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1화
후와아앗!!
다음 순간, 토요 팔괘도에서 거대한 영기가 꿈틀거리더니 하나의 형체를 구현화시켰다.
정갈한 묵의(墨衣)를 입고 있는 삼단같은 칠흑 머리칼의 미인 - 무기는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섬섬옥수에는 알 수 없는 고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그녀의 몸 주위를 마치 공전하는 행성처럼 회전하고 있는 영력의 덩어리는 토요의 정령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연하며 차가운 인상을 지닌 토요의 정령은 싸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토요의 정령. 그대가 제갈일족이 늘 말하던 백웅이란 자인가?]
수요와 화요의 정령을 본 적이 있었기에 토요의 정령이 인간화했다는 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토요의 정령 또한 각성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약간의 놀라움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렇다…… 토요의 정령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
토요의 정령은 나를 깊게 관찰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내 주인이 될 생각이 있느냐?]
[엉?]
갑자기?
내가 어리둥절해서 토요의 정령이 마치 선심을 베풀듯 말했다.
[너 정도면 내 주인으로 어울릴 것 같다. 내 주인이 된다면 천하를 쥘 수 있게 해 주마.]
[…… 아니 지금은 딱히 천하를 쥐고 싶지는 않아서.]
[감히 내가 권하는데도 튕긴다는 소리냐?]
자존심이 상한 듯 토요의 정령이 말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제갈유룡이 초상기인의 위치를 숨기려고 널 꺼낸 것 같거든. 목적부터 달성하고 나서 얘기하는 게 어때?]
[흥…… 그깟 게 뭐가 어렵다는 것이냐.]
토요의 정령은 양팔을 들어 하늘로 향하며 외쳤다.
[잘 보아라…… 이게 바로 해방 토요의 힘이다!]
쿠오오오!!
다음 순간, 사방에 무려 수백 개나 되는 고대의 문자가 떠올랐으며 그 문자 하나하나가 강대한 영기를 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양파처럼 겹쳐 있는 결계들이 잠시 모습을 비추었고 사방의 공기가 꽉꽉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크게 압박을 받아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으니 지금 어떤 수준의 결계가 펼쳐졌는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갈유룡이 감탄한 듯 말했다.
“팔괘(八掛)를 중첩시켜 제곱으로 압축시키고도 모자라서 사방(四方)으로 한 번 더 겹쳐서 256중 장벽이라…… 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이런 결계를 만들 수는 없겠지.”
[제갈유룡. 언제까지 그런 뻔한 소리를 할 것이냐? 아무리 구천현녀의 계약자라도 이 결계 내에서 우리를 감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구천현녀 본인이 오지 않는 이상!]
“대단하구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심 감탄했다.
‘해방토요…… 굉장하구나.’
금천재의 권능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는 건 해방토요의 결계는 설령 구천현녀의 본체가 나타나서 공격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기본적으로 [옛 지배자]를 상대로 해도 꿀리지 않는다는 것이니, 과연 해방칠요의 일좌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해방토요로 방어하고 해방수요나 해방화요를 써서 공격한다면…… 평범한 인간도 지배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칠요는 역시 대단한 보물이 맞았다. 그렇기에 앞으로 신력을 회복한다면 반드시 내가 얻었던 과거의 칠요들을 모두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느꼈다.
해방토요의 결계가 완성되자 제갈유룡은 그제서야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뭔가를 본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건…… 반고의 상…… 이 아니라 다른 상……? 용(龍)이오?]
“후후. 반고의 상이라고 착각했나 보군. 생긴 게 전혀 다른데도 착각한 걸 보면 역시 당신은 신력에 있어서 인간과 차원이 다른 감지력이 있는 것이오.”
뭔가 즐거운 듯 껄껄 웃던 제갈유룡이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용상(龍像)을 들어서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창세신 반고를 상징하는 상이 있다면 마땅히 다른 신들을 상징하는 상 또한 존재하는 법. 일례로 당신은 과거 전욱의 동상을 소유했지 않았소? 나는 그 점에 착안해서 대재앙이 닥쳐온 후 각지의 유적을 비밀리에 탐색했고 그곳에서 복희(伏羲)의 상을 찾아내었소.”
