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4화
브라만교와의 혈맹이라고……!!
나는 그 말에 옆에 있던 망량을 쳐다보았고, 망량은 전음의 술법을 써서 내게 말했다.
[제안만으로는 나쁠 게 없소. 현 브라만교는 명백히 천축과 남만을 아우르는 패주(覇主)이니 손잡으면 앞으로 무척 편해지겠지. 다만…… 당신도 알겠지만 레비아탄 같은 걸 다룬다는 건 틀림없이 저들 뒤에는 신적 존재가 있소.]
그렇군.
나는 망량의 조언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채고는 나레쑤언에게 말했다.
[쉽게 믿기 힘들군. 혈맹을 하면 우리는 그대들에게 뭘 해줘야 하지?]
“통상적으로 혈맹을 맺은 국가처럼 대하면 그만이오. 모든 외교, 군사, 식량 등의 문제에서 서로 최선을 다해 도웁시다. 자세한 조건은 여기 계약서를 준비해 왔소.”
[흠.]
나는 두꺼운 계약서가 심상치 않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코 일반적인 종이가 아니었고 양피지 또한 아니었다. 나는 계약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이게 무슨 재질인지 잠시 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이건…… 인피(人皮)로 만들어진 계약서 아니오?]
나는 인피면구를 여러 번 다뤄본 적이 있었기에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그러자 나레쑤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렇소만.”
[인간의 가죽을 벗기는 건 사악한 짓이오.]
“걱정 마시오. 본디 사악한 종교를 믿던 사악한 자들의 가죽을 벗겼으니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외다.”
[…….]
넵!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내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나레쑤언이 말했다.
“인피에 마력이 잘 배어들어서 계약서의 효력이 강해지기에 재료로 쓴 것일 뿐이니 괘념치 말고 내용을 읽어보시구려.”
나는 망량에게도 보여주며 계약서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모두 읽자 망량이 내게 전음의 술법으로 몰래 말했다.
[우리 쪽에 너무 조건이 좋구려. 받아들이지 않는 게 멍청이일 수준이오. 함정일 수도 있지만,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소.]
그렇단 말이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토록 후한 조건으로 혈맹을 맺으려 하는 이유를 내게 설명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찝찝해서 혈맹을 맺을 수 없소이다.]
“후후! 귀하 백웅께서는 듣던 대로 외교적 수사 없이 무척 솔직담백하구려. 하긴 그게 나로서도 편하겠군.”
왜인지 고소를 머금던 나레쑤언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 브라만교의 교주이신 파르바티 님의 명이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만이 우리의 진실이오.”
[그건 아까도 했던 말인데…… 정말로 파르바티가 우리와 이렇게 해서라도 혈맹을 맺으라 했다는 말이오?]
“그렇소.”
[웃기는 얘기군. 일개 교주에게 한때 남만의 국왕이었던 자가 이유도 모른 채 휘둘리다니…… 당신은 그걸로 납득되리라 생각하오?]
“하하하하하.”
내가 다소 도발적으로 말했는데도 나레쑤언은 도리어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정말 왕과는 거리가 먼 존재 같소. 원래 이럴 때는 진의를 따져 묻는 게 아니라 도움이 되는 외교조건이면 수락하여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제왕의 정도(正道). 허나 당신은 반대로 진실을 알 수 있다면 국가 따위는 언제든 내팽개칠 수 있다는 태도이지 않소?”
[…….]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것 같으니 나도 듣고 싶은 대답을 해 드리지. 파르바티께서는 당신을 신(神)으로 인식하고 계시며, 신들끼리의 협력을 하고 싶으신 것이오. 나는 그 의사를 전하러 온 전령일 뿐이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그런가.]
파르바티의 이름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실 예전에 남만 천축의 세력이 무림을 침공하려 한 적이 있었고, 그때 명룡자의 요청으로 중원무림을 구원하러 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만최강의 고수인 진국준에 빙의한 시바와 만나서 불가침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브라만교는 명목상 사바세계의 종교지만 사실상 천축 삼대신을 모시는 교단!
심지어 파르바티는 천축신화에서 시바의 반려로 유명한 신격이었으니 브라만교의 배후에 천축의 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파르바티에게 전하시오. 나는 이 조건대로라면 혈맹을 맺을 수 없다고.]
“의외군. 뭐가 문제요?”
