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7화
크리슈나는 내 말에 당혹한 듯했다. 그가 항변하듯 말했다.
“계약서를 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대에게 전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이미 표시했고, 혈맹이 될 마음이 있다. 이제와서 그대가 우위에 있음을 이야기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나는 그 말이 고개를 저었다.
[전적으로 협력한다는 게 말은 좋지만 결국 구체적으로 뭘 해줄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잖아. 계약서에도 주로 자원이나 병력의 지원이 적혀 있었는데, 사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건 알 텐데.]
“무슨…….”
쿵!!
나는 위협하듯 발을 크게 굴러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크리슈나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 내가 갑이다. 나는 네가 언제든지 내놓을 수 있는 하찮은 게 아니라 정말 중요한 걸 얻고 싶다.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겠나?]
내가 경험이 없고 어수룩했다면 천축세력의 호의적인 제안에 금세 녹아내려서 아무생각없이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험이 많았고 크리슈나가 무척 음흉해서 결코 보이는 대로 순순히 다 내놓을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계약서에 잔뜩 적혀 있는 ‘이득’이라는 건 사실 신적 존재인 크리슈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내놓을 수 있는 하찮은 물건들이기에 나는 더욱 중요한 걸 받아내야만 한다. 그게 지금까지 전생경험에서 도출된 내 결론이었다.
크리슈나는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원하는 게 있다면 최대한 그대의 요구를 들어주지.”
[원하는 거라…… 나한테 먼저 물어보는 게 건방지군.]
“뭐?”
나는 씩 웃었다.
[네가 먼저 제시해라!]
내 선제시 제안을 받은 크리슈나는 한층 더 고민하는 기색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쪽에서 제안을 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내게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식이 되면 내가 이득을 볼 확률이 크게 올라갔다.
크리슈나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모르겠군…… 그대는 향후 삼황오제를 넘어서기를 원하는 건가?”
[내 목적까지 네가 알 건 없다. 그냥 네 성의를 보여라.]
“…….”
크크크. 이게 가장 까다로운 요구라구.
내가 내심 득의양양해서 웃고 있을 때 크리슈나가 말했다.
“전투의 화신 아르쥬나를 무제한으로 너희의 전투에 제공하도록 하지. 이 조건은 어떤가?”
[호오.]
나는 꽤 끌리는 제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투신 아르쥬나!
비슈누의 또 다른 화신이며 전투를 담당하는 아르쥬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과거 대웅제국의 절대지경 고수들을 손쉽게 패대기친 데다가 신의 화신으로서 지니고 있는 권능까지 생각하면 아르쥬나를 무제한으로 대여할 수 있다는 건 무척 매력적인 얘기였다. 특히 항우가 있는 강동성과 앞으로 다툴지도 모르는 걸 생각하면 꽤나 생각해볼 만 하다.
그러자 내 곁에 시립해 있던 망량이 내게 말했다.
“별로구려. 전력(戰力)은 우리도 많으니 좀 더 창조적인 대가가 필요하오.”
[음, 아르쥬나는 꽤 셀텐데…….]
“이 남경성에 모인 게 천계의 전력 중에 절반에 가깝소. 신의 아바타인 아르쥬나 하나 있고 없고가 그리 아쉽진 않을 거요. 투신 아르쥬나는 강하긴 하지만 이만한 단위의 거대세력이 부딪힐 전장의 판도 자체를 뒤바꿀만한 존재는 아니오.”
[그렇군.]
망량의 조언에 내가 납득하자 크리슈나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망량의 조언 때문에 자신이 부담해야 할 몫이 커졌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그런 크리슈나의 태도가 왠지 꼬왔기에 시비를 걸었다.
[이봐. 교섭하기 싫어? 싫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꺼져!]
“……잠깐만. 너무 급하게 나서지 말라. 내게 제시를 하라고 해도 그대의 목적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자꾸 이야기가 겉돌지 않는가?”
[그걸 생각하는 게 네 일 아니냐? 머리를 쓰는 계교의 화신이라지만 그럴 머리는 없나 보지?]
“…….”
크리슈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내가 비협조적이라는 걸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망량이 톡하고 내 어깨를 쳤고, 그게 너무 압박해서 아예 회담을 파탄 내지 말자는 의견이라는 걸 눈치챈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일단 내가 원하는 것부터 알고 싶군. 네 녀석은 이 질문에 솔직히 답해야 할 거다.]