[……!!]
“무려 복희가 과거 인간제자들에게 만들 것을 허락한 보물 중의 보물. 격으로 따지면 도리어 반고의 상보다 위에 있는 게 이 복희의 상이오. 당신에겐 별 영향이 없어 보이지만, 이 또한 신의 본체를 묘사한 것이라 보통 인간은 이 상을 보는 순간 정신이상에 걸리고 미쳐 버리지.”
복희의 상!
상고시절의 유물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나는 신기해서 그 복희의 상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복희의 상을 왜 꺼낸 것이오?]
“비밀장소로 향하는 열쇠로 설정했기 때문이지. 이렇게.”
휙
복희의 상을 아무렇게나 제갈유룡이 바닥에 내던지자, 놀랍게도 바닥에는 그대로 무저갱 같은 구멍이 생겨나서 흔적도 없이 복희의 상을 집어삼켰다.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기괴한 변화였지만 아마도 차원을 직접 일그러뜨려서 만든 비밀통로로 보였다.
‘저런 건 아무리 대라신선이라도 눈치챌 수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신의 계약자와 수백의 신선들이 포진하는 이 남경성에서 비밀장소를 만들 수 있다니! 새삼 내가 제갈유룡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두를 때 제갈유룡이 말했다.
“따라오시오.”
내가 제갈유룡을 따라서 그 무저갱 같은 구멍으로 들어가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과 대조적으로 발에 계단이 닿이는 게 느껴졌다. 계단을 천천히 따라서 내려가다 보니 바깥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의 깊이로 내려왔고, 다 내려오자 갑자기 사방이 환해졌다.
두웅!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대(臺)가 있었고 그 대의 위에는 팔괘문양에 둘러싸인 초상기인이 있었다. 나는 저게 바로 비밀의 초상기인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초상기인이 백발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백발의 초상기인…… 저건 설마 진이오?]
“아니오. 애초에 그 백발의 초상기인이 왜 백발이었는지 알고 계시오?”
그러고 보니 그건 들은 적이 없네?
[잘 모르겠소만…….]
“초상능력의 수준이 낮거나 갯수가 적은 경우 외견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소. 그러나 초상능력이 극치에 도달하거나 가짓수가 매우 많아지면 필연적으로 백발이 되는 것이오. 왜냐하면 초상능력을 일으키는 상단전(上丹田)이 극도로 혹사당하면서 육체에까지 그 부담이 전이된 것이지.”
[…… 그러니까 백발이라는 건 초상기인의 육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신호였던 거요? 고생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늙으면 빨리 백발이 되는 것처럼?]
“그렇소. 허나 최강의 초상기인 단 1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초상기인도 그만큼 능력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뿐이지.”
[…….]
설마 그런 것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제갈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의 전생기억과 제갈사, 그리고 저 태극(太極)의 대(臺) 덕분에 초상기인의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소. 그래서 굳이 진시황의 영혼까지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백발의 경지까지 손쉽게 초상기인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오.”
[태극의 대…… 저 상고시대의 유물을 용케도 발견했구려.]
잘 보니 초상기인이 있는 저 대는 내가 몇 번이나 보았던 태극의 대였다. 탁록시대부터 존재하던, 인간의 [혼돈의 재능]을 인위적으로 발현시키는 보패! 물론 탁록시대에는 이미 꽤 파괴되어서 부작용이 생길 지경이 되었는데 후대에 주운 저 태극의 대가 제대로 작동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제갈유룡이 훗 하고 웃었다.
“인간이 태극의 대가 어디있는지 모른다 해도 구천현녀까지 모를 수는 없지. 구천현녀가 지상에 강림할 때 그녀와 교섭해서 위치를 알아내었소. 물론 복원까진 힘들었지만 초상기인을 양성하는 제작과정에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소.”
[그랬군.]
“문제는 백발 경지의 초상기인을 만든 이후였소. 당신도 알다시피 아무리 초상기인이 강해져도 각성 진시황 수준이 한계요. 그 존재 또한 강하긴 했지만 진짜 신격을 상대로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 그래서 나와 제갈사는 백발의 경지를 넘어서는 초상기인을 제작하기로 합심했소.”
