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588화 (1,487/1,615)

전생검신 84권 16화

나는 제갈사를 다시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걸 느꼈다. 그것은 너무 뜻밖의 인물을 발견한 탓도 있으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흉신을 피해서 명경으로 도망쳤는데 갑자기 현실세계로 되돌아와서 제갈사를 만나다니?

내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제갈사가 말했다.

“물리적 외상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묘하군. 왜 일어나지 못하는 거냐?”

나는 그 말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제갈사가 다 알면서 나를 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약간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지금 상황은 제갈사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크윽…… 잠깐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전신에 기력과 의념을 불어넣어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힘을 불어넣어도 내 몸은 거의 꼼짝도 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손과 발을 조금 움직이는 정도였다. 내가 무력한 발버둥을 치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제갈사는 문득 내 목에 손가락을 슬며시 올렸다.

기잉 -

“……!!”

그 순간 나도 제갈사도 놀라고 말았다. 내 목과 제갈사의 손가락이 닿은 접점(接点)에서 갑자기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원형의 파장이 흘러나온 것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파장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고 분명히 내 몸에 알 수 없는 존재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약간이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게 되었다.

“윽. 일어났다.”

상체는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된 듯 손과 팔은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고 시험 삼아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니 그 사실이 확실해졌다. 다만 하체는 여전히 내 통제를 벗어나 있는 듯했다.

그러자 나를 보고 있던 제갈사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미소였다.

“꽤나 재밌는 상황이 된 것 같군…… 크크크.”

“……“

나는 그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 표정을 본 제갈사가 말했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이군.”

“그, 그래…….”

“모든 게 궁금하겠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네가 가장 궁금해할 게 무엇인지 말해볼까?”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찾아와서 동료로 영입하지도 않았고 흑요석을 준 적도 없는 내가 당연한 듯이 전생동료로서 전생자인 백웅 너를 알고 있는 이유라던가, 말이지…… 크크큭.”

“……!!”

정곡이었다.

‘도, 도대체…….’

제갈사의 말대로 나는 이번 생에 제갈사를 찾아가서 영입하거나 흑요석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갈사는 마치 아주 예전부터 내 동료였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내 전후사정을 죄다 알고 있는 걸로 보이는 것이다. 제갈사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은 했으나 사실 이건 굉장히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제갈사는 느긋이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하나 묻고 싶군. 너는 왜 30번째 삶이 시작한 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 거지?”

“그, 그건…….”

“아, 대답하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겠군. 너는 30번째 삶이 시작하자마자 소을촌에서 촌장 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 촌장 놀이를 했던 이유는 전생하면서 받은 정신적 외상 때문에 잠깐 맛이 가서였지. 반쯤 미쳐 버린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본격적으로 세상의 어둠과 마주치면서 세계관이 막 넓어질 때가 아니었나?”

“……“

제갈사가 한층 짙은 미소를 지었다.

“또 하나, 가장 큰 이유는 대충 정신 놓고 힘으로만 밀어붙여도 아무 문제 없었던 게 컸겠지. 이미 너는 29번이나 전생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전생자라서 지상세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였고 이만큼 쉬운 판에서 굳이 내 지혜까지 필요하진 않았던 거다. 흉신만 봉인해 버리면 근처에 현이 정도만 있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극히 쉬운 전생이었을 테니까.”

“어…….”

“아닌가?”

나는 잠시동안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모든 말이 정곡이라는 걸 깨달았고 반박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하다…….”

제갈사의 말대로였다. 나는 사실 30번째 삶을 시작할 때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대충 소을촌의 삶을 즐기려는 생각밖에 없었고, 전생의 제갈사가 말했던 대계(大計)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쉬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데다가 딱히 무력(武力)이 부족해서 막히는 국면도 없었기에 큰 지혜가 필요하지 않았고 전생에 괜히 제갈사를 끌어들여 죽게 했다는 부채감 때문에 제갈사의 영입을 망설이게 되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영입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던 중에 팔부신중 건으로 난데없이 외우주로 가버리게 되었던 게 치명적이었다.

