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5권 17화
신농?
그 삼황(三皇) 신농을 말하는 건가?
‘여기서 그자가 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 나왔기에 나는 잠시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금천재와 신농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하는지 내 두뇌회전으로는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은 이야기부터 들어봐야 한다는 걸 깨닫고 침착하게 말했다.
[신농이라니…… 삼황이 네게 접근해서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했단 말인가?]
“그렇소.”
[언제?]
“지금부터 1년 반 전이오.”
[최근의 일이군. 금만재가 죽은 건?]
“9년 전…….”
이래서는 시간만으로는 인과관계를 추리할 수 없다. 내가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금천재의 말이 이어졌다.
“신농은 내 꿈에 나타나서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했소. 그 대신에 내게 향후 구천현녀의 신력(神力)을 바칠 것을 요구했지.”
[……!!]
그게 목적이었나!
확실히 지구의 수호자이자 대지모신인 구천현녀의 신력이라면 신농이 탐낼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같은 편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이해관계 때문에 뭉친 자들이라서 경우에 따라 서로의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으리라. 나는 상황을 이해하곤 말했다.
[그래서 받아들였나?]
“생각해보겠다고 했소.”
[뭐? 거절했다고?]
꽤나 의외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까지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들인 금천재의 죽음에 크게 상심해서 뭐든지 할 것만 같은 부모였기에 거절했다는 대답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금천재가 말했다.
“신농 그자가 약속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었소. 그리고 내 아들 목숨 하나로 신력을 내어주는 건 내가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소.”
[…… 그러니까 손이득을 재고 있었다는 건가?]
“그렇소. 나는 신농이 확실하게 내게 더 큰 이득을 줄 때까지는 고민하고 있었소. 그래서 다시 신농이 내 꿈에 나타나거나 그의 사자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소…….”
[…….]
나는 약간 기가 막히고 허탈해서 웃었다.
[하아…… 그럴 거면 방금 전까지 전생동료들한테 억울한 티는 왜 낸 거냐? 천하의 불쌍한 부모가 다 있다 생각했는데 천하의 삼황과 밀고당기기를 하는 놈이 무슨 철면피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정말 웃기는 일이다. 정말로 금천재가 아들의 죽음에 미치고 팔짝 뛰어서 미쳐 버린 부모였다면 그의 감정을 생각해서 참작할 여지가 있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사실 금천재는 내심으로는 삼황 신농의 제안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게 부활시킬지 말지 손이득을 재고 있었던 계산적인 인물이란 게 아닌가? 이딴 식으로 나올 거라면 전생동료들에게 그토록 신경질을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금천재가 움찔하더니 말했다.
“전생동료들에게 무척 섭섭하고 미운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오. 그때 상황을 알고 있으시오? 그자들은 대의를 위해서 수많은 인간을 살리기를 택했고 그 대신 내 아들 금천재가 죽은 거요! 아비인 내 입장에서 안 억울할 거 같소? 그 감정도 내 진실된 감정이 맞소.”
나는 뻔뻔하게 말하는 금천재가 기가 막혀서 말했다.
[이 개자식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신농한테 그런 제안을 들었다고 동료들한테 밝히고 의논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지도 않고 니 맘대로 혼자서 신농하고 교섭하려고 들면 니 말에 무슨 정당성이 있냐고!]
“그 자들도 멋대로 대의의 이름 아래 내 아들의 희생을 택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오? 그리고 구천현녀의 계약자는 나요. 당신 동료들과 의논할 이유는 없었소.”
[…….]
“그리고…… 나는 신농과 교섭해서 가능하면 내 아들에게 큰 힘을 주어 되살리고 싶었소. 두 번 다시 억울하게 죽지 않게.”
[그게 목적이었구만.]
나는 황당해서 혀를 내둘렀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금천재는 세상의 운명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과 자기 아들의 안위와 부귀영달만을 생각한 것이다!
나는 황당한 감정이 조금 지나자 약간의 분노로 바뀌는 걸 느끼며 말했다.
[이봐. 구천현녀의 계약자가 너니까 동료들과 상의할 필요가 없다고? 애초에 일개 악덕시골촌장이었던 네가 구천현녀와 대면할 수 있는 자리에 갈 수라도 있었던 게 누구 덕인 거 같냐?]
“윽……!!”
