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5권 19화
배당?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눈을 껌벅거렸다. 그러자 렐크로바우스가 내 눈치를 한번 보더니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했다.
[…… 촉룡(燭龍)의 신(神)이 당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했소. 우리 모든 투자자들의 권리와 그에 따른 배당…… 그걸 주기를 원하여 여기까지 찾아왔소, 회장!]
“……?! 회장? 대체 무슨 소리를…… 알지도 못하는 소리 하지 마!”
나는 당황해서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그러자 렐크로바우스가 슥 하고 자신의 손을 들면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이것이 바로…… 권리의 증거요!!]
번쩍!
신력을 머금은 동전은 환한 황금빛을 내었다.
“……!!”
황금 동전!
나는 그 황금 동전을 보는 순간 머리를 크게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저, 저건 [상업의 권능]으로 획득한 동전이잖아!’
내 동전이야!
그리고 내 머릿속에 탁록시대에 이환웅의 제안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당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
[당신만의 주식회사(株式會社)를 설립하기 위해서야.]
[고대신이고 [옛 지배자]고 할 것 없이 이 지구에 와 있는 수백 명의 신들에게 투자받는 거다! 그자들은 말 그대로 위대한 존재니까 당신에게 커다란 투자금을 줄 수 있을 게 분명하지 않아?]
[안 그래도 3급 전귀의 단계에서는 온갖 무형의 파워를 거래하는 게 가능해. 즉, 고대신들에게서 성좌를 제공받거나 혹은 옛 지배자에게서 먼 우주에 있는 별을 제공받을 경우…… 그걸 그대로 당신의 마두로 바꿀 수 있다는 거야.]
[상업의 권능]의 고위단계인 3급, 전귀(錢鬼)의 단계에 이르게 되자 더 효율적으로 힘을 얻기 위해서 내 책사인 이환웅이 제안한 주식회사 계획! 그 계획은 이 우주에 있는 신격과 고위존재들에게 큰 투자를 받아서 효율적으로 마두와 신력을 수집하는 것이었는데, 그 계획을 위해서 나는 최초주주 10명의 서명까지 받아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서명을 받아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이후의 일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우리 회사에 투자하면…… 신력을 배당받으실 수 있소!!]
[그저 우리 회사와 협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해진 주기마다 신력의 정수(精髓)를 배당받으실 수 있소.]
[이 동전을 투자자분들에게 나누어드릴 것이오! 이 동전을 매개체로 하여 정해진 주기마다 투자자들에게 신력을 전송할 것이오.]
[흐음…… 어느 정도의 신력을 배당해 줄 수 있느냐?]
[투자한 것의 5푼이오!]
[배당을 받는 주기는?]
[…… 5천 년이오!!]
그렇다…… 내가 [상업의 권능]으로 획득한 저 황금 동전을 신뢰의 대가로 제시하며 배당을 주기로 약속하며 주주들을 끌어들였었다! 그리고 그 때의 조건은 틀림없이 투자한 신력의 5푼을 5천 년마다 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필멸자의 기준이라면 5천 년이 무척 긴 세월이지만, 문제는 눈앞에 있는 저 수백 명의 영기가 죄다 신(神)이라는 점이다. 5천 년은 결코 그들에게 긴 시간이 아니다.
‘……지금은 그때 이후로 몇 년이 지난거지?’
줘야 할 배당이 얼마인 거야?
나는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렐크로바우스에게 직접 질문하기에는 내가 책임자라는 걸 인정함과 동시에 약점을 잡히는 질문일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눈앞에 있는 렐크로바우스의 정체 또한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전생하던 중에 파우스트가 있는 미래의 세계로 가서 인류의 종말을 지켜본 회차가 있었는데, 그 때 적궁백시를 이용해서 파우스트와 함께 물리쳤던 [옛 지배자]인 것이다.
그 말은…… 저 뒤편에 있는 수백개의 영기 전체가…… [옛 지배자]인 건가?
‘어우 젠장할…….’
그 사실을 깨닫자 더럭 겁이 난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동전이 어쨌단 거요?”
[잘 보시오!]
렐크로바우스는 황금동전을 손가락으로 튕겨내서 내게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동전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추더니 기묘한 진동(振動)을 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황금동전은 내 몸 근처에서 천천히 회전하면서 마치 태양 주위를 행성이 돌듯이 공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렐크로바우스가 씩 웃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그렇군.]
“뭐가 그렇다는 말이오.”
[그 동전에는 완벽하게 똑같은 신력의 파장을 가진 자에게만 반응하는 술식을 걸어두었소. 파장에공명해서 회전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이 그 동전의 주인이라는 뜻…… 즉 당신이 바로 회장이며, 우리에게 배당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증거요!!]
“……!!”
이런 젠장할?!
