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4권 1화
[기어오는 혼돈]과 반고가 태초에 싸웠다니!
“그, 그게 사실입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반고가 봉인된 이유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런 과거의 비사가 있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복희는 잠시 나를 심유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믿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주의 극초기에 반고는 정말 대단했네. 그의 힘은 우주의 법칙을 그를 중심으로 바꿀 정도로 강대했으며 단숨에 [옛 지배자] 수백 개체를 잡아 죽이기도 했지.”
“……!!”
“반고는 세계를 질서의 원리계(元理界)로 바꾸려 했네. 혼돈은 완전히 무(無)가 되고 정결한 법칙과 질서만이 가득한 세상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지.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지.”
“그 일이라는 건……?”
복희는 잠시 안개가 가득한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반고는 [옛 지배자]를 몇 잡아 죽인다고 세계의 균형이 크게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 왜냐하면 우주의 초기였기 때문에 혼돈이 너무나 밀도가 높았으며 시시각각 혼돈의 강자들이 태어나던 시대였기 때문일세. 심지어 신좌에서 튀어나올 맹자들도 기회를 보고 있었기에 반고는 선택의 여지가 생각보다 별로 없었어.”
“으음.”
“그래서 그는 커다란 도박수를 두었는데, 바로 혼돈으로 가득하던 세계를 쪼개어 새로이 창세(創世)를 이룩한 것일세!”
“차, 창세?!”
나는 그 말에 경악하고 말았다.
창세라니!
반고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그 고대신화가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했다.
“자, 잠깐만요. 뭔가 이상합니다만…….”
“뭐가 이상하지?”
“창세라는 건 세계를 만든다는 뜻이잖습니까? 하지만 반고가 활동하던 그 우주는 이미 창세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창세된 우주를 또 창세하는 건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그게 바로 고대의 숨겨진 비밀이지.”
복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액면 그대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야. 반고는 세계의 끝에 도달해서 그대로 자신의 모든 권능을 쏟아부어 우주의 대원칙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어 버린 것일세. 그리고 그 순간부터 무한히 창생하던 혼돈은 팽창을 멈추었으며, 질서에 속하는 고대신들은 크게 강화되었으며, 신좌에 웅크려 있던 혼돈들은 강제로 튕겨 나와서 힘을 더 키우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활동을 시작해 버렸지. 그 모든 것이 반고가 이룩한 업적일세.”
“……!!”
“마지막이 가장 컸지. 사실 신좌에 웅크려 있던 존재들은 종말로 갈수록 혼돈이 더 강해지는 우주의 법칙 때문에 나중에는 질서의 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서 튀어나올 수도 있었어. 허나 반고가 초반에 그들을 다 추방시킨 덕에 우리 고대신들이 싸울 만해진 것이네.”
“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직후에는 고대신들의 압도적인 승리가 이어졌네. 그 당시에는 반고 바로 다음가던 혼돈의 지배자조차 질서진영에서 중급에 있는 고대신을 이기기가 무척 어려웠을 정도야. 고대신들은 그때 은하와 성좌의 기틀을 잡고 필멸의 존재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지. 이대로라면 우주는 안정될 것 같았지만…….”
복희는 무겁게 말했다.
“혼돈의 지배자들도 얌전히 당하고 있지 않았어. 그들은 단체로 모여서 외신을 소환했는데, 그 명분이란 바로 반고 또한 업(業)을 쌓았기에 그에 상응하는 인과율의 역풍을 당해야 한다는 거였지.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았네.”
“인과율의 역풍을 왜 걱정하지 않은 겁니까?”
“왜냐하면 반고가 행한 것 자체가 균형이며 질서였다고 믿었으니까. 혼돈이 너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태에서 질서의 힘이 강해진 것이 도리어 인과율을 맞춘 게 아니겠는가? 거기에 또다시 업을 주장하는 건 사실 터무니없는 억지였지. 하지만…….”
그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외신소환은 성립하고 말았어. 소환의식에 참여했던 모든 지배자들이 소멸당하는 대가로 출현해 버렸지. 그게 바로 [기어오는 혼돈]이었고, 그자는 소환되자마자 바로 반고에게 찾아가서 전투를 개시했네.”
“…….”
“싸움은 무척 오래 이어졌네. 인간 세상의 체감으로는 적어도 3억 년 이상 그들은 싸우고 또 싸웠지. 허나 [기어오는 혼돈]이 더 강했기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반고는 [기어오는 혼돈]에게 패배하여 세상의 끝에 봉인되어 버렸네.”
“그랬던 겁니까…….”
이제야 반고가 봉인되었던 이유를 알게 된 느낌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했다.
