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2화
초상기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강력한 존재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초상능력만 하더라도 가볍게 각성한 상태에서 제갈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할 정도로 강한 데다가 육체 또한 원하는 만큼 강화시킬 수 있다. 거기에다가 어떤 재료를 썼느냐에 따라서 가능성도 크게 달라지니, 제갈유룡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초상기인에게 고위 정신능력을 부여하면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리라는 가설. 그걸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합심해서 초상기인에게 반복하여 [혼돈의 재능]을 부여했소.”
나는 익숙한 단어가 나오자 흠칫했다.
[혼돈의 재능을?]
“그렇소. 초상기인이 갖고 있는 능력도 따지고 보면 혼돈의 재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초상기인은 순수한 인간보다는 도리어 태초에 재능을 각성했던 인간과 비슷한 존재요. 그리고 혼돈의 재능을 반복적으로 부여하다 보면 그 와중에 혼돈의 성질이 초상기인의 잠재된 정신력을 활성화시키리라 생각했소.”
[흠…….]
“그리고 최근 성과가 나왔소.”
제갈유룡은 천천히 눈앞에 떠 있는 초상기인에게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토요의 힘을 불어넣을 거요. 이걸 보시오.”
초상기인은 미형(美形)의 중성적인 미소년(美少年)이었는데 머리카락이 완전한 백발이라서 과거의 진을 생각나게 했다. 다만 진과는 생긴 게 많이 달랐다.
쿠구구구!!
잠시 후 제갈유룡의 손끝에서 강대한 술력이 흘러나와서 초상기인에게 흘러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던 초상기인은 움찔하며 몸을 떨다가 잠시 후 몸에서 강대한 생명력 같은 기운을 뿜어내었다.
파지직!!
초상기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노란빛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제갈유룡이 지닌 토요의 기운을 단숨에 흡수하더니 이윽고 몇 배나 커져서 초상기인을 보호하듯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제갈유룡이 씩 웃었다.
“보았소? 해방토요가 지닌 토의 기운에 반응하여 그대로 토생금(土生金)을 발현시켰소.”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백련교주가 쓸 수 있다는 원영신 오행변환의 능력을 이 초상기인은 의식하지 않아도 늘 자동시전하고 있는 것이오. 심지어 한 번에 여러 개를 쓸 수도 있지. 이미 이놈은 오행술에 있어서 대라신선을 뛰어넘은 능력을 갖고 있소.”
[……!!]
“혼돈의 재능을 부여할 때마다 이놈은 잠시 그 재능을 흡수하다가 갑자기 소멸시키지. 정말로 재능이 소멸된 게 아니라 영혼의 내부에 각인되어 새겨지는 것이오. 그와 함께 혼돈의 재능이 초상기인의 내밀한 정신적 세계를 강화시키니, 이놈은 차원이 다르게 강해지고 있소. 정신을 발전시키면 초상기인의 한계를 깰 수 있다는 게 사실인 것이오.”
그 말대로라면 이놈은 이미 수십 개 이상의 [혼돈의 재능]을 내면에 보유하고 있는 건가?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찬찬히 초상기인을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지금 느껴지는 잠재력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했다.
‘오레이칼코스의 팔이 따끔거리는군…….’
이 팔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 감춰져 있다는 뜻이다. 세계수의 방대한 마력이 반응할 정도라면 그 힘의 질적인 농도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완성되면 어마어마한 괴물이 될 거라는 걸 알아챈 나는 제갈유룡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놈을 제작한 이유는 뭐요? 궁극의 초상기인을 만들어서 뭘 하고 싶었던 거요.]
“뻔하잖소. 평소에는 이걸 운용해서 강적과 맞서 싸우는 전투요원으로 쓰고, 향후 격을 더 높이면 만신(萬神)이 군침 흘리는 사상최고의 제물로 바칠 수 있소.”
[…….]
“이놈의 제작에는 사실 생 제르맹도 관여했소. 그의 연금술은 확실히 탁월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
[생 제르맹도…… 그런가.]
“또 하나. 이 초상기인의 내부에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 있소. 그래서 이놈은 당신이 보았다던 최강의 초상기인, 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오.”