나는 관자놀이 부분을 꾹 눌렀다.
[제기랄. 조금이나마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등신같군. 그래서 이렇게 시원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이유가 뭐냐?]
이 촌장 놈이 음흉한 속셈을 갖고 있는 것 치고는 너무 솔직하게 속을 다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이유가 있으리라.
내가 투덜거리자 금천재는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역시 당신은 백웅이 맞소…… 아까까지는 긴가민가했지만, 그 말투를 보면 다른 사람일 수가 없군. 그리고 당신이 백웅이라는 걸 확신했기에 다 털어놓은 거요.”
[뭔 소리야?]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오. 당신을 더 속이고 기만해봐야 결국 전생자를 상대로는 헛짓거리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조금 내 사정을 봐주기를 바라며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거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금천재는 무릎을 꿇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한번만 봐주시오!! 아들이 죽은 탓에 억울한 마음에 죽을 죄를 지었소.”
[…….]
“두 번 다시 헛된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 제발 내 아들만 살려주시오!”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왠지 모를 익숙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게 금천재 촌장이지…….’
이 새끼가 처음부터 세계의 운명이나 대의에 관심 없었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았던가? 전형적인 소악당(小惡黨)이었고 속세의 물욕에만 밝으며 자기 혈육에 대한 편협한 애정으로 점철된 자였다. 내가 예전에 살던 구차한 인생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
어쩌면 그 때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삶의 여정에 나선 이래로 수많은 고난과 모험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많은 힘을 얻었지만 그만큼이나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얻었다. 단순히 삶의 안위만으로 친다면 딱히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서 더 낫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젠 잘 모르겠군…….’
단순히 신을 모조리 다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그 증오의 마음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삶이 마모되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래, 내게 맞지 않는 걸 택하는 탓에 계속해서 마음은 깎여나가고 있었고 감정도 희석되어갔다. 그러나 희석되어가는 감정을 다시 의지로 되살리며 아직까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희망?’
언젠가 신이고 뭐고 다 없애 버리고 동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내 희망인가?
아니, 그렇게 어설픈 생각은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만 생각했다면 진심으로 진공가향을 바라던 그 때의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광기에 젖어서 마치 백련교주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세계의 멸망을 간구했던 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뇌자는 말했다. 진공가향만이 답이 아니라고. 전생자는 그 이상의 답을 낼 수가 있다고.
어째서인지 전뇌자는 그 답을 직접 말해주지 않고 내가 스스로 찾아내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그 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가?
첫 번째 삶에서 일개 표사일 때는 그저 고수가 되고싶다는 마음을 충족시키고 싶었다면, 지금 내가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순간 - 내 머릿속을 한마디의 화두가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스스로의 무의식과 무위(無爲)를 얼마나 깨닫고 있소?]
퉁!
청명한 물 한 방울이 수면을 떨리게 하는 듯한 파장이 느껴졌다.
‘도신(道信)…….’
그 화두를 던진 것은 바로 역근세수경의 세계에서 만났던 소림사 2대주지, 도신이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당신의 마음이오.]
이 세계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이 세상을 죽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그것은 세계의 멸망(滅亡)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진공가향이라고 생각했었다.
여태 전생하면서 딱 봐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걸까……?
내가 바라는 건 전혀 다른 게 아닐까?
‘설마…….’
내가 죽이고 싶은 세상이라고 하는 건 액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절대 진공가향이 아니야.
“……왜 그러시오?”
엎드려 있던 금천재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며 말하자 나는 몰아지경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빠르게 정리되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내가 그동안 무엇 때문에 고뇌해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다. 고작 금천재의 사죄 한 번에 이런 중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버리다니.
설마 나는 과거를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기회가 필요했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응? 무슨…….”
[그냥 그렇단 거야.]
나는 말을 얼버무렸지만 지금 이 순간 강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심득(心得)을 얻은 바로 그 때 ‘무언가’가 내 안에 충만해졌다는 걸.
그것은 실재하는 힘은 아니었지만 왠지 내 운명(運命)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덩어리라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신력도 마력도 아닌 이 기묘한 덩어리가 어떤 작용을 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말했다.
[원래라면 네놈을 천참만륙했을 텐데 그냥 딱 한 방만 맞아라. 그럼 용서해 주지.]
내가 금천재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자 그가 기겁했다.