“……그런데 동귀어진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은 [기어오는 혼돈]도 반고와 싸워서 치명상을 입고 소멸했다는 뜻인데, 지금도 [기어오는 혼돈]은 멀쩡히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 반고와 싸웠던 놈의 신체는 소멸했어. 모든 이들이 반고를 봉인시키며 [기어오는 혼돈]이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걸 똑똑히 목격했지. 허나 [기어오는 혼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으니,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네.”
복희는 손가락 두 개를 뻗었다.
“하나는 [기어오는 혼돈]이 소환으로 내보낸 건 사실 화신에 불과했기에 화신 하나 소멸된 걸로는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다. 허나 이건 아무리 [기어오는 혼돈]이 위대한 외신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왜냐하면 반고 또한 외신의 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야. 당시 반고의 힘은 그를 제외한 전 우주의 신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강했다네.”
“으음.”
“또 하나. [기어오는 혼돈]은 영겁불멸(永劫不滅)의 존재라는 결론일세. 정말로 그때 그의 본체는 소멸했지만 불멸의 존재라서 반고와 달리 봉인도 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성기의 힘을 지니고 부활했다는 거지.”
나는 그 말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영겁불멸?! 그, 그 말은 무슨 수를 써도 쓰러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까?!”
“……외신을 우리의 상식으로 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실제로도 현재 대부분의 신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네. 절대자의 힘을 지닌 반고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기어오는 혼돈]을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
“허나…… 나는 생각이 좀 달라.”
나는 복희를 쳐다보았다. 복희는 지금까지 없던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앞으로 수그려 손깍지를 낀 채 턱을 괴고 말했다.
“[기어오는 혼돈]은 영겁불멸이 아니야. 그자의 불멸에는 뭔가 비밀이 있네.”
“비밀이라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복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외신이 아무리 굴레를 초월한 존재라지만 이 굴레 내부에 들어오는 순간 제약은 생기게 되어 있지. 우주의 굴레에 들어오면 생멸(生滅)의 인과율은 피할 수 없어! 반고와 [기어오는 혼돈]은 그 당시에 조건이 같았던 것일세. 그리고 [기어오는 혼돈]은 자신의 패배조건을 숨기는 데 성공한 것뿐이라고 보네.”
“음……!!”
“나는 반고의 적자이기에 사실 [기어오는 혼돈]과 반고가 싸웠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그의 생생한 전투 경험을 모두 전해 받았네. 그리고 수없이 싸우는 동안에 [기어오는 혼돈]이 반고에게 당해서 수세에 몰릴 때는 반드시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한다는 걸 알아냈지. 그 행동만 사전에 봉인한다면 충분히 놈을 쓰러뜨릴 수 있어.”
복희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바로…….”
“…….”
“…….”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한참 동안 견디다 못해서 결국 버럭 외쳤다.
“아, 그게 뭡니까!! 사람이 말하다 끊는 게 어딨냐고요.”
그러자 복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지금 생각해보니 이 비밀을 자네한테 내거는 나만의 조건으로 해도 될 거 같군?”
“……?!”
“하하하. 잘 생각해보게나.”
“이, 이런 치사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잘만 도와주던 복희가 비밀을 숨기며 내게 교섭에 나설 줄이야?
심지어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릴 수 있는 단서라고 한다면 어쩌면 내 수십 번의 전생과 동등한 가치가 있을 지도 몰랐기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자, 장난치는 건 아닌가?’
복희의 눈빛은 장난기가 가득 차 있고 서글서글했지만, 그 내면에는 진심이라는 빛이 느껴졌다. 나는 사람을 자주 대해 봤기에 그 분위기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유하게 나오면서도 자신의 진심은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게 바로 복희인 것이다.
“끄응…….”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복희가 피식 웃었다.
“뭐, 내 조건은 깊게 생각지 말게.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
어떻게 깊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끝판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단서인데!
내가 내심 분개하고 있을 때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지. 소녀가 말했던 ‘파멸’이란 건 바로 이 도끼를 말하는 걸세.”
슈슉
이윽고 정자 바깥에 거대한 도끼가 소환되어 있었다. 나는 기린이 있던 오행의 중앙에 있던 도끼를 알고 있었기에 침음성을 내었다.
“반고의 도끼…….”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자네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보물일세.”
“그게 제 덕분입니까? 당신이 반고의 적자이니 누구보다도 얻을 자격이 있는 데다, 당신이라면 기린을 힘으로 쓰러뜨려서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요.”
복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네. 기린은 결코 나 혼자서는 설득할 수 없는 존재였어. 힘으로 쓰러뜨리려 했다면 기린은 스스로 자폭해서 봉인을 폐쇄해 버렸을 걸세. 기린은 그때 자네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그 도끼를 내어준 걸세.”
“……저를요?”
“그래. 그는 자네가 커다란 운명의 흐름을 주도하는 존재라는 걸 느끼고 있었네. 그래서 그런 자네의 지원을 받는 나에게라면 도끼를 넘겨줘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거지.”
