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1575화
나는 잠시 후 일행과 함께 망량선사의 마을에서 나왔다. 그러자 사방의 운무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밤]으로 가득 찬 하늘이 보였다. 백련교주가 혼자 왔었다는 건 사실인지 주변에 누군가가 매복해 있는 기척도 없었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아까 했던 말은 뭐요? 스사노오가 정말로 타락했소?]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영과 고려에 거대한 재액을 몰고 온 타락한 악신이 되었소.”
나는 망량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스사노오!
본디 후지산(富士山)의 땅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다가 갑자기 신성을 되찾아서 부활한 그 존재는 동영의 삼대 신이었다. 그자는 교토의 용맥을 장악하고 있다가 나와 만나서 여러 가지 교섭을 했었고, 그 당시 만났던 스사노오는 전형적인 질서의 신이며 상당히 훌륭한 인품을 가진 존재였다. 휘하에 정령신인 히노카구즈치를 거느릴 정도라면 그자는 선한 진영이라고 봐도 되었던 것이다.
그런 스사노오가 타락하다니!
[도대체 언제…… 왜……?]
내 반문에 망량이 말했다.
“그건 직접 가서 설명해주겠소. 나머지 분들은 먼저 남경성에 복귀하시구려.”
“알았네.”
파앗
미호의 가마를 타고 검마가 저 하늘 멀리 사라지자, 망량은 품속에서 한 장의 부적을 꺼내더니 허공에 던졌다.
구웅!!
갑자기 육중한 소리와 함께 부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차원의 문이 생겨났다. 내가 놀라서 그 차원문을 보자 망량이 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사부님이 있는 이곳은 함부로 이 술수를 쓸 수 없지만 일단 나는 가본 적 있는 곳은 언제든 시해지술로 이동할 수 있소. 스사노오의 본거지 앞에 가본 적이 있으니 이 통로를 따라가면 쉽게 스사노오를 목격할 수 있소.”
나는 놀라서 멍해졌다.
[…….]
“백웅, 왜 그러시오?”
[아니…… 당신 술법 실력이 언제 이렇게 대단해졌소? 아무런 영창이나 집중도 안 하고 수천 리를 단숨에 차원 도약하는 술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다니.]
원래 망량의 실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이 정도면 대라신선도 쉽게 쓸 수 없는 술법인데 도대체…….’
지금의 망량은 무조건 팔선급 이상의 뛰어난 대라신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지경인 것이다. 심지어 그와 비교하려면 수보리같은 초월자급의 술사를 데려와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망량이 훗 하고 웃었다.
“전에 말하지 않았소? 이번 생이 내 최대의 전성기가 될 것이라고.”
[그랬긴 한데…….]
“나는 숙부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전생지식을 최대한 활용했고 천계의 지원도 받을 만큼 받았소. 또한 이십 년이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천계의 비동(秘洞)을 이용해서 시간을 몇 배로 늘려서 수련했지. 게다가 구천현녀의 수제자가 되었으니 나는 현재 천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술력을 지니고 있소.”
[으음!]
“또한 나는 스승님께도 추가로 가르침을 받았소.”
[망량선사에게?]
나는 흠칫했다. 지금까지는 망량이 얻을만한 기연이었다 치더라도 망량선사에게 가르침을 더 받았다는 건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여태 이런 적이 있었나……?’
망량선사의 사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다른 가르침을 받은 것이리라.
망량이 껄껄 웃었다.
“그 가르침은 조만간 보여줄 수 있을 거외다. 아무튼 지금은 갑시다.”
[알았소.]
파앗
나는 망량의 차원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완전히 색다른 풍경이 펼쳐짐을 알 수 있었다.
‘여긴…… 백해(白海)?’
대지의 저편에 바다가 흐르고 있었는데 놀라운 건 그 바다가 푸른빛이 아니라 새하얀 빛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그 새하얀 빛의 너머에는 시퍼런 달이 수평선에 걸려 있었는데 시퍼런 바탕에 마치 일식(日式)에라도 걸린 것처럼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서 섬뜩한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다.
세상에 이런 기이한 장소가 다 있다니!
그리고 그 청월(靑月)이 존재하는 수평선에서는 알 수 없는 어둠이 이따금 파동처럼 번져 나와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파동이 강대한 마력(魔力)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군.]
“이곳은 스사노오의 본체와 가장 가까운 해안이오. 스사노오는 동영의 바다에 자신의 주차원을 만들어서 이계화(異界化) 시켰지. 그리고 스사노오의 마력은 현재 동영과 고려 전체에 영향을 미치며 인간들을 살기 힘들게 만들고 있소.”
