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6권 1화
나는 백련교주를 마주치자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이건 분노인가?’
솔직히 분노가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백련교주는 내가 보는 앞에서 제갈사의 머리통을 짓밟아서 터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사가 이미 이혼대법으로 회피한 상태에서 껍데기뿐인 육신을 부순 것이었기에 그렇게까지 분노할 만한 일이라기엔 애매했다.
그래서 분노의 비중은 생각보다 낮았고, 그보다 백련교주에게 더 강력하게 치밀어오르는 감정은 두 가지였다.
반가움. 그리고 의문.
하지만 그런 걸 너무 대놓고 드러나면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도 확실치 않은 백련교주에게 빌미만 주는 셈이다. 수십 번 전생하면서 수백 번 만난 상대였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는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설마’라. 그때 내 정체를 어림짐작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백련교주의 말대로라면 그는 내가 제갈사의 혼을 수습했던 첫 대면의 시점부터 나를 백웅일거라고 의심했다는 뜻이다.
내 대꾸에 백련교주가 대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과 너무 달랐으니까. 그러나 상황으로 볼 때 그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근거가 없는걸.]
[근거라면 있다. 바로 그 몸뚱이에 어설프게 달라붙어 있는 혼(魂)의 균열이다. 그대의 혼과 육신은 다른 것이라 느꼈지.]
백련교주의 말에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자신을 관조하자, 아주 희미하게 육신과 영이 합치되지 못해서 생겨 있는 균열이 느껴졌다.
‘이걸 봤다는 건가?’
그러나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았고 기가 막혀서 말했다.
[이혼대법이 경지에 오른 나조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균열이다. 이걸 그 짧은 순간에 알아차렸다는 말이냐?]
[나는 언젠가 제갈사와 싸우게 되리라 생각하고 남몰래 이혼대법의 대항책을 연구했다. 또한 제갈사와의 접전에서 혼의 맥동을 직접 느꼈으니 그 감각이 정점에 도달했던 때였지. 그렇기에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
역시 백련교주는 괴물이다. 백련교주는 무림의 최종 흑막에 걸맞는 존재라는 게 지금도 여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저 뛰어난 두뇌 회전에 절대 방심하지 않는 신중함과 노련함은 그를 단순히 무력만으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호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겁도 없이 망량선사의 마을 내부로 직접 들어오다니…… 네가 아무리 강해도 여기서는 벌레처럼 죽을 수 있다는 걸 모두 각오하고 들어온 것이겠지?””
미호의 말대로였다. 우리는 아직 마을에서 나가지 않았기에 이곳은 망량선사의 권능이 고스란히 미치는 영향권이자 이계(異界)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에 망량선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백련교주가 그동안 강대한 힘을 쌓았더라도 순식간에 소멸하게 되리라.
백련교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망량선사는 우리처럼 하찮은 자들의 분쟁에 직접 끼어들 만한 존재가 아니며 특히 인과율에 맞지 않은 개입은 하지 않는다. 그가 딱히 나의 편은 아니지만, 너희 편도 아니지. 싸우려 들지 않는다면 내게 위험은 없다.]
“말은 잘하는군…….”
미호가 입을 삐죽였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백련교주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백련교주.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소? 용건을 밝히시오.”
[그러려던 참이다.]
성큼 두세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 백련교주는 나를 좀 더 살펴보려는 듯 상체를 약간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를 주의 깊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나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전달해다오.]
나는 백련교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흑요석을 쓸 수 없어.]
[흑요석을 쓸 수 없다고?]
[그리고 또 하나…… 너는 어찌 되었든 제갈사를 죽였어. 제갈사의 혼은 살아남았다지만 세상의 기준으로는 살해한 게 맞지. 그런 너를 어떻게 함부로 믿고 내 이야기를 해준단 말이냐?]
[…….]
내가 그를 강하게 경계하자 백련교주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왜 싸웠는지는 제갈사가 말하지 않던가?]
