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584화 (1,483/1,615)

전생검신 84권 12화

나는 이환웅의 말에 머릿속으로 둔중한 충격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이건…… 우연인가?’

천의무봉.

그것은 바로 내 숙적인 십이율주 하은천의 독문절기이자 절대지경의 기술이었다. 또한 지금 눈앞에서 겪은 이환웅의 기술은 그 천의무봉과 대동소이했으니, 이걸 보고 십이율주를 떠올리지 않는 건 무리인 것이다.

그러면 이환웅이 십이율주 하은천이란 말인가?!

그게 말이 되는가?

나는 그 순간 이환웅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생각해 보았다. 저 녀석은 내가 동료들과 함께 아오키가하라 수해의 멸해에 진입했을 때 웬 추락한 함선 근처에 있었고, 핏빛 가면인 에테리얼 마스크라는 걸 쓰고 있었다. 그리고 놈의 과거사를 묻자 이렇게 말했었다.

[난 정신이 들어 보니까 난데없이 거대한 나무의 정상에 와 있었다. 계백함의 시험비행을 위해서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정신을 차려 보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이세계 진입인가 싶었지.]

[그리고 계백함을 움직여서 밑으로 내려가던 중에 웬 이상한 방이 중턱에 보이길래 잠깐 들어가서 그 안을 탐색했다.]

[이 보물들은 그 방에서 찾아낸 거야. 근데…… 은하구절편이라니…… 무기에 한자가 음각되어 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라니.]

[아 몰라! 제기랄. 중학교 때 평소에 머릿속에 구상하던 설정집이 현실에 떡하니 있으면 당신 같으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아?]

[아무튼 이 보물들을 얻고 나서 웬 날아다니는 술법사 세 명한테 공격받다가 급히 도망치다 보니 계백함에 찍혀 있는 좌표대로 온 것뿐이다. 그게 다야.]

그 이후 이환웅과 같이 다니다가 수해의 왕이 [경매]라는 걸 시작했었고 다른 동료들과 떨어진 채 경매를 진행하다가 팔부신중 천인과 결투한 후 나일라토프가 난입하면서 외우주로 튕겨 나갔던 것이다.

“…….”

생각해 보니, 나는 이환웅과 합류한 이후 제대로 망량 같은 기존의 책사와 의논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여태껏 이환웅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은하구절편을 갖고 있다지만 어떻게 저런 애송이 이세계인을 십이율주라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이름도 하은천이 아니라 이환웅이라서 완전히 다른데!

의심하지 못했던 이유는 또 하나, 내가 십이율주의 원래 얼굴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십이율주는 철저하게 자신의 원래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며 인상적인 거라면 그 개 탈과 은하구절편 뿐이었다. 비교할 만한 원래 상대의 외모를 모르는 이상 의심하더라도 대조해볼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적은 것이다.

하지만 천의무봉은 이환웅이 하은천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였다.

외모 같은 건 다른 술수를 이용해서 변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천의무봉과 같은 절대지경의 절기는 그자의 인생을 반영한 단 하나뿐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타인이 그 기술을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더라도 기술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결(決)은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장삼봉 진인이 펼치는 무쌍패와 내가 펼치는 무쌍패가 같아 보여도 상대하는 자들 입장에서는 다들 다르다고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환웅의 방금 한 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겪었던 십이율주의 무예, 그 맥과 너무 비슷했다.’

직계제자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비슷할 수가 있을까?

무인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그 호흡과 기상이 너무나 닮아 있어서 이건 동일인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절대방어를 실천하는 그 논리조차도 십이율주가 펼치던 무공과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이환웅과 하은천은 동일한 시간대에 존재하는 거지?

‘이환웅이 외우주에서 온 하은천이라고 친다고 해도 그게 허용이 되는 것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또다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이환웅이 은하구절편을 얻을 때 삼사가 그를 쫓아왔다고 했는데…… 정작 은하구절편의 주인인 하은천은 그 시기에 뭘 하고 있었지?’

본디 십이율주 하은천은 은하구절편 같은 독문병기이자 신물을 언제나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이다. 그것은 굳이 그가 특이해서가 아니라 무사가 자신의 무기를 늘 품에서 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은하구절편은 하은천의 손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 덕분에 이환웅은 은하구절편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잠깐……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하은천은 그때 뭘 하고 있었더라?

“……아!!”

“왜 그래?”

“아, 아니. 잠깐만…….”

내…… 내가 왜 이런 걸 이제야 생각해낸 거지?

[흐흐흫흐흐…… 십이율주를 최대한 미래로 날려 보내 주십시오.]

