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587화 (1,486/1,615)

전생검신 84권 15화

흉신이 나타났다.

나는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모습을 드러낸 흉신에게서 느껴지는 절대무비(絶對無比)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단순한 힘의 고저 차이가 아니다.

이놈은 격(格)이 다르다.

황제 공손헌원과 맞닥뜨렸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심중(心中)이 진탕되는 것을 느낀다. 황제는 끝을 알 수 없는, 신비하며 위대한 악의였다면, 눈앞의 흉신은 원시(原始)의 흉맹한 악(惡)이자 원죄(原罪) 그 자체로 느껴졌다. 저런 존재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저주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을?’

나는 동시에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전생하면서 흉신을 마주쳤던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직접 얘기를 나눠본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렇게 압박감이랄게 심하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지금 느껴지는 이 중후한 기풍은 그야말로 격의 차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이윽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신력을 다룰 줄도 모르는 하찮은 필멸자 수준에서는 흉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흉악한 존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고 그 여파만으로도 미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필멸자일 때도 아예 겁을 상실했기 때문에 역으로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지금은 충분히 강대한 신력을 얻어서 신급이 되었기에, 같은 신격의 수준에서 흉신의 힘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된 셈이었다.

마치 무림에서 고수가 될수록 더더욱 초고수의 위대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

…… 설마 이 정도였다니.

나는 외우주 종말의 순간에도 사실 흉신의 진짜 힘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었다. 너무 큰 격차가 나서 그랬던 걸까?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지?

‘대체 이놈은 왜…….’

이만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면에서 다 때려 부수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곤혹감 때문에 잠시 주춤거리자, 내 앞에 있던 [별을 뒤트는 자]가 내게 등을 돌리고 흉신에게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다. 마치 내게 기습받는다 하더라도 흉신에게 경배를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듯한 절대적 복종의 태도였다.

[신이시여. 부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신……!!

[별을 뒤트는 자] 또한 강력한 신격이 분명한데 신이 신을 섬긴다는 이 기묘한 모순! 그것은 그만큼이나 흉신이 위대한 존재임을 의미했고 우주의 균형에 직접 손을 뻗을 수 있는 신좌(神座)임을 의미했다.

우우우…….

발밑의 바다가 공명(共鳴)하며 끓어오른다. 본디 수억 도의 온도를 내뿜고 있던 열해(熱海)가 한층 더 끓어오르면서 그 온도는 단숨에 수백 배 높아진 것 같았고, 우주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던 열수(熱水)가 서서히 마르는 게 보였다. 물질적인 한계에 도달한 세계의 변화가 이윽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광대한 크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촤촤촤촤

어둠의 열해가 끓어오르면서 생겨난 소용돌이는 점점 더 넓어지더니 그 중심에서 천천히 찬란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 빛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적색거성인가!!

아마 태양보다 수천억 배는 더 거대할 게 분명한 적색거성은 열해의 표면에 떠오르자 상상도 할 수 없는 에너지를 사방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 잠시 동안 빛의 광선에 휩싸여서 눈이 아플 정도가 되었고, 그 수많은 열 광선들은 이윽고 무차별적으로 천지를 물들였다.

“크윽.”

나는 신력으로 가볍게 막아내었지만, 광선 하나하나가 우주적인 단위의 힘을 품고 있었기에 손발이 저려왔다. 그렇게 파장의 일파를 막아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웅이 초조해하며 외쳤다.

[주인!! 아직 적이 이쪽을 얕보고 있으니 기회는 지금뿐이오! 도망칩시다!]

“뭐, 도망?”

[뭔가 이상하오. 저 흉신은…… 뭔가 이상하단 말이오!]

흑웅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함유되어 있었다.

나는 흑웅도 그런 감정을 품는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끼며 차분히 말했다.

“걱정 마. 생각이 있어.”

내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고오오

적색거성보다 더욱 거대한 괴물의 손이 적색거성을 손바닥 위에 올린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고, 천천히 그 괴물의 손은 적색거성을 손에 잡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수평선 저 너머에서 거대한 실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흉신!!

나는 전면에 나타나는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며 생각했다.

‘어둠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던 적색거성을…… 자기가 강림하는데 필요한 제물로 직접 사용했군.’

방금 전의 광선도 공격이 아니라 그저 적색거성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파장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적의 힘이 너무 상식을 초월해 버려서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내 신력으로도 흉신을 상대하기에는 아득하게 부족하다는 사실만 다시 되새기게 될 뿐. 내 신력으로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냐 하면 절대로 불가능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흉신이 처음으로 내게 의사를 전달했다.

