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5권 10화
대룡관주가 검마라는 걸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입고 있는 옷은 달라졌어도, 그의 체구나 기도(氣道)는 내가 기억하는 검마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얼굴이 조금도 늙지 않았고 도리어 더 팽팽했기에, 그의 내공이 굉장한 경지에 이르러있다는 걸 짐작케 했다.
검마의 말에 놀란 건 옆에 있던 모산대주인 황허 도장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배…… 백웅? 저자가 그 전설의 소을성주란 말…….”
퍽!
풀썩
황허 도장은 곧장 검마의 수도(手刀)에 뒷덜미를 맞고 깔끔하게 기절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할 때까지 무엇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검마는 그에 이어 아직 의식이 있던 모산대의 모든 고수들을 순식간에 기절시켰다.
쿠웅
마지막 무인이 혼절하여 쓰러지자 검마가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시끄러워지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잠깐이나마 입을 봉했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굉장해졌구려.]
“자네가 그만한 기연을 주었고 20 년의 시간 내내 전투의 연속이었지. 강해지지 않으면 그동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네.”
그렇게 말한 검마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우선 들어오게. 얘기 좀 하지.”
나는 검마를 따라서 대룡관으로 걸어가던 중 예전의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이 보이자 반가워져서 말했다.
[이 건물은 증기관으로 가득 차지 않았군.]
“술법사들이 여기도 증기관을 깔고 싶어서 난리를 쳤었지.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했네.”
그렇게 말한 검마는 응접실로 보이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앉았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는데 인간의 몸이 아니라서인지 앉자마자 깡 하는 소리가 엉덩이에서 울렸다. 내가 이질감에 엉덩이 쪽을 힐끔 보자 검마가 껄껄 웃었다.
“허허, 무척 어색해 보이는군. 그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서인가?”
[그렇소. 솔직히 기계의 몸을 갖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지.]
“무슨 일이 있었나?”
[…….]
나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멈칫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옛일을 생각하고 감회에 젖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흑요석을 쓸 수 없는 상태이니 간략하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겠소…….]
나는 한참 동안 검마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제갈사 때와는 달리 지금은 느긋하게 얘기할 때는 아닌 것 같았으므로 한 식경 약간 넘는 시간 동안 최대한 요점만 추릴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검마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런가. 자네의 본체는 여전히 그 고대 탁록시대에 있고, 명경의 도움을 빌려 잠시 이 세계에 온 거군…….”
[자세한 상황은 어찌 된 건지 모르오. 다만 제갈사는 내가 [섬김받는 자]라고 하였소.]
“……으음. 지금 그 말로 자네가 혹시 가짜 백웅인 지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네. 그렇게 기이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지어낼 수 있는 자는 존재할 수가 없어.”
침음성을 흘리며 감탄하던 검마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있군.”
[무엇이오?]
“자네가 지금 무공을 못 쓰는 건 이상하다는 걸세.”
[……?]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지?
내가 검마의 갑작스러운 말에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지금 인간의 몸이 아니라 기계의 몸이니 당연히 내공도 단전도 없어서 무공을 못 쓰는 게 당연하지 않소. 내 몸에 지금 흐르는 건 기(氣)가 아니라 세계수에서 빨아들인 마력이오.]
“흠.”
[이 마력이란 힘은 무형의 기운이라는 점만 같을 뿐 사실 기와는 완전히 다른 거요. 그래서 나는 이 마력을 써서는 무공을 시전할 수 없소.]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럼 어째서…….]
검마의 입이 열렸다.
“대웅제국 시대의 신승 또한 기계였지.”
[……!!]
아!!
내가 그 말을 듣고 그제서야 알아챈 표정을 짓자 검마가 훗 하고 웃었다.
“깨달았군.”
[…… 그랬던 거군. 나는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황이 되지 않아 눈치채지 못했소.]
검마가 대웅제국 시대의 신승을 언급한 이유는 단순했다.
‘500년 후의 신승은 안드로이드였다…… 그러나 그는 의념을 쓸 수 있었어!!’
28회차 때 대웅제국에 도착했던 시절, 본체는 이미 죽었지만, 안드로이드로 되살아난 신승이 내게 의념까지 쓰며 무공을 시전하는 걸 보여줬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 안드로이드가 된 신승이 의념을 썼다면, 나 또한 마땅히 기계의 몸이라도 의념을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못 쓰는 거지?’
