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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604화 (1,503/1,615)

전생검신 85권 12화

나는 미호를 보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 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아……!! 미호!’

그동안 전생하면서 다 포기하고 미호와 행복한 삶을 꾸리려고 생각한 적이 숱하게 많았다. 수련이 미친 듯이 힘들 거나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적인 음모와 심연을 내버려 둔 채 그런 현실도피를 해봤자 결국 미호까지 불행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걸 끝낼 때까지 미호를 좋아하는 마음을 최대한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 미호…….’

평소에는 전생하면서 이룩해야 할 게 워낙 많아서 그런 감정조차 잠시 무의식으로 밀어 넣었지만 지금 미호를 마주 본 상황이 되자 새삼스레 감정이 욱하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도대체 무엇을 이루고자 기계의 몸이 되어서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 도착했단 말인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순간 미호가 곱지 못한 눈으로 유정을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빨리 살생염주(殺生念珠)를 만들어달라 했을 텐데 왜 이리 늦느냔 말이다.”

살생염주?

무슨 말인지 몰라서 나와 검마가 의아해하고 있자 유정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시주의 꼬리가 자라는 걸 봉(封)할 수 있을 정도의 법보(法寶)는 그리 쉽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일로 많은 신선과 불승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기다려 주시지요.”

“또 변명이구나! 이게 나 좋자고 하는 일이냐?”

왜인지 미호는 역정을 내더니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고는 열받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표정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음? 설마 저게 살생염주라는 건가?’

잘 보니 미호의 여덟 개의 꼬리에는 모두 끝단에 둥근 염주가 꽉 묶여서 매달려 있었다.

그러자 유정은 염불을 외며 말했다.

“아미타불…… 힘이 폭주하여 모두에게 해를 입힐까 저어하는 그 고운 마음씨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이는 우리 인간과 신선들이 지닌 능력의 한계일지니…… 시주에 상응하는 격을 지닌 존재가 조력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저 꼰대 같은 구천현녀는 내게 도움을 줄 수 없다 하고 나머지 놈들은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니…… 속이 터지는구나.”

답답하다는 듯 말하던 미호가 문득 나를 쳐다보더니 호기심을 내비쳤다.

“근데 그 깡통은 뭐냐?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

미호, 나 백웅이야.

순간 나는 미호에게 내 정체를 밝히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검마가 슥 하고 나를 가로막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검마의 신호라는 걸 알아챈 나는 순간 입을 닫았고 검마가 나 대신에 말했다.

“내가 데려온 손님이다. 교주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잠시 면담하러 왔지.”

“철인 따위를 데려간다고? 무슨 일로?”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미호.”

“…….”

미호는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알 바 아니라는 듯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던가. 나는 수련하러 가니까 괜히 교주하고 언성 높이지 마라.”

“장담은 못하겠군.”

“흥…….”

파앗!

미호는 순식간에 공간을 격해서 사라져버렸다. 미호가 사라지자 다시 우리 일행은 앞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는 검마에게 의구심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 내가 정체를 밝히는 걸 막은 거지?

그러자 검마의 전음이 들려왔다.

[백웅. 솔직히 나조차도 자네가 진짜라는 걸 믿기가 쉽지 않았네. 하물며 원래부터 의심 많은 미호의 성격상 여기서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야. 교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정리할 때까지는 분란을 피하도록 하지.]

그런 의미였군.

하지만 나는 속으로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미호라면 믿어줬을 거 같은데…….’

잠시 후 우리는 거대하고 화려한 비궁(秘宮) 앞에 도착했다.

까마득하게 크고 넓은 비궁! 최소한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크기의 그 비궁을 보자 나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바깥에서 볼 때는 이렇게 거대한 궁전이 안에 또 있을 수가 없는 크기였는데…….]

“구천현녀의 도력(道力)으로 이 남경의 내성은 사실 또 다른 차원이나 마찬가지요. 그래서 이 내성의 넓이만 하더라도 외성에 못지않을 정도로 넓지.”

[차라리 외성에 이런 능력을 적용하면 될 텐데 뭐하러 이렇게 거대한 내성을 만든 것이오?]

“인과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들었소. 구천현녀의 원래 능력은 훨씬 광대하지만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충분한 인과율을 얻지 못해서 능력에 한계가 있지. 그래서 이 내성만큼의 공간만 이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오.”

[흠…….]

나는 듣다 보니 이 공간이 예전에 수보리가 말했던 비취계(翡翠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보리 또한 지금 이 내성과 비슷하게 자기만의 이차원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비취 궁전을 지어놓은 채 힘을 흡수했던 것이다. 구천현녀 또한 수보리에 뒤지는 존재는 아니니 충분히 만들 수 있으리라.

저벅저벅

우리는 커다란 궁전의 화려한 내부 회랑을 지나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미호에게 살생염주를 만들어준다는 건 무슨 말이오?]

그러자 유정이 말해도 되냐는 듯 검마를 힐끔 쳐다보았고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유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살생염주는 미호 님의 능력을 봉인하는 특수한 법보입니다. 하나의 꼬리마다 하나의 살생염주를 매달아 놓았으니 총 8개의 살생염주가 제작되었지요. 하지만 그 살생염주로도 힘이 계속 성장하는 걸 막지 못하여 9개째의 살생염주를 우리 법승들에게 주문하셨습니다.”