[금기(禁忌)를 범했는가, 전생자(轉生者)여.]

“……?!”

뭐, 뭐라고?!

나는 대뜸 정곡을 찔리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내가 전생자라는 걸 단숨에 안 거지?!’

정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이유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그가 ‘금기’를 언급했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을 금기라 하는지는 뻔하다.

내가 [큰 굴레]의 과거로 왔다는 사실!!

본디 그 어떤 존재도 해낼 수 없는 그 금기를 어겼다는 사실을 눈앞의 흉신은 곧바로 간파한 것이다.

나는 두 가지의 비밀을 단숨에 알아낸 흉신에게 기만전술을 써봐야 안 먹힐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상대는 그냥 나를 떠본 게 아니라 틀림없이 다 알고 얘기한 거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흉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 기억을 읽었나?”

전륜성왕의 예시에서 내가 추리를 하자 흉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다…… 무량한 굴레를 넘을 수 있기에.]

“……?”

무량한 굴레?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흉신이 말했다.

[우자(愚者)여…… 언젠가…… 스스로 나의 도움을 구하여 찾아오게 되리라고 했었지.]

펄럭…….

흉신의 날개가 한 차례 펄럭였고 그의 안광이 좀 더 짙어졌다.

[오늘이 바로 그 약속된 날인가 싶구나.]

“……!!”

뭐지?

방금 저 말은…… 어디선가…….

바로 그때,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대, 우자(愚者)여…… 언젠가…… 스스로 나의 도움을 구하여 찾아오게 되리라…….]

틀림없다…….

저 말은 이번 30회차의 초반에 흉신에게 은거하라는 교섭을 할 때 저놈이 마지막에 했었던 말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멍해져서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지금의 흉신은 몇만 년 전의 흉신이지 않은가?

어떻게 [큰 굴레]의 미래에서 나눴던 대화를 알고 있단 말인가?

큰일이다.

이건 진짜 뭔가가 심상치 않다.

흑웅의 직감대로 눈앞에 있는 흉신은 뭔가 이상하다!

나는 위기를 느끼자마자 급히 외쳤다.

“……아, 아니 그건 상관없어! 흉신이여…… 너는 나와 계약을 맺었다!”

[…….]

“기억하지? 너는 이번 내 생에…… 얌전히 있기로 약속했단 말이다!!”

그렇다. 내가 방금 전까지 힘의 차이를 느꼈음에도 도망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

상대가 흉신이라면, 아직까지 내 생이 끝나서 전생이 되풀이되지 않은 상태라면 - 얌전히 있기로 약속을 했었기 때문이다!

흉신이 침묵하자 나는 발악하듯이 마저 외쳤다.

“나와의 약속대로라면 너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 르 뤼에를 부상시켜서도 안 되고 레무리아를 공격해서도 안 돼! 자기 입으로 약속한 걸 어길 셈이냐?”

됐다……!!

이걸로 흉신을 다스린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내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흉신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얌전히’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엉?”

[나와 내 세력, 동맹을 모두 침묵시키는 얌전함…… 그러나…… 아무리 얌전하더라도 본거지에 쳐들어온 적을 눈뜨고 볼 정도로 얌전하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

서, 설마…….

[은자의 굴레라 하여도…… 자기 방위의 권리를 이길 수는 없는 법…… 조건이 설정되지도 아니하였으니…… 나는 그대의 불성실을 이유로 이 자리에서 계약의 일시 파기를 고하노라.]

그렇게 말한 흉신은 마치 확인을 받기라도 하듯 자신의 거대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파지지직!!

그러자 흉신의 손이 잠시 감전되듯 하더니 곧바로 원래대로 되돌아왔고, 흉신은 뭔가 만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약의 공증인인 ‘그’가 없는 이 시대…… 확실히…… 편하구나.]

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나는 내가 무엇을 겪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흉신은 크게 날개를 홰치듯이 움직였다.

쿠구구구!!

암해(暗海)가 진동하며 천지천상이 분열한다. 신화시대의 악(惡)이 급부상하며 그 진체(眞體)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흉신의 힘이 한도 끝도 없이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쿠오오오!!

‘미…… 미친…… 더…… 더 강해지는 게…… 말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제에 필적하는 것 같았는데 더 강해지고 있다고……?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넋을 놓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흑웅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인이여!! 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슈아악!!

