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6화
식이 트여 있는 존재?
내가 의아함을 느끼고 다시 라운에게 질문하려고 할 때였다. 뒤편에 있던 다른 사천왕 중에서 한 명이 크게 외쳤다.
“지국천! 잡담은 그만하고 이제 돌아오게. 백웅은 이제 사천왕 중 둘을 상대했으니 이제 우리 둘을 상대할 차례이지 않은가?”
그러자 지국천 라운은 뒤를 돌아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광목천(廣目天)이여! 증장천 브리트라와 내가 백웅에게 속절없이 패하였으니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소. 이런 강자를 상대로 더 시험하려 드는 건 무례함일 뿐이니 여기서 시험을 멈춥시다.”
하지만 광목천은 지국천 라운의 제안을 들었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강자라. 그렇다기엔 아직 백웅의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 힘의 근원이 애매모호하지 않은가? 나는 좀 더 그를 시험해보고 싶다네.”
“고집이 강하구려. 의미 없거늘.”
뜻밖에 단호하게 거절당하자 라운은 약간 곤혹스러워 보였다. 동급에 있는 존재가 제안을 거절하면 라운으로서는 더 밀어붙이기가 힘든 것이다.
나는 슬며시 광목천이라고 불린 상대를 쳐다보았다. 새하얀 천을 옷처럼 두르고 있는 데다가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기에 전형적인 술법사로 보였다. 게다가 체구가 작은 것으로 보아 절대 성인의 육체는 아니었고 어린아이의 몸으로 보였는데 아마도 진짜 모습은 아닐 것이리라.
‘어? 저 지팡이는…….’
그런데 나는 광목천의 지팡이를 보다가 기시감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어디서 봤는데…… 저거 분명 내가 본 지팡이인데…….’
어디서 봤더라?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저 지팡이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깜짝 놀랐다.
[……!!]
뭐야?! 내 기억대로라면 저 지팡이는 분명……!!
나는 놀라고 있다가 이윽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몰랐으면 모르되 이제 그 정체를 알았으니 나는 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국천 라운의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광목천에게 말했다.
[당신이 사천왕인 광목천이오?]
“그렇소.”
[이름이 무엇이지?]
“나는 광목천일 뿐 속세의 이름은 이미 버린 지가 옛날이오.”
나는 그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그럼 내가 이름 하나 추천해 주지. 광성자(廣成子)는 어떻소?]
“……!!”
[마침 글자도 비슷하군.]
“뭣이…….”
그 순간 광목천이 흠칫하며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광목천 외의 사천왕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지 어리둥절 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 확신하고 있다.
‘저 지팡이는 틀림없이 광성자의 지팡이(杖)다! 전생하면서 몇 번이나 봤으니 헷갈릴 수가 없어! 여기서 뜬금없이 나올 줄은 몰라서 기억을 뒤져야 했지만…….’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천축사천왕 중 광목천이란 놈이 광성자의 지팡이를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곤륜십이선(崑崙十二仙) 중 하나인 광성자의 정체를 생각하면 일목요연했다.
‘광성자는 곤륜십이선이지만 동시에 강대한 신(神)의 화신(化神)이었다. 그 정체를 드러내면 여와나 복희조차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 저놈의 진짜 정체는…….’
동시에 왜 그의 화신이 이 자리에 와 있는지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저놈은 광성자일 때도 평범한 척하면서 세상을 속이다가 중요할 때 휙 하고 끼어들어서 관여하는 게 취미였다. 사천왕에도 끼어들어서 천축세력이 위험하게 되면 수호신처럼 등장해서 막아주는 역할을 하리라.
광목천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듣던 대로 보통이 아니군. 그 신력(神力)을 다루는 재주만 보아도 인간의 영역은 한참 전에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지금 날 평가해서 어디 써먹겠다는 거요? 나는 대충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 간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시오.]
“…….”
그러자 광목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사천왕은 당신을 인정하오.”
광목천의 말에 반응한 것은 그의 옆에 서 있던 마지막 사천왕이었다. 장대한 체구에 신족(神族) 특유의 영기어린 구름을 몸에 휘감고 있던 그 천축의 전사(戰士)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광목천!! 네가 인정했어도 나는 아직 백웅을 인정 안 했다. 나는 한 번 싸워봐야겠다!!]
“비사문천(毘沙門天). 그만두시구려.”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만둘 거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다!!]
츠츠츠츠!
비사문천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철창이 강대한 신기를 머금고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비사문천도 본격적으로 신력을 사용하는 하급신이라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맙소사. 순수하게 힘의 급수로 따지면 사천왕 중에서 비사문천이 제일 강하겠군. 하급신이나 되는 놈이 겨우 일개 종교의 호법사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신족답게 자존심도 무척 강해서 나를 상대로 자기의 힘을 시험하고 싶은 욕망이 뻔히 보였다. 비사문천이 전투태세를 잡자 나도 마주 싸울 준비를 했는데, 그 순간 광목천이 눈을 빛내면서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퉁 하고 내리쳤다.
“신족이라서 그런가 말로 해서는 안 듣는군.”