나도 허투루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세쓰를 통해 마력을 흡수하는 동안에 간간이 기와 의념을 구사해 보려고 노력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의념이 반응하지 않았으므로 반쯤 포기하고 있던 상태라 약간 곤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고민하며 침묵하고 있자 검마가 말했다.
“백웅. 자네는 의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는 것이오.]
“그래…… 그게 맞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다르지 않아. 자네든 나든 무(武)의 극의에 가까워져 가는 자들이니 그 이상의 정의는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한 검마가 말을 이었다.
“허나…… 굳이 지금 자네가 의념을 쓸 수 없는 이유를 짚어보자면…… 의념이 발(發)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해보겠네.”
[…….]
나는 검마의 말을 잠시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무학의 경지를 해석하다가 그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의(意)와 념(念)을 쏘아(發) 세계에 도달시키는 것인데 지금 내가 의념을 발하더라도 세계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단숨에 알아채다니 과연…… 대단하군. 수백 년간 무공을 수련했다더니 과거보다 훨씬 현기가 깊어졌어.”
찬탄하던 검마가 말했다.
“그 말대로일세. 의념이 ‘무언가’를 두들기는 그 기묘한 감각은 의념지경의 절세고수면 다들 느끼는 것…… 자네의 경우는 그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의념을 쓸 수 없다고 짐작이 되는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전생하며 수천수만 번은 더 의념을 사용했으나 그런 식으로 의념의 작용이 막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소. 아예 적의 능력이 가공할 지경에 이르러서 내가 의념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으로 끌어들였다면 모를까.]
“그런가? 그러면 자네가 의념을 못 쓰는 공간으로 갔던 경우를 생각해보시게. 그 공간과 지금 상태의 공통점을 비교해보면 뭔가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흠.]
내가 의념을 못 썼던 일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경우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나를 전뇌공간에 가뒀던 일!’
전뇌공간에 강제로 소환되었을 때야말로 내가 가장 무력화되었던 순간이었다. 그때는 술수나 기타 잡다한 기술은 물론 무공과 의념까지 완전히 봉쇄되었던 것이다.
‘그때와 지금 기계 몸뚱이를 가진 상태가 비슷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그 당시는 사실 내 정신이 0과 1으로 이루어진 전뇌공간의 데이터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데이터가 무공이나 술수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의념을 못 쓰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찌 되었든 전뇌공간은 아닌 현실이며 엄연히 기계 몸일지라도 몸이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때마냥 의념을 쓸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길래?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천주(天柱).]
“의념천주를 말하는 것인가?”
[…….]
어째서 의념천주가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 의념천주가 떠오름과 동시에, 신승이 남겼던 한마디 또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을 느꼈다.
[ 백웅 그대는 이 점을 유념하여…… 의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봐 주시오.]
의념을 넘어선 곳. 의념천주.
신승은 분명 의념은 쓸 수 있었으되 의념천주는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내게 의념천주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를 원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너무 어렵고 광대한 주제라서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 이제 와서 다시 이 문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무(武)를 맞닥뜨릴 줄이야!
‘절대지경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념천주가 떠받치는 기둥 위쪽을 볼 수는 없다. 보려고 해도 새하얀 것이 시야를 감싸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와 버리는 제약이 있다.’
아수라가 수십 년 동안 수천 번이나 시도했는데도 기둥 위쪽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나는 그 이후 제대로 시도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넘겨 버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제약이 생겨나자, 나는 갑작스럽게 내 머릿속을 영감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설마…….
의념을 발(發)하여 도달하는 기둥 끝의 하늘(天)…….
지금 내게는 그 하늘이 존재치 않기에 의념도 의념천주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의념천주가 평소에 떠받치는 기둥 끝의 ‘하늘’이란 것은, 0과 1의 데이터 상태이거나 혹은 지금 내 몸 상태에서는 출현하지 않는 것이란 뜻이 된다.’
거기까지 추론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 그래. 나는…… 지금 내가 무슨 상태인지 아무것도 몰라!!’
우선 나는 지금의 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제갈사의 추론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내가 어떤 경위로 명경을 통해서 이 세계에 왔으며 어떻게 해야 이 세상으로 진짜 귀환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하는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게 될 거야!
이런 마력에만 의존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깨달음을 얻고는 검마에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소.]
“무엇인가?”
나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하루바삐 저승으로 가서 명경을 찾아야만 하오. 이 세상으로 넘어올 때 사용했던 그 매개체를 찾아내야만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오.]
지금 다른 잡다한 일은 다 필요 없다.