“그 정보를 주면 동맹을 하겠단 건가?”
[아니. 당연히 생각해보겠단 거지. 줄 건 따로 줘. 어디서 날로 먹으려 해?]
“……좋다. 어떤 질문이든 해 보아라.”
나는 크리슈나와의 관계에서 갑이 된 상황이 기분 좋아서 내심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크리슈나…… 아니 비슈누. 너희는 분명 사대신수 봉황한테 지구를 침략하는 [옛 지배자]들을 물리치면 [계시]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받으리라는 정보를 듣고 그의 임무를 진행하고 있었지. 근데 왜 그 임무를 내팽개치고 황제 따까리나 하고 있는 거냐?]
탁록시대에 만났던 천축 삼대신의 상태와 지금 삼대신의 상태가 너무 달랐다. 봉황이 삼대신에게 줬던 임무가 어떻게 되었길래 이 꼬라지가 된 건지 알아봐야만 했다.
“……?!”
크리슈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걸 말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
그는 눈에서 신광(神光)을 흘리며 나를 경계했다.
“그건 우리 셋만의 비밀…… 백웅 너는 대체 무엇이길래 그걸 알고 있느냐? 설마 봉황의…….”
[질문은 내가 했어. 대답이나 해라.]
“……그만큼 알고 있다면 숨겨봤자 소용없겠군. 그 임무를 진행하다가 브라흐마가 시공의 저편으로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우린 결국 타계의 지배자들에게 패배했고, 되돌아올 브라흐마가 있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황제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그랬던 건가. 브라흐마는 결국 아직도 안 돌아왔단 말이지?]
“…….”
[근데 크리슈나…… 난 사실 브라흐마가 어딨는지 알고 있어.]
쿵!!
그 순간 크리슈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격앙과 흥분이 담겨 있었고, 평상시의 냉정함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크리슈나가 핏발 선 눈으로 외쳤다.
“정말이냐!! 브라흐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그래.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다. 브라흐마가 있는 곳을 알아.]
“……!!”
나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턱을 괴었다.
[자아…… 내가 더 갑이 되었군. 이제 네가 뭘 내놔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냐?]
“우리가 커다란 손해를 볼 정도의 대가를 내놓길 원하는군…….”
[아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
“…….”
크리슈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말했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브라흐마의 일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다. 네가 정보를 이용해서 우리를 현혹한다면 너무 위험한 일이다.”
[내가 갑이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못알아들었냐?]
크리슈나가 잠시 후 포기한듯 한숨을 푹 쉬더니 항복했다는 듯 두 손바닥을 내미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말 안 되겠군. 그냥 네가 우리에게 대가를 제시해달라.”
[엉? 건방지게…….]
“그토록 우리에 대해 잘 안다면 우리가 뭘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알 것 아닌가? 네게 전적으로 협조해야 할 이유도 생겼으니 정말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을 제외하곤 뭐든 들어주겠다.”
[흠.]
아까와는 태도가 달라진 느낌이다. 나는 이제 좀 얘기를 할 만하다고 생각하며 천축 삼대신에게서 뭘 뜯어내야 잘 뜯어냈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다.
‘투신의 무제한 협력보다 훨씬 좋은 거……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거…… 나한테 지금 필요한 건 신력인데.’
신력? 천축 삼대신?
그 순간 나는 과거 탁록시대에 겪었던 기억이 생각났고, 즉시 크리슈나에게 외쳤다.
[…… 칼파!! 신전도시 칼파를 나한테 줘!]
“……?!”
[그거면 만족하겠다. 칼파에 10개나 되는 천상윤회옥(天上輪回玉)도 갖고 있겠지? 그거 싹 다 내놓으라고.]
“뭐, 뭐라고…….”
크리슈나는 뜻밖의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눈치챈 듯 말했다.
“천상윤회옥…… 그렇군. 네게 필요한 건 신력이구나.”
[엉.]
천상윤회옥!!
그 희귀한 절세보물의 능력은 바로 인간들의 신앙을 얻어서 신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지금 나도 신앙을 신력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건 아주 기초적인 단계일 뿐이야. 실제로는 천상윤회옥처럼 힘을 변환시켜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모르긴 해도 천상윤회옥을 쓰고 안 쓰고는 신력의 흡수율에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내가 신앙을 신력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저 삼대신 놈들도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천상윤회옥을 만든 건 그런 이유일 게 분명하다.
