 속도로 추락하면서도 기어이 끝장을 보겠다는 게 느껴졌고 이윽고 아난의 선공(先攻)이 날아왔다.
연화절권(蓮花絶拳)
두세 번 끊어져서 사람을 현혹시키며 급소를 노리는 위맹한 공격! 나는 이 무공이 백련교의 권법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하며 절권의 약점을 미리 읽어내어 절권이 시작되기 직전에 흐름을 끊으며 반격했다. 그러자 아난은 공중에서 몸을 몇 바퀴씩 선회하면서 이번에는 수십 번의 발차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대선룡퇴법(大旋龍腿法)
퍼버벅
‘으으으윽.’
역시 의념도 내공도 없는 상태로 마력을 이용해 물리적인 반응속도만 따라붙으면 한계가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아난의 공격을 버텨온 나였지만 대선룡퇴법에 이르게 되자 점차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몸이 전혀 따라주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흐름]으로써 급소만큼은 안 맞게 최대한 초식전개를 막는 데도 한계는 여실히 있었다.
천왕퇴(天王腿)
콰과광!!
마침내 성층권에서 떨어지던 나는 마지막으로 대선룡퇴법의 필살기를 맞고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지면에 부딪혀서 폭발음을 내었다. 지면에 충격파가 울리며 내 몸이 지면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자, 막 착지한 아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승산 없다.
[흐름]을 이용해서 상대의 약점을 치고 들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상대는 거기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기에 절대 필살의 반격을 이룰 수 없다. 그런 데다가 의념과 내공이 천양지차인 탓에 아난이 그냥 잡스러운 초식으로 내 빈틈만 공략해도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지금까지 이것보다 더 심한 차이를 겪은 적도 많았고 언제나 내 싸움은 강적과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해 봐야지.’
내가 투지를 불태우며 천천히 땅에서 몸을 일으킬 때 아난이 입을 열었다.
“그대, 나를 기만하는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아난을 쳐다보자, 아난은 신경질적으로 눈에서 혈광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대가 신역(神域)의 초입이라면 충분히 기(氣)를 쓸 수 있을 텐데 일부러 쓰지 않느냔 말이다.”
전생검신 1593화
…… 뭐?
기를 왜 안 쓰냐고?
나는 그 말에 순간 기가 막혔다.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라고!’
기를 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이 깡통 몸에는 단전이고 경락이고 뭐고 없어서 기(氣)를 모을 구심점이 없는 데다 예전에 달마의 세계에 있을 때처럼 의념으로 잠시 내공을 모으기도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의념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고 내공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자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기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놈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지만 뭐라 반박하려는 순간 놈이 했던 말 중에 찝찝한 게 느껴졌다.
‘신역의 초입이라면……?’
그 말은 신역에 이른 자는 조건에 관계 없이 기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퍼뜩 놈에게 말했다.
[…… 기를 쓰는 방법을 가르쳐다오.]
“…….”
그러자 아난은 내 말을 예상치도 못한 듯 굳어 버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허세를 부려봤자 쓸데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고는 마저 입을 열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른다. 신역이면 어떻게 쓸 수 있다는 거지?]
“……그런가. 본인의 몸이 아니라서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런 셈이지.]
나는 아난이 나를 비웃거나 도리어 무시하고 공격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고 또 계속 무예를 연마하면 그만이다. 적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이런 행위가 얼마나 미친 짓인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아난은 잔잔하게 입을 열었다.
“신역절기는 기(氣)가 없어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역에서 내공과 의념이란 필요 없는 존재인가?”
나는 이 질문에 현기가 스며들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질문은 간단해 보였지만 사실 모든 절대지경 고수들이 다음 경지라고 여겨지는 신역에 발을 들이밀 때 수천 번은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난의 질문에 답했다.
[아니다.]
“어째서 아닌가? 제대로 답해보라.”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는 번개 그 자체를 혼으로 삼는데, 그 혼이(@은) 상단전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지만 동력은 중단전(中丹田)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구궁파천뢰를 근간으로 하는 사신지혼 또한 마찬가지이니 신역도 내공과 의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구궁파천뢰…… 사신지혼……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들어봤던 무공이구나. 그러면 너는 사신지혼이 신역의 무공이라 생각하는가?”
[그래.]