일단 최우선적으로 명경부터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좋군. 방금 전과는 마음의 자세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져. 조금 전까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서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는데 말일세.”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검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게.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네.”
[알았소.]
저벅저벅
나는 검마를 따라서 천천히 이 대룡관의 계단을 올랐다. 고풍스럽지만 튼튼하게 지어진 나무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검마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의 내면에 있다는 제갈사는 아직 수면에서 깨어나지 못했나?”
[그렇소.]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 자에게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이니.”
[……?]
“다 왔네.”
십여 층에 이르는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였다. 나는 대룡관의 강당에서 새하얀 빛에 감싸인 구슬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구슬은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 듯싶었다. 그리고 그 구슬에는 탁하게나마 인영(人影)이 비쳐 보였는데, 그 인영이 여자의 모습인 것을 확인한 나는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 설마!!]
“그 설마일세…….”
[이런 일이 또…….]
나는 순간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그 빛의 구슬을 쳐다보다가 검마에게 말했다.
[이 구슬 안에 있는 게 서문혜란 말이오?!]
검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서문혜에게 또다시 이변이 일어나다니!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몸에 있는 거신족의 힘이 폭주하여 신열(神熱) 현상이 일어났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이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 말에 검마는 침묵했다. 그는 천천히 흰 구슬에 다가가 겉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혜아는 2년 전까지는 전혀 이런 현상이 없었네. 도리어 동료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으로 신력을 각성하여 일행 중에서 최강자 중 한 명으로써 활동했지. 사실상 진소청과 백련교주를 제외하고는 최강이었어. 이 아이가 요동에서 해치운 강대한 마물만 하더라도 열 마리가 넘었다네.”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오?]
“그렇네. 어느 순간부터 죽은 듯이 잠을 오래 자는 날이 많아지더니, 급기야는 하루아침에 이 구슬에 본인을 가두고 말았지.”
[……!!]
“나는 본디 백련교와 천재만재교의 대립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네. 중립을 지키면서 제갈사처럼 자네가 복귀할 때까지 기다리는 파였지. 허나 이 이변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천재만재교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비밀리에 요동성에서 본거지를 옮겨 이 남경까지 찾아왔던 것이네.”
나는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가 되어서 중얼거렸다.
[제갈사는 당신과 서문혜가 요동성에 있다고 알고 있었소. 그러나 당신은 사실 남경의 대룡관주로 일하고 있었으니, 제갈사에게도 근황을 알리기 싫었던 모양이군.]
“세상에 사법지존 제갈사에게 행적을 알려져서 좋다 생각할 자가 누가 있겠나?”
[우린 동료잖소.]
“동료는 동료지. 허나 제갈사는 자네의 기억 속에서 보았듯이, 자네 이외의 모든 동료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존재일세. 그런 자에게 내 딸의 이런 모습이 알려져서 대체 뭐가 좋겠나.”
[…….]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긍정하기에는 제갈사가 너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검마는 하얀 구슬에서 손을 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백련교가 지배하는 낙양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일세. 첫째는 이곳에 구천현녀가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백련교주가 언제 내 딸을 인질로 삼아 제물로 바치려 할지 모르기 때문일세.”
나는 뜻밖의 말에 약간 놀랐다.
[구천현녀? 이 남경성에 구천현녀가 있단 말이오?]
“그래. 구천현녀가 내 딸의 이상현상을 잠시 멈춰주고 있다네.”
[그럴 수가…… 천계에 있어야 할 존재가 어찌.]
“제갈사에게 그동안의 일을 듣지 못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행보를 서두르다 보니 동료들의 자세한 근황을 들을 새가 없었소. 이 남경에 구천현녀가 있었단 말이오?]
“그렇네. 사실상 천재만재교가 버티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지.”
[하지만 내가 만났던 낙양의 사천왕이라는 자들은 대개 강력한 천계의 대라신선이었소. 구천현녀와 그자들의 입장이 대립하는 일이 가능하단 말이오?]
아닌 게 아니라 낙양사천왕 중에는 팔선 종리권이 있었다. 팔선은 원래부터 구천현녀의 아래나 다름없었기에 서로 대립하는 단체에 각각 몸을 담는 경우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세상에 구천현녀와 팔선이 으르렁거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검마는 씁쓸하게 웃었다.
“후후…… 어이없는 일이네만…… 금천재가 구천현녀의 계약자가 되었네. 그래서 이 남경성의 주인이 되는 게 가능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