“헉…… 자, 잠깐.”
[이 꽉 물어!]
콰광
내가 전력을 다해서 한대를 때렸지만 금천재는 순간적으로 신력으로 내 공격을 방어해서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걸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쭈 막아?]
금천재가 겁에 질렸다.
“히익…… 그런 무식한 힘으로 때리면 죽소.”
[죽긴 뭐가 죽어? 구천현녀의 계약자라서 몸 또한 신체(神體)라서 죽이기도 쉽지 않은데. 그냥 몸이 파편이 되고 조금 물렁물렁해질 수도 있지.]
“아니 좀 봐주시오…….”
[젠장. 왜 너 같은 새끼가 구천현녀의 힘씩이나 받은 거냐?]
정말 이 새끼는 무인(武人)은커녕 살아생전 주먹싸움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구나!
나는 기가 막혀서 투덜거리다가 말했다.
[다시 묻지. 곱게 한대 맞을래 아니면 정말 나한테 갈가리 찢겨서 그 힘을 죄다 토해내고 싶냐?]
“……!! 사, 살살 쳐주시오.”
[그래, 살살 칠게. 얼굴에 힘 빼.]
“으으…….”
금천재가 눈을 질끈 감자 나는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대로 금천재의 낭심에 발차기를 날렸다.
‘죽어랏!’
콰광!!
“끄아아아악!!”
마력을 담은 발길질에 하체가 처참하게 터져서 날아간 금천재는 핏덩어리가 되어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지가 날아다니며 피칠갑을 한 꼴을 보니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껄껄 웃었다.
[하하하. 예상 못 했지?]
“아아악…… 유…… 육시랄…… 개종자…… 소똥이…… 이놈!! 으아아아.”
너무 아파서인지 온갖 헛소리가 다 나오는 걸 보니 제대로 찬 모양이다.
아무리 신의 힘을 갖고 있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낭심에 발차기를 맞는 것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정신 차리고 몸을 다시 신력으로 재구성해라. 네가 못하면 이상한 거다.]
신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걸 알고 있기에 일부러 손대중을 해주지 않고 있는 힘껏 패준 것이었다.
“끄으으윽…….”
슈슈슉
스믈거리며 금천재의 몸이 빛을 내는 영체로 바뀌더니 잠시 후 원래대로의 몸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신의 몸이라는 건 저렇게 자기 의지만으로 무한히 회복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보아하니 금천재는 여태 몸이 찢길 정도의 부상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신력으로 몸을 재구성하는 게 처음인 것으로 보였다.
고통 때문에 혼란상태가 되어서 눈이 맛이 가 있는 금천재를 보고 있던 내가 말했다.
[자, 이걸로 네놈이 까불었던 건 다 잊어준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게 전적으로 협력해라.]
“……어떻게 협력하면 되겠소?”
나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단 이 성의 성주 직위를 내놔라. 그리고 천재만재교의 교주 자리도 내놔라. 그리고 저승으로 갈 수 있게 힘으로 통로를 열어라.]
“…….”
[그러면 저승에 가서 네 아들인 금천재를 되살려 주지. 약속하마. 전륜성왕으로서 하는 약속이니 믿어도 돼.]
세상에서 전륜성왕이 영혼을 되살려주겠다는 것보다 공신력 있는 약속은 없으리라.
그러자 금천재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젠장…… 내가 손해밖에 보지 않소? 그래도 신농은…….”
나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신농은 뭐?]
“……아니오…….”
[아니 일단 입을 열었으면 끝까지 말해봐. 그자가 무슨 제안을 했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시, 신농은 머지않아…… 세계를 제패하고 나면 내게 인간계를 다 주겠다고 했소이다.”
[…… 호오?]
나는 흥미를 느꼈다. 그러고는 되물었다.
[세계를 제패한다고? 지금 신농은 봉인이 풀렸다는 말인가?]
“그렇소.”
[흠.]
예상은 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외우주로 가기 직전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제가 봤던 존재를 말하자면, 그 은빛의 거인은 아마 삼황(三皇) 신농(神農)일거예요.]
[그림자의 세계. 어둠 속에 회색 달이 떠 있었고 달을 등지고 백은의 거인이 제게 말을 걸었어요.]