생각해보니 신전도시 칼파를 유지하던 천상윤회옥이야말로 지금 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인 것이다.
몇 배나 빠른 신력의 회복!
천상윤회옥을 얻는다면 그게 가능해진다.
크리슈나가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다.”
[뭐라고?]
“천상윤회옥은 우리에게도 무척 중대한 보물이다. 신력 그 자체를 강화 회복시켜주는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가치가 있다. 시바 또한 그리 생각할 게 분명하기에 함부로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원래 성질대로라면 괘씸해하면서 여기서 동맹은 끝이라고 내쳤으리라. 하지만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물었어.’
뭐든지 내놓을 것처럼 호의적으로 굴던 놈이 이것만은 안 된다고 정색을 한다는 것.
그것은 천상윤회옥이야말로 이번 교섭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성과라는 게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그걸 깨닫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크리슈나! 내가 브라흐마가 어딨는지 안다는 것은 결국 그를 만나보았다는 뜻이 아니겠냐?]
“…….”
[잘 보아라. 네가 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금부터 가르쳐줄 테니.]
나는 살짝 눈을 감으며 정신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우우 -
그러자 정신세계의 한가운데에 시뻘건 보석이 박혀 있었고 세 개의 영역이 나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예전에 내 힘이 왕성했을 때와 비교하면 마치 대궐과 초가집을 비교하듯 그 규모가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내 신력이 쥐똥만큼도 안 되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이건 힘이 아니라 기술이니까 상관없어.’
나는 보석을 중심으로 갈라진 세 개의 영역에 각각 다른 속성의 신력을 배치했다. 원래 몸이 아니라서 본래 갖고 있던 다양한 신력의 근원은 아니었으나 사실 이 기술은 살짝 원래의 신력에 가공만 해주어도 다른 속성으로 인식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트리무르티(三位一體)!]
쩌엉!!
잠시 후 내 손의 앞에 찬란한 보석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딱 한손에 쥘만한 크기의 그 육각모양 보석은 새하얀 빛을 내뿜고 있었고, 나는 그 보석을 그대로 크리슈나에게 주었다.
크리슈나는 홀린 듯이 보석을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크리슈나에게 말했다.
[트리무르티로 천상윤회옥을 제작해봤는데 어떠냐?]
물론 지금은 내 힘이 완전 쥐똥만해서 최대한 노력해도 저 크기밖에 못 만들지만…….
‘과거 천상윤회옥을 단숨에 몇 개씩 제작해서 날려대던 때와 비교하면 초라하군.’
내가 내심 씁쓸해하고 있을 때 크리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럴 수가…… 정말로 트리무르티를……?! 그리고 천상윤회옥을 제작했다는 건…… 이건…… 진짜인가…….”
[진짜라고. 내가 브라흐마한테 직접 배운 기술이다.]
“…….”
잠시 후 크리슈나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웅이여. 정말 그대에게 칼파와 천상윤회옥……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모든 협력을 한다면 브라흐마의 행방을 알려줄 수가 있는가?”
[약속하지.]
“좋다. 나는 그대를 믿을 수밖에 없겠구나.”
크리슈나가 말을 이었다.
“칼파는 옛날에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부서져서 사라졌다. 천상윤회옥 또한 그러하지만…… 방법이 있다.”
[무슨 방법인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세계 각지에 있는 영산에 천상윤회옥을 하나씩 숨겨두었다. 제단에 주문을 외우면 해방되게끔 되어 있지. 유사시에 쓰려고 숨겨둔 건데 총 3개가 있으니, 그거라도 좋다면 너희에게 주겠다.”
[그중에 영산 바할랏사도 포함되겠지?]
“……!! 다 알고 있군. 그래, 나머지 영산의 위치도 가르쳐주겠다.”
[좋았어. 원래 칼파에 있던 건 10개였을 텐데 부족하긴 해도 3개라도 뭐 상관없겠지.]
“…….”