나는 의외였기에 제갈유룡을 돌아보았다.
[초상기인의 상단전 때문에 육체가 무리하게 되어서 백발이 되는 거라면서? 그러면 더 이상의 강화는 불가능한 게 아니오?]
“물론 육체는 더 이상 강화할 수 없소. 이미 동서양의 모든 술법과 귀한 재료가 모두 들어가서 연성된 게 초상기인이니 이것보다 더 좋은 육체는 만들 수 없지. 하지만…….”
제갈유룡의 눈이 빛났다.
“육체를 발전시킬 수 없다면 정신(精神)을 발전시키면 되는 것이오.”
정신?
나는 제갈유룡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해서 말했다.
[무슨 소리지? 상단전의 힘으로 초상능력을 쓰는 거니까 이미 초상기인의 정신력은 발전할 만큼 발전한 게 아니오?]
“우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소. 헌데 초상기인의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이어진 제갈유룡의 질문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초상기인이 의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
뭐?
너무 생뚱맞은 질문이라서 나는 잠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대꾸했다.
[못 쓰지. 쓰는 걸 본 적도 없소.]
최강의 초상기인인 진조차도 의념을 쓰지 못했다. 그저 무시무시한 초상능력을 마구 휘둘렀을 뿐 의념 같은 무공의 영역은 아예 손도 대는 걸 본 적이 없다. 내 대답에 제갈유룡이 말했다.
“그렇소. 원래 초상기인은 의념을 쓸 수 없소. 그건 왜라고 생각하시오?”
[왜냐니…… 음…….]
막상 제갈유룡의 말을 듣고 보니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서라고 하기엔…… 인간이 아닌데도 의념을 쓰는 존재들을 본 적이 있다.’
탁록시대에 거신족 절대고수인 유망에다가 외계인 절대지경 검성인 아지다하카까지 봤는데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의념의 조건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과 유사하게 생겼어도 인간과 다른 구조로 만들어진 초상기인 또한 육체 그 자체만으로 의념을 못 쓰는 이유라 할 수 없다.
이윽고 나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대답을 내어놓았다.
[의념이란 상상력이기도 하지. 초상기인의 정신은 상상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오?]
“……!!”
그 말에 제갈유룡은 살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상당한 통찰이오.”
[당신이 생각한 답과 비슷하오?]
“그렇소. 초상기인에게는 이성(理性)은 있으되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니 의념 같은 고급단계의 정신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오. 그게 초상기인이 본디 지니고 있는 정신적 능력의 한계이지.”
[십이연기는 뭐요?]
“불가의 이론이오. 괴로움(苦)의 원인을 12가지로 나누어 통찰한 것인데 깨달음을 지니지 못한 자가 인식(認識)을 얻는 과정을 말한 것이오. 앎 그 자체가, 삶의 괴로움을 불러오는데 그 원인이 12가지라는 것이지.”
[흠…….]
“초상기인은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이성이 있으나 이와 같이 삶을 실감할 수 있는 통찰이나 감각의 작용이 무척 희박하오. 진의 경우는 진시황의 영혼을 그대로 덧씌운 거라 이런 제약이 덜했지만 평범한 초상기인은 인간성도 십이연기도 없는 기계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의념 같은 건 쓸 수 없소.”
대충 제갈유룡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그래서 의념 얘기는 왜 꺼낸 것이오?]
“본래 의념을 쓸 수 없는 초상기인이 정신능력을 더욱 발전시켜서 의념을 쓸 수 있게 되면 어찌 되겠소? 그렇게 되면 상단전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어 생긴 백발의 부작용이 사라져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오.”
[……?!]
“무림인으로 치자면 초범입성(超凡入聖), 반로환동(反老換童)에 상응하는 경지라 할 수있지.”
의념을 쓰는 초상기인은 본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고?
아니, 그 전에 그게 가능한 거야?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자…… 잠깐. 의념이라는 건 최상승 고수의 증거인데…… 초상기인이 그걸 쓴다는 건 그놈이 무공 또한 절세지경으로 쓸 수 있게 된다는 거요?]
“그렇소.”
[무슨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