[특별한 재료?]
“그건…….”
제갈유룡이 차분하지만 확고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바로 계백함의 핵(核)이오.”
[……?!]
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소…… 손해 아닌가? 그 귀한 걸 초상기인 하나에 박아 버리면…….]
계백함의 핵!
이환웅이 외우주를 넘어설 때 놈과 함께 이 세계로 소환된 계백함은 틀림없이 말세에 가까운 시대의 미래과학기술이 집약된 물건이었다. 수백 장에 이르는 거대한 강철 덩어리를 자유자재로 하늘에 띄워서 운행시킬 수도 있는 막대한 동력은 물론이고 계백함만의 특수능력을 발현시키는데도 쓰였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설마 초상기인 하나에 계백함의 핵을 넣어 버릴 줄이야!
“어차피 폭발해서 잔해만 남아 있던 것이었소. 우리는 잔해 속에서 핵을 수습해서 신기술에 투자하기로 한 것뿐이오.”
[미쳤군…… 하지만 대단하긴 하구려.]
나는 전생동료들을 모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딱히 생각도 안 했는데 알아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서 내게 갖다 주는 것이다.
전생동료 중 최고의 술법사와 연금술사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최고의 걸작!
그 걸작을 눈앞에서 확인하니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제갈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계백함의 잔해에서 얻어낸 건 핵뿐만이 아니오. 생 제르맹은 핵의 분석결과를 이용해서 마도공학으로 하급 플로지스톤(phlogiston)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소.”
[……?]
플로지스톤?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내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잠시 후 기억을 해내고는 말했다.
[…… 그, 그거 이제 기억나는군. 팔부신중 긴나라가 들고 있던 ‘인과율을 무효화시키는 보물’ 아니었소? 수해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봤던 거 같은데.]
“맞소. 진짜 플로지스톤은 팔부신중 긴나라와 함께 외우주로 튕겨져 나갔지만, 원래부터 연금술의 명인이던 생 제르맹은 계백함의 핵이라는 훌륭한 물건에서 영감을 받자 수정석비와 보패 등을 이용해서 플로지스톤에 준하는 새로운 영핵(靈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오.”
[…….]
“하급 플로지스톤은 현재 인공보패 양산 및 다양한 곳에 활용되고 있소. 현재의 인류에겐 없어서는 안 될 동력원이 되었지.”
그런 게 되나?
나는 멍하니 있다가 생 제르맹 또한 세기의 천재라는 사실을 새감 실감할 수가 있었다. 플로지스톤은 팔부신중조차 비장의 한 수로 운용할 정도의 최상급 보물인데 그만한 물건을 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생 제르맹의 천재성이 탈인간급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갈유룡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 그리고…… 사실 당신이 진짜 백웅이라면 계백함에 대해 또 말하고 싶은 게 있소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자들에게는 섣불리 밝힐 수 없는 비밀이지…….”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반문했다.
[무엇이오?]
“계백함은 우연히 이환웅이라는 이계의 존재가 오면서 생겨난 미래의 과학기술의 결정체요. 하지만 당신이 백웅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이 세상에는 계백함 같은 게 또 하나 있었소. 알고 있소?”
마치 나를 시험하는 듯한 말. 역시 아직은 제갈유룡 입장에서 내가 백웅이라는 사실을 좀 더 검증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이해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방주(方舟)지. 소림사에서 삼십 리 떨어진 심산유곡에 있었던 물건인 이성계(李成桂)함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과연 알건 다 알고 있구려.”
방주 이성계함!
나는 그 방주를 발견한 후 꽤 유용하게 써먹었던 적이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이환웅의 계백함을 처음 보았을 때도 대번에 방주 이성계함과 비교할 정도로 그 둘은 유사한 존재였고 아마 같은 시대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방주는 왜? 설마 이 초상기인에 방주의 핵까지 집어넣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비효율적일 텐데…….
내가 걱정스럽게 반문하자 제갈유룡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것 때문에 방주를 언급한 건 아니오.”
[그럼?]
“……방주에는 봉인실(sealing room)이란 게 있었소. 알고 있겠지만 그 봉인실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봉인되어 있었고 지속적으로 냉동하며 그 봉인을 유지하고 있었지.”