[그 말은…… 저 수평선의 청월 가까이에 가면 스사노오를 볼 수 있다는 거요?]
“그렇소. 하지만 지금의 우리로서는 아마 볼 수 없을 것이오.”
[왜?]
망량은 수평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저 백해(白海)는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수평선에 도달할 수 없게끔 되어 있소. 배를 띄우든 날아가든 순간이동을 하든 일단 청월에 다가가려는 의지를 보이는 순간 무한(無限)의 거리가 설정되지. 천계의 신선들을 모두 불러서 백해의 술수를 해제하려 해봤지만, 모두가 실패했소.”
[……!!]
“저건 아마도 스사노오의 신력(神力)을 사용하여 설정된 결계. 최소한 스사노오와 대등한 신격이 와야만 저걸 신력으로 해제하고 스사노오를 볼 수 있소.”
[구천현녀라면 가능하지 않소?]
“그게 문제요.”
망량은 꺼질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스사노오의 결계를 깨는 것은 가능하지만 깨는 순간 타락한 스사노오는 물론이고 그의 주위에 도사린 다른 신격의 합공을 받게 되리라고 예언했소. 현재 구천현녀는 천계에서 현계로 오면서 많이 약해진 상태이기에 그런 모험을 할 수 없어서 저걸 방관하고 있는 것이오.”
[…….]
나는 그 말에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스사노오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 거군. 그 자에게 동료가 있소?]
“동료인지 뭔지는 모르오.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이 포진하고 있을 것이오. 아마 그들 모두가 신이겠지.”
[으음…… 스사노오는 왜 저런 꼴이 되었단 말이오? 이제 이유를 듣고 싶은데.]
“우리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소. 그러나 스사노오는 우리 소을촌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다가 갑자기 [밤]이 시작된 순간 연락이 끊겼소. 그렇기에 스사노오는 츠쿠요미의 [밤]의 재앙이 펼쳐진 직후에 타락했다고 추측할 뿐이오.”
[츠쿠요미의 [밤]…….]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츠쿠요미라는 놈이 수상하군. 그놈이 스사노오를 타락시킨 건가?]
“가능성은 높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인 게…… 그 말대로라면 저 청월의 결계 안에는 동영 삼귀자 중에서 최소 둘 이상이 있다는 뜻. 구천현녀가 섣불리 치는 걸 망설인 것도 이해가 되지.”
[…….]
그럴 만하다. 동영 삼귀자는 동영의 최고신! 한때 삼황오제를 상대로 치고박고 싸웠던 상위신격들이었기에 하나면 몰라도 둘 이상이라면 아무리 구천현녀라도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 밑의 부하며 동료가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치기 힘들 것이다.
망량은 청월의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백웅. 앞으로 당신은 힘을 더욱 모아서 최소한 혼자서 저 결계를 깰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하오. 그걸 위해서는 수많은 인과율이 필요하니, 우리 동료들은 최대한 당신을 도와서 인과율을 모으도록 해 주겠소.”
[으음…… 원래 그럴 생각이니 문제는 없지만…….]
“뭔가 문제 있소?”
나는 떫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원래 이쪽은 십이율주 관할 아니오? 그자는 자기 일을 내던져 버리고 뭘 하고 있단 말이오?]
“십이율주 얘기를 듣지 못했소?”
[못했소만…….]
“십이율주는 실종된 지 오래요. 아마 당신이 실종되었던 그 시기에 사라졌던 걸로 추정되오.”
나는 뜻밖의 말에 흠칫했다.
[…… 어엉? 그때 며칠만 실종되었다가 되돌아왔던 거 아니었소?]
그때 십이율주와 이환웅의 상황을 정리했을 때는 그런 결론이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망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까진 모르겠소. 하지만 20여 년 동안 십이율주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가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너무 많았소. 단(檀)의 일족과 삼사는 세계수를 지키며 본거지에 웅크리기에 급급했고 고려와 동영은 속수무책으로 마족(魔族)들에게 침범당했소. 너무 참상이 심해서 우리 쪽에서 어쩔 수없이 신선과 고수들을 파견해서 생존자들을 도와줬을 정도로.”
[…….]
“불행 중 다행인 건 신단수는 아직 생존해 있다는 거지. 그게 죽었다면 아마 고려와 동영을 살릴 도리도 없었고 수많은 악신들이 봉인에서 풀려 부활했을 거요.”