제갈사가 큭큭 웃었다.

“크흐흐, 뭐가 미안하냐. 네 행동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확실히 흉신만 제약으로 묶어둘 수 있었다면 나머지 지상의 적수들은 적도 아니었지. 도리어 난이도를 빠르게 해금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적으로 성장할 시간을 크게 벌 수 있었으니, 상당히 현실적이고 효율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아…….”

“나를 일찍 영입했다면 전생횟수를 줄이기 위해 또다시 모험을 준비했을 테니 네 행동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가 무력으로 너를 보좌하는 역할도 아니고.”

“……그, 그런가.”

“뭐 그래도 설마 한 번도 안 올 줄은 예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크크큭.”

“……“

이, 이 자식 역시 화난 거 아니야……?!

내가 미안함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제갈사는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백웅, 넌 소을촌장 놀이 도중에 구궁파천뢰를 자주 썼지?”

“어? 어…….”

“항아.”

제갈사는 그 뜬금없는 한마디를 한 후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

나는 그 시선을 어리둥절해하며 한동안 마주 보다가 한참 후에야 뭔가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어, 어, 어……?! 서, 설마!!”

제갈사는 내가 깨달은 표정을 짓자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가 구궁파천뢰의 뇌혼을 계속 명동(鳴動)시킬 때마다 내 이혼대법이 계속해서 반응했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나 그 빈도와 횟수가 많아질수록 네 정신과 내 정신이 혼(魂)과 백(魄)의 관계로 연결되었고, 종래에는 네 생각과 기억까지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지.”

따악

경쾌하게 손가락을 마주친 제갈사가 씩 웃었다.

“흑요석 줄 필요가 없어서 편하지?”

“……!!”

나는 그 모습에서 과거 28번째 삶에서 항아의 계략에 빠져 있던 나를 구원해준 제갈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제갈사가 하는 행동은 정확히 그때와 같았던 것이다.

구궁파천뢰!

그 무공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뇌혼은 이혼대법의 원리로 형성되어 있었고, 또한 그 탓에 내가 쓰는 구궁파천뢰는 제갈사와 연결되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제갈사는 30번째 전생을 시작한 이후 내 기억을 계속 공유했던 거나 마찬가지인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하지만 29번째 삶에서 찾아갔을 때 너는 전혀 나를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때는 삶 초반인 데다 구궁파천뢰를 펼친 횟수도 그리 많지 않았잖나. 하지만 이번 30번째 삶에서는 네가 소을촌장으로서 몇 년 단위로 무공수련하며 계속 구궁파천뢰를 펼치니 나 또한 자연스럽게 네 기억을 얻게 된 거다.”

“아……!!”

내가 그제야 정확히 이해한 표정을 짓자 제갈사가 말했다.

“아무튼, 나는 네가 소을촌장으로 활동하는 것을 인지한 후에도 굳이 널 찾아가진 않았다. 왜인 것 같으냐?”

“왜?”

“네가 날 찾아올 수도 있었던 데다가…… 따로 행동하는 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효율적이라고?”

내 반문에 제갈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 밑에 갔다면 해줄 수 있는 건 책사로서 조직을 정비하거나 네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것. 하지만 책사로 조직을 정비하는 역할은 이미 현이가 다 해주고 있었고 30회차 전생자에게 굳이 나갈 길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왜냐면 이전 생에 나 자신이 네게 이미 지침을 주지 않았는가?”

“……“

“즉 나는 그 시점에서 너와 딱히 합류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마도의 기초나 세피로트에 관한 것도 대략 다 알려줬었고.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따로 움직이기로 했지.”

그래도 소을촌에 찾아오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쑥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제갈사를 찾아가는 걸 까먹었던 나 자신이 몇 배는 멍청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떻게……?”