[삼황 신농은 이미 어느 정도 세상에 개입할 수 있는 상태로군! 원거리에서 서문혜 당신을 각성시킬 수 있을 정도라면…….]
내가 떠나기 직전에 이미 신농의 봉인은 상당히 해제되어 있었으며 원거리에서 서문혜를 각성시킬 정도였다. 그렇다면 츠쿠요미의 ‘밤’이 세계를 뒤덮어서 혼란해진 후에 신농은 아마 봉인에서 풀려났으리라.
거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었다.
‘신농은 너무 오랫동안 봉인 당한 데다 여와에게 너무 많이 견제되어서 이미 이 시대에는 전성기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아예 여와가 신농을 포기하지 않는 한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힘이 없다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럼에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신농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세계에서 아직 여와나 오제(五帝) 등 자신에게 맞설 존재는 아직도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함부로 보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전까지의 전생에서 만났던 신농이 비교적 신중한 데다 의미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서문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 감이 좋지 않아요…… 신농의 태도가 바뀐 이유…… 그걸 알지 못한다면 큰 참사가 일어날 것 같아요.]
그 때 서문혜의 한마디는 그저 불안감일 뿐이라 생각하고 지나쳐 갔었고 실제로도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신농은 이미 20년 전부터 뭔가 다른 상태에 접어들어있었던 것이다.
이번 생의 신농은 뭔가 다르다.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농이 뭘 제안했든 나는 너에게 뭔가를 더 해줄 생각이 없다. 애초에 내가 외우주로 가지 않았다면 네가 계약자씩이나 할 일도 없었겠지. 계약자의 자리나 신력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인간계의 직위 따위를 내놓는 게 그렇게 아까우냐?]
“으으으윽…… 그, 그렇다면…….”
[그렇다면?]
금천재가 소심하게 말했다.
“가끔씩 주지육림을 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보장해 주시오…….”
[엉? 아까 했던 그거?]
“그렇소…… 내 삶의 낙이오.”
[아오 이 새끼 진짜…….]
화악
“히익.”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촌장이 겁을 먹고 팔로 머리를 감싸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툴툴거렸다.
[보니까 지금도 이 도시는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서 다들 살기 힘들어하던데 너 혼자서 미남미녀와 주지육림을 즐긴다고? 네가 일단 구천현녀의 계약자 같은 게 아니었으면 당장 쳐죽였을 거다.]
“으으.”
[아가리 닥치고 앞으로는 쥐죽은 듯이 살아. 정말 네 아들놈을 구하고 싶다고 주장하고싶다면.]
“아, 알았소…….”
[그럼 아공간 풀어. 그리고 신선들한테 내린 공격명령도 철회하고.]
“알았소.”
나는 상황이 다 정리되었다 싶자 금천재를 데리고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망량을 비롯한 동료들은 아직도 화염방어막 안에서 아주 여유롭게 신선들의 공격을 견뎌내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자 화염방어막이 풀렸다. 나를 발견한 검마가 반가운 듯 외쳤다.
“백웅!! 금천재 교주를 제압했나.”
[얘기가 대충 끝났소. 그가 앞으로는 경솔하게 굴지 않는다고 하는군.]
내가 힐끔 옆에 있는 금천재를 쳐다보자 금천재가 움찔하더니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오! 내가 그동안 옹졸하게 굴었구려.”
[그렇다는군.]
검마는 알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으면 언제든 부처가 될 수 있다 하더니 딱 그 말 대로군.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자세한 얘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나는 동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검마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승에 간다 치고 정말 금천재를 그대로 되살릴 수 있겠는가? 아마 현재의 저승은 죽은 자들이 그대로 촉룡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한 줌의 먹이가 되는 아수라장일터인데.”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옛 지배자 촉룡과 아마 교섭해야겠지. 그리고 그자와 교섭하려면 지금의 힘으로는 안 되니 좀 더 힘이 필요하오.]
“흐음, 그래서 금천재에게서 교주자리를 뺏은 건가?”
[그렇소.]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망량이 안 보이는군. 화염방어막을 펼쳤길래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급히 가볼 곳이 있다고 도중에 사라져 버렸네. 어지간히도 자네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야.”
[흠…….]
나는 새삼 망량의 술법수준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수많은 대라신선들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내는 화염방어막을 펼친 것도 모자라서 그냥 펼쳐두고 자기는 딴데 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니?
