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603화 (1,502/1,615)

전생검신 85권 11화

뭐?! 마을 촌장…… 아니 금천재가 구천현녀의 계약자가 되었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잠시동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한참 후에나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구천현녀가 드디어 처 돌았소?]

“……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 허나 사실은 사실이니 다들 받아들였네.”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가 안 가는군…… 구천현녀가 어디 보통 존재요? 그녀는 창세신 반고(盤古)의 화신이자 최후의 정령왕이고 일요의 수호자이며 이 지구의 진정한 대지모신(大地母神). 사실은 삼황오제의 부하라기보다 동맹에 가까운 존재인데 그런 자가 일개 촌장 따위를…….]

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일단 근본부터 따져보자면 천계에서 큰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들 짐작했네.”

[대립? 무슨 말이오.]

“사실 저 ‘밤’의 영역이 전개된 후 천계 또한 크게 오염되어서 차원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였네. 그래서 천계에 있던 대부분의 신선, 영물들은 다들 강제로 현세로 뛰쳐나와야 했지.”

[……!!]

그 말대로라면 츠쿠요미의 [밤]이라는 게 천계(天界)를 무너뜨린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재난이었단 말인가?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천계의 존재들은 아무런 매개체 없이 오랫동안 세상에 현계할 경우 크게 힘이 줄어들고 종래에는 소멸하는 모양이야. 괜히 우리들에게 공양의식이나 대가를 받았던 게 아니지. 게다가 임시도피처인 영계나 환계 또한 천계의 모든 존재들이 이주하기에는 포화상태였으니 큰 혼란이 있었네.”

[그래서 어떤 대립이 일어났다는 것이오?]

“인간계를 지배하자는 파벌과 인간계를 그냥 멸망시키자는 파벌의 대립이었네. 모든 신선들이 양쪽 파벌로 나뉘어 다툼을 벌였지.”

[……?!]

뭐, 뭐라고? 그런 대립이었다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크게 당황했다. 설마 신선 놈들이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검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과정은 좀 복잡하지만, 여하튼 그 대립은 아직 종식되지 않았네. 그리고 구천현녀는 인간을 지배하자는 파벌의 수장으로서 현계하였고 금천재를 자신의 계약자로 선택했지. 또한 금천재는 그 힘을 이용하여 천재만재교를 세웠으며 낙양파벌과 대립하게 된 것일세.”

[…….]

“제갈사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나? 사실 이런 얘기는 나보다 제갈사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걸세. 나는 곁다리로 전해 들은 것이라 자세한 정황은 잘 모르기 때문일세.”

나는 곤혹스러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이해가 가지 않소.]

“뭐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 말대로라면 이 천재만재교는 천계의 인간지배를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건데, 반대로 백련교주의 낙양파벌은 천계의 인간계 멸망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거 아니오?]

“그 말대로일세.”

[헌데 그럼 낙양의 인간들은 다들 미치광이란 말이오? 자신들을 죽여서 멸망시켜 버리겠다는 신선들에게 순순히 굴종하는 게 말도 안 되지 않소.]

“음…… 그게…… 멸망시킨다는 게 좀 복잡한 얘기 같더군.”

검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할 운명이라면 [올바른] 형태로 멸망하자는 게 그쪽의 주장이야. 그래서 낙양파벌의 신선들도 딱히 인간을 학대하거나 죽이진 않네. 도리어 신선들과 인간의 친밀도는 이 천재만재교보다 낙양파벌이 더 높지.”

[…… 그건 또 무슨 궤변이오? 멸망하면 하는 거지 올바른 멸망이 따로 있단 말이오?]

“자네도 전생자이니 알고 있을 걸세. 세상이 똑같이 멸망의 운명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과정에 따라 결말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결말 중에서는 그냥 얌전히 세상이 폭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결말이 있지 않은가? 이계(異界)의 존재들에게 영겁토록 노예처럼 부려지면서 잡아먹힌다던가.”

[…….]

“애초에 그게 백련교의 교의(敎義)이기도 했지. 그래서 백련교와 손쉽게 영합한 걸지도.”

나는 검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뭔가를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낙양파벌은…… 백련교주 측은 진공가향(眞空家鄕)을 노리고 있는 거구려.]

진공가향!

모든 것을 [아버지]의 힘으로 쓸어 버리고 정순한 세계멸망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련교의 본령(本領)이자 근본이념이었다.