심수력이 익혔던 초창기의 고대 사신지혼은 분명 신역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그 후 [신의 그릇]으로 발전시킨 사신지혼은 신역에 이르는 무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신지혼을 혼합시킬 때 그 가공할 위력이 나오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무공의 문답처럼 되어 버린 상황에서 아난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너는 나와의 싸움에서 왜 사신지혼을 쓰지 않는가?”
[말했잖냐. 구궁파천뢰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라 동력을 중단전에서 가져오는 것인데 지금 단전 자체가 없다고…….]
“구궁파천뢰는 번개 그 자체를 혼으로 삼는다 하였다. 그러면 혼불이 된 번개에도 내공과 의념이 필요한가?”
[……?!]
어?!
이, 이건 무슨 말이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깨우침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게?! 뇌신지혼을 형성할 때 내공이 필요하긴 하지만…… 뇌혼 그 자체에 정념이나 의념이 필수적인 것인가?’
이건 그 수많은 세월을 수련하면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수련하는 나 자체가 이미 의념천주와 내공을 막대할 정도로 갖추고 있어서 이게 없는 상황따위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난의 말대로 뇌혼 그 자체가 하단전과 중단전을 꼭 필수로 하는지는 다른 얘기 같았다.
그렇다…….
나는 이미 사신지혼이 [신의 그릇]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던가.
[신의 그릇]이라 할 수 있으며 앞으로 거대한 무(武)를 담아낼 기초가 고작해야 몸이 상실되었다고 사라질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롤랑과의 전투에서 깨달았음에도, 그게 진짜로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
뭔가 알 것 같다.
알 것 같기에 아쉽다.
내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난이 차랑하는 소리와 함께 불장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면 봐주지 않을 것이다. 각오는 되었는가?”
[그래……? 그러면 하나 부탁하지.]
“무엇이냐.”
나는 아난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문득 내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오레이칼코스의 팔은 잔뜩 우그러지긴 했어도 아직까지 형태는 제대로 남아 있었다.
‘결국 이것도 외물(外物)이 아닌가.’
성 수십 채에 맞먹는 가격을 지니고 있는 오레이칼코스의 팔을 쳐다보던 나는 왼쪽 팔을 들어서 힘을 주었다.
뿌드득…….
콰직!!
오레이칼코스의 팔을 뽑아낸 나는 그대로 아난에게로 내 팔을 던졌다. 탁하고 내 팔을 받아든 아난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졌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으니, 그 팔을 담보로 맡기고 내가 죽을 시기를 유예하고 싶다.]
“전생자가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그래. 어차피 이대로 싸워도 승산이 전혀 없군.]
승산이 없다는 건 진심이다. 눈앞의 아난은 설령 내 본체의 전력을 다 갖고 와도 이길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강적이었다.
“내게 이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네놈이 죽음을 유예하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라.”
뒤에 어떤 말이 생략되었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유가 아난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나는 즉시 이 자리에서 참살당할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공포심이 생기지 않았고 도리어 차분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사신지혼을 다시 쓸 수 있어. 그리고 그걸 다시 쓸 수 있다면 네게 이길 수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건가?”
[그래.]
“너의 지금 선택으로 이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말인가.”
아난에게 대꾸한 말은 약간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다시 무(武)를 수련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좋다.]
세상이 멸망하고 말고는 지금 내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뜻밖에 적인 아난이 내게 준 무(武)의 가르침!
그것을 다시 수련하여 하나의 경지를 이룰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수백 년 내내 기약 없이 좌절 속에서 쳇바퀴만 돌며 [벽]을 느꼈을 때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내가 더욱더 무예에 집착하도록 만든 것 같았다.
아난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고는 자기 손에 들려 있던 오레이칼코스의 팔에 힘을 주더니 그대로 박살 냈다.
푸콰콱!!
내 팔을 완전히 절단내버린 아난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생자여…… 네놈은 참으로 모순된 존재다. 일개 마라(魔羅)인 주제에 무도(武道)를 걷겠다 주장할 셈이냐? 허나 이미 신역에 발을 들인 걸 봤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군…….”
[…….]
“잘 들어라…… 내가 네놈을 살려줄 이유는 없다…… “
투쾅!!
다음 순간 아난이 엄청난 속도로 전진해오더니 내 명치에 일장(一掌)을 그대로 꽂았다. 장인(掌印)이 선명히 새겨졌고 내 강철몸뚱이가 크게 우그러진 게 느껴졌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내장이 터지고 뼈가 박살 내어 토혈을 했을 정도의 일격이었지만 강철의 몸이라 감흥이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찌리릿
[……?!]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대결하는 내내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라는 감각이 찌릿하고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익숙치(@지) 않은 고통 때문에 몸을 크게 비틀자 아난은 자신의 손을 떼며 말했다.