[미친…… 생각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구려.]
그나마 중원의 상황이 제일 나은 거였단 말인가?
내가 질린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망량이 말했다.
“백련교주가 스사노오를 토벌하고 오라고 한 이유가 있소. 저걸 토벌하는 순간 동영과 고려의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단의 일족까지 우리의 수중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오. 낙양성을 쳐서 합병하는 데는 최고의 명분이 되겠지.”
[흐음.]
“그리고,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소.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내겠군.”
[음?]
쿠구구구구…….
쿠구구구구구구!!
잠시 후 백해의 수저(水底)에서 육중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천공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웬 대사(大蛇)의 그림자가 번쩍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 거대한 뱀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전율하고 말았다.
[윽…… 저건……?!]
엄청나게 크다!
복희 같은 우주급 존재에는 비견할 수 없지만, 눈에 미처 그 모습이 전부 담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저 정도면 몸 크기만 수백 리에 이를 게 틀림없었으며 달기의 본체보다 몇 배 이상 거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단순히 거대함 뿐만이 아니라 저 거대한 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또한 달기에 비견될 만하다는 점이었다.
고오오오
천지를 메우며 쏴아아 움직이는 그 거대한 뱀을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망량이 껄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바로 스사노오가 불러낸 거대한 뱀,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 저놈한테 백해의 공략을 시도한 수많은 신선들이 잡아먹혔소.”
[야마타노오로치?! 그건 분명 스사노오가 자신이 삼황오제와 싸운 기록을 인간들이 착각해서 기록했던 거라고…….]
“아마 그 당시에도 스사노오가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던 거요. 실제로 야마타노오로치는 존재했으며 스사노오가 도쿄의 용맥에 잠재된 강대한 힘을 이용하여 저놈을 달기 이상의 괴물로 양성하고 있었소.”
[……!!]
“보면 알다시피 달기급의 괴물이오. 다행히 저 청월 인근만 지키고 있기에 지상에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저런 괴물을 상대하면서 스사노오까지 토벌할 힘을 남겨두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오. 최소한 지금 전력의 두 배 이상이 필요하지.”
[으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스사노오, 이 새끼……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나한테 거짓말을.’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당시에도 완전한 신뢰관계가 아니라는 건 서로가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비장의 한 수를 일부러 말해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월이 지나서 뒤통수 맞은 기분을 느끼는 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갑자기 내 팔뚝에서 강한 힘의 반응이 오면서 무언가와 공명(共鳴)하는 게 느껴졌다.
[……?!]
내가 놀라서 팔뚝을 쳐다보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팔뚝에 [이름]이 빠르게 떠오르는 게 보였다.
그 이름은 바로 [이자나기노미코토(伊邪那岐命) ] 였다.
후와아악!!
그 순간 내 정신세계에 거대한 환영이 덧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환영이 마치 내 영혼에 직접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인과율을…… 다오!!]
그 목소리는 마치 피가 끓는 듯이 애절했다.
[나를 이 주박에서 풀어다오……!! 그렇게 해준다면 네가 저 뱀을 굴복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마!!]
[……!!]
[인과율을 다오!!]
점차 선명해지는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게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설마…… 이자나기의 영혼?!’
설마 내 팔뚝에 봉인되어 있던 이자나기가 내게 직접 말을 걸고 있단 말인가?
나는 이해가 안 되어서 이자나기에게 반문했다.
[이자나기! 지금까지는 가만있다가 왜 지금 와서?]
[…… 나는…… 존재의 자격을 잃었다…… 너에게 말을 거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다……!!]
[……?]
[이 메아리를 들어다오!! 인과율이 이어진 상황에서만 출현할 수 있는…… 나의 절규에…… 반응해다오…… 인과율을 달란 말이다!!]
쿠와아앗
‘으윽!!’
순간 거대한 어둠의 얼굴이 내 앞에 쇄도하는 듯한 환영 때문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실제로는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필사적인 의지가 내게 부딪히면서 생긴 착각일 것이리라. 나는 이자나기가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젠가 주겠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크아아아아……!! 이놈!!]
파앗
다음 순간 이자나기의 목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망량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백웅. 갑자기 왜 아무 말도 없소? 괜찮으시오?”
[…….]
나는 팔뚝을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인과율을 빨리 모아야 하겠소.]
팔뚝의 [이름]들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팔뚝을 통해 힘을 빌려올 수 있다면, 이름이 새겨진 모든 자들의 힘을 내가 원할 때 쓸 수 있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