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625화 (1,524/1,615)

전생검신 86권 13화

[이름]을 부여할 자격?

나는 그 말에 과거 내가 이름을 부여했던 초상기인이 생각났다.

‘유신(有信).’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 녀석은 내게 이름을 부여받은 후 나를 따르는 기색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마주치기는 힘들었지만, 유신이라는 초상기인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 이 팔뚝의 [이름] 중에는 분명히 유신이 있다. 그렇다면…….’

유신을 다시 불러낼 수도 있을까?

유신은 지난 [굴레]의 존재인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 이 초상기인은 우리가 계획한 힘의 부여과정에서 절반도 지나지 않았소. 좀 더 강해져서 능력이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당신이 그때 이 초상기인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오.”

[…….]

“제갈사가 원하는 것도 그런 거겠지.”

[알았소.]

방금 전에 뭔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던 거 같지만 그것도 나중에 [이름]을 부여해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 알게 될 비밀이리라. 나는 그 정도로 상황을 인식하고는 납득했지만, 이내 문제점을 하나 알아채고는 말했다.

[…… 잠깐 근데 토요에 제물을 바쳐서 토요의 힘으로 영토를 정화하겠다 하지 않았소? 이 최고의 초상기인을 제물로 바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걱정 마시오.”

촤아아아 -

잠시 후 공간의 여기저기에서 관(館)이 기계장치에 의해 지상에 떠올랐다. 그 관에는 여러 명의 초상기인들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었고 하나같이 백발이었다. 약 6체의 초상기인을 떠올린 제갈유룡이 말했다.

“단지 최고의 완성품이 아닐 뿐 예비품도 많이 만들어두었소. 이 중에 3체 정도만 제물로 쓰면 영토를 2배 확장할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오.”

[…….]

“왜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시오?”

[아니 뭐…… 예전에도 초상기인을 제물로 바친 적이 있긴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놈들을 제물로 바치는 게 무척 떨떠름해서 말이오.]

내 말에 제갈유룡이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초상기인의 외형이 인간과 똑같은 이유는 신들이 그렇게 생긴 제물을 좋아하기 때문이오. 식욕이 돌게 하는 모양이라서 인간일 뿐이지 그게 아니라면 돼지나 소 형태라도 상관없소. 어차피 영혼이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원한다면 죄책감이 생기지 않도록 돼지 모양으로 바꿔주겠소.”

나는 그만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 됐소. 다만 고통 없이 빠르게 진행시켜 주시오.]

이런 얘기를 망량도 아닌 제갈유룡에게 한 내가 바보다. 제갈유룡은 원래라면 세상을 마도의 힘으로 뒤집어엎을 흑막이었던 존재였기에 고작 초상기인을 제물로 바치는 문제로 윤리적인 갈등을 하진 않으리라.

“알았소. 해방토요의 힘을 빌려 영토를 확장시키는 건 사흘 정도 의식을 치러야 할 것이오. 기다려 주시오,”

[좋소.]

“그리고 또 하나. 나와 제갈사, 생제르맹 외의 그 누구에게도 이 장소와 출입방법을 누설하지 마시오.”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동료들을 의심하는 거 아니오? 누가 배신한다고…….]

“백웅. 당신은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기에 실감 못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세상은 충분히 멸망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오. 그리고 모든 이가 당신 같은 강철의 정신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오. [옛 지배자]가 부여하는 끔찍한 절망 앞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해도 타락할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

“현이에게도 최고의 초상기인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지 마시오. 저걸 논할 수 있는 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제갈사 뿐이오.”

난 동료들을 믿는데 너무 제갈유룡이 비관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저런 게 또 제갈유룡의 성격이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여기는 망량에게도 미호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좋소. 그럼 나갑시다…….”

내게 다짐을 받은 제갈유룡이 비밀장소에서 나가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나는 의아해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겹쳐진…… 두 개의 세계라…….”

제갈유룡이 잠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되뇌이더니 갑자기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 당신은 영지주의의 마법을 배웠다 들었소. 그렇다면 혹시 제갈사에게서 클리포트(Qliphoth)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소?””

[클리포트……?]

나는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그러고는 헤르메스가 했던 말을 기억해내며 말했다.