다음 순간 나는 갑자기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다. 흑웅이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해서 내 몸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마치 과거 달마대사와 싸우던 그때처럼 나는 정신세계 한켠에 의식이 날아가 버렸고, 그 대신에 화면을 통해서 흑웅이 내 몸을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의식세계에서 외쳤다.

“흑웅 너!!”

[주인!! 정신 차리시오! 지금 상황을 인정해야만 하오!]

이어진 흑웅의 말에 나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저 흉신은 30회차 초반에 주인과 계약을 맺었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소! 또한 지금 자기방위를 이유로 은거계약을 파기했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일시파기라고 제한을 걸었다는 것이오!]

“…….”

[일시적으로 파기했다는 건 영구적으로 은거계약을 깰 수 없다는 것! 이 자리에서 일시파기를 해서 운신의 자유를 통해 노리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오!]

“그, 그게 뭐지…….”

[주인을 봉인하거나 납치하는 것이오!]

“……!!”

흑웅의 말에 나는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흑웅처럼 냉정하고 확실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는 동안에 흑웅의 말이 이어졌다.

[흉신은 계약을 일시파기한 틈을 타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서 주인을 행동불가 상태로 만들어 봉인할 것이오! 그리고 사악한 지혜를 이용해 은거계약을 유야무야시키고 앞으로 주인을 꼭두각시로 만들게 분명하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최선을 다해 공격을 세 번까지는 견뎌볼 터이니 주인이 수를 내주시오!]

잠시 후 흑웅이 전신에 신력을 모으며 이를 악물었다.

[온다!!]

쿠구구구…….

흉신이 자신의 한 손을 뻗는 자세를 취했고, 그 손바닥 위에는 화염의 구체가 떠올랐다. 그 화염의 구체는 틀림없이 방금 전에 흉신이 소환의 대가로 먹어치운 적색거성이었고, 그 적색거성은 아까와는 달리 맹렬한 속도로 회전을 하고 있었다.

지잉

잠시 후 적색거성이 회전을 견디다 못해 짜부라지더니 시꺼먼 무언가로 응축(凝縮)되는 듯했다. 흑웅은 그 모습을 보더니 당황한 듯했다.

[브…… 블랙홀…… 그렇다면 저 공격은…… 퀘이사.]

번쩍!!

콰과과광

[크아아아아아!!]

흑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흑웅은 잠시동안 내 신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방어막을 만들어내어 흉신의 공격을 방어했지만 한순간에 넝마조각처럼 변해서 찢긴 것이다. 다행히도 일격에 죽는 건 면했는지 흑웅은 빠르게 태세를 되찾았는데 나는 그 순간 흑웅의 영혼을 대신해서 내 몸의 제어권을 절반 정도 되찾은 걸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흑웅 대신 제어권을 빠르게 되찾은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절망했다.

“흐, 흑웅.”

[…….]

대답이 없는 흑웅은 이미 반쯤 소멸당한 것이다. 방금 전의 공격이 아무리 대단한 물리적 출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흑웅의 신력까지 와해시킬 수는 없었는데, 아마도 흉신이 퀘이사라는 공격에 자기의 신력을 듬뿍 담아서 날린 탓에 흑웅의 영체는 직격타를 맞았으리라.

흑웅은 이미 인간으로 치면 식물인간이 된거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얼마나 신력을 회복해야 원상복구가 될 수 있을까? 동시에 나는 흑웅을 일격에 이 지경으로 만든 흉신의 힘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더…… 더 강해지고 있어…… 다음 공격이면 무조건 죽는다.’

나는 상상 이상의 절망이 마음속을 몰아치는 걸 느꼈다. 나 또한 이 시대에서 상위신격급으로 많이 대접받았는데 진짜배기를 만나니 내가 별것도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해 버린 것이다. 아직까지 진짜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초강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의 벽을 알게 된 것이다.

동료조차 없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흉신을 감당할 수 있는 거지?

‘일월지혼…….’

단 하나의 해답이 떠올랐지만 나는 동시에 일월지혼을 지금 쓸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쌍성의 기운을 합일시키는 그 절세적인 힘은 누군가가 나 대신에 인과율을 지급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지금 무작정 도전하면 무조건 실패할 게 분명했다. 실패해서 사대신기의 힘을 영구적으로 일월의 천칭에 흡수당할 바에야 도전 안 하는 게 맞았다.

그러면 사대신기라도 꺼내서 대적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 또한 말도 안 될 정도로 멍청한 짓이다. 흑웅이 방금 신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린 것도 사대신기의 힘을 쓰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결국 흉신의 전력(全力)은 내 사대신기의 잠재력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루나를 꺼내든 아그니를 꺼내든 나는 1초 만에 흑웅과 똑같이 반죽음을 당하고 말리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난 정말 이 시대에 동료가 없는 건가?’