“흐흐. 지금은 그것보다 네 기억을 주는 게 어떠냐? 아주 먼 세상으로 떠났다가 되돌아온 네 기억을 보고 상황을 정리하는 게 몇십 배는 중요한 일이니까.”

“아! 잠깐만.”

나는 품속을 뒤적거리며 목갑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저 내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또 하나의 물건을 잃어버린 걸 깨닫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내 얼굴을 보자 제갈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천암비서와 목갑을 전부 잃어버렸군.”

“제, 제갈사!! 혹시 어디 떨어져 있는 거 못 봤냐?!”

“전혀. 네가 출현했을 때는 그냥 어디 널브러져 있었는데 아무것도 안 갖고 있었다.”

“……!!”

이런 망할!! 천암비서를 또 잃어버렸어!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도 천암비서 찾겠다고 무지개뱀도 찾아가고 별짓을 다 했었는데 또 개고생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목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천암비서를 잃어버린 사실은 잠시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나는 잠시 후 고개를 크게 젓고는 말했다.

“이, 일단 흑요석이라도 줘. 기억전송을 할게.”

“그러지.”

제갈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서 커다란 흑요석을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이 정도면 그간의 기억을 전해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았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흑요석으로 기억전송을 했다.

우웅…….

“……?”

뭐, 뭐지……?

나는 아예 내 힘이 차단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방폐감(防廢感)에 불쾌해졌다. 힘의 발단(發端)에서부터 아예 출력(出力) 자체가 막혀 버리는 이런 느낌은 무척 생경한 것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끙끙대며 기억을 전송하려 했지만, 이윽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예 기억전송술 자체가 막혀 있어!

내가 어이가 없어서 흑요석을 쳐다보자 제갈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흑요석 기억전송이 막힌 건가.”

“……아니 대체 왜?!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까지 적용되는 건…….”

“제약?”

“허공록이 나한테 금계(禁戒)를 걸었는데 거기서 흑요석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금계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 허공록에 새겼다고 하던데 설마 여기서까지…….”

제갈사는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네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군. 외우주로 간 이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략 얘기해봐라.”

“어…… 무척 길 텐데…… 그리고 말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아.”

내가 걱정스럽게 얘기하자 제갈사는 씩 웃었다.

“자세히는 얘기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방법이 따로 있으니까.”

방법?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제갈사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했다. 제갈사가 자세히 말할 필요 없다고 해서 몇 번이나 재촉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를 생략했음에도 나는 얼추 다 이야기하는데 한 시진 가까이 소모해야만 했다. 게다가 봉황에게 발설금지의 제약이 걸렸던 [그 의뢰]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힘들었으므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제갈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

그러더니 제갈사가 말했다.

“백웅. 지금 이 상태에 대해서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확실하게 하려면 일단 시험을 해봐야 할 것 같군. 몸을 움직일 수 있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부터 상체 외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

“그런가? 어쩔 수가 없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손가락을 퉁 하고 튕겼다.

슈슈슉!!

그러자 장내에 있던 커다란 빈 공간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여 명의 인간들이 출현했다. 그 인간들은 꽁꽁 묶여 있었으며 저마다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무고하게 잡혀 온 민간인들로 보였다. 내가 깜짝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자, 제갈사는 여전히 의자에 걸터앉은 채 인간들을 향해서 말했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라. 그럼 살려줄 수도 있다.”

“네…… 넵!! 말씀만 하십시오!!”

“지금 이 침상 위에 있는 천하박색의 추남이 보이는가?”

울컥!

나는 그 말에 순간 욱하는 걸 느꼈다. 나는 제갈사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놀릴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투덜거렸다.

“야, 제갈사! 난 지금 복희의 얼굴이야. 추남은 무슨…….”

하지만 제갈사는 그런 내 말을 무시하는 듯했고, 잠시 후 묶여 있던 인간들이 웅성거리며 서로 의논하다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요!!”