[마법의 신 헤르메스가…… 세피로트를 다룰 수 있는 자는 클리포트를 다룰 수 있다느니 머시기…… 암튼 그랬던 거 같소만…… 클리포트라는 것은 사실 제갈사에게 배우지 못했소.]

“역시. 그건 제갈사가 일부러 당신에게 가르치지 않은 영역이오.”

나는 제갈사 얘기가 나오자 흠칫했다.

[무슨 말이오? 제갈사가 일부러 가르치지 않다니?]

“나도 이곳에서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제갈사에게서 영지주의 마법을 배웠소. 그리고 빠르게 대성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내가 쓸 수 있는 정상적인 마법은 세피로트 뿐이며 클리포트의 영역은 쓸 수가 없소. 제갈사는 내게 그 이유를 말해주었지.”

제갈유룡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세피로트란 바로 세피라, 생명의 나무를 상징하오. 세계수의 수형도(樹形圖)에서 힘을 불러오는 체계이며 주술이지. 허나 클리포트는 그와는 반대로 역(逆) 세피로트이며 검은 수형도. 정(正)을 모독하는 악(惡)의 상징이며 금단의 주술이오.”

[제갈사가 단순히 금단의 주술이라고 해서 전수를 하지 않는다고? 이혼대법도 전수해준 제갈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금단의 주술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지. 제갈사가 말하길, 클리포트는 사실 [바깥]에 손을 뻗는 게 전제이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그랬소.”

[바깥?]

제갈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갈사도 제갈사의 스승인 시몬마구스도 클리포트의 주술을 쓸 수 없소. 주법은 기록되어 있으되 일반적인 영지주의의 마법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클리포트를 발동시킬 수가 없는 거지. 클리포트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주문시전자는 오로지 마법의 신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 단 한 명뿐이오.”

[……!!]

“제갈사는 그 이유가 헤르메스가 사실 외우주를 넘어온 존재이며 외우주를 넘은 방법 그 자체가 클리포트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클리포트는 애초에 주문체계 같은 게 아니라 일종의 [계약]이라고 보는 거지.”

[클리포트를 이용해서 외우주를 넘는다는 말이오?]

“어디까지나 제갈사의 가설일 뿐이지만…… 제갈사는 클리포트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계지만 헤르메스가 외우주를 넘기 위해 만들어낸 편법이라 생각하고 있었소.”

[…….]

“그리고 또 하나…… 헤르메스의 고향부터가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더군.”

뭐라고?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 처음부터 외우주 출신이란 말이오……?]

“확실치 않소. 제갈사 또한 물증이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의 심증일 뿐이라 했으니. 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클리포트의 영역이 위험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세피로트와 겹쳐져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오.”

[그건 뭔 소리요?]

“그러니까…… 세계수는 평행세계든 외우주든 가리지 않고 우주의 모든 곳에 존재하오. 그런데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세계수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지. 클리포트란 세계수의 그런 성질을 이용해서 겹쳐져 있는 양면적인 세계를 악용하는 수법인 것이오.”

[…….]

“음…… 전혀 못 알아들은 표정이군.”

[그렇소.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이오?]

똑똑하다고 자랑하냐?!

내가 괜히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제갈유룡은 냉막하게 말했다.

“방금 전 초상기인이 말했던 내용. 두 개의 세계는 무한히 겹쳐져 있다 하지 않았소? 나는 그게 클리포트를 상징한다고 느꼈단 말이오.”

[어…… 그럼…… 초상기인의 내면에 있는 존재들은 외우주에서 왔다 그거요?]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닐 것이오. 어쩌면 헤르메스처럼 외우주를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존재들만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의 비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

“표정이 좋지 않구려.”

[솔직히…… 무슨 개소리 하나 싶소…….]

“머리가 나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못 알아들었으면 못 알아들은 대로 일단 외우기나 하시구려.”

[…….]

“언젠가는 이 [겹쳐진 한 쌍의 세계]를 단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있을 거요.”

[대체 그런 걸로 뭘 깨닫는다는 거요…… 참나.]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무리 우리 편이 되었다 하더라도 제갈유룡은 나쁜 새끼였다.

머리 좋은 걸 이용해서 나를 괴롭히는 놈인 것이다.