키잉 - !!
기묘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빛의 파장이 터져 나가서 천지를 빠르게 한 번 휩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달려들려고 하던 비사문천은 그대로 황금빛의 금상(金像)이 되고 말았다.
쩌엉!
[아앗.]
“저런.”
기습이라지만 단숨에 비사문천을 황금상으로 만들어서 제압해 버린 광목천을 보고는 나머지 두 명의 사천왕들이 놀라서 소리를 터뜨렸다. 동료끼리 공격할 줄은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사건을 일으킨 광목천은 태연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천왕의 시험은 끝났소. 이제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나는 광목천의 행동을 보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하하. 부랴부랴 번갯불에 덴 것처럼 수습하는 것을 보니 어이가 없군. 당신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게 그렇게 민망한 일인가?]
“…….”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의 유희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소. 일단은 나레쑤언과 이야기하겠지만 당신은 나와 기탄없이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오.]
“생각해보겠소.”
나는 사천왕을 등지고는 시험을 구경하고 있던 나레쑤언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흑태자 나레쑤언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흥미로워져서 말했다.
[뭐가 그리 놀라운 거지?]
“……사천왕의 시험에서 보여준 귀공(貴公)의 무위가 정녕 놀랍소.”
[아닌 것 같은데. 사실 당신도 광목천의 정체를 짐작한 게 아니오?]
움찔
나레쑤언은 최대한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신체의 미묘한 반응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나레쑤언 또한 광목천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걸 내심 확신하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쪽의 시험을 다 통과했소. 이젠 파르바티의 현신을 보아서 당신네들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소이다.]
“…….”
[파르바티가 현현한다면 나는 그쪽이 진심이라는 걸 인정하고 조약을 맺어주도록 하지. 시험까지 통과해줬는데 이제 와서 딴말하진 않기를 바라오.]
“물론이오.”
나레쑤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시선을 향했다.
“스와스바티. 해 주시오.”
“알겠사옵니다.”
잠시 후 흑태자 나레쑤언의 황후이자 브라만교의 무녀인 사와스바티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눈을 감고는 주문을 외우며 합장했다. 그러자 신령스러운 빛이 그녀에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려서 사와스바티를 때렸다.
쿠구궁!!
그 거대한 기둥 속에서 사와스바티의 전신에는 신력이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와스바티는 선명한 백광(白光)을 머금은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백웅이여. 제가 바로 브라만교의 교주인 파르바티입니다.”
[그대가 파르바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브라만교의 교주이자 파괴신 시바의 반려인 파르바티!
이름만 들었던 그 존재를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전생을 오래하다 보니 소문만 듣던 놈도 만나게 되긴 하는군…….’
파르바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을 보니 상당히 강해 보였다. 무녀의 몸으로 낼 수 있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지간히 강한 것으로 보아 파르바티의 본체 또한 상위신급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나는 파르바티에게 말했다.
[파르바티. 당신네가 가져온 조약이라는 건 너무나 우리 쪽에 유리하게 되어 있었소. 그렇게까지 생면부지인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는 건 진짜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방금 전에는 사천왕을 시켜 나를 시험하려 들었으니 나는 솔직히 당신에게 그리 좋은 감정이 없소이다.]
내 말에 파르바티는 미안한 듯 내게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당신에게 불쾌감을 주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백웅이라면 저희로서는 과거에 맺은 불가침조약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불가침조약!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맞아, 분명히 예전에 천축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나는 진국준의 몸을 빌린 파괴신 시바에게 내가 전욱의 화신인 척하면서 교섭을 걸었다. 그리고 깜빡 속아 넘어간 시바는 나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서로 합의가 되었군. 이 자리에서 천축 삼대신과 중원 삼황오제의 인중(人中) 불가침조약이 추가로 맺어졌음을 선언하겠다. 후후!]
시바가 그렇게 선언했으니 당연히 시바 휘하의 모든 천축세력이 중원침공을 그만두었고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 저놈들은 그때 자기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고, 그 주체가 바로 ‘백웅’인 나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시험하며 불가침조약을 운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되었으니 불가침조약이고 뭐고 별로 의미 없는 거 아니겠소?]
내가 말을 얼버무리려 하자 파르바티가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속인 것은 괘씸하지만 그 후에 알아보니 당신은 삼황오제조차 정체를 모르는 귀인(貴人)이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과 맺은 불가침조약이 앞으로 우리가 친해질 수 있는 인과율이라고 여기기로 한 것입니다.]
[…….]
[이제 와서 중원을 침공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 사실입니다. 이제 곧 전 세계의 신(神)들이 직접 겨루어 전쟁을 하는 시기가 찾아오겠지요. 그때가 되면 하나라도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
스윽
파르바티는 내게 섬섬옥수를 내밀며 말했다.
[백웅이여. 천축의 삼대신과 저는 당신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부디 이 손을 잡아 혈맹(血盟)을 맺어주십시오.]
[음…….]
[우리는 마치 의형제처럼 당신에게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천축과의 혈맹이라?