“침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려죽이셔도…… 정말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

뭐, 뭐라고?!

‘내가 안 보여?!’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는데 왜 안 보인다고 하는 거냐?!

“그렇단 말이지.”

그러자 제갈사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개중 한 명의 포승줄을 직접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침상 앞까지 데려온 후 그에게 장검(長劍)을 쥐여주었다.

“자아. 어디 검기(劍氣)를 써서 이 침상을 망설임 없이 베어보아라.”

“제갈사. 그럼 나도 베이는데?”

제갈사는 또 내 말을 무시했고, 장검을 쥔 사내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 그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빨리 해라. 그리고 백웅 너는 막거나 피하지 마.”

막지 말라고?

“흐아압!!”

슈콱!!

잠시 후 그자의 장검이 검기를 머금은 채 허공을 갈라서 침상까지 칼날이 박혔다. 검기를 쓸 수 있는 걸 보면 어중이떠중이 무사는 아닌 듯했다.

그리고 뻔히 눈앞에서 참격을 시도했는데도 나는 그 칼날의 궤적이 내 몸을 가르는 중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말 그대로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내 몸을 투과해 버린 것이다.

“……!!”

이건 대체 무슨…….

나는 아무런 무공이나 방어술법이나 신력을 쓰지 않았는데?!

도리어 지켜보고 있던 내가 더 당황하자 제갈사는 잠시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듯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백웅. 네 상황을 개선시킬 방법을 알아냈다. 어디 한 번 해볼까?”

“어떤 방법인데?”

“이를테면…….”

덥썩

갑자기 제갈사가 방금 전 장검을 휘둘렀던 사내의 얼굴을 덥석 붙잡았다. 장검을 든 사내는 마치 사마귀 앞의 벌레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제갈사는 잠시 후 킬킬거리며 말했다.

“스사노오의 재난에서 살아남으려고 어린아이 수백 명의 인신공양을 주도한 무사.”

퍼억!!

역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두개골이 제갈사의 손아귀 힘에 터져 나갔다. 피륙이 비산하자 묶여 있던 인간들이 다들 혼란에 휩싸였다.

“으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갈사는 피 묻은 손을 늘어뜨리며 그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 손을 인간들 쪽으로 향했다.

“또한 그 인신공양의 수혜를 입고자 아이들을 잡아온 인간쓰레기들의 목숨을…… 취해야겠다.”

“자, 잠깐! 제갈사!! 그만둬!”

한 놈은 얼떨결에 죽게 했다 쳐도 저 많은 사람을 단숨에 죽이는 건 좀 아냐!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학살하는 걸 지켜볼 수는 없다!

파앗

그래서 나는 급히 손을 뻗어 제갈사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순간 제갈사의 눈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날카로워졌고, 나는 그대로 제갈사를 억누르기 위해서 신력을 시전했다. 지금 제갈사가 가진 능력이 파악이 되지 않았기에 신력이 가장 확실한 제압수단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어?’

하지만 내가 힘을 쓰려고 해보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이거 왜 이래?

나는 신력이 안 먹힌다 싶자 재빨리 의념을 발현해서 제갈사를 살기(殺氣)를 이용한 심공(心功)으로 억누르려 했다. 신력처럼 확실하지 않더라도 차선책으로는 써먹을 만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의념조차 발현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평소에 품고 있던 막강한 내공조차도 아무런 기별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설마 제갈사가 특별한 술수를 써서 내가 아무 능력도 못 쓰게 제약했단 말인가!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제갈사가 묘한 소리를 했다.

“과연 그렇군. 간섭할 수 없는 거야.”

츠아아아앗 -

인간들이 묶여 있는 바닥의 밑에 마도의 마법진이 시뻘건 빛과 함께 그려졌다. 잠시 후 그 흉험한 적색의 빛에서 수많은 핏빛의 손아귀가 뻗어지더니 인간들을 하나둘씩 혈광(血光)이 가득한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저항하는 자들의 손발을 촉수가 묶는 것도 보였다.