분명히 동료는 있으되 진심으로 덤비는 흉신에게 맞서 싸울 만한 동료는 없다.

하지만…… 동료는 아닐지라도…… 교섭대상은 있다!

나는 다음 순간 머리가 반짝 돌아가는 걸 느끼며 그대로 창조의 권능을 발휘하여 차원문을 눈앞에 만들어내었다. 그러고는 그 차원문에 대고 외쳤다.

“당신의 편에 서겠다는 걸 맹세하겠습니다! 대신에 나를 도와주십시오!!”

일렁

차원문이 잠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 기색을 보던 흉신은 말없이 다시 손을 뻗어서 흑웅을 일격에 잠재웠던 그 괴광선을 발사하는 듯했다.

쿠콰콰쾅!!

우주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공격을 나 대신에 막아낸 존재는 마치 우주에 흐르는 핏빛의 연기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우주적 존재처럼 보였다.

그 존재는 굳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지 않았지만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웅이여. 사악한 운명의 흐름이 너를 여기까지 인도해 버렸구나.]

“…….”

[허나 이 또한 인과율일것이다.]

그 존재가 흉신에 맞서듯이 허공으로 부상하며 말했다.

[전력을 다하는 흉신을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당신도 황제에 필적하는데 왜 그리 자신없어 하는 겁니까?”

내가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그 존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정녕 모르겠는가? 저자는 방금 전 자신에게 걸려 있던 종말의 제약을 풀었다.]

“……네? 그 말은…….”

[지금부터 저놈은 무한히 강해진다. 이 공간에 한정한 거겠지만.]

“…….”

그, 그럴 수가.

흉신이 자신에게 걸려 있는 제약을 임의로 풀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경악하자 그 존재가 말했다.

[최대한 막아볼 터이니 너는 지금 즉시 명경으로 향하거라.]

나는 그 말에 반문했다.

“명경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설명할 여유가 없다……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치치치칭!!

다음 순간 그 존재의 몸 주변에 일곱 개의 빛이 현란하게 떠올랐다. 저승 최강의 무기, 칠보(七寶)의 권능을 소환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은 거대한 힘을 뿜어내며 흉신을 노려보았다.

[저자는 지금 끝장을 보려 하고 있나니!]

후우우우

흉신은 자신의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반신을 크게 부풀어 올린 듯했다. 마치 격노한 듯한 그 자세가 잠시 이어지더니, 이윽고 흉신이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날아들어서 전륜성왕을 향해 공격했다. 전륜성왕은 단숨에 자신을 살해하려 하는 흉신에 대적해서 칠보의 힘을 원(圓)의 형태로 모아서 막아내었다.

핑 -

뭔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천지사해가 정적에 휩싸이고 빛만 가득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게 사실 은하계(銀河界)가 대신격들의 충돌으로 인해 폭발하면서 잠시동안 너무 거대한 물리력이 천지를 휩쓸었기에 생긴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번쩍

“……!!”

나는 은하계의 폭발에서 신력으로 몸을 보호한 순간 어마어마한 거리를 튕겨서 날아갔고, 그 충격과 함께 성운(星雲)이 뒤틀리며 어둠의 천공이 쩍 하고 입을 벌리는 것마저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러는 와중에도 내 신력이 시시각각 소모되는 걸 알 수 있었으므로 각오를 하고는 급히 차원의 문을 열어서 명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크아앗!!”

타다닷

나는 전륜성왕의 궁전에 튕기듯이 쓰러지고는 곧바로 고탄력의 경공으로 일어서며 앞으로 달렸다.

‘일단…… 명경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위치는 알고 있다. 지금까지 전륜성왕이 있을 게 뻔하니까 안 갔을 뿐!

지금은 전륜성왕과 칠보가 모두 없기에 충분히 진입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명경의 방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주의 명에 따라 그대를 척살하겠소.]

후두둑…….

눈앞은 핏빛으로 가득하다.

[별을 뒤트는 자]가 수많은 저승의 판관과 옥졸들을 살해한 채 명경의 방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저놈이 여기에 와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걸 보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흉신은 진심이다.’