나는 파르바티가 진심이란 걸 알고 고민하게 되었다. 이건 뭔가 책략이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나를 비장의 수로 여기고 영입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아마 그들은 나를 손에 넣는다면 앞으로 삼황오제나 기타 강력한 신들을 상대로도 유리할 거라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나는 판단이 서지 않아서 옆에 있던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어쩌는 게 좋겠소?]
“고민할 이유가 있소? 천축이라는 거대세력이 당신의 편에 선다면 앞으로 삼황오제가 직접 우리를 공격해와도 싸워 볼 만하오. 나는 도리어 당신이 망설이는 이유를 모르겠소.”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저놈 때문이지.]
나는 파르바티의 뒤편에 있는 사천왕, 그중에서도 지팡이를 들고 있는 광목천을 노려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광목천은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고, 망량은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정 그렇다면 그냥 본인을 이 자리에 불러냅시다. 꼭두각시의 장난질로는 당신과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위대한 신이라면 이해했을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파르바티여?”
역시 머리가 좋아서인지 내 말을 이해한 망량이 은근슬쩍 파르바티를 부르자, 파르바티가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이제 나와주십시오,]
쿠르르르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뇌운이 맺혔다. 그리고 꽈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번개가 광목천이 있던 자리에 떨어져 내렸고, 그와 동시에 광목천의 몸이 크게 타들어 갔다. 화르륵 불타고 있던 광목천의 몸은 잠시 후 빛의 형상으로 화했고, 그 자리에서는 완벽하게 환골탈태한 듯한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척 선해 보이는 인상의 미청년 - 하지만 나는 그 자를 전생하면서 몇 번이고 보아왔기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 이렇게나 망신을 줘야만 모습을 드러내다니 음흉하기 그지없구나.]
내 말에 크리슈나는 뭔가 포기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일부러 그대를 기만하려 한 건 아닐세. 그저 그대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었을 뿐…….”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나?]
“아니. 알았다고 생각했더니 더 수수께끼가 깊어졌군. 확실한 건 그대가 내 억겁의 삶에서도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특이한 존재라는 것일세.”
그렇다.
사천왕 광목천의 정체는 바로 광성자이며 크리슈나이며 천축의 삼대신인 비슈누!
비슈누는 무려 열 명이 넘는 화신을 갖고 있었으며 광목천 또한 그 화신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지팡이가 같다는 걸로 광목천의 정체를 눈치채니 비슈누의 정체까지 손쉽게 눈치챌 수가 있었다.
크리슈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대체 삼황오제와 어떤 관계인가? 삼황오제 중 그 누구도 그대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인과율이 심오하게 얽혀 있어서 그대를 함부로 건드리기조차 껄끄러워하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크리슈나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보통 일이 아니면 어쩌겠다는 것이지? 말했듯이 나는 그다지 그대들과 혈맹을 맺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더 이상 탐색하려 들지 마라. 싫으면 그냥 가면 될 것이다.]
“이런…… 우리를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틀림없이 그대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며 함부로 신의를 저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의 말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였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크리슈나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 녀석은 이미 만신전 소속이며 황제 공손헌원의 수족이라는 걸 모를 줄 아느냐? 너처럼 음흉한 녀석과 오월동주해야 할 정도로 우리가 아쉬운 처지는 아니다!]
“……!!”
내가 단숨에 정곡을 찌르자 크리슈나는 크게 동요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황제의 만신전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은 웬만한 신들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슈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대는…… 대체 뭐지? 어찌 단숨에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백웅이다. 내가 난데 뭐 문제가 있나?]
“…….”
크리슈나는 말이 꼬인 듯 침묵했고 나는 내심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 개 같은 놈. 28번째 전생에서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면 네놈의 정체 같은 걸 전혀 모르고 냉큼 동맹하겠다고 손을 잡았겠지!’
나중에 저놈이 광성자이자 비슈누의 본체로 변신해서 복희까지 암살하러 오는 통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전형적인 예시가 바로 비슈누였다. 화신 크리슈나가 갓난아이들을 돌보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서 착한 놈인 줄 알고 협력했다가 얼마나 뒷통수를 맞았는지 지금도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크리슈나가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듯 말했다.
“백웅이여. 그대는 황제 공손헌원을 적대하는 것인가? 대체 왜? 그대쯤 되는 식견이라면 현재 이 세상의 절대자에 가장 가까운 게 황제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나는 크리슈나의 말에 퉁명스레 대꾸했다.
[적대할 것까지 있나? 지금 황제 공손헌원은 봉인된 상태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호랑이가 없는 무주공산에 대장을 하고 싶은 여우들이 들끓는 판국인데 네가 호가호위하는 걸 얌전히 도와줄 생각은 없다.]
“……!!”
[네가 황제 공손헌원의 대체재로 나를 선택하려 하든…… 아니면 삼황오제를 견제하기 위한 패로 나를 선택하려 하든…… 나는 네놈의 책략에 아무 이득 없이 말려들 생각은 없다.]
나는 팔짱을 끼며 오연하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크리슈나. 내가 갑(甲)이다!! 나와 손을 잡고 싶다면 네가 손해를 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