“끄아아악!!”

“아악!”

“사, 살려…….”

꾸물텅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며 인간들의 모습이 서서히 마법진 안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인간들의 비명이 사라지고 잠잠해지자 제갈사는 마법진 쪽으로 걸어가서 한가운데에 손을 뻗었고, 허공에 시뻘건 홍옥 같은 보석이 나타나서 제갈사의 손에 쥐어졌다.

“……!!”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제갈사를 노려보다가 외쳤다.

“제갈사!! 하지 말라고 했잖나!”

붉은 보석을 손에 넣은 제갈사는 내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는 지그시 붉은 보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 보석을 삼켰다.

번쩍!!

붉은 보석이 갑자기 엄청난 빛을 뿜어내었고 그 빛이 제갈사의 몸에 올올이 스며드는 게 보였다.

동시에 제갈사의 몸에서 갑자기 숨 막힐 정도의 마력이 터져 나오는 게 보였다.

쿠구구구!!

저 정도면 웬만한 마왕이나 사도 수준인 게 아닐까? 나는 갑작스레 강해진 것 같은 제갈사를 쳐다보며 놀랐지만 정작 제갈사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후, 역시…… 이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군. 공장을 가동시켜야겠어.”

“……“

나는 제갈사를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갈사…… 방금 죽인 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 맞는 거겠지?”

말릴 수도 없었지만, 인간의 희생으로 행동이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이 못내 기분 나쁘고 찝찝했다. 정말로 인신공양을 한 인간들이었다면 연민을 품을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눈앞에서 인신공양을 바라보았다는 건 무척 싫은 일이었다. 제갈사는 클클 웃었다.

“내 이름을 걸고 나쁜 놈들이라고 말해두지. 수백 명의 어린아이들을 악신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게 만드는 대신 재난을 피한 인간쓰레기들이 맞다. 저번에 겸사겸사 제물용으로 잡아 온 걸 이렇게 써먹는군.”

“으음…….”

“백웅, 네가 없는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지금 내가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겠지만 요즘 시대에는 딱히 대단치도 않아.”

…… 도대체 세상이 얼마나 변했길래 제갈사가 저렇게 당당한 거야?

제갈사가 떳떳할 수 있는 세상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젠장. 방금 일은 잊어버리자.’

제갈사가 나쁜 놈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지금 그 말을 믿어주는 수밖에 없어.

중요한 건 지금 상황부터 정리하는 거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제갈사 너는 내가 어떻게 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거냐? 방금 전에 무슨 일을 했던 거지?”

“……“

제갈사는 내 말에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처음 네 몸에 진맥을 해보려고 손가락을 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나?”

“내 상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

“그래. 그 대가로 내 마력의 절반이 영구적으로 소실(消失)되었다. 여태껏 열심히 모아왔던 그 마력의 절반이 말이야.”

“……뭐?!”

“쉽게 말하자면 내 마력을 대가로 네 상체를 움직이는 게 허락된 거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

그렇게 말한 제갈사는 힐끔 방금 전 인간들을 희생시킨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저놈들의 생명을 프로토타입 현자의 돌에 응축시켜서 내 잃어버린 마력을 회복시킨 것뿐이다. 겸사겸사 네가 지금 능력을 쓸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도 하고.”

“현자의 돌…….”

“생 제르맹이 기술을 많이 발전시켰지. 지금은 유용하게 쓰고 있어.”

제갈사는 그렇게 말한 후 팔짱을 꼈다.

“중요한 건 현자의 돌 따위가 아니다. 네가 내 마력을 영구적으로 강탈해감으로써 상반신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게 무슨 의미일 거 같나?”

“……? 모르겠는데.”

“잘 들어라, 백웅. 지금은 아직 추측단계일 뿐이지만…….”

제갈사의 표정에 요사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너는…… [섬김받는 자]로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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