검마의 말대로 신선들의 세계멸망이라는 목표는 그 진공가향과 무척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다만 본인들 입으로 말한 적은 없으니 확실치 않네.”

[허나 백련교주 또한 내 흑요석을 받은 자요. 진공가향이 꼭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부질없이 그걸 추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데.]

“흠…… 아까 말했듯 나는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네. 더 알려 하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비밀을 캐낼수록 더 위험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이지. 그리고 나는 내 딸을 지켜야 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비밀을 캐내려 할 수 없는 위치였다네.”

[…….]

“계속 말하는 거지만, 제갈사가 깨어나면 물어보게. 내 생각이지만 아마 제갈사가 백련교주와 다퉜던 이유는 방금 내가 말했던 두 파벌의 대립이 틀림없이 큰 연관이 있을 게야.”

[알았소. 그래야겠군.]

검마의 말대로 제갈사는 이 모든 일의 핵심에 있는 존재였다. 행보를 서두르느라 내게 자세한 얘기를 할 여유가 없었지만 제갈사라면 지금 일이 얼마나 꼬여 있는지 다 알고 있을 듯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자 검마가 말했다.

“그래서, 백웅…… 이젠 어찌할 생각인가?”

[아까 말했듯이 저승으로 가서 명경을 찾을 것이오.]

“물론 그래야겠지. 허나 지금 당장 저승으로 갈 방법은 없지 않은가?”

[…….]

“제갈사가 자네를 이 남경으로 인도한 것은 틀림없이 천재만재교와 접촉하라는 의미일 거라 생각하네. 천재만재교의 도움을 받는다면 구천현녀의 힘을 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에, 자네는 손쉽게 저승으로 갈 수 있을 걸세.”

나는 검마의 말에 대꾸했다.

[금천재를 만나보란 말이오?]

“그 수밖에 없지. 그자가 구천현녀의 계약자니까.”

[…… 흐음. 금천재라…….]

나는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설마 촌장새끼가 그렇게 출세했을 줄이야.’

내가 있을 때는 존재감도 별로 없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구천현녀의 동아줄을 잡고 천하의 백련교주와 겨룰 수 있는 양대세력의 수장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도리어 내가 부외자이며 출신불명의 괴인이었기에 입장이 딸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안내해 주시오.]

“따라오게.”

검마는 대룡관의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최상층 위의 꼭대기에 도착하자 꽤나 드넓은 공간이 출현했고, 그 위에는 웬 커다란 기구가 존재했다. 나는 사람 십여 명을 태울 수 있을 법한 그 풍선(風船)을 보자 놀랐다.

[이건…….]

“새로이 만들어진 비행선(飛行船)이라는 걸세. 자네도 전생하면서 대웅제국 시대에 본 적 있지 않은가?”

[…… 그렇소. 설마 동료들이 내 기억에 의존해서 다시 만들어낸 것이오?]

“그래. 자네는 실감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전생의 기억 속에는 대웅제국 500여 년간 쌓여 있던 과학기술의 정보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지금은 자네 생각보다 문명이 발달해 있다네.”

덜컹

이윽고 나와 검마가 탑승하자 철인(鐵人)이 조종사로 탑승하는 게 보였다. 맨 앞의 조종석에 있던 철인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주님. 어디로 모실까요?]

“본성(本城)으로 가 주게.”

[흐음, 그 철인은 누구인지요? 문주님께서 이 무영문 전용 비행선에 따님 외의 다른 자를 태우는 건 본 일이 없습니다만…….]

“방류향(芳柳享). 공연히 관심을 가지지 말게.”

검마가 준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방류향이라고 불린 철인은 찔끔하더니 기가 죽어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문주님.]

하지만 나는 그 방류향이라는 이름을 무척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흠칫하고 놀랐다.

[백면신군(白面神君) 방류향(芳柳享)?]

내가 놀라자 방류향은 힐끔 좌석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인간 시절의 이름을 아는 자라니 정말 누구지? 그것도 별호라면 몰라도 이름을 알다니…… 당신 누구요?]

[…….]

알 수밖에 없다.

‘백면신군 방류향…… 이놈은…… 내게 변태술(變態術)을 가르쳐준 놈이다!!’