크리슈나는 질린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칼파에 있던 천상윤회옥의 갯수까지 알고 있으니 내심 섬뜩하리라. 하지만 예전에 칼파에 직접 가서 수보리와 함께 천상윤회옥으로 보호받는 칼파의 결계를 직접 뚫어보았던 나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천상윤회옥에 대해서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근데 천상윤회옥으로 신앙을 흡수하면 인간들이 용족 같은 걸로 변이하는 현상이 생기잖아? 그건 어떻게 억제할 방법 없냐.]
“……그건 고대유적의 문헌에도 안 적어둔 내용인데 알고 있다니 정녕 놀랍군.”
크리슈나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건 신앙의 흡수능력이 너무 좋아서 인간의 본질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3개 정도로는 그 현상이 안 생길 것이다.”
[확실해?]
“그렇다.”
[좋아. 그건 그거고 이제 앞으로 너희는 우리가 요구할 때 무조건 전력을 다 내놔야 해. 횟수 제한 따위는 없다. 다른 보물도 내놓으라면 다 내놔.]
“…….”
[그리고 나중에 우리 대신에 삼황오제 앞으로 가서 교섭할 때도 무조건 튀어나와라. 그 정도는 되어야 동맹인 거다. 알겠냐?]
“……보통 그런 걸 동맹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나…… 알았다. 그렇게라도 브라흐마의 행방을 알 수 있다면.”
[흐흐. 잘 처신하라고.]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저놈들이 딴마음을 먹으려 해도 브라흐마의 행방 때문에 나를 배신 못 하겠지.’
다른 잡다한 건 둘째치고 브라흐마의 행방이야말로 남은 천축 삼대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일일 것이다. 저놈들은 셋이 하나로 모였을 때 가장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크리슈나는 물론이고 천축에 있을 시바 또한 내게 목줄이 잡힌 것과 마찬가지다.
크리슈나는 우울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 정녕 무서운 자로군. 오늘은 탐색이나 하러 온 거였는데 이토록 털리다니…… 그대가 이런 자인 줄 알았다면 이 근처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 마라. 너희가 허튼짓하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니까.]
“…….”
크리슈나가 저만치 있던 나레쑤언에게로 가서 뭔가를 얘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쯤 강림해 있던 파르바티의 강신도 풀렸는지 사와스바티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약 반 각이 지난 후 나레쑤언이 내게로 오더니 말했다.
“백웅이여. 우선은 계약서에 서명해 주시오. 인간의 일을 먼저 마무리한 후에 신의 일을 진행할 수 있지 않겠소?”
[흠. 조건은 바뀐 게 없겠지?]
“그렇소.”
나는 나레쑤언과 마주 앉아 계약을 마저 진행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일이 마무리되자 나레쑤언이 계약서를 챙기며 말했다.
“어차피 이 세상이 신의 손에 놀아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대는 그런 신조차도 마음껏 농락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려.”
[응?]
나레쑤언은 나를 감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인간적으로 감탄했소. 부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쿵 쿵 쿵…….
잠시 후 나레쑤언과 사천왕을 비롯한 천축의 인물들은 다 같이 영수를 타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비아탄의 몸뚱이 또한 육중한 굉음을 내며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일련의 퇴각과정이 끝나자 우리가 있던 자리에 남은 크리슈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따라오라. 천상윤회옥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파앗!!
나는 크리슈나를 따라서 망량을 동행시켜서 순간이동했다. 그리고 어두운 유적의 제단에 도착하자 크리슈나가 말했다.
“이곳이 우리가 과거에 방치했던 쿠룩셰트라 신전이다. 이곳에 하나가 있고.”
우우웅
크리슈나가 주문을 외우자 제단 밑에 있던 거대한 빛의 옥(玉)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옥을 크리슈나가 망량에게 넘겨주자, 망량은 수납술법으로 천상윤회옥을 집어넣었다.
파앗
“여기는 카필라 신전이다. 여기에 하나가 있다.”
우우웅
나는 또다시 주문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천상윤회옥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마지막 1개는 유세비크 신전에 있겠지?]
흠칫
“그걸 어떻게…….”
[그냥 그럴 거 같아서.]
아수라가 일족 대대로 지켜오던 전설의 초고대 신전, 유세비크. 그곳은 결코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고 엄중한 결계의식으로 지켜지는 곳이었으며 천축 고대의 비밀을 담고 있었기에 틀림없이 유세비크가 천상윤회옥이 있을 만한 장소라 생각했고, 크리슈나의 반응에서 그게 진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유세비크 신전은 원래 아수라를 영입하러 가는 곳이었는데 이로써 다음 회차에 여기에서 얻어야 할 물건이 1개 더 늘었군.’