[…….]
이어진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봉인실의 봉인이 제멋대로 풀리려 한 적이 있었소. 급히 닫았지만.”
[…… 뭐, 뭐라고?!]
나는 [방주]에 있던 봉인실을 생각하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봉인실에는 알 수 없는 게 봉인되어 있었고 나는 늘 동력을 소모해서 그 봉인실을 추가로 닫아 버리곤 했다. 그래서 거기에 대체 뭐가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주 위험한 게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어진 말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천지의 균형이 무너지며 혼돈의 신격들이 방주 근처에 잔뜩 출현했었소. 그 존재의 출현만으로도 천지천상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이 뒤바뀌었다는 소리였지. 심지어 구천현녀마저도 크게 경계하는 기색을 칠일 밤낮으로 유지했소.”
[……!!]
“백웅이여. 당신은 [방주] 안에 봉인되어 있는 게 혹시 뭔지 알고 있소? 현재 그 누구도 그 정체를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 존재가 풀려나왔을 때 인간종족은 절대 감당할 수 없소. 모든 걸 진소청에게 맡길 수밖에…….”
[…….]
나는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오. 하지만 조만간 알아낼 생각이오.]
아마 그건 나만이 알아낼 수 있으리라. 아무리 강한 놈이라 해도 죽음을 감수하면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고 죽음을 감수할 수 있는 건 나뿐이기 때문이다.
‘뭔가 찝찝하다…….’
직감이 온다.
아마 방주에 봉인된 존재와 접촉하는 그 순간 나는 거대한 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직감이.
나와 제갈유룡이 대화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무슨 얘기를 그리 재밌게 하고 계신 건가요?”
사라락
옥구슬 구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고아한 날개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장내에 출현했다. 나와 제갈유룡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그 선녀(仙女)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오셨으면 저를 불러주시지 둘만 얘기하고 계시다니 섭섭하군요.”
누구지?
천계의 존재인 거 같은데……?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제갈유룡이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맡긴 임무는 침입자를 격퇴하는 것뿐. 대화에 끼어들다니 주제넘구나.”
나와 이야기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하고 냉정한 목소리! 원래의 제갈유룡 그 자체였기에 아름다운 절세천녀는 잠시 흠칫하더니 말했다.
“주제넘은 건 제갈유룡 당신이 아닌가요? 당신은 한낱 인간에 불과합니다. 제 과업이 끝날 때 무례한 당신에게 어떤 재앙이 닥쳐올지 두렵지도 않으신가요.”
공손한 척 말하고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뒷감당 되냐’라는 협박이었다. 그러자 제갈유룡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웅, 저 월궁항아(月宮姮娥)의 말을 어찌 생각하시오?”
[…… 항아?]
“그렇소.”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쳐 죽였는데?]
“대뢰옥을 떠돌던 요마(妖魔)의 혼백이 츠쿠요미의 [밤]과 함께 저주가 반전되어 월궁항아로 부활했소. 부활한 항아를 또다시 대뢰옥에서 죽이려다가 투신 예가 간청하여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데려왔고 제곡의 눈에서 숨겨주는 대신 이곳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겼소.”
[호오…… 그런 일도 있을 수가 있군.]
내가 신기해하고 있을 때 월궁항아가 순간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배…… 백웅? 그럴 리가…….”
월궁항아가 놀라는 걸 보자 나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30번째 생을 시작하자마자 달려가서 대뢰옥에서 단숨에 월궁항아를 쳐죽인 게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월궁항아의 기억 속에 있는 내 모습과 지금 모습이 완전히 다르니까 혼란스러우리라.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항아. 피차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군. 하지만 너를 죽일 수 있는 이 주먹은 건재하니까 조용히 해줄 수 있겠느냐?]
불끈!
내가 강철주먹을 앞세우며 위협하자 항아는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 같았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표정을 얼굴에 띄운 항아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날 죽였느냐!!”
[전생의 원한이 무척 깊었다구.]
“전생이라고?! 말도 안 되는…….”
[사실이야. 얼마나 깊은 원한인지 너를 10번 정도는 죽여야 속이 풀릴 정도거든.]