나는 난데없이 낭패를 느끼자 당황스러워졌다. 그래서 일단 되는 대로 부정하기로 했다.
“자, 잠깐만! 당신들은 신격이니까 얼마든지 술식 따위는 자기 맘대로 조작할 수 있소!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오자마자 망량선사께 공증(公證)을 부탁했소.]
“뭐?”
내가 망량선사를 쳐다보자, 망량선사는 하품을 쩍 하더니 말했다.
[저 자들은 동전의 술식에 아무런 조작을 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공간에서 저놈들 따위가 그렇게 할 수도 없지. 그러므로 그 동전의 주인은 백웅 네가 맞다는 걸 나 망량선사가 보증한다.]
“……?!”
이런 망할 고양이 새끼!! 내 뒤통수를 치다니! 사실을 말해 버리면 어떡해!
이러면 내가 배당을 해줘야 한다는 말이냐!
나는 당황해서 잠시 어버버하며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러다가 급히 말했다.
“초…… 촉룡!! 촉룡 그 새끼가 영업한 거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촉룡한테 가서 말하시오.”
[촉룡은 최고위 금강석(金鋼石) 회원(會員)이 된 후 개인 투자설명회를 모집해서 또다시 피해자를 만든 후 우리를 조롱하고는 잠적했소…… 우리 모두가 촉룡을 찾고 있는 중이오.]
“…….”
[그래도 확실한 건 백웅 당신에게 배당의 의무가 있다는 거요!]
이런 제기랄……!!
‘촉룡 이 개자식……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잠적했어!’
나는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다른 상황이면 내가 책임이 없다고 부정하겠지만 저 황금 동전이 문제였다. 저 동전이 내 신력으로 만들어졌으며 망량선사가 공증까지 해준 이상 저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내가 회장이라는 건 이미 증명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렐크로바우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마…… 만일 내가 당신네들 배당을 해줘야 한다면 얼마나 해줘야 한다는 말이오?”
하기 싫은 말이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상황파악을 하지 않으면 대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렐크로바우스가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더니 말했다.
[내 기준으로 53281년 전에 회원으로 가입했으니 당신은 10회분 배당을 해주어야 하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10회분이라고 보면 될 것이오.]
“10회분이라면 어느 정도인 거요?”
[복리이므로 우리가 투자한 신력보다 최소 5할 이상 더 주어야 할 것이오.]
“엉?! 그런 게 어딨소?”
내가 항의하자 렐크로바우스가 되레 역정을 냈다.
[그런 게 어딨냐니…… 우리는 단 한 번도 배당을 못 받았단 말이오!! 그래놓고 우리가 맡겨놓은 담 보니 보물이니 신력을 한 번도 돌려주지 않았잖소!! 얌전히 정해진 만큼만 받겠다는데.]
“…….”
[좋게 말할 때 우리에게 배당을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주의 인과율에 의거하여 수금자(受金者)를 소환할 것이니.]
“수금자?”
[모르는 건가?]
렐크로바우스가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망량선사를 쳐다보자 망량선사가 천천히 말했다.
[이만한 업보가 쌓였다면 저 자들은 자신의 마력을 크게 소모하여 네게 대가를 받아낼 존재를 소환할 수 있다. 그 존재는 바로 외신(外神)의 사도(使徒)가 될 것이다.]
“……?!”
외, 외신의 사도라고……?!
난데없이 외신이 언급되자 더더욱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졌다. 외신의 사도라면 대체 얼마나 강한 존재란 말인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배당을 하라는 말인가?
지금 나는 본체조차 없어서 깡통 몸뚱이에 몸을 싣고 있는 신세인데……!!
내가 할 말을 잃자 망량선사가 렐크로바우스에게 말했다.
[자, 이만하면 되었으니 너희는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그러자 렐크로바우스가 불만을 품고는 말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우리는 제약 때문에 이런 자리가 아니면 직접 저 자에게 말할 기회조차 변변히 없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채근하여 최소한 1회분의 배당이라도 받지 않는다면 훗날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웅성웅성
[옳소.]
[주주가치 실현하라.]
그리고 렐크로바우스의 의견에 동의하듯 뒤편에 있던 영기들 또한 사나운 마력을 분출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감히 너희가 내게 강요를 하는 것이냐?]
번득!
그 순간 망량선사의 안광이 거칠게 빛나는 게 보였다.
후와아악……!!
그러자 렐크로바우스와 그의 뒤편에 도열해 있던 수백 명의 영기가 마치 강풍에 쓸려나가듯 이리저리 쓰러졌다. 그들은 너무 큰 압력 때문에 못 일어나는 자도 있었다.
[크아악.]
[요, 용서를…….]
한 순간에 수백 명의 영기를 제압한 망량선사는 오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백웅에게는 빚을 갚을 의지가 있다. 나 망량선사가 백웅의 먹튀를 막을 터이니 걱정 말고 오늘은 물러가도록 하거라.]