[세계를 구하는 방법의 차이로 싸웠다고 들었어. 제갈사는 나를 끝까지 기다리자고 했고,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기로 했다고…….]
[틀린 설명은 아니군.]
[백련교주. 대체 어떤 방법을 쓰려고 했다는 거냐?]
내 반문에 백련교주가 눈에 이채를 띄는 듯했다.
[과연. 제갈사가 그걸 이야기하지 않았군. 하긴 자신에게 불리할지도 모르니.]
[젠장…… 얘기 좀 해봐. 대체 무슨 갈등이 생겼길래 제갈사를 죽인 건지.]
[간단하다. 네가 언제 되돌아올지 기약이 없기에…….]
이어진 백련교주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삼황(三皇)의 힘을 빌려 새로운 평행세계를 만들어 인간을 거기로 이주시키려 했다.]
[……?!]
뭐, 뭐라고?
여기서 삼황이 왜 나와?
그러자 미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나는 미호의 반응에 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호? 너도 설마 알고 있었냐?]
“그래. 네가 너무 바빠 보여서 상황이 정리되면 차분하게 얘기해줄 셈이었다. 사실 백련교주 녀석은 나한테도 회유를 했으니까.”
[……!!]
“하지만 거절했다. 나는 네가 되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멍하니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 백련교주. 무슨 생각으로 그런 계획을 진행한 거지?]
[제갈사가 말했듯 나는 나의 방식으로 인류를 구하려 했다. 어차피 츠쿠요미를 찾을 수 없기에 수십 년 내로 [밤]의 재앙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인류가 버틸 수가 없게 되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인류를 피신시키려 했을 뿐이다.]
나는 백련교주의 계획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타 차원의 평행세계로 이주하는 거대한 계획이라면 신적 존재와 협력하는 게 옳았고 질서의 신인 삼황이라면 협력할 만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아서 그에게 반문했다.
[으음.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갈사와 죽자사자 싸웠다는 건 납득이 안 돼.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냐?]
[후후. 숨기고 있던 건 바로 제갈사다.]
이윽고 백련교주가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나는 정말로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제갈사는 네가 귀환하지 못한다면 인류를 피난시킬 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인신공양해서 너에게 인과율을 넘겨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방법이 많이 있겠지.]
[뭐…… 뭐?!]
[제갈사의 주장은 쓸모있는 ‘자원’으로서의 인간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거였다. 마도(魔道)의 관점에서는 당연한 것이기에 나도 제갈사를 이해하긴 한다.]
[믿을 수 없어!!]
[왜 못 믿겠다는 거지? 제갈사가 지금은 힘을 많이 써서 휴면 상태 같지만, 그가 깨어나기만 하면 바로 들통날 얄팍한 거짓말을 하러 내가 여기까지 왔다 생각하는 것인가?]
[…….]
그건 아닐 것이다.
나는 백련교주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백련교주는 거악으로서의 품격을 아는 자이므로 거짓부렁이나 하려고 여기에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잃자 검마가 말했다.
“나는 다른 이유로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없소.”
[어떤 이유 말인가, 검마.]
“당신은 제갈사와 마찬가지로 악(惡)에 몸담고 있으며 그 원리를 이해하는 자. 당신 또한 인신공양을 그리 꺼리지 않으니 인류를 피신시키려고 삼황과 협력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오. 당신은 인류의 목숨과 고통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오.”
[흐음.]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검마의 말에 약간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래. 원래의 백련교주라면 인류를 자원으로 소모하자는 제갈사의 의견에 찬동하면 했지 억지로 인류를 구하려고 계책을 짜낼 자가 아니야. 이런 식의 대립은 너무 이상해.’
도리어 원래라면 백련교주와 제갈사가 한편을 먹고 다른 동료들과 대립하는 게 정상 아니었을까?
평상시의 백련교주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상했기에 내가 의혹 어린 눈으로 백련교주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망량선사의 마을로 들어온 것도 있다.]
[무슨 말이야?]