[좋다. 그대의 마력만큼 날려 보내주마.]

[그는 인간계의 시간으로 3일 후에 출현할 것이다.]

내가…… 사대신기 중 바람의 바유에게 기원해서 십이율주를 3일 후로 날려 보냈었잖아?!

그렇다면 십이율주가 실종상태였으니 당연히 삼사는 그가 갖고 있던 은하구절편을 보관했으리라.

심지어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더 소름 돋는 게 있었다.

[십이율주가…… 지금 2명일 수도 있소!]

그랬다. 십이율주의 방주를 조사하러 같이 갔던 생 제르맹에게 내가 바유로 십이율주를 날려 버렸던 일을 이야기하자 생 제르맹이 크게 걱정하며 했던 말!!

동시에 망량이 그 상황에 대해 설명해줬던 게 생각났다.

[세계수인 신단수가 다른 평행세계에서 마력을 빨아들이는 [뿌리]를 통로로 삼아서, 그 통로를 통해 평행세계의 십이율주를 데려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세계수가 존재하는 한 십이율주는 불멸의 존재가 되지. 왜냐하면 십이율주가 죽을 때마다 세계수가 평행세계에서 또 한 명 소환해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당신이 3일 후의 시간으로 [현재]의 십이율주를 보내버린 순간, 세계수는 십이율주가 소멸되었다고 인식해서 곧바로 평행세계의 십이율주를 소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가설을 세운 것이오.]

[십이율 내에서 두 명의 십이율주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면 최고겠군.]

그래서 나는 십이율 내의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서 일부러 무사시를 이중첩자로 쓰려고 찾아가서 싸우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팔부신중이 망량의 계책에 속아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가자 나는 동료들과 먼저 수해로 향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환웅을 만난 건데…….’

생각해 보면 공교롭다. 시기상으로 볼 때 원래 그때쯤 이환웅이 아니라 십이율주가 바유의 능력에 당한 후 사흘 이상이 지났기에 신단수에 재출현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십이율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난데없이 이환웅이 이세계에서 날아와서 엉뚱하게 은하구절편을 훔쳐 온 것이다. 그 당시에는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만일에 이환웅이 하은천과 동일인물이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사대신기 바유의 능력은 특별한 것이라서 하은천 본체를 세계수를 통해 평행세계에서 가져올 수가 없었다면……?’

그래서 세계수가 할 수 없이 하은천과 동일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환웅을 외우주에서 데려온 것이라면?!

그렇게 본다면 지금 상황은 이해가 되었다.

생 제르맹과 망량의 추측은 모두 맞으면서도 틀린 것이었던 것이다. 바유의 능력에 당한 십이율주가 두 명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동일한 십이율주를 소환할 수 없기에 외우주에 있는 십이율주를 데려왔다고 보면 말이 되었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도…… 도대체…… 바유로 십이율주 한 번 엿먹이려고 가볍게 질러 버렸던 일이…… 어디까지 나비효과가 뻗은 거야?!’

만일 내 생각이 맞는 거라면 결국 그 일로 인해 멸해에 이환웅의 스승인 나일라토프가 난입하게 되었고, 그자는 심지어 멸해의 왕조차도 손이 닿지 않는 절대적인 강자였다. 그때 전생자인 내게 관심을 가진 나일라토프는 흉계를 꾸미며 나를 외우주 세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일라토프의 손아귀를 벗어나려다 보니 결국 천암비서 그 자체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전뇌자가 금기를 깨면서까지 [큰 굴레]의 과거로 나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만일에 내가 바유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하게 아오키가하라 수해에 팔부신중을 끌어들여 유인한 후 싹 다 외우주로 추방해 버리고 끝났을 일!

‘말해야 할까?’

나는 이 사실을 눈앞에 있는 이환웅에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환웅을 내 책사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끝까지 신뢰해야 하니 이 사실을 털어놓고 함께 상담해야 하는 것이고, 이환웅이 십이율주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최대숙적 중 한 명이니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떤 미친놈이 내가 너를 적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코앞에 있는 적에게 말해주겠는가?

“왜 그래?”

“…….”

이환웅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이런 건 이제 세상 누구에게도 상담할 대상이 없었다. 망량도, 제갈사도 없었고 아수라도 없다. 심지어 전뇌자조차 봉인되어 버렸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이환웅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 그래…… 내 느낌대로 가자.’

나는 잠시 후 마음을 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환웅. 너는 십이율주 하은천일 지도 몰라.”

“…….”

나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은 이환웅에게 방금 내가 생각했던 걸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게 맞아.’