꼼수로 나와의 은거계약을 파기한 이 틈을 타서 무조건 나를 손에 넣어 버리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진심이기 때문에 향후 찾아올 인과율의 역풍이고 뭐고 무시한 채 전력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나는 그대로 사대신기 바즈라를 내던져서 [별을 뒤트는 자]의 명치를 노렸다. 이전에도 전욱이 투척한 바즈라가 일격에 저놈을 쓰러뜨렸던 걸 기억하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내 기대가 무색하게도, [별을 뒤트는 자]는 그대로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엉뚱한 장소에 나타나 버렸다.

쐐액

바즈라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서 [별을 뒤트는 자]를 재차 노렸지만 그때마다 놈의 신형이 계속 순간이동하며 분열할 뿐이었다. 틀림없이 신묘한 마법이었기에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별을 뒤트는 자]가 말했다.

[주께서 경고해주셨소. 그대의 금강저는 위험하니 절대 맞지 말라고. 그리고 피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단숨에 이 몸을 맞출 수는 없소.]

“……!!”

[별을 뒤트는 자]는 여유롭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자아, 마음껏 해 보시오. 나는 시간만 끌어도 이기는 것이니.]

나는 그 말에서 내가 얼마나 수세에 몰려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간만 끌어도 이긴다는 것은 결국 그 공간에서는 아무리 칠보를 사용하는 전륜성왕이라 해도 전력을 다하는 흉신을 못 이긴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나는 뒤따라온 흉신에게 잡혀죽게 되리라.

어떻게 하지?

바즈라도 안 통한다면 저놈은 절대 단시간에는 쓰러뜨릴 수가 없는데……!!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는 아니 될 것이다.]

[아니?]

츠아아아!!

갑자기 놈의 등 뒤에 나타난 자가 자신의 손을 뻗어 [별을 뒤트는 자]의 뒷목을 잡고 있었다. [별을 뒤트는 자]는 옴짝달싹못하는 것 같았지만 놈을 붙들고 있는 존재 또한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 걸로 보였다. 나는 크게 그 자의 이름을 외쳤다.

“염라대왕!!”

저승의 제 2인자, 염라대왕은 전신에서 빛을 뿜어내며 외쳤다.

[백웅이여. 빨리 가시오. 나는 내 모든 권능을 걸고 이 자와 공멸(共滅)할 테니.]

“……!!”

[부디 왕야(王爺)의 뜻을 이어주시오……!!]

나는 염라대왕이 소멸을 각오하고 [별을 뒤트는 자]를 붙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를 악물고는 문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제길!!’

타다닷

나는 급히 명경의 방 내부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약간을 더 뛰어오자, 거대한 명경이 내 눈앞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명경을 보자 순간적으로 머리가 비어 버리는 걸 느꼈다.

“…….”

오긴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전륜성왕은 왜 내게 명경으로 가라고 했던 거지?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우웅…… 우웅…….

명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명경에 반응하듯, 나는 내 목갑에 있던 무언가가 크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가만 놔뒀다가는 목갑이 부서질 기세였기에 나는 서둘러 목갑에 들어가서 그 물건을 재빨리 꺼냈다.

“……어?”

개골! 개골!!

돌로 된 두꺼비가 기운차게 울고 있었다. 나는 이 두꺼비가 [무지개뱀]에게서 받은 유물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소리도 없다가 왜 울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명경과 반응하는 이유가 뭐지?’

개골! 개골!!

돌두꺼비는 더 세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그런 것도 신경 쓰기 힘들 정도로 맹렬한 졸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윽…….”

뭐야?! 갑자기 왜 졸려?!

거의 망량선사 앞에 갔을 때 수준으로 졸렸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수마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가 잠시 후 명경 앞에서 엎어지듯이 잠들고 말았다.

***

“…….”

익숙한 천장이다.

나는 이 천장을 아주 예전에 봤었다고 생각하며 잠시동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군. 갑자기 팔부신중을 몰이사냥하다가 사라지고는 이제 와서 보라는 듯이 재출현이라…….”

이, 이 목소리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상대는 저 멀리서 그런 나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딱히 술법으로 잡아놓지는 않았다.”

“…….”

“지금 움직일 수 없다면 너 스스로가 제약에 걸려 있다는 거겠지.”

털썩

상대는 내 앞의 의자에 걸터앉고는 씩 웃는 듯했다.

“20년 동안 어디 갔었던 거냐, 백웅?”

“……!!”

“세상을 네 마음대로 바꿔놓고 자리를 비우다니 무책임하기 그지없군.”

너무나 반가운 얼굴!!

그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입에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윽…….’

잘 나오지가 않는다. 왜 이러는 거지?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그리고 한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제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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