파앗

나는 제갈유룡과 함께 나와서 내성에 되돌아갔다. 그리고 가만히 동료들을 기다리자 머지않아 다른 동료들도 차례대로 콘스탄티노플에서 남경성으로 귀환했다. 망량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대략 듣고는 말했다.

“사흘 후에 영지가 두 배가 되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구려.”

[그동안 내가 뭘 하면 되겠소?]

“우선 그 찌그러진 몸부터 수리하는 게 어떻소? 나중에 남경성의 교주로서 위엄을 보이려면 겉모습이 멀쩡해야 하니.”

망량의 말에 나는 힐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내 몸은 롤랑과 싸울 때 팔이 관통당한 데다가 손에는 검상이 생겼고 온갖 압력 때문에 몸 여기저기가 찌그러져 있었다. 말 그대로 볼품이 없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말했다.

[이 남경성에도 낙양의 이븐시나 같은 뛰어난 기술자가 있소?]

“그런 기술자를 찾을 필요 없소. 그냥 금천재를 불러옵시다.”

파앗!!

불려온 금천재가 구천현녀의 권능을 쓰자 환한 빛과 함께 나는 즉시 원래 상태로 회복되었다. 뿐만아니라 사지의 도색 또한 매우 멀쩡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금천재는 무척이나 귀찮아하며 말했다.

“나는 수리하는 사람이 아니오…….”

[근데 권능으로 치료하는 거 무척 편하군. 자주 이용할게.]

“으으. 그냥 숨만 쉬게 내버려 두란 말이오.”

[또 낭심 맞고 싶냐?]

“……!! 아, 아니오.”

금천재는 사색이 되어서 급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런 금천재의 한심한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구천현녀는 왜 저런 하찮은 놈한테 권능을 준 거지?]

“이유는 모르오. 하지만 구천현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진 않았겠지.”

[좋아. 아무튼 몸은 수리했고 이젠 뭘 하면 되오?]

“딱히 아무것도…… 사흘 후를 기다립시다.”

[그거 좋지.]

나는 뒹굴뒹굴 놀면서 사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수련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노는 것도 무척 좋아했기에 시간은 매우 잘 갔다. 게다가 기계의 몸이라서 처음부터 잠이 필요 없어서 커다란 내성을 돌아다니는 것도 꽤나 재밌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그날의 정오가 되자, 내성의 상공에 해방토요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영기가 출현했다.

파아아아 - !!

토요의 영기는 어마어마한 범위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뻗어 나간 영기가 대지를 감쌌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도시에 편성되어 있던 정찰대와 고수들을 보내서 성 바깥을 정찰하게끔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광대한 영토가 확실히 정화되었다는 걸 확인하자, 나는 남경성 전체에 중계화면을 띄웠다.

[보아라, 남경성에 사는 인간들이여.]

나는 대라신선들의 술법으로 나타난 중계화면에 비치는 정화된 땅의 모습을 수십 개나 비춰주었다. 원래 시뻘건 사막으로 가득하던 땅은 녹음(綠音)을 되찾고 있었으며 멀쩡한 나무와 개울물이 많이 보였다. 뿐만아니라 곳곳에 출현하던 마물(魔物)들이 토요의 영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치거나 그대로 죽어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인간들이 웅성거렸다.

“오오…….”

“저, 정말인가.”

“땅이 회복되었다고?”

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말했다.

[나는 영토를 두 배로 늘리겠다는 너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앞으로 이 확장된 영토에 새로운 성벽을 쌓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노라.]

잠시 동안 광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환호성이 터졌다.

“으아아아아!!”

“다시 나가서 살 수 있어!!”

“교주님 만세!!”

고오오오

‘이전에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기(靈氣)가…….’

저번에 흘러들어왔던 힘은 가벼운 미풍(微風) 같은 흐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영기 그 자체가 커다란 구름을 형성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구름은 이내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내 이목구비를 통해서 흡수되기 시작했다.

번쩍……!!

[……!!]

내면에 번개가 갑자기 내리친 것 같다.

그만큼 지금 흘러들어온 신력(神力)의 양은 상당했던것이다.

못해도 처음에 흡수했던 신력의 열 배 이상!!