나레쑤언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 레비아탄의 가교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데다 우리 남만의 마총(魔銃) 기술을 전수해주며 군사적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보통 이 정도면 굴종적이라 할 만한데 이래도 부족하단 것인가?”
[그런 사바세계의 이득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소. 내가 원하는 건 파르바티나 브라만교의 진정한 수뇌가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비추어 직접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오.]
“…….”
[나는 수박 겉핥기 같은 이득보다 그쪽의 진심을 보고 싶소.]
나레쑤언이 잠시 멍해졌고 그 대신 옆에 서 있던 황후, 사와스바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말했다.
“듣던 것보다 더욱 까다로운 분이시군요. 이 사와스바티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말씀하시오.]
“저는 사실 파르바티 님과 영통(靈通)이 이어져 있는 무녀(巫女)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 하신 말씀을 그대로 파르바티 님께 전달드렸지요.”
음?!
뜻밖의 사실이었다.
‘사와스바티…… 그냥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남만 소녀인 줄 알았는데…… 신격이자 브라만교의 교주인 파르바티의 무녀였단 말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의 사도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존재였다. 30번의 전생 만에 뜻밖의 사실을 알아내서 잠시 놀란 나는 이윽고 놀라움을 추스르고는 말했다.
[뭐라고 하오?]
“귀하께서 과거에 취했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에 확인을 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와 동행한 브라만교의 사천왕(四天王)을 상대로 그 무용(武勇)을 보여주실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저의 몸을 빌어 현신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나는 힐끔 저 뒤편에 서 있는 브라만교의 사천왕을 쳐다보았다. 다들 하나같이 엄청난 힘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며 결코 만만한 존재들이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내가 본인인지 확인해서 그때 맺었던 불가침조약이 유지되는지 간을 보려는 거군.’
그렇다면 아까 보았던 인피계약서의 내용 따위는 알 바 아니고 지금의 이 시험이 진짜 시험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 있겠소? 그럼 어디 한 수 부탁해보지.]
이 싸움에서 이겨서 파르바티나 시바의 실체를 직접 만나게 된다면 굉장히 앞으로가 편해질 것이다.
신들이 그 속내를 드러내기까지는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저벅
내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천왕들도 내 걸음에 맞춰서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했다.
저벅
저벅
서로가 이십여 걸음을 걷자 딱 삼 장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 거기서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추어 서자 사천왕 중에서 한 명이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천왕 중 증장천(增長天), 브리트라! 내가 먼저 그대를 시험하리라.”
촤아아악……!!
갑자기 시꺼먼 흑풍과 번개가 몰아치더니 평범한 인간 남성이던 브리트라의 모습이 신화 속의 용(龍)과 같이 변했다. 다만 중원에 있는 용과는 다른 모습이었으며 몸 주변에 3개나 되는 여의주를 회전시키고 있었고 심상치 않은 영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십 장 크기의 용으로 변신한 브리트라는 곧장 입에서 거대한 숨결을 내뿜었다.
쿠콰콰쾅!!
‘용의 숨결…….’
나는 브리트라의 공격이 상당한 위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동방의 용이든 서방의 용이든 흔히 쓰는 공격이었지만 브리트라의 숨결에는 뇌(雷)와 화(火)의 속성이 동시에 들어가 있어서 웬만한 주술방어를 종잇장처럼 관통할 것 같았다. 아마 대라신선이라 해도 브리트라의 일격에 그대로 죽을 게 틀림없었다.
‘흠…… 정면으로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귀찮다!
하지만 나는 오랜만에 날로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브리트라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대신에 여의주를 들어서 숨결의 한가운데로 던졌다.
치지직
순식간에 브리트라의 뇌염은 여의주에 빨려들어 가서 사라져 버렸는데 브리트라는 그 모습을 보자 크게 당황한 듯했다.
[아, 아니? 대체 언제 내 여의주를…….]
만상지투를 써서 눈에 뻔히 떠 있는 여의주를 훔쳐서 자기 힘에 자승자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굳이 설명해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에 뇌염을 머금은 브리트라의 여의주를 내 손에 회수하고는 말했다.
[넌 용인 것 같은데 타고난 신통력과 술법으로 싸우는 놈이지? 그럼 더 이상 싸워도 재미는 없을 테니 다른 놈 나와봐라.]
[뭐라고……!!]
화르르륵!!