“팔식(八識)의 심법(心法)이 작용할진대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게 고통을 주는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단 말인가.”
……?!
팔식?
그러고 보니 라운이라는 놈도 나에게 식(識)을 일깨우는 능력을 써서 고통을 느끼게 했는데, 눈앞의 아난 또한 라운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보다…… 내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게 마음(心)이라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을 주는 것은 생물의 신경체계이며 물리적인 반응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근원이 되어 고통을 준다는 게 가능하다는 걸까?
‘아니…… 잠깐……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아수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수라! 정말 살기를 느꼈나?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져!]
[너는 아직 팔식(八識)에 온전히 자아를 담그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기라기보다는 더욱 원초적인 ‘낌새’ 같은 거지. 무언가가 분명히 우리에게 적의를 향하고 있다. 그 근원은 바로 저 태양이고.]
태양지계와 태음지계의 접촉면. 무생노모의 법문이 숨겨져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아수라, 천우진과 함께 도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살기를 아수라가 느낀 적이 있었다. 아수라의 살기감지능력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그 비법을 물었더니 아수라가 해준 대답이 저것이었다.
‘…… 아수라 또한 팔식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살기를 넘어선 ‘낌새’마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에 도달하려면 그의 말대로라면 팔식에 온전히 자아를 담가야 하는 것…….’
그러면 팔식에 자아를 담근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게 [마음]이 내게 고통을 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혼란 속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하나의 말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머리카락에 마음이 있나?]
[보통은 없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에게 마음이 생겼다는 건 머리카락에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니…….]
[길가의 돌멩이, 스쳐 가는 바람, 혹은 시간 그 자체에 마음이 생겼다는 것과 진배없네. 무생물에게 자연적으로 마음이 부여된 것과 같아.]
[가면]에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문스러워서 [가면]이었던 수보리에게 질문했을 때 그가 해준 이야기들.
분명 [가면]의 이야기는 신역의 무예와는 상관없을 텐데 어째서 그때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일까?
뭔가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때 나는 뭔가를 알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입을 잠시 뻐끔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후 말했다.
[식(識)이라는 건…… 생물과 무생물의 분간이 없이 존재하는 거란 말이냐?]
“…….”
내 말에 아난은 말없이 자신의 한쪽 손으로 반장(半掌)의 자세를 취하였다.
불존천왕수(佛尊天王手)
그러더니 다시금 출수(出手)하여 내 심장을 찌르려 했는데 마치 번개와 같은 속도였다. 무사시의 쾌검을 생각나게 하는 엄청난 속도에 나는 그대로 당하는가 싶어서 흠칫하고 말았다.
휘리릭
그러나 아난은 불존천왕수로 나를 끝장내지 않고 되레 출수를 도중에 멈추며 그대로 회수했다. 그러더니 냉막하게 말했다.
“네 스스로 내공도 의념도 쓰지 못한다 하였음에도 극쾌(極快)의 경지에 달한 불존천왕수의 속도에 반응한 것은 어찌 설명할 셈인가?”
[…….]
“너는 정말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의 한계에 얽매여 식(識)을 도외시하고 있느니.”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말했다.
“[가면]이란 마음 없는 존재…… 팔식(八識)을 깨달을 자격이 없는 존재…… 네놈도 그리 생각하는가?”
[…….]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석가세존께서는 내게도 불성(佛性)이 있다 일러주셨다. 나는 그분의 그 마음을 잊지 못하여 스스로를 분노로 채찍질하는 것이다.”
스스스…….
아난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닌지, 아난의 모습은 숨을 다섯 번 쉬기 전에 완전히 사라져 장내에서 없어졌고 그 대신에 그가 남긴 육합전성이 내 마음속으로 직접 들려왔다.
[마라여…… 3년 후에 다시 와라! 그때는 변명할 수 없는 패배를 안겨주마.]
이윽고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황량한 곳에서 멍하니 있다가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변명할 수 없는 패배라…….’
오늘 내 목숨 구걸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알고 놈도 알고 있었다. 사신지혼을 쓸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한껏 추한 몰골로 생을 도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난은 나를 놓아주었고, 이것은 그자가 가지고 있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의미했다.