28번째 삶에 항아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린다. 그나마 30번째 삶에 또 다른 고생을 워낙 많이 해서 조금 희석이 되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들어서 항아를 죽였으리라. 나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빠르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듣자 하니 나한테 죽은 덕에 선녀로 부활했으니까 덕 봤구만. 그럼 얌전히 집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고.]
“이…… 이놈……!!”
항아는 부들부들 떨다가 이윽고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주르륵!
“흑…… 흐윽…… 으으으…… 본녀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단 말인가…….”
[…….]
“그저 연인과의 사랑을 원했을 뿐인데…… 더러운 요마 두꺼비로 강제로 살아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간들에게 능욕당하다니.”
항아같은 절세가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는 걸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잘못했나 싶어서 마음이 뒤흔들릴 것이다. 나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매듭] 때 생각만 하면 정말 이가 갈릴 지경이라서 금세 냉정해지고 말았다. 나는 퉁명스럽게 항아에게 말했다.
[꼬우면 너도 천암비서 얻던가.]
나는 알고 있다.
저 녀석이야말로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어떤 패악질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놈이라는 걸.
“으으으!!”
항아가 분노인지 원망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내고는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서 강렬한 술법의 인(印)을 맺었다. 당장에라도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기색이었는데 제갈유룡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약을 무시하고 멋대로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어느새 그만큼 힘이 강해지다니 역시 고대의 신족…….”
촤라락
쩌정!!
제갈유룡이 토요를 발동하여 항아의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술법의 기운이 허공에서 토요 때문에 소멸되자 항아는 독기어린 표정을 지으며 이번에는 돌풍을 소환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갈유룡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술법밖에 못 쓰는 천녀가 토요를 상대로 계속 덤빈다니 네놈만 손해이다. 시전한 술법이 무효가 되면 네게 주독(呪毒)이 쌓여서 약해진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닥쳐라!! 너희 인간 따위가 감히 본녀를 이토록 능욕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항아가 소리를 지르는 걸 보자 천녀로서의 엄청난 자존심이 그녀가 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것 같았다.
‘항아가 계속 날뛰면 이 연구동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을까?’
토요가 있기에 그럴 염려까지는 없을 것 같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었다. 나는 지금의 내가 항아를 어떻게 해야 빠르게 제압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스윽
나는 팔뚝을 앞으로 내밀며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 백웅이 말한다. [항아] 너는 나에게 [이름]이 귀속된 존재이다.]
잔잔한 내 목소리에 강한 술수를 전개하려던 항아는 흠칫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너…… 설마…… 내 [이름]을…….”
나는 그런 항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의 본질을 거둬들여 직접 다스리겠다!!]
파아아앗 - !!
“꺄아아악 - !!”
다음 순간, 항아의 영체가 빠르게 내 팔뚝으로 흡수되어서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소멸했다기보다는 팔뚝에 새겨진 [이름]으로 본질이 흡수된 것이다. 이제 이로써 항아는 더 이상 이 공간에서 날뛰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는 내가 필요할 때 소환되어서 일해줄 수 있으리라.
그런 항아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역시 제갈사가 말한 대로 당신은 죽으면 다시 시작하는 전생자구려.”
[알고 있었군. 알고 있었는데 아까는 왜 모르는 척했소?]
“그래봤자 나는 기억을 흑요석으로 전해 받지 못했으니까. 헌데 당신의 전생능력의 근원은 천암비서라는 마도서일 텐데, 지금 그 마도서를 잃어버린 상황이라면 곤란하지 않소?”
[사실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소. 그런데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되었기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소.]
“…….”
침묵하던 제갈유룡이 갑자기 정곡을 찔렀다.
“당신의 전생능력은 천암비서가 있든 없든 발동하는 거구려.”
[…… 아니, 그게…… 음…….]
나는 정곡을 찔리자 고민을 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이 반쯤 인정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떻게든 천암비서를 회수하긴 했었지만 사실 별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천암비서를 되찾긴 했지만, 왠지 천암비서 없이도 전생능력이 발동한다는 정황이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암비서를 되찾는 데 최선을 다했던 이유는 천암비서가 나 이외의 타인에게 들어갈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제갈유룡이 말했다.