[힘이 성장하는 걸 일부러 억제하는 이유는, 그녀가 폭주할 우려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현재의 미호 님은 천호(天狐)중에서도 전례 없이 강력한 최강의 존재. 뿐만아니라 천계에서 뭔가 엄청난 힘의 정수(精髓)를 얻은지라 그 힘이 모두 성장하면 구천현녀님에게 필적할 것이라 합니다. 허나 그 정도의 힘은 말 그대로 신(神)의 경지인지라, 미호님이 원래 갖고 있는 육체와 정신의 그릇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가 없지요.”

[…….]

“진소청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미호님이 폭주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빈승의 가장 중대한 임무가 바로 그 살생염주를 제작하는 것이지요.”

[구천현녀가 나서서 막으면 되지 않소?]

“그게…….”

유정이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있던 검마가 퉁명스레 말했다.

“구천현녀는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네. 금천재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자취를 감췄네.”

[흐음.]

검마의 말에 유정이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말 하시면…….”

“이자는 그걸 알아도 되는 자일세. 내가 보증하지.”

당당하게 말한 검마가 말을 이었다.

“구천현녀는 언젠가부터 아예 현신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유일하게 아는 건 금천재 놈뿐이야. 허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이 남경에 있는 모든 전생동료들이 답답해하고 있지! 구천현녀의 계약자로서의 힘을 갖고 있으니 무력으로 겁박할 수도 없고 말이야.”

[…….]

“자네가 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데려온 것도 사실일세.”

그런 거였군.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맡기시오.]

촌장 이 새끼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한 번 들어봐야겠군!

이윽고 우리는 궁전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왔는데 여기에 오자. 마치 오색별빛이 휘황찬란하게 수놓아진 듯한 천계(天界)의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이 또한 공간의 제약을 무시하는지라 강력한 권능이 엮여있다는 걸 쉽게 짐작하게 했다.

‘도화원(桃花園)인가?’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 있는 데다 연못과 폭포가 아름다운 정경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윽고 이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느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이건…… 돼지고기를 굽고 있나.]

생각보다 안드로이드 기술이 발달해 있는지 철인은 인간처럼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다. 아주 익숙한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나자 나는 기분이 좋아짐과 동시에 금천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글지글

그리고 더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불판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금천재와 그 근처에 아리따운 여인들이 수십 명이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여인들의 외모는 하나같이 매우 출중해서 절대 흔히 볼 수 있는 외모가 아니었다.

채앵

짤랑

“아하하하.”

“교주님, 너무 웃겨요…….”

또한 술잔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에 미녀를 양손에 낀 금천재가 얼큰하니 약주를 마시는 걸 볼 수 있었다.

미녀들뿐만 아니라 무척 잘생긴 남자들과 미동(美童)도 여기저기 있었으며 아무래도 잔치의 구색을 맞추려고 데려다 놓은 자들인 것 같았다.

“끄윽.”

술트름을 하던 금천재는 얼마나 술을 쳐 마셨는지 얼굴이 벌게져 있었으며 딱 봐도 전신에서 술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비단금옷을 입고는 있으나 그 옷이 술 때문에 가득 젖어 있을 정도면 할 말 다 한 것이다. 다만 금천재의 몸은 상당히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질의 몸이었으며 얼굴 또한 예전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검마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교주. 저번부터 이런 주지육림(酒地肉林)은 관두라 말했을 터인데 말이오.”

그러자 검마를 발견한 금천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허허허. 이 정도가 무슨 주지육림이오? 그냥 마을잔치 하는 거잖소?”

“그냥 마을잔치라고? 그냥 마을잔치에는 남경성에서 손꼽히는 미남미녀들이 당신 시중들기 위해 참석하지 않소만!”

“자자…… 그러지 말고…… 이보게! 우리 위대한 무영문주 검마님께서 오셨군!! 자자, 그러지 말고 앉아서 한잔합시다.”

금천재가 친밀을 표하려는 듯 검마를 껴안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검마는 말없이 손바닥을 들더니 장풍(掌風)을 내쏘았다.

쿠콰콰쾅!!

그와 동시에 검마의 장풍에 당한 금천재가 바람의 기운과 함께 날려가서 아름드리 복숭아나무에 처박혔다. 금천재가 비틀거리자 삽시간에 왁자지껄 떠들던 연회장이 조용해졌고, 와 있던 수십 명의 아리따운 여인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검마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상당히 역정을 냈다.

“당신이 지금 이 남경의 성주로서 이럴 때요? 지금도 토벌대는 인류를 위협하는 악랄한 마왕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소!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금천재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흐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오?”

“뭣이.”

검마는 그 말에 순간 분노한 듯했고 옆에 있던 유정 또한 노화를 간신히 누그러뜨리고는 아미타불, 하고 짧은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금천재가 다시 한번 끄윽 하고 술트름을 내뱉자 검마는 더는 참지 못하고 출수(出手)했다.

수어검(手御劍)!

순식간에 조그마한 검마의 손짓만으로 이기어검이 날아가서 금천재의 목젖에 맞닿았다. 금천재를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금천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죽히죽 웃으며 더욱더 사람 속을 긁는 말을 했다.

“이미 세상은 망한 거나 다름없는데 왜 나한테만 지랄이냔 말이오.”

“……이놈……!!”

검마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금천재는 눈이 벌게진 채 독랄한 말을 쏘아붙였다.

“이보시오, 백웅도 없는 판국에 뭘 하겠단 말이지? 전생동료입네 행세하지만, 당신들은 백웅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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