[……!! 위, 위대하신 분을 믿겠습니다.]
[이 땅에서 떠나라.]
망량선사는 왠지 나른한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경계가 더 이상 부서지기 전에…….]
슈우욱!!
그리고 망량선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렐크로바우스와 수백 명의 영기가 사라졌다.
다시 평화로워진 오두막 주변이었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이런 제기랄……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그냥 탁록시대에 상업의 권능을 더 빨리 성장시키려고 신들에게 투자받으려 한 것뿐인데 5만여년 후인 현 시점에 오니까 빚쟁이가 되어 있다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네 업보다. 그러나 온전히 네 탓만은 아니지.]
응?
내가 뭔가 희망이 생기는 걸 느끼고 망량선사를 쳐다보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변호하여 채권자들을 물려준 까닭은 네게 억울한 점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아니면 이 인위적인 경계의 붕괴를 막을 자가 없기 때문이지.]
“무…… 무슨 소리야? 아무튼 내 사정을 이해해 준다는 거지?”
[…… 백웅, 너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꿈?”
망량선사는 폴짝 하고 담장 위로 뛰어올라서는 고양이 특유의 앉는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세계의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그 혼돈 속에는 모든 것이 있었으나, 단 하나만큼은 존재하지 않았지. 그리고 그 하나를 갈구하여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이 눈을 떴으니 그것이 모든 것의 시초였다.]
“…….”
[너는 이미 절연(絶緣)의 흔적을 보았으리라. 너는 그 광대한 절연이 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을 내뿜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마치 모든 걸 알고 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내가 과거의 전륜성왕을 만나 절연사막을 보았던 사실도 알고 있다는 건가?’
도대체 이 고양이의 정체는 뭐지?
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망량선사의 말에 대답했다.
“모르겠어. 전륜성왕 본인도 절연사막에서 태어난 존재지만 절연의 정체는 잘 모른다고 했었다고. 내가 절연이 뭔지 어떻게 알아?”
[연이 끊긴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 인과(因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인과를 끊는 행위는 인과율이 소모되지 않는가?]
“……소모되겠지. 아마도.”
전륜성왕이 절연의 힘을 쓸 때도 소모를 감당해야만 했던 걸로 봐서는 분명히 인과율을 소모하는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절연하려면 그만한 인과율이 필요한 거겠지. 그런 초월적인 인과율이 생성될 수 있는 경우는 전 우주 역사상 단 하나뿐이다.]
“……?”
[바로 그것이 절연사막의 정체이다.]
뭔 소리야?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망량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절연사막이 탄생하면서 동시에 [사라진 이야기]의 주인(主人) 또한 그 틈새에서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존재는 모든 과거를 잊었으나 마치 창조주와 같이 무(無)에서부터 혼돈의 본질을 끌어내어 소유하게 되었다. 신이 아니지만 무한히 신에 가까운 자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장난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
[경계가 어지럽혀진 이유는 그자와 연관이 있다. 그자가 의도를 했기에 모든 것이 꼬이고 말았지. 심지어 [큰 굴레]의 혼란조차도 그자가 이용할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악랄한 책략은 황제 공손헌원에 뒤지지 않는다.]
나는 망량선사의 말이 뭔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뭔가를 눈치채고는 예리한 눈빛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 상황을 꼬이게 만든 흑막 같은 게 따로 있단 소리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실컷 얘기해놓고 그럴지도 모른다니…… 장난해?”
[적어도 네가 존재하는 ‘지금’은 우주상에 존재치 않는 자이기 때문이지. 존재확률조차 불확실하다.]
“……?”
[그 존재는 자신이 승리하는 순간에만 등장하여 마지막 승리를 쓸어 담을 것이다. 너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자를 상대할 수가 없으리라.]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얼마나 강한데?”
[그자가 인과율을 얼마나 모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허나 중요한 것은 네가 그자를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현재로서는 이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그를 찾을 수 없다.]
“…….”
[너는 이대로라면 왜 지는지도 모르고 지게 될 테지.]
나는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막강하기만 하다면 여러 가지 수단으로 힘을 동원해서 막아볼 건데…… 찾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이런 적수는 생전 처음이다. 망량선사가 나한테 헛소리를 할 리도 없으니 분명히 그런 강적이 존재는 할 것인데 애초에 없는 적을 쓰러뜨린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자는 내 영역을 정면으로 침범해 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경계]를 지키기 위해 너를 도와줄 인과율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엔 네게 필요한 조언을 해 주도록 하지.]
“……!!”
나는 순간 쾌재를 불렀다.
‘망량선사가 대가 없이 조언을 해 준다고?!’
이런 적은 거의 처음 아닌가?!