[너희는 삼황오제를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내가 어리둥절 해하자 백련교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츠쿠요미는 명목상 흑월(黑月), 흉행의 집행자이다. 과거에는 대홍수를 일으켰던 존재였고 지금은 [밤]이라는 대재앙을 일으킨 존재. 헌데 그 츠쿠요미만 날뛰고 있으며 정작 그 츠쿠요미에게 일을 시킨 삼황오제는 여태껏 모든 호출과 소환에 응답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하고 있다.]
그렇게 말한 백련교주가 힐끔 미호를 쳐다보았다.
[일개 꼬리에 불과했던 미호가 전생동료들의 힘을 빌려서 도리어 본체 달기를 타도하고 그 힘을 흡수했다. 본디 여와가 길길이 날뛸 일이었지. 지금까지 백웅이 전생할 때마다 달기와 미호의 일에는 무척 예민하게 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여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침묵만 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
미호는 침묵했다. 나는 그런 미호의 여덟 꼬리를 보며 이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미호가 왜 저렇게 강한가 했더니…… 달기의 힘을 그대로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거구나.’
백련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백웅의 전생 기억에 비춰볼 때 삼황오제들이 이만큼 커다란 재앙이 벌어졌는데도 대리자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은거한 것은 전례 없이 이상한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그들은 지금 뭔가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다. 나는 그 음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직접 그들에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 않던가? 삼황의 정보를 캐내는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인류의 안위를 보전할 수 있으니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었고.]
검마는 눈치챘다는 듯 말했다.
“……흐음. 그래서 삼황이 당신을 감시하고 있을까 봐 일부러 망량선사의 마을에 들어온 거구려. 이곳이라면 아무리 삼황이라도 당신을 감시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 백웅이 귀환하기 전에 어떻게든 삼황의 음모를 밝혀내야 백웅에게 도움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 거였군.”
[허나 제갈사는 그런 나의 접근조차도 위험하다고 여겼다. 내가 삼황에게 이용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였겠지. 지금이라도 삼황의 부하들을 몰아내고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하기 위해 날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제갈사의 설득을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죽인 것이구려.”
[그렇다.]
…….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았다. 어찌 되었든 백련교주의 속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백련교주가 제갈사를 살해했다는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동료를 살해한 동료를 계속해서 신뢰한다는 건 상당한 저항감이 있는 일이 분명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말없이 듣고 있던 망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생각도 제갈사의 생각도 일리가 있소. 허나 나는 숙부의 생각이 더욱 옳다고 생각하오.”
[어째서이지?]
“삼황은 그리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오. 백련교주 당신이 현 인류 최강자 중 한 명이자 웬만한 하급신을 때려눕힐 기량이 있다 한들, 그들에게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어쩌면 그들에게 끝까지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지도 모르는 것이오.”
[그건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삼황은 이미 나를 꽤 신뢰하고 있지. 이걸 보거라.]
스윽 하고 백련교주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잠시 새하얀 백염(白炎)이 치솟아 올랐다.
후우우우……!!
“……!!”
“으음.”
[…….]
다들 그 백염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일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왜냐하면 그 백염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의 농도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어중이떠중이면 몰라도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강자였기에 도리어 그 백염의 위력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저건 순수한 신력의 덩어리.
마왕(魔王)도 태워죽일 수 있는 불이다.
망량이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권능……!! 설마 신농이 당신에게 그 권능을 내려줄 줄이야!”
[이 정도면 충분한 신뢰의 증거가 아니겠나? 신농이 불꽃을 하사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똑똑한 네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
[이게 없었다면 제갈사와의 싸움에서 버틸 수가 없었지.]
그렇게 대꾸한 백련교주는 자신의 손을 꽉 쥐어서 백염을 소멸시키고는 말했다.
[백웅. 네가 나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너의 동료이다. 나는 네 동료로서 삼황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정보를 얻어내는 내 계획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 오늘은 네게 그 이야기를 하러 찾아온 것이다.]
[흠…….]