내가 설령 사신지혼을 쓸 수 있더라도 자신이 무공만으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나는 그 자신감을 느끼자 지금 살아남은 게 기쁘기보다는 참담한 기분이 들어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먹을 꾸욱 쥐었다.
[젠장.]
사실 수련세계에서 그만큼 수련을 한 이후 내심 지상세계의 그 어떤 고수도 제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해(@차) 있었다. 그것은 롤랑을 비롯해 라운을 꺾으면서 사실이라는 게 증명되었고, 신역의 깨달음을 잘 응용하면 딱히 내공과 의념이 없어도 어설픈 자들을 패배시킬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진짜로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를 상대로는 정말 내공과 의념이 없어도 되는 걸까?
그건 아니라는 걸 지금 아난이 가르쳐준 것이다.
‘아난은…… 틀림없이 신역의 고수다!’
딱히 신역의 무공을 시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흐름]을 읽고 그대로 몰아치려 할 때 정확하게 회피하고 반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아난 또한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시전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내면에 불꽃이 들끓는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호적수라고 할 만한 상대를 만난 것 같다.
[두고 봐라, 아난.]
사신지혼만 쓸 수 있으면 널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마.
나는 이 순간, 진정으로 30번째 생을 마감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정처 없이 걷다가, 약 두 시진이 지나자 맞은편의 황량한 지평선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며 내게 아는 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 팔 없는 친구. 왜 그리 죽을상을 쓰고 있는가?”
나는 내게 아는 척하는 자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태공망……?]
그랬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태공망! 원시천존의 수제자이자 세상에 몇 남지 않은 고대선인급 대선인이었다.
태공망이 왜 여기 있지?
내가 뭘 잘못 봤나?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바로 자신을 알아본 게 신기한 듯 태공망이 껄껄 웃었다.
“남경성주 백웅이 천하제일의 기인(奇人)이라더니 듣던 것 이상이군. 설마 한눈에 나를 알아볼 줄이야.”
[…… 당신은 강동성(江東城)에 항우와 함께 세력을 일구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진 어쩐 일이시오?]
“언제나 술수를 이용해서 천지를 살피고 있던 중 엄청난 힘의 대결이 느껴지더군.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정찰을 나와봤는데 설마 이런 상황일 줄은 전혀 몰랐지.”
[그렇소.]
아마도 카필라 성에서 아난을 상대로 망량이 시해지술을 쓰고 비슈누 본체도 출동하며 심지어 아난이 대여래신장으로 나를 성층권으로 날려 버리는 등 난리를 치니 무슨 일인가 싶어서 태공망이 직접 나와본 듯했다. 나는 이런 장소에서 태공망을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약간 어이없는 웃음을 짓다가 말했다.
[그럼 이만 가 주시겠소? 길은 멀지만 나 혼자 가기에 충분한 길일 듯해서.]
“유감이지만 그럴 수는 없네.”
[……?]
스윽
그때 태공망이 타신편을 자신의 손에 들고 나를 가리켰다. 신급보패 타신편을 보자 내가 움찔하니 태공망이 말을 이었다.
“얌전히 나를 따라와 줬으면 좋겠네. 무력을 쓰고 싶지는 않으니.”
[…….]
파파팟
어느새 내 주변에는 무려 열두 명이나 되는 인영(人影)이 나타나 있었고 그들 하나하나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그 기운이 인간의 기나 술법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속으로 침음성을 내었다.
‘이건 성좌의 기운…… 그렇다면 이 열두 명은 양산박이구나.’
봉신혈주에 있던 고대의 인간들 또한 태공망의 인도아래 강동성으로 갔다더니 기어이 성좌의 재능을 개화한 모양이었다. 그 말은 나를 둘러싼 열두 명 모두가 상단전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선천능력자라는 뜻이었으니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잘 보니 태공망 또한 신급보패 타신편 뿐만 아니라 영수 사불상에 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어용 보패를 둘둘 두르고 있어서, 태공망 본인이 저렇게까지 중무장을 한 것은 아마 내 전생 동안 처음 보는 일이었다.
나는 태공망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강동성과는 변변히 얘기도 못 해봤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그쪽을 좋게 볼 수 없소.]
“누가 뭐라 했는가? 그냥 따라와서 얘기만 해보자는 말이지.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자네를 해할 일은 절대 없을 걸세.”
[납치하겠다는 말을 참 고상하게도 하는구려.]