“백웅. 마도에 속한 자로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소.”
[무엇이오?]
“내가 당신이라면…… 천암비서 그 자체에 생명이 있다고 간주할 것이오. 그리고.”
이어진 제갈유룡의 말에 나는 의외였기에 눈을 크게 떴다.
“언제고 천암비서 그 자체와 대화할 때를 대비할 것이오.”
[…… 천암비서와 대화를 한다고?]
“그렇소. 자기 자신의 의지도 있으며 당신과 계약을 한 상대방이오. 그 마도서와 대화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소.”
[하, 하지만 여태 천암비서와 대화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일방적으로 나한테 단말을 내려주거나 제멋대로 행동하기만 했는데…….]
“그건 간단한 이유지. 아직까지 천암비서는 당신에게 자신과 대화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오.”
[…….]
“언젠가 천암비서가 스스로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든…… 아니면 당신이 말을 걸든…….”
제갈유룡의 말에 나는 왠지 언젠가 그 일이 현실이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바로 그날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날이 될 것이오.”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 그리 달가운 날은 아니겠군.]
“그러니 그전까지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해 두시오. 당신 또한 무한한 전생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유념해 두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서 초상기인을 쳐다보았다. 항아가 갑자기 나타나는 등 번잡한 일이 있었지만 이제서야 초상기인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 이놈이 어떤 녀석인지 한 번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험 삼아서 손을 뻗어서 초상기인의 뺨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너는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제갈유룡이 나를 불렀나 싶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제갈유룡의 심어는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제갈유룡은 그런 장난을 칠 자가 아니었기에 나는 혹시나 해서 눈앞의 초상기인을 쳐다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초상기인이 마음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이 혼돈에서 우리를 구해줄 게 너인가? 대답해라!!]
[어…… 어? 무슨 소리냐? 너는 초상기인이냐?]
내가 당황해서 그 목소리에 대꾸하자 초상기인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다시금 강하게 내게 마음을 전달했다.
[‘우리’는…… 이 무저갱에 있다…… 너희가 아무렇게나 혼돈을 퍼다 담은 덕에 이성을 되찾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름도 존재도 잊었던 자들이다…….]
[…….]
[너는 이 혼돈을 수습할 자신이 있느냐? 그럴 자신이 있다면 우리를 꺼내 다오…… 그리고 우리에게 이름을 부여하여 우리의 주인이 되어라!!]
[혼돈이라니 무슨 말이냐? 너희는 혼돈에서 탄생했단 말이냐?]
[…… 이 무저갱은…… 끝없는 죽음…… 우리는 억겁의…… 실로 신조차 상상할 수 없는 억겁을 헤매었나니…… 두 개의 세계는…… 무한히 겹쳐져 있다…….]
다음 순간 거대한 포효 같은 외침이 내 정신세계에 울려 퍼졌다.
[최초에 가장 거대한 두 개의 권능을 가져간 자…… 그 자에게 대항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이름과 힘을 부여하라!!]
쿠웅!!
나는 초상기인에게서 강렬한 파동이 터져 나와서 뒤로 밀려 나와서 벽에 부딪혔다. 벽이 우그러지고 강철 몸이 약간 찌그러졌기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갈유룡이 깜짝 놀랐다.
“어…… 어찌 이런 일이? 괜찮소?”
[…….]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초상기인을 만져보았지만 아까 같은 반응은 오지 않았다. 난 그 사실에서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방금 그 마음의 소리는…… 내게 요구나 강요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구조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어.’
그리고 초상기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인격은 단수가 아닌 군체(群體)인 것 같았다. 아마 한두 명이 아닐 것이리라.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방금 알아낸 사실을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갈유룡의 얼굴이 약간 하얘졌다.
“그럴 수가…… 그 말대로라면 이미 이 초상기인의 내면에는 인격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수만 번 손질할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당신이 손을 대자 반응한 거지.”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소?]
“이유…… 그렇군.”
제갈유룡이 잠시 후 뭔가를 알아챈 듯 말했다.
“당신만이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자격이 있는 것이 틀림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