내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해방의 주문은 내가 외웠소. 좀 있다 당신에게 알려주리다.”
[잘했소.]
“그럼 다음 장소로…….”
그렇게 말하던 망량이 문득 흠칫했다.
“……거기 누구요?”
그 말에 우리 셋의 이목이 카필라 신전의 어둠 속으로 향했다. 제단 근처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기둥 뒤편은 무척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서서히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뜻밖에 모습을 드러낸 괴인이 나직이 말했다.
“이방인들이여. 석가모니께서 입적하신 곳이 바로 이 카필라였다. 그대들은 어찌 함부로 불가(佛家)의 성지(聖地)에 발을 들였는가?”
짤랑…….
괴인이 들고 있는 건 기다란 불장(佛杖)이었으며 그가 입고 있는 것은 투박하고 헐렁헐렁한 가사였다.
‘승려인가?’
그렇지만 그 복장이 온전히 중원의 것은 아니었고 천축의 양식이 반영되어 있었기에 참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괴인에게서는 별다른 기운이 풍겨 나오지 않았으며 딱히 고수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얼굴이 안 보여…….’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건 그의 복장뿐. 몇 발자국만 앞으로 나오면 보일 것만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이상하게도 저 어둠은 꿰뚫어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신전 최심부 제단으로 순간이동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존재가 결코 평범한 자일리도 없다. 나는 승려를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고, 망량은 그 괴인에게 놀랍다는 듯 말했다.
“석가모니의 입적은 보리수나무 아래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카필라 성이었단 말이오?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카필라 성은 분명 석가모니가 탄생한 장소일 터인데.”
“그렇다. 석가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입적하셨다 알려졌지만, 진정한 생몰(生歿)은 이 장소였느니라. 너희는 신성한 장소를 더럽히고 있구나.”
“흐음…….”
망량은 곤란한 듯한 침음성을 내었고, 크리슈나가 나서서 껄껄 웃으며 그를 비웃었다.
“하하하…… 신성하다라? 석가모니가 위대한 자인 건 인정하지만 그는 본디 인간이었다. 진짜 신(神) 앞에서 그런 자가 신성하다는 말을 쓰는 건 참으로 언어도단이구나.”
그 말에 승려가 크리슈나 쪽을 주시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승려의 안광에서 상당한 살기가 일렁이며 강하게 크리슈나를 쏘아보았다.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인가. 너 따위가 감히 불법의 세존을 능욕하는가?”
“…….”
그 말에 크리슈나의 눈빛 또한 달라졌다.
크리슈나를 모르고서 도발한 게 아니라 모든 정체를 알고 도발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역시 심상치 않은 놈이다. 한눈에 크리슈나의 정체를 간파하고도 모자라…… 위압당하지 않다니.’
크리슈나가 비슈누의 전투용 화신이 아니라지만 화신이라는 것 자체로 대라신선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였다. 그런 크리슈나를 알면서도 도리어 불경에 화를 낸다는 건 특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승려는 뭐지?
저벅
승려가 어둠 속에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천천히 말했다.
“석가세존이시여. 이 불민한 제자가 늘 그대께 범한 죄를 후회하며 참회하고 있었나니…….”
승려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 승려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또한 그 가면의 밑으로 선명하고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승려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이다.
“세존에 대한 불경을 징치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가면의 승려가 그렇게 말하며 크리슈나 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번쩍!!
다음 순간 크리슈나의 몸에서 거대한 뇌전(雷電)이 튀었고 크리슈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쿠르르르……!!
강렬한 뇌염에 불타던 크리슈나는 잠시 후 소멸되어 사라져 버렸다.
“……!!”
[뭐…… 뭐야.]
아무리 크리슈나의 전투력이 크지 않다지만 그래도 웬만한 신선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게다가 신의 화신으로서 갖고 있는 주문저항력이 어마어마하기에 주문만으로 크리슈나를 쓰러뜨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크리슈나를 손짓 한 번으로 태워 버릴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승려가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불경한 자들이여…… 열반(涅槃)을 누리게 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