다시 한번 브리트라가 뇌염을 뿜었지만 나는 이번에는 또 다른 여의주를 훔쳐서 뇌염을 막아 버렸다. 순식간에 내게 두 개나 되는 여의주를 뺏긴 브리트라는 당황한 듯했다.
[아, 아니…….]
[왜 그래? 니꺼니까 다시 가져가 봐.]
[으오오.]
브리트라가 염동력을 발휘해서 내 손에서 여의주를 뺏어가려 했다. 하지만 여의주가 놈의 근처로 날아가면 그 즉시 내가 또 즉시 만상지투로 훔쳐 버렸고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브리트라는 망연자실해하며 멍해 있었다.
[…….]
[여의주 받으시고.]
나는 낄낄대며 브리트라에게 여의주를 던져주고는 한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거기 너. 왠지 손이 근질근질해 보이는데 싸우고 싶으면 당장 튀어나와.]
나는 흰색의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놈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왠지 나한테는 저놈이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내게 지목당한 놈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말했다.
“놀랍군. 살기를 이 이상 죽일 수는 없다 생각했는데 내 미묘한 심경까지 읽었단 말인가?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 나로서도 흥미로워졌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태연하게 대꾸했다.
[딱히 읽은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느껴져서 말이야. 네 명과 싸우려면 피곤하니까 의욕이 있는 놈부터 먼저 쓰러뜨리는 게 좋겠지.]
“흠, 그런가……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여 이 종교에 몸담은 지도 오래되었건만, 그대처럼 특이한 자는 처음 보는군.”
그렇게 중얼거린 장년의 사내는 문득 자신의 양손에 특이한 병기를 소환하여 손에 붙잡았다. 나는 그 병기가 뭔지 알고 있었기에 눈에 이채를 띄었다.
[권(圈)?]
둥근 칼날을 이용하는 저 병기는 일찍이 금의위 백호나 나타태자가 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활용방법은 어렵지만,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굉장한 위력을 보이는 병기였다. 그러자 장년의 사내가 말했다.
“사천왕 중 지국천(持國天), 라운(羅雲). 무인으로서 그대와 싸워주마.”
타닷!!
카가가강
그와 동시에 지국천 라운이 쇄도하여 내게 현란한 권을 날렸다. 나는 현재 무공을 쓰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지만 그의 공격을 대충 감만으로도 피할 수는 있었다. 신력과 마력을 이용하면 신체능력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기에 대놓고 못 피하는 공격 같은 건 없었다.
퓨퓨퓽
나는 라운의 무공실력이 상당하긴 하지만 그간 봐 왔던 절대지경 고수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기에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약한데?’
물론 약하다는 건 내 기준이고 중원에서라면 충분히 남궁세가의 가주 정도는 삼백 합에 쓰러뜨릴 수 있는 실력이다. 그러나 브리트라만 봐도 브라만교 사천왕은 하나같이 대라신선을 뛰어넘은 자들이었기에 이 정도 무공실력으로 사천왕에 들어가 있다는 건 의아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약간 실망하며 라운에게 말했다.
[무인의 결투를 자처하기엔 당신은 너무 약해 보이는군!]
콰과광
나는 다짜고짜 오레이칼코스의 팔에 강한 마력을 밀어 넣어서 마력포를 써서 라운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아무리 라운의 무공수준이 비교적 낮아 보인다 하더라도 일단 나는 제대로 무공을 못 쓰는 상태였기에 오랫동안 무공으로 상대해줄 이유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후두둑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며 마력포에 라운의 몸이 소멸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오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쩌억
라운은 내 마력공격을 그대로 일도양단하며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서 있었다. 방금 내 공격이 브리트라의 뇌염에도 뒤지지 않는 위력을 갖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라운의 양팔에 들려 있던 두 개의 권은 어느새 한 자루의 기다란 검(劍)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 검은 대단한 신병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 창에서 미세하게 울려 퍼지는 진동을 느끼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 어디서 그 기술을 배운 것이지?]
“파르바티께 듣자 하니 그대는 아수라를 부하로 두고 있다고 하더군.”
[…….]
“그대가 짐작한 대로다.”
휘익!!
라운은 검술의 자세를 잡으며 내게 겨누었다.
“아수라와 비기 폭광누멸검(爆光漏滅劍)을 함께 수련한 게 바로 나다. 십대제자(十代第子) 라운으로서 상대해주마, 백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