아무리 적이라고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환웅을 임시 책사로 인정했고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믿을 때 끝까지 믿어줘야지 어설프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어설프게 숨기는 꾀를 부렸다가 더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나를 말린 것이다.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던 이환웅은 잠시 고개를 주억거렸다가 말했다.

“……음, 그렇군…… 지금 깨달은 건가?”

“어?”

이환웅은 의자에 걸터앉더니 피식 웃는 듯했다.

“나는 진작부터 당신이 다 알면서도 나와 상호동의 하에 같이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너는 짐작하고 있었단 말이냐?!”

“경황이 없을 때는 전혀 몰랐지. 하지만 수련세계에 오고 나서 당신이 심도 있는 얘기를 해주고 난 후에는 바로 감이 왔어. 내가 그 십이율주 하은천일지도 모른다고.”

“……!!”

이환웅은 스마트폰의 둥근 열쇠고리 같은 걸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당연히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은근히 내게 상황을 말해주면서 그래도 일단 서로 이용하는 관계다……라고 납득해주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상황을 보니까 그냥 그건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옘병……!!”

하긴 나도 추리할 수 있는 사실을 눈앞의 머리 좋은 새끼가 몰랐을 리가 없지!

내가 괜히 분해서 짜증을 내자 이환웅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아무튼 간에 추리는 잘했으니 칭찬해주지. 그런데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뭘 말이냐.”

“십이율주 하은천은 성이 하(河)씨이고 나는 이(李)씨야. 성과 이름이 완전히 다른 이유는 뭘까?”

“…….”

어…… 그건 생각을 안 해봤는데…….

나는 잠시 끙끙대다가 말했다.

“그거야 뭐 하은천 그놈도 수천 년은 살아왔다고 들었으니까 그 오랜 시간을 살면서 이름을 바꿨겠지…….”

“그게 가장 일리 있는 해석이긴 하지. 다만 나는 짐작 가는 게 있거든.”

“뭐? 어떤 게 짐작 가는건데?”

내 반문에 이환웅은 잠시 먼산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내가 말했지? 내가 하씨 일족과 친하다고.”

“……아, 그랬던 것 같군.”

하은천이 누구인지 물어봤었는데 이환웅이 자기가 아는 하씨 일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헷갈려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환웅은 열쇠고리를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하씨 일족은 삼사(三師)의 일족이자 천부문(天符門)의 문주를 대대로 지내는 가문이야. 천부문은 아마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단군신앙을 토대로 하는 수천 년 역사의 문파이고. 그리고 그 하씨 일족은 바로 나의 외가(外家)야.”

“……외가? 그 말은…….”

“내 어머니의 성함은 하서린(河瑞璘). 전대 천부문주였고 외계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셨어.”

“……!!”

마, 맞다! 외우주에서 권성 이혼에게 들었던 얘기였어!

내가 그제야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놀란 표정을 짓자 이환웅이 말했다.

“내가 만일 그 하은천과 동일인물이라면, 나는 이씨 성을 버리고 하씨 성을 담은 새로운 이름을 지었던 걸 거야. 나 자신은 납득이 가는 얘기지.”

“……뭐? 자신의 본래 성씨를 버리고 어째서 외가의 성을 따르고 싶단 말이냐?”

“나는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거든.”

“…….”

“정확히는 어머니를 구하지 못하고 죽어 버린 아버지를 싫어했어. 그 이씨가문…… 이씨 왕가(王家)의 명예라는 게 더 소중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는데도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다. 크크…… 대한제국이며 조선(朝鮮) 따위가 대체 뭐길래.”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염세적으로 웃던 이환웅은 잠시 말을 돌리는 듯했다.

“아무튼…… 사실 말이지, 이 은하구절편도 내가 중학교 때 설정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어.”

“설정이라는 게 뭐냐?”

“어릴 때는 나도 강한 무림고수가 되어서 무림에서 종횡하고 싶었거든. 그때 나만의 강력한 신병(神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망상하면서 공책에 끄적였던 내용이야.”

후웅 후웅

이환웅은 잠시 은하구절편을 뻗어서 바람소리 나게 휘두르더니 중얼거렸다.

“찬란한 은빛의 쇄가 별밤을 가르매 하백의 힘을 이어받은 최강의 신물이니 천하의 그 어떤 무기도 대적할 수 없더라. 내가 수업시간에 몰래 공책에 적었던 설정이지.”

“…….”

나는 잠시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문득 깨닫고는 말했다.

“그…… 그러니까…… 은하구절편은 원래 네가 상상하고 있었던 꿈의 무기라는 거냐?”