내가 두근거리며 망량선사의 말에 정신을 집중하자 그가 말했다.
[백웅. 네가 배당을 갚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뭔데?”
순간 망량선사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경계의 수호자로서 네게 과정을 바꿀 기회를 주겠다.]
“과정을?”
[본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상대부터가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고 내 영역을 침범했으니 이번에는 나 또한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
[그리하면 어떤 세계가 너의 꿈인지를 확실히 해라. 네가 바라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다.]
망량선사의 몸과 그 주위가 크게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점차 내 시야도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너 스스로가 [경계]를 잇는 존재가 되어라…….]
***
번쩍
내가 눈을 떴을 때였다.
“어?”
나는 내가 난데없이 익숙한 풍경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의 명에 따라 그대를 척살하겠소.]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별을 뒤트는 자].
흉신의 최고위 심복이자 그 자체로 [옛 지배자]이며 어마어마한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
그가 수많은 저승의 판관과 옥졸들을 살해한 채 명경의 방 앞에서 버티고 있는 이 광경은 내가 과거에 한 번 겪었던 일이었다.
이…… 이게 뭐지?
설마 이 상황은…….
내가 가만히 있자 [별을 뒤트는 자]가 여유롭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자아, 마음껏 해 보시오. 나는 시간만 끌어도 이기는 것이니.]
저 말 또한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잠시 후에 있을 일도 알 수가 있었다.
‘분명히 이 다음에 염라대왕이…….’
츠아아아!!
[그렇게는 아니 될 것이다.]
[아니?]
갑자기 놈의 등 뒤에 나타난 염라대왕이 자신의 손을 뻗어 [별을 뒤트는 자]의 뒷목을 잡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전신에서 빛을 뿜어내며 외쳤다.
[백웅이여. 빨리 가시오. 나는 내 모든 권능을 걸고 이 자와 공멸(共滅)할 테니.]
“……!!”
[부디 왕야(王爺)의 뜻을 이어주시오……!!]
마, 맞다.
이 상황은 분명…… 내가 현대로 되돌아오기 전에 겪었던 마지막 전투상황!
방금 전까지 나는 망량선사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왜 여기로 온 거지?!
내가 멍하니 있자 염라대왕의 몸이 더욱 환한 빛에 휩싸이는 게 보였다.
[크아아아……!!]
번쩍
그 순간 염라대왕이 거대한 단말마를 뿜어내며 굉음과 빛을 뿜어내더니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잔해 속에서 [별을 뒤트는 자]가 큰 부상을 입은 듯 꿈틀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쿵!!
하지만 이내 기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듯 [별을 뒤트는 자]는 대지에 강인하게 한쪽 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과연 염라대왕, 자폭까지 감수하니 내 최대의 방어주문으로도 중상을 피할 수는 없구나…….]
“…….”
[허나 그대를 상대로 시간을 끌 정도는 충분하지. 염라대왕이 시간을 끈 사이에 도망치지 않다니 아주 고맙소.]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이게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현실이라 한다면 설마 이건…….
바로 그 때 내 머릿속에 망량선사의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경계의 수호자로서 네게 과정을 바꿀 기회를 주겠다.]
…….
그런건가.
나는 그 순간 망량선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모든 신력을 끌어모은 후 전방으로 돌격했다.
“이 개새끼야! 어디 한 번 이 공격을 피하지 말고 받아봐라!!”
[좋소! 덤비시오.]
[별을 뒤트는 자]가 호기롭게 피하지 않고 내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려 했다.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과연 오제와 어느 정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 우주에서 손꼽히는 신격다웠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걸 노렸기에 바로 기술을 시전했다.
만상지투!!
파앗
그 순간 - [별을 뒤트는 자]의 몸과 내 몸이 동시에 멈춰 서 굳었다.
그리고 직후, [별을 뒤트는 자]가 외쳤다.
“아…… 아니!! 이럴 수가!”
그 목소리는 이계신격 특유의 뒤틀린 외계어가 아닌 ‘백웅’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 기분 좋게 히죽 웃었다.
[중상이라서 힘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아서 통할 것 같았는데 진짜 되는군.]
“이럴 수가…… 어찌 이런 기술이…… 어찌 이런…….”
상대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자를 뒤로 하고 날개를 펄럭이며 재빨리 명경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저번에도 이렇게 할걸 그랬네!]
그렇다.
만상지투로 [별을 뒤트는 자]의 몸을 뺏은 것이다!
아마 내 신력까지 죄다 끌어모은 덕에 가능한 기술일 것이리라.
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쓸 만한 기술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신력을 소모하면서 중상을 입은 상대방의 몸을 뺏아서 뭐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 목적은 그저 상대의 견제를 피해서 명경의 방으로 가는 것뿐!
이렇기에 이 상황에서는 최적의 방법일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