나는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쥐꼬리만 한 양의 신력과는 달리 이 정도 신력의 양이면 틀림없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원래 신력의 일 푼도 되지 않는 힘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신력이라는 힘이 가진 위력을 생각하면 내게는 커다란 패가 생긴 셈이다.

내가 힘을 흡수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망량이 씩 웃었다.

“훌륭하군. 내 술수로 도시 사람들의 동향을 살펴보았는데 이 정도면 적어도 이 도시의 2할 이상이 백웅 당신을 신앙하게 된 것이오.”

[2할? 이렇게 큰일을 이뤄냈는데 그것밖에 안 되는 건가?]

“아직은 사람들이 영토가 넓어졌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직접 나가 살기 시작하고 당신의 위업을 실감하면 그때는 4할 가까이 불어날 것이오.”

[…… 생각보다 사람들의 신앙을 얻는 게 힘들군.]

예전 같았으면 해방 토요까지 쓰면서 땅을 대량으로 넓히는 기적을 보여주었다면 보통 인간들은 대번에 나를 신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절반의 신앙을 얻기도 힘들 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이오. 이 남경성 사람들은 술법사, 신선에 외계인도 심심찮게 마주치고 있으니 초월적인 힘의 발현에 이미 익숙하오. 신을 마냥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힘이 강한 군주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니 도리어 진실한 신앙을 갖기는 쉽지 않은 인간들이지. 그런 자들의 신앙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오.”

[흠…….]

“이번 일로 한 번 기반을 세워두었으니 앞으로 점점 쉬워질 것이오.”

[그런데 단순히 계산해 보면 이 도시의 모든 인간들에게 신앙을 얻는다 해도 내 원래 힘을 되찾는 건 한참 먼일일 것 같소. 좀 더 많은 신앙이 필요해.]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른 소성(小城)을 공략할 필요가 있겠지.”

촤악

망량이 오화칠금선을 펼치며 말했다.

“중원에 존재하는 각 성(城)에 사신을 보내어 새로운 천재만재교의 교주의 출현과 당신의 위업을 알리며 복종할 것을 요구하겠소. 회신은 한 달 내로 올 것이오.”

나는 망량의 말에 놀랐다.

[복종을 요구한다니…… 그들이 거절하면 힘으로 억눌러야 하오?]

“필요하다면…….”

[안 그래도 대재앙을 맞이해서 살아남기도 힘든데 인간끼리 싸우는 건 좀…….]

“후후.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도리어 피를 안 볼 수가 있소.”

망량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굳이 당신의 힘까지 빌리지 않아도 우리 선에서 각지의 소성을 제압하여 무혈입성할 수 있소. 걱정 마시오.”

[피를 안 볼 수 있다고? 전에 당신이 말하기를 각지의 성주도 한가락 하는 인물들 아니오.]

망량이 내게 말해준 바가 있었다. 현재 대재앙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각 성의 성주들은 죄다 최소한 초절정고수 이상의 능력을 갖춘 강자들이라고. 요괴나 마물에 맞서 싸워야 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은거기인들도 자경대처럼 뭉쳐 있었으니 만만치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자 미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성주들이 강해봤자 대라신선을 넘어설 수 없다. 본녀와 망량의 힘만으로도 그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할 수 있지.”

[아.]

“검마나 제갈유룡, 제갈부의 힘까지 빌리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미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단 하나 점령하기 힘들 것 같아서 걱정되는 곳이 있긴 한데…….”

[어딘데?]

“강동성(江東城)이다. 그곳은 제일 나중에 신중하게 접근하자.”

옆에 있던 망량 또한 동의하는 듯했다.

“나도 미호의 의견에 동의하오. 거긴 위험하니 조심해야겠지.”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호의 성정은 원래부터 오만하고 천방지축이었으며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면 거리끼지 않고 상대를 패곤 했다. 그런 미호가 먼저 ‘신중하게’라는 말을 꺼내다니!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강동성에 심상치 않은 강자가 있나 보군. 대체 뭐가 있길래 그래?]

이어진 미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항우(項羽).”

[……?!]

“그놈이 현 강동성주다. 신장(神將)도 꽤 끌고 간 데다 그놈의 책사로 있는 게 바로 그 태공망(太公望)이지.”