“세상의 종말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수단 방법을 가릴 때겠는가? 나는 과거 봉신대전 때도 딱히 수단을 가리지는 않았다네.”
도저히 지금의 태공망에게서 과거 보았던 중후한 신선의 기풍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태공망이 나를 납치하려는 일에 진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내가 천하의 정세를 결정짓는 핵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리라.
[후회할 것이오.]
“어디 후회하게 만들어 보게.”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 태공망이 다른 한 손에 웬 포승줄을 들더니 내게 던졌다.
“묶어라, 곤선승(綑仙繩)!!”
촤라라락
십이대선인 구류손 대법사의 보패인 곤선승! 이 곤선승은 반인반신인 팽조를 수월하게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므로 잘못 대처하면 나는 한방에 제압당해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마치 하늘을 나는 뱀처럼 풀려서 날아오는 곤선승을 지켜보다가 재빨리 수법을 시전했다.
만상지투(萬像之偸)!
촤악 하고 곤선승이 내 팔을 타고 올라와서 감아 버리려 할 때 갑자기 그 기세가 멈추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곤선승을 [훔친] 나는 그대로 역으로 곤선승을 태공망을 향해 던졌다. 태공망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깜짝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촤아악
갑작스럽게 곤선승이 태공망과 사불상을 동시에 묶었다. 태공망은 예상 밖의 기습에 당황한 듯 잠시 허우적거렸고 태공망을 태우고 있던 영수 사불상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태공망 이 망할놈아! 아까부터 저 깡통이 힘을 다 쓴 것 같다 얕보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처음부터 타신편으로 작살 내고 시작하라니까…….]
“이놈, 사불상. 타신편 썼다가 죽어 버리면 어쩌라고. 그건 위력을 조절하기 쉽지 않단 말이다.”
[태극도 써서 봉인하면 되잖아.]
“복희 님이 내 신술을 봉인했다고 몇 번 말해야 하느냐.”
…… 어? 삼황 복희가 태공망의 신술을 봉인했다고?
의외의 정보에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사방에 있던 열두 명의 능력자들이 단숨에 나를 향해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나는 이번에야말로 도저히 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공과 의념만 쓸 수 있었어도 멸혼보를 써서 도망쳤을 텐데 신력과 마력조차 다 떨어지고 팔도 없는 이런 상황에선 대처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파앗!
바로 그때였다. 표홀하게 장내로 날아든 한 인영이 엄청난 속도로 나를 들쳐 업고는 그대로 창공으로 치솟았다. 갑작스러운 초절정의 상승신법에 능력자들은 예상치 못했는지 잠깐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 인영은 그대로 허공에서 두 번 발을 박차더니 더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콰아아
파지지직
뒤에서 불꽃, 번개, 무형의 화살 같은 기이한 초능력들이 날아왔지만 나를 구한 자는 허공에서 무려 몸을 열두 번이나 번신(飜身)하며 하나하나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나는 그 신법재주가 굉장한 수준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내심 놀랐다.
‘이 정도의 경신술 대가라니…….’
경공술을 쓸 줄 아는 자는 많지만 허공답보를 쓰며 번신까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고수는 강호에서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어디서 이런 고수가 출현했는지 몰라서 내가 어리둥절해할 때 나를 들쳐 업은 자가 말했다.
“정말 당신이 백웅이오? 팔도 한 짝 없는 비루한 모습의(@추가) 철인이 그 소을촌장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어? 이 목소리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정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나를 들쳐 업은 자는 흑색 두건을 두르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목소리를 잊을 수는 없었다. 나를 죽였던 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뭐…… 설마 너는……?!]
이놈의 정체가 내 생각대로라면 대체 왜 여기……?
“음!!”
투쾅!!
하지만 바로 그때 그가 등짝에 커다란 충격파를 한 대 얻어맞고는 땅에 빠르게 떨어졌다.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로 봐서는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추격해오던 자들 중 하나가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
“아무리 날고기는 신법을 쓸 수 있어도 자동추적 능력에는 당해낼 수 없지! 끝장이다.”
타다닷
그자가 환도를 들고 달려들자 흑색 두건의 사내는 나직이 말했다.
“초능력이란 건 참 치사하군.”
까앙!!
“크악.”