과거 신투지존의 비급에 존재하는 기술들을 대성해야 해서 전 무림에서 도둑의 비기를 잘 아는 자를 찾아다녔는데, 그 당시 검마가 꼽은 중원제일도둑 중 한 명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백면신군 방류향이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 검마에게 은혜를 입은 후 검마의 명을 받드는 자가 되었는데 그 인연을 이용해서 방류향에게 역용술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변태술을 며칠 내내 전수받은 적이 있는 것이다.

내가 힐끔 검마를 쳐다보자 검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백면신군은 대재앙이 덮쳐왔을 때 괴물들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어서 살아날 방도가 없었네. 그래서 본인의 동의를 받고 영혼을 철인으로 옮겨서 되살려냈지.”

[그랬구려.]

“그나저나 자네가 그를 기억해줄 줄은 몰랐군. 무척 오래된 인연일 텐데.”

[그야 그의 변태술을 자주 써먹었으니까…….]

내 대답을 앞좌석에서 듣던 백면신군 방류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봐! 너도 철인이면서 변태술을 어떻게 쓴다는 거야? 인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이렇게 보여도 사실 나는 인간이오.]

[다들 철인으로 되살아나면 그런 얘기를 하지.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투덜거리듯 말하던 백면신군은 홱하고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문주님, 출발하겠습니다.]

우우웅 -

잠시 후 육중한 증기소리와 함께 커다란 비행선이 하늘에 떠올랐다. 나는 비행선을 타고 가는 도중에 옛날 생각이 나서 검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백면신군 방류향과 함께 중원제일대도로 꼽히는 인물로 쾌영(快影)이라는 자를 추천해주셨던 기억이 나는군.]

“후후…… 나는 기억에 없지만, 자네의 기억에 있다면 그런 거겠지. 실제로 나도 평소 그리 생각하고 있었고.”

[그…… 특급괴도인 쾌영은 이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었소?]

“드러내었네. 인류가 망할 위기가 되니 별수 없는 듯하더군.”

나는 왜인지 반가워져서 외쳤다.

[오!! 그자는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소?]

“아마 자네를 제외하면 세계최고의 대도(大盜)일 것일세. 아수라를 상대로 정면에서 도둑질을 성공했거든.”

[……?!]

“마왕의 본거지에 가서 영핵을 훔쳐 와서 도시 하나를 구원하기도 했네. 그는 현재 전생동료의 토벌대에 합류해서 대활약 중일세.”

뭐, 뭐라고?! 그 정도 실력이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검마를 쳐다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실력자의 출현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 말고도 그 정도로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마치 그 말을 증명하듯 앞에서 비행선을 몰고 있던 백면신군 방류향이 쑥스러운 듯 기계음으로 말했다.

[문주님, 제가 다 송구하군요. 저따위를 감히 쾌영에게 비교해주시다니.]

검마는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왜 그러나? 자네도 인간시절에는 틀림없이 중원무림에서 알아주는 특급도둑이었네. 쾌영이 너무 대단할 뿐이지.”

[그래도 감사합니다.]

저 반응을 보면 검마가 나를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다!

나는 놀라서 검마에게 말했다.

[설마 쾌영이…… 만상지투를 쓸 수 있는 것이오?]

“아니…… 그가 쓰는 건 뭔가 다른 기술이었네. 본인이 숨겨서 그 기술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자도 굉장히 잘 훔치는 존재일세. 절대로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쾌영은 이 남경에 있소?]

“아쉽지만 쾌영은 현재 도시에 있지 않고 토벌대에 합류해 있네. 그래서 그를 찾아가려면 좀 노력해야 할 걸세.”

나는 검마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토벌대? 토벌대가 대체 뭐요?]

“음. 제갈사가 그걸 안 말해줬나…….”

침음성을 흘리던 검마가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대로 지금 인류는 신선과 더불어 두 파벌로 나뉘어서 으르렁대고 있지만, 토벌대만은 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있네. 토벌대란 최강자인 무신 진소청을 대장으로 하여 자네의 전생동료들을 위주로 짜인 신적 존재를 토벌하는 인류최강자들의 집단일세.”

[……!!]

“주로 성 밖이나 서양에 있는 사도나 마왕들을 척결하고 다니지. 하나 없앨 때마다 훨씬 인류가 안전해지니까. 이들의 활동이 워낙 중요하기에 암묵적으로 그들은 파벌싸움에서 배제되어 있네.”

그게 바로 토벌대인가…….