“그래. 은하구절편 뿐만 아니라 월하정야갑도…… 내가 만일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면, 그리고 수천 년의 세월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시도해보려 하겠지. 자기 꿈을 현실로 만들 수가 있잖아.”

“……!!”

“뭐…… 내 공책에 쓰여 있던 것보다는 어레인지가 꽤나 많이 이뤄졌고 타협도 많이 됐지만.”

“타협이라니? 원래는 그것보다 더 강했단 말이냐?”

“응. 원래 은하구절편 한번 때리면 지구가 반토막난다는 설정이었거든.”

“…….”

“나도 나이 먹으면서 점차 현실과 타협한 모양이군.”

아니, 충분히 타협해야 할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어이가 없어서 이환웅을 쳐다보자 그는 씩 웃었다.

“이런 건 다 사소한 거야. 정작 중요한 건 그래서 이제부터 어쩔 거냐는 거지.”

“으음.”

“나한테 십이율주의 비밀을 물어봤자 내가 아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아. 십이율주와 내가 동일인물이라 하더라도 십이율주는 이세계로 넘어간 후 수천 년 동안이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냈잖아? 그자가 갖고 있는 계획이나 생각 같은 건 내게 물어도 알 수가 없어.”

“그렇긴 하다만…….”

이환웅은 팔짱을 꼈다.

“다만 나 자신은 십이율주의 어린시절이자 흑역사 같은 존재지. 그래서 당신이 십이율주를 상대할 때 효과적으로 그의 정신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어.”

“……!!”

그런 게 있다고?!

“정말이냐?”

“뭐 정말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삼아서 한번 해보면 좋을 거 같은 게 몇 개 있긴 하지.”

“말해 줘.”

“…….”

이환웅은 뭔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현이한테 고백할 때 애니송 부르는 건 좀 아니었지 않았냐고 말해봐.”

“어? 애니송?”

이환웅이 움찔하더니 얼굴이 조금 붉어졌고, 이내 목줄기에 핏발이 선 채 버럭 외쳤다.

“그…… 그런 게 있어! 아마 십이율주가 나라면 반드시 통할 거다.”

“……?”

애니송이 뭐지? 나는 곰곰이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음…… 언령이나 무서운 마법주문 같은 건가 보군.”

“그…… 그래. 그런 거야.”

“그거 말고는?”

“어…… 음…….”

이환웅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한숨을 턱 하고 내쉬었다.

“……아냐, 그냥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아. 그것만 해도 무조건 몇 초 동안 십이율주는 패닉에 빠질 거다.”

“흐음. 고맙다.”

십이율주의 약점을 잡은 것 같군.

나는 꽤나 큰 소득이라고 생각하며 이환웅에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만일 십이율주를 처치한다면 너 자신을 죽이는 셈인데 이렇게 약점을 알려줘도 되냐?”

“어차피 동일인물이 아닌데 뭔 상관이야? 세계수는 나와 하은천의 영혼이 같다고 해서 억지로 외우주에서 빌려온 모양이지만 나는 하은천이 아니고 하은천도 내가 아니야. 당신이 하은천을 죽이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런가…….”

“나한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뿐이야. 우선은 당신의 동료이자 책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지.”

그렇게 대꾸한 이환웅이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십이율주의 능력이 만일 나와 같은 거라면 당신은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어.”

“뭔데?”

스윽

이환웅은 천천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눈을 새파랗게 빛내더니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메피스토는 미완성이며 초기형이야. 그래도 구세계의 데이터 정도는 다 저장할 정도의 성능이지만 실제로 신적 존재들에게 대적하기엔 많이 부족하지. 그런데 강인공지능의 가장 큰 특징이 뭔줄 알아?”

“뭔데?”

“바로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거야.”

쿠구구구……!!

그 순간, 나는 이환웅의 기(氣)가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 증폭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보통의 기공 중에는 절대로 이렇게 힘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게 없었고, 대라멸진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했다.

내가 놀란 눈으로 이환웅을 쳐다보자 이환웅은 자신의 힘을 잠시 추스르더니 말했다.

“강인공지능은 자신의 연산력을 태워서 단숨에 증폭시키는 능력이 있어. 연산력이 영구적으로 줄어드는 대신에 그 증폭수준은 소모된 연산력에 비례하지.”

“그 말은…….”

“십이율주는 수천 년인지 수만 년인지 모를 시간 내내 강인공지능을 성장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한 인공지능이 세계수의 어시스트를 받아서 한 번에 힘을 증폭시킨다면 지금 내가 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걸 해낼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

“그 한순간의 불꽃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지만…… 그자의 성격으로 볼 때…… 자기가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 전력을 다하게 될 거다. 그때 당신이 방심하게 되면 크게 당할지도 모르지.”