[겉으로는 낙양성주와 남경성주의 대립을 통해 그대와 척진 형태가 되어도 좋다. 어차피 나는 그대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백련교주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배신한 게 아니었고 단지 삼황에게 접근하려는 자신의 무모한 계획을 관철하려는 고집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삼황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이 망량선사의 마을에 단신으로 들어온 것만으로 그의 진정성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마 그때 나를 막아섰던 그 세 명의 신적 존재도 삼황의 부하들이란 말이오?]
[그렇다. 나의 호위 겸 감시로 강림한 자들이지. 하나같이 인간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 우주에서 알아주는 강자들이다.]
[…….]
[백웅. 이젠 내게 그대의 이야기를 해줘도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정도면 백련교주의 소명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나는 간략하게 요점만 추려서 그동안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약 한 식경 동안 내 간추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련교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남경의 인간들뿐만 아니라 낙양의 인간들에게서도 신앙을 얻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군.]
[인과율을 빠르게 얻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오.]
[하지만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천계의 파벌 다툼이기에 명분이 없다면 쉽사리 낙양의 문을 열어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겠나?]
[뭔가 계책이 있소?]
[앞으로 세력을 키워 낙양을 포위해라.]
백련교주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앞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
뭔 소리야?
나는 백련교주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지만, 옆에 있던 망량이 이해한 듯 훗 하고 웃었다.
“낙양과 남경 외에도 요충지에는 성이 지어져 있지. 그 각각의 소성(小城)과 잔존 세력을 키워서 확실하게 복종을 받고, 더 나아가서 서역까지도 백웅의 세력권으로 하겠소. 그러고 나서 압도적인 세력을 이용해서 낙양에 항복을 종용하면 충분한 명분이 있으니 항복을 하겠단 소리구려.”
[그렇다. 내게 명분만 준다면 언제든 너희 뜻대로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단, 스사노오부터 어떻게 처리를 하고 와 줘야 할 것이다.]
“후후! 적의 수장과 이런 교섭을 한다는 건 본디 반칙이나 다름없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망량이었다. 하긴 이런 식이면 사실 이미 천하를 통일한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한 번에 항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천계세력들과 삼황이 내게 더 큰 힘을 주어서 너희에게 대항하라고 종용하겠지. 나는 그걸 기회로 삼아서 더더욱 힘을 키운 후 삼황의 세력으로 파고들도록 하겠다.]
“흠…… 자신 있소? 제갈사가 말했듯이 그건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오.”
[글쎄…… 사실 내가 이러는 것도 도저히 지금 상황에서는 답이 없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다. 츠쿠요미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현재로서는 삼황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백련교주가 말했다.
[백웅이여. 조만간 제갈사가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 질문을 해 줄 수 있겠나?]
[어떤 질문이오?]
[그가 내게 말했던 ‘데미우르고스’가 대체 무엇인지…….]
[……? 알았소.]
데미우르고스?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어찌 됐든 백련교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주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안개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연기를 위해 너희를 적으로 만났을 때 마냥 봐줄 순 없을 것이다. 너희가 알아서 상황을 조정해주기를 바란다…….]
스으으
백련교주가 사라지자 검마가 허탈한 듯 말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줄이야. 백웅의 존재감이란 정말 대단하군…….”
[응? 무슨 말이오.]
“백련교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우리 모두가 그동안 긴장해왔고 어쩌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고민했네. 허나 그 또한 자네의 귀환을 인지하자마자 별다른 저항 없이 복종하는 걸 보니…… 새삼 전생자라는 존재가 대단하다고 실감하게 되는군.”
[…….]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나는 그냥 몇 마디 대화한 거뿐인데?
내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멍하니 있자 망량이 말했다.
“백웅.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소?”
[무엇이오?]
“여기서 나가서 나와 같이 갈 데가 있소.”
[어디오?]
“동영이오.”
망량의 이어진 말에 나는 이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 직감했다.
“그곳에 타락한 동영의 삼대신, 스사노오가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