어쩌면 이번 생의 망량은 여태 내가 만나본 망량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술법력을 갖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이 끝나면 미리 말한 곳으로 자신을 찾아와달라 했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는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갈 때 가더라도 일단 정리를 먼저 하고 가야겠지.]
“…….”
[왜 그러시오?]
“자네도 많이 성숙해진것 같군. 원래라면 앞뒤 생각 안 하고 망량부터 만나러 갈 거였을 텐데 상황정리부터 하겠다는 걸 보면.”
나는 검마의 말에 피식 웃었다.
[30번씩 죽었다 살아났는데 이제 와서 이 정도를 못하면 곤란하지 않소?]
“그것도 그렇군.”
나는 이후 검마 등의 도움을 받아서 수월하게 금천재의 모든 직위를 물려받았다. 금천재가 내게 자리를 준다는 게 공언되어서 성 전체로 퍼져나가는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고, 이후는 금천재가 다스리고 있던 천계의 대라신선들을 납득시키는 과정이었다.
[투선들이 납시오.]
남경성의 옥좌에 앉자 신장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남경성의 사대문을 지키는 투선(鬪仙)들이 내 앞으로 불려왔다.
나는 그 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음…….’
이윽고 설명을 다 들은 후 나를 쳐다보던 천계의 투선, 이랑진군이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금천재가 구천현녀의 계약자 자리를 백웅 그대에게 넘긴 건 아니군. 그저 인간의 직위를 넘겼을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그렇소만.]
[그러면 우리 투선들이 그대의 명을 따를 이유도 없다.]
[…….]
그러자 옆에 와 있던 투선, 후예(后羿)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랑진군! 뭘 그리 깐깐하게 굴고 앉았냐? 어차피 금천재라는 인간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었잖나.]
[후예여. 그렇기에 더더욱 명령체계를 따져야 한다. 나중에 구천현녀께서 귀환하셨을 때 어쩌려고 그러나.]
[참나…… 옆에 있는 금천재가 괜찮다고 그러잖아? 왜 너만 난리야.]
[하지만…….]
그러자 팔짱을 찌고 있던 투선, 제천대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백웅은 나하고 엄청 친한 놈이라고. 백웅한테 개기지 마라 빌어먹을 자식아.”
[…….]
이랑진군은 나머지 2명의 투선이 자신을 공격하자 당황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내심 생각했다.
‘…… 진짜…… 남북두성군하고 싸우길 잘했다.’
그렇다.
남경성의 나머지 사대문을 지키는 투선은 바로 저들이었던 것이다.
이랑진군, 후예, 제천대성!
저자들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여태 전생하면서 질릴 정도로 느꼈기에, 만일 남북두성군이 아니라 저들과 싸웠다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아니, 쉽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제천대성과 싸웠다면 아마 이 몸뚱이가 개 박살 났을지도 모른다.
제천대성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야 백웅! 너 나랑 술도 마시고 근두운도 타고 어? 그렇게 친했는데 나한테 안 찾아오다니 섭섭하다 어?”
나는 왠지 제천대성한테 미안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죄송…… 그런데 이런 기계의 몸뚱이인 걸 바로 믿어주시기 힘들 것 같아서.]
“그건 그렇지. 나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냐?”
[설명하자면 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수보리 기억하십니까?]
“엉? 수보리가 왜?”
[다른 세계에서 수보리를 만났습니다.]
“……!!”
그러자 제천대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약간의 흥미로운 감정을 내비쳤다.
“그 망할 새끼를 만났다고? 뭐하고 있더냐?”
나는 수보리와 만난 경황을 간략하게 제천대성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제천대성은 다소 황당해했다.
“안 믿기는걸…… 그 음흉하고 잔인한 새끼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네게 협력했다고?”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수보리가 얼마나 못된 새낀지 모르나 보군. 그 누구냐…… 네가 말했던 이광이랑 비슷한 놈일지도?”
[…….]
그 정도인가?!
내가 내심 경악하고 있을 때 제천대성이 피식 웃었다.
“딱 봐도 내가 줬던 여의봉은 어디 가서 엿 바꿔 먹었나 보군. 그럴 줄 알았다.”
[아, 그게…….]