흑색 두건 사내의 허리춤에서 빠르게 섬광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환도와 함께 달려들던 양산박의 능력자가 튕겨 나가서 나동그라졌다. 찰나의 순간에 검강을 뿜어내서 단숨에 능력자까지 도살하려 했지만, 능력자가 자신의 초상능력으로 보호막을 쓴 탓에 그냥 튕기는 걸로 끝난 것이다. 나는 그 한 수를 보자 흑색 두건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정밀하고 빠른 쾌검…… 그것도 약점이 없는 경지…… 역시 저 녀석은.’
흑색 두건의 사내는 휘리릭 하고 다시 장검을 수발하며 중얼거렸다.
“갈고닦은 능력이 아닌데도 너무 강해…… 그러니 나 같은 살수(殺手)는 너희 같은 능력자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제한되어 있구나.”
스스스
흑색 두건의 사내가 자신의 장검에 기를 가득 모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모조리 한 방에 멱을 따 버릴 수밖에!”
흑야파천뢰(黑夜破天雷)
극성(極成)
흑월참룡검(黑月斬龍劍)!!
번쩍 - !!
다음 순간 강대한 천뢰(天雷)를 머금은 반월형의 검강(劍罡)이 선형(線形)을 그리며 출수되었다. 번개를 머금은 시꺼먼 기운은 잠시동안 검로(劍路)에 먹빛을 남기며 천지를 일필휘지(一筆揮地)하는 흑룡(黑龍)처럼 날뛰었고, 그 짧은 난동이 끝난 후 흑월참룡검의 위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털썩…… 털썩…….
흑색 두건의 사내를 추격하던 양산박의 능력자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기이한 점은 흑월참룡검에 당한 자들은 그저 몸에 기다란 흑선(黑線)이 그어져 있을 뿐 실제로 몸이 베이지 않았고 겉으로는 마치 기절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흑월참룡검의 검강이 가르고 지나간 흑선의 내부는 가닥가닥 끊어져 있어서 생명체라면 두 번 다시 회생이 불가능한 중상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한순간에 추적자들을 전멸시켜 버린 흑색 두건의 사내가 말했다.
“움직일 수 있겠소?”
나는 멀뚱히 놈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는 설마…… 소을(小乙)이냐?]
“그렇소.”
[…….]
나는 담백하게 내 질문에 대꾸하는 소을을 보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소을!
전(前) 흑야문 살수조장!
과거 초반부의 전생에서 내 모가지를 땄던 저놈의 목소리를 도저히 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을촌에 거둬들여서 무공을 가르치게 한 후에는 그다지 놈의 행적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설마 이런 장소에서 만나게 되다니!
[살수조장…… 아니 소을.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
내 말에 소을은 왠지 고소를 머금는 것 같았다.
“이제 사람들은 흑야문 살수조의 과거조차 거의 모르는데 그걸 헷갈리다니…… 본인이 맞긴 한 모양이구려.”
[…….]
“걱정 마시오. 과거 당신이 대련을 빙자해서 나를 떡이 되게 패고 외양간 청소시킨 걸 복수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이크. 이 자식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속으로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움찔하다가 반문했다.
[그럼?]
“망량이 지시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서 도우러 움직였소. 나는 그중 한 명일 뿐이오.”
소을의 말이 끝나는 그때였다.
파앗!!
갑자기 공간이동의 술수와 함께 우리 앞에는 태공망이 사불상을 타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언제 곤선승을 풀었는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나타난 태공망은 타신편을 우리 쪽으로 겨누며 말했다.
“조력자가 하나 늘어난 모양이지만 그것뿐. 순순히 항복한다면 다칠 일은 없을 것이오.”
[…….]
이거 정말 큰일 났네…….
눈앞의 태공망이 실제로는 얼마나 강자인지 알고 있는 나는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실상 준신급 존재라 할 수 있는 태공망을 상대로 인간 무림인이 얼마나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도저히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소을은 자신의 장검을 거머쥐며 나와 태공망 사이를 가로막았다.
“백웅을 데려가려면 나부터 넘어야 할 거다.”
태공망은 그런 소을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생을 그리 원하지는 않네만…… 인간계의 강자여, 그대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가?”
언뜻 오만해 보였지만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원시천존의 수제자인 태공망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는 것이다. 과거 달기조차 봉인했으며 봉신계획의 수행자인 태공망에게 한낱 인간 무림인이 덤비는 건 당랑거철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하늘 높은 줄을 모르냐고?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그러자 소을은 씩 웃으며 태공망에게 덤벼들었다.
“내가 아는 하늘은 진소청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