[하, 항우에 태공망?]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힘 하나는 천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성좌의 괴물 항우에다가, 고대신선이자 곤륜산의 적통이며 봉신혈주를 지키던 수문장이며 타신편의 주인인 태공망이라니! 그 둘이 힘을 합친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지만, 조합을 놓고 보면 정말로 막강해 보였다. 미호의 말에 망량이 거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태공망의 휘하에 양산박(梁山泊)이 재결집했는데, 당신도 알다시피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던 [혼돈의 재능]을 각성한 인간들의 모임이오. 그런 자들이 108명이나 있지. 더 골치 아픈 것은 태공망이 어쩌면 봉신혈주에 존재하던 고대 신선들을 끌고 갔을 수도 있다는 거요.”

[…….]

“틀림없이 그자들은 낙양성과 남경성에 이은 제 3의 세력. 그래서 다른 소성들과 달리 그들을 상대할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대체 그자들은 왜 따로 떨어졌소? 대재앙에 맞서서 다 같이 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게다가 태공망과 항우라니, 그자들이 어울릴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이오?]

“……자세한 내막은 모르오. 하지만 아무래도 태공망과 항우는 천계가 붕괴하기 전부터 이미 말을 맞춰놨던 모양이라서 천계소멸 당시에 바로 자신들의 세력을 데리고 가서 독립했다오.”

[으음…… 항우와 태공망…… 이라.]

골치 아프다. 물론 남경성의 모든 전력을 끌고 가면. 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쪽도 큰 피해가 생길 게 분명한 조합이었다. 그들을 누를 수 있는 건 낙양성 또한 마찬가지겠지만 같은 이유로 강동성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제 3 세력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실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내막이 있겠군.’

항우야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태공망은 천계에서 손꼽히는 태상선인(太上仙人)이었다. 실력이든 배분이든 구천현녀에게도 맞설 수 있는 태공망 같은 태산북두가 항우의 손을 들어준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좋소. 그렇게 진행해 주시오.]

“아, 그리고 또 하나…….”

[뭔가 더 있소?]

망량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오늘 오전부터 갑자기 전 세계에서 거대한 용맥(龍脈)의 활동이 관측되었소. 그리고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출현했소이다.”

[거대한 존재? 적이오?]

“그건 알 수가 없소만 척후로 나가 있는 대라신선들의 말로는 머지않아 성(城) 근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망량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이었다.

쿠콰콰쾅!!

거대하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의 남쪽에서 큰 진동이 울렸다. 내가 높은 곳에서 그쪽을 내려다보자, 나는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 저건?!]

고오오오

실로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남쪽 성벽에 들이박은 거대한 동체(動體)는 무려 그 넓이가 몇 리나 되어 보였으며 길이는 지평선 끝까지 뻗어 있었다. 심지어 머리 부분은 보이지도 않았기에 그 진정한 크기는 신화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이리라.

‘뱀…… 인가?’

나는 그 기괴한 거대생물이 뱀이라고 직감했다. 너무 거대해서 한눈에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양옆에 비늘이 돋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거대한 뱀의 마물은 아오키가하라 수해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랍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인외의 말세라고 하지만 저런 존재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리라.

그리고 뱀의 위에 올라타 있던 시꺼먼 인영(人影)들 중에서 선두에 있던 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내가 있는 곳까지 사자후를 터뜨리는 게 들렸다.

[남경의 성주여!! 천재만재교의 교주여!! 들리시오?]

인영은 최소한 수만 명은 되어 보였다. 그리고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보니 잘 훈련된 정예 병사라는 게 느껴졌다.

치지지징!!

적광빛을 내뿜는 광선 - 그 광선을 휘감고 있는 은철(銀鐵)의 총검(銃劍)을 쥐고 있는 칠흑빛 갑옷의 제왕이 연달아서 사자후를 외쳤다.

[나는 남부 아유타야의 제왕이자 브라만교의 총호법인 나레쑤언!! 위대한 교주 파르바티의 전령(傳領)으로서 그대를 찾아왔소이다!!]

[……!!]

나는 그의 외침을 듣자마자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 흑태자 나레쑤언!!’