어쩌다 보니 목갑의 보물 전체가 석화되었고 나중에는 석화는 풀었지만, 보물 전체를 대가로 바치고 상업의 권능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 설명을 하려 했지만, 제천대성이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됐어~ 일단 볼일 보라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만일 상업의 권능을 지금 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겼지만, 신력을 쓸 수 없는 지금 상태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신력을 조금이나마 얻게 된다면 그때 가서 시도해볼 수 있으리라.
그 이후로도 금천재의 권력을 승계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데는 만 하루가 걸렸다.
하루의 시간이 지나자 내게 미호와 검마가 다가왔다.
“준비는 다 됐어.”
“가보세나.”
나는 눈을 멀뚱멀뚱 뜨며 그들에게 말했다.
[망량에게 가려 하는데 같이 가려는 거요?]
미호가 픽 웃었다.
“어차피 그동안의 이야기가 길어서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해 줄 수 없지 않느냐? 네가 약간의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망량과의 볼일을 다 보고 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에게 한 번에 설명 해주거라.”
“내 생각도 미호와 같네. 이 기회에 망량의 생각도 따로 듣고 싶고 말일세.”
[알았소.]
나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미호에게 부탁했다.
[검마의 비행선을 빌릴까 했는데 술법으로 여동빈의 사당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맡겨두어라, 백웅.”
파앗……!!
잠시 후 미호의 꼬리분신 네 마리가 출현했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가마가 소환되었다. 우리가 그 가마에 들어가서 타자 미호의 꼬리분신들은 거간꾼이 되어 하늘을 날아갔고, 이윽고 하늘을 날아가는 가마가 남경성을 벗어나서 천공을 갈랐다.
쉬이익
‘이런 이동방법도 있구나. 아예 땅을 밟지 않으면 되는 거야.’
퓨우웅!!
게다가 간간이 마차가 차원을 넘는 듯한 소리마저 들렸다.
그 술법을 고려한다면 아마 지금 이 마차는 대웅제국 시대의 음속전투기보다 몇 배는 빠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술법은 막대한 술법력이 소모되므로 미호 같은 존재가 아니면 신선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미호가 말했다.
“백웅.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구나.”
[뭐든 물어봐.]
“네 말대로라면 너는 수만 년 전의 탁록시대에서 수많은 모험을 하다가 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탁록시대에서 네가 변화시킨 과거는 이 시대에 반영되지 않느냐?”
[…….]
“네가 그만큼이나 과거의 역사를 바꿨다면 우리는 당장에 다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거늘.”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전뇌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분명히 수만 년 전의 탁록시대로 간 것이다. 천암비서에서 전뇌자가 대신 바친 막대한 [대가] 덕분에 [큰 굴레]를 돌려서! 하지만 [큰 굴레]의 과거로 갔다 왔음에도 이 세상의 역사는 거의 바뀐 게 없는 것 같았다.
검마가 나직이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큰 굴레]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네.”
[무슨 말이오?]
“단순히 과거를 바꾼다 해서 미래에 바로 반영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원리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그 원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들이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과는 다른 것 일게야.”
[흐음…….]
“우선은 망량을 만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 그가 여동빈의 사당으로 굳이 오라고 한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일세.”
[그럴 거요.]
그리고 둘과 두런두런 얘기하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우리는 마침내 여동빈의 사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타닷
거간꾼처럼 가마를 메고 있던 미호의 분신들이 이 신비스러운 안개에 착지하고는 곧장 공중제비를 넘어서 사라져 버렸다. 분신술을 회수한 미호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곳은 낙양의 근교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낙양성주인 백련교주에게 알려졌을 것이다.”
[그 말은…….]
“여동빈의 사당에서 나올 때는 백련교주와 싸울 수도 있다는 거지.”
[…… 싸우지는 않을 거요.]
일단 백련교주가 왜 제갈사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는 들어야 한다.
차라리 이게 더 잘 된 것일 수도 있으리라.
[갑시다.]
저벅
나는 천천히 안개로 둘러싸인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당에 몇 걸음인가 더 들어갔을 때 자욱한 운무가 더욱 심해졌고 곁에 있던 두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말 그대로 자기 발조차 알아보기 힘든 운무 속에서 내가 멈춰 서 있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려, 백웅.”
스스스
천천히 운무가 걷히며 나타난 그곳에는 여동빈의 사당이 있었다.
그리고 학창의를 입고 있는 망량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