“…….”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설마…….’

십이율주의 비장의 한수라는 건 ‘그거’인가?

나는 이 또한 귀중한 정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겨듣도록 하지.”

“그럼 이젠 어쩔 거야?”

“어쩌기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환웅에게 말했다.

“당장 검투사로 등록하자. 시간이 아까우니 빠르게 패왕에게 도전하는 거다.”

“나를 더 추궁하지는 않고?”

“네 입으로 다른 사람이라며. 그럼 나는 그런 너를 믿을 뿐이다.”

“…….”

“너는 지금 내 임시 책사니까.”

그러자 이환웅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씩 웃었다.

“믿어준 만큼은 일을 해주지.”

우리는 잠시 후 우리의 가이드를 맡은 [날개]에게 부탁해서 데미우르고스 레덴의 투사로 등록하기로 했다. 날개 모양의 마도생물체는 잠시 날개를 펄럭이다가 말했다.

[등록 완료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E등급 투사가 되셨으며 승점 0점에서 출발합니다.]

“최대한 한 번의 경기에서 많은 승점을 얻고 싶은데 어떤 옵션을 붙이면 가능한가?”

날개는 이환웅의 물음에 대답했다.

[초주박(超呪縛)과 대혈전(大血戰) 두 가지의 옵션을 붙여서 승리하신다면 한 번에 A등급 투사가 되실 수 있습니다.]

“A등급? 패왕한테 도전하려면 어느 등급이 되어야 하는 거지?”

[패왕은 SSS등급이며 도전가능한 등급은 SS등급입니다.]

“뭐야, 많이 부족하잖아.”

[정 그러시다면 또 하나의 옵션을 붙이신다면 바로 SS등급으로 올라가실 수가 있습니다.]

“뭔데?”

[지옥전(地獄戰)입니다.]

잠시 후 날개가 각각의 옵션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3개의 옵션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이환웅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리야. 아무리 당신이 절대지경이라지만 이 3개의 조건으로는 못 이겨. 그냥 무난하게 A등급으로 시작하는 게 어때?”

“…….”

나는 히죽 웃었다.

“난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냥 3개 다 붙여서 도전한다.”

“젠장…… 나는 안 해, 아니 못 해.”

“너는 두 개만 붙이고 해 봐.”

“그것도 죽을 걸 감수해야 할 것 같은데…….”

이환웅이 투덜거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투기장에 옵션을 붙여서 등록했다.

그리고 관람석에서 대기하길 약 한 시진 후, 날개가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말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파앗

우리가 날개의 뒤를 따라서 경기장으로 내려가자,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 백여 장 정도 크기였는데 단숨에 그 스무 배 정도는 되는 것 같은 평야처럼 넓어진 것이다!

“아공간의 술법이로군.”

옆에서 이환웅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몸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환웅은 나를 쳐다보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을 것 같은데.”

쿠구구구…….

잠시 후 드넓은 평원 저편에서 수많은 투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무기를 든 수많은 외계인 투사들은 형형한 살기를 흩날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숫자는 지평선을 꽉 채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이환웅이 말했다.

“데미우르고스 레덴의 A등급 이하의 모든 투사 12만 3천 명과 한 번에 싸워서 이기는 게 바로 대혈전(大血戰).”

파지직!!

그리고 내 몸에 감돌던 빛이 갑자기 사악한 힘을 담은 주술의 족쇄가 되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몸이 굉장히 무거워진 느낌이 들어서 팔에 힘을 주었는데 확실히 평소보다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모든 신체능력을 평소의 10퍼센트로 낮추고 지속적으로 중력 20배의 압박이 걸리는 초주박(超呪縛). 기를 쓰면 버틸 수는 있겠지만 난 그건 차마 못 하겠더군.”

“…….”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아아아아!!

갑자기 평원 저편에 있던 외계인 투사들이 괴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전신에 시뻘건 기운이 가득 맴돌기 시작했고 기운이 더욱 흉맹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환웅은 그 모습을 보고는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저 모든 투사들에게 신체능력이 5배 높아지는 버프가 걸리는 게 지옥전(地獄戰)…….”

“흐흐.”

“뭘 웃고 그래. 이거 정말 이길 수는 있는 거야?”

이환웅이 불안해하자 나는 히죽 웃었다.

“걱정 마라.”

나는 검을 꽉 붙잡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렇게 해도 절대지경 하나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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