틀림없이 그자는 중원의 남쪽, 남만지역의 패왕이자 강대한 군왕이었다. 중원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지만 서방과 교역하여 빠르게 과학기술도 발전시켰던 그자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전생여정과 직접적 관련은 없었기에 자주 만나지 않았던 자였는데 뜻밖에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망량 또한 흑태자 나레쑤언을 알고 있는지 천리안의 술수로 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원래도 흑태자 나레쑤언은 강기를 쓸 수 있는 초절정고수였는데 지금은 더욱 강해진 것 같구려. 게다가 그와 동행하고 있는 저 4명의 존재들이 마음에 걸리는군.”

[저자들은 누구지?]

아닌 게 아니라 흑태자 나레쑤언의 바로 곁에는 그의 아내로 보이는 사와스바티가 백마를 타고 있었으며 그들의 뒤에는 의문의 존재 4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4명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이렇게 멀리에서도 선명히 느껴질 정도였으며 심지어 압박감마저 느껴진 것이다.

그러자 망량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브라만교의 교주 파르바티의 전령으로 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저자들은 남만 브라만교의 사천왕(四天王)일 것이오.”

[사천왕?]

“브라만교의 호법사자 같은 것이오. 헌데 왠지 대웅제국 시절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있는 사천왕과는 그 수준이 천지차이군…… 대웅제국이 정벌했던 그때의 사천왕과는 다른 존재들일 가능성이 높소.”

[…….]

나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저들과 만나보도록 하지. 나가자.]

쿠구구구…….

잠시 후 나는 동료 일행과 함께 내성에서 나가 문 앞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의 군병이 수만이나 되는 이상 그들을 성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고 방금 전 영토를 늘린 상황이었기에 성내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불안감을 심어주면 신앙이 약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 밖에 도착해서 뱀의 등짝 위에 올라서자 흑태자 나레쑤언이 나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천재만재교의 교주 백웅을 뵈게 되어 영광이오.”

나는 흑태자 나레쑤언을 보자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내 기억 속의 흑태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구나.’

원래의 흑태자 나레쑤언은 그저 무술경지도 높은 인간의 왕 수준이었을 뿐이다. 중원무림의 기준으로 나레쑤언만큼 무술이 강한 자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흑태자는 상당한 마력(魔力)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기존의 무술경지보다 훨씬 높은 성취를 이루었으며 심지어 육체도 인간의 것을 초월한 것으로 보였다. 단순한 전투력만으로 봐도 절대지경과 싸워볼 만한 수준이 틀림없으리라.

‘게다가 저 적광빛을 내뿜는 총검……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흑태자는 브라만교에서 굉장한 후원을 받은 모양이었다. 신적인 존재들이 가호를 내리고 그를 강화시켜줬다면 저만큼 강해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뭐 그렇다 해도 적의가 없다는 건 다행이군.’

예의가 바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 자리에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닌 듯했다.

나는 마주 화답했다.

[나야말로 천하에 명성 높은 흑태자 나레쑤언 왕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곁에 있는 분은 아내이신가?]

내가 넌지시 묻자 나레쑤언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본왕의 황후인 사와스바티라 하오.”

[결국 결혼했군.]

“음……?”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내심 히죽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남경에 온 것이지? 그것도 이렇게 거대한 마수와 수만의 군병을 데려오다니 설마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아니외다. 우리는 귀하에게 교주 파르바티 님의 제안을 전달하러 왔소. 군병을 데려온 이유는 우리가 귀환하는 길에 본국 근처의 마물을 추가로 토벌해야 하기 때문이오.”

[흠. 그렇단 말이지…… 그래서 중원 남쪽의 브라만교가 중원에 와서 무슨 제안을 하고 싶단 말이오?]

처억

나레쑤언의 손가락이 발아래를 가리켰다.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나레쑤언이 입을 열었다.

“이 존재는 전설의 마신(魔神)인 레비아탄. 브라만교에서 사역하는 이 레비아탄의 몸 길이는 이 세상을 수십 번 칭칭 감을 수 있을 정도이니, 레비아탄의 몸을 늘려 전 세계의 각 성(城)을 잇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하고자 하오.”

[……!!]

나레쑤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 가교의 이용을 제한 없이 허락해주는 대신, 천재만재교는 우리 브라만교와 혈맹(血盟)을 맺어줬으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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