내가 개념을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검마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토벌대에서 몇 년 정도 같이 뛰다가 혜아의 상태가 악화되는 바람에 함께 일선에서 물러났네. 다만 내가 느낄 때, 나도 토벌대에서 딱히 대단한 편은 아닐세.”

[진소청은 그렇다 치고…… 지금의 당신도 대단히 강한 고수인데 당신보다 강한 자가 현 토벌대에 있단 말이오?]

“우선 혜아가 토벌대의 최강자 중 한 명이었지. 아수라도 있고. 다만 생각보다도 중원에는 은거기인이 매우 많아서, 뜻밖에 자네의 전생동료 출신이 아닌데도 토벌대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자가 있었네. 쾌영도 그중 한 명이지.”

검마의 눈이 빛났다.

“물론 신적 존재를 쓰러뜨리는 토벌대에서 필요한 건 무공뿐만이 아니라서 무공이나 초상능력, 기문진법, 혼혈족 등 무차별적으로 뛰어난 자들이 섞여 있네. 어찌 보면 무공같은 직접적인 전투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을 갖춘 자들이 많지.”

[흐음!]

“나중에 토벌대로 직접 찾아가 보게. 그들이야말로 현 인류 최강의 전력이니까.”

나는 검마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내가 30번이나 전생하면서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중원의 은거기인들이 있었단 말인가?

‘중원은 넓구나.’

내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앞에서 백면신군 방류향이 말했다.

[비행선, 착륙합니다.]

취이이이 -

요란하게 증기가 뿜어지면서 빠르게 날던 비행선이 커다란 성에 착륙하기 시작했다. 남경성은 낙양과 달리 내성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내성 또한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무척 크고 넓어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축조한 건물 같지가 않았다.

쿠웅

비행선이 완전히 내려앉고 나와 검마는 비행선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웬 인영이 서서 우리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중?’

그자는 가사를 입은 채 머리를 완전히 밀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기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검마 어르신을 뵙니다! 어쩐 일로 본성에 행차하셨습니까.”

그자의 인사를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맞이한 검마가 대꾸했다.

“오랜만일세, 유정(惟政)! 자네는 토벌대에서 입은 부상은 좀 나았는가?”

그러자 유정이라 불린 승려는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사실 전혀 낫지 않았습니다. 마왕(魔王)의 마력이 침투한 내장이 아직도 썩은 채로군요.”

“흠…… 구천현녀의 힘으로도 더 이상 호전되진 않는가.”

유정은 다시금 합장을 했다.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전투에서 고려의 무고한 민초들을 구해내었으니, 이 어찌 부처님의 대자대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랬다.

눈앞에 있는 건 바로 강화도 월요의 유적에서 만났던 천재 법승, 유정!

그가 뜻밖에 이 남경에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말하는 걸 보니 과거에 토벌대에 참여했다가 큰 부상을 입고 은퇴한 듯했다.

‘나이를 꽤 먹어서 몰라봤군…….’

내가 내심 침음성을 흘릴 때 검마가 말했다.

“급히 금천재를 만나볼 일이 있네. 안내해주게.”

“교주는 지금 중요한 개인시간을 갖고 있어서 면회사절을 내걸고 있습니다만.”

검마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 놈팽이가 중요한 개인시간? 알만한 거 다 아는 내게도 그런 변명을 하는가?”

그러자 유정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고려의 민초들이 이 남경에 이주해와서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말이외다.”

“자네의 사정은 십분 이해하는 바이네. 허나 나는 그 자의 허랑방탕한 생활에 장단 맞춰줄 생각 없으니 당장 안내해주시게.”

“……따라오시지요.”

유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와 검마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무척 화려하군.’

내궁(內宮)은 바깥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말 그대로 선계의 비궁에 온 듯 현란한 자수가 놓여 있었고 별빛이 은은하게 맺혀 있어서 황제의 궁전보다 더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걷던 중 유정이 갑자기 통로에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

“왜 거기에서 살기를 뿜고 있으시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윽고 검마 또한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통로 저편을 노려보는 것을 보고 어찌 된 상황인지 눈치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가 통로를 가로막은 채 살기를 뿜고 있는 것이다.

통로 맞은편의 존재가 대꾸를 하지 않자 유정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비켜주시구려, 미호(美狐).”

치리리링!!

다음 순간, 황금의 꼬리 여덟 개를 휘날리며 은발의 반인반요(半人半妖)가 나타났다.

“닥쳐라, 땡중.”

그것은 틀림없는 미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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