“…….”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나? 그런 거치고는 기린이 엄청나게 나를 깔보던 거 같은데…….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저 반고의 도끼는 사실상 질서의 고대신이 얻을 수 있는 최강의 무기일세. 왜냐하면 대전(大戰)이 한창일 때 전성기의 반고가 지니던 투력(鬪力)이 고스란히 깃들어있으며, 또 하나의 이유는…….”
이어진 복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저 도끼가 반고가 창세에 쓴 도끼이기 때문일세.”
“……?! 저, 저게요?!”
“그래. 반고가 바로 저 도끼를 써서 혼돈의 영지(靈知)를 박살 내고 질서의 기틀을 만들었네. 그리고 바로 그 창세 과정에서 생겨난 무저갱의 혼돈, 그리고 외신이 작성한 질서의 법칙이 고스란히 도끼에 들어가 있지. 외신이 아닌 이상 저 도끼보다 강력한 걸 제작할 수 없네.”
“……!!”
그렇게 엄청난 도끼였단 말인가?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 복희가 약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나는 저 도끼를 함부로 쓸 수 없어. 왜냐하면, 반고의 힘이 너무 많이 깃들어있거든.”
“그건 무슨 말입니까?”
“외신 반고 또한 봉인 당했지만 소멸하지 아니했네. 멀쩡히 활동하는 [기어오는 혼돈]에 비하면 큰 손해를 본 거지만 어찌 되었든 그 또한 외신, 결코 굴레 안쪽의 분쟁으로는 소멸하지 않아. 그리고 반고가 소멸하지 않았으니 도끼는 반고와 아직 인과율이 닿아 있는 것일세.”
“……?”
“자칫하다가는 도끼를 매개체로 이 세상에 반고가 소환될 수 있다는 말일세.”
나는 그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복희 님 입장에서는 좋은 게 아닙니까? 반고는 당신의 어버이니까 힘을 합쳐서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계를 정복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복희는 무척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신들에게 혈연관계는 큰 의미가 없네. 그건 혼돈의 신뿐만 아니라 우리 질서의 신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지.”
“아.”
“그리고…… 반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조차도 모르네. 그게 문제일세.”
“반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고요? 그가 뭔가 음모를 꾸민다는 뜻입니까?”
“석연치 않은 게 있네.”
복희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고는 더 싸울 수 있었어. 하지만 뭔가 마지막에 체념한 듯 패배를 받아들였지. 그건 뭔가 거래가 있었다는 거겠지…….”
“…….”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네. 적어도 그게 뭔지 알 때까지는 반고의 봉인이 풀리는 것도 위험하지.”
“어…….”
뭐지?
반고가 뭔가를 기다린다는 거…… 설마…….
[네가 아니다.]
…….
적어도 난 아닌 것 같고.
괜히 엉뚱한 기억이 떠올라서 내가 인상을 구기고 있을 때 복희가 말했다.
“소녀가 본 파멸이라는 건 내가 반고의 도끼가 지닌 힘을 남발하다가 반고의 힘에 잡아먹혀서 결국 모든 세계를 질서의 파멸에 끌어들이는 미래일 걸세. 솔직히 나 또한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기에 자네를 굳이 열심히 설득하지는 않는 걸세.”
“네? 왜 그렇습니까? 반고의 도끼의 힘을 안 빌려도 충분히…….”
“못 이기네. 황제든 전륜성왕이든 만만치 않은 자들이야. 도끼의 힘을 쓰지 않으면 공멸이 최선인, 전 우주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 그들을 쓰러뜨리려면 도끼의 힘을 안 빌리면 안 돼. 허나 그랬다가는 소녀가 말한 대로 파멸의 미래가 찾아오겠지.”
“…….”
“나는 최대한 수동적으로 전략을 짤 걸세. 누군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도끼는 적의 세력에 비해 밀릴 때 쓰는 최후의 수단이 되겠지.”
잔잔하게 말한 복희가 정자의 기둥에 몸을 뒤로 기대며 말했다.
“허나 자네가 내 손을 잡겠다면 굳이 거부하지도 않을 걸세. 나름대로 말해줄 수 있는 비밀도 있으니, 충분히 생각을 하고 나서 찾아오게나.”
“알겠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복희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파앗
흑웅의 도움으로 탁록촌 근처에 왔을 때 흑웅이 말했다.
[주인. 마음을 정하셨소?]
나는 흑웅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삼대세력 모두가 저마다 이유가 있고, 내게 줄 수 있는 보상도 다 매력적이야.”
[그렇게 보이는구려.]
“흑웅. 누구의 손을 잡으면 좋을 것 같냐?”
[…….]
한참을 침묵하던 흑웅이 말했다.
[주인. 나도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서 모르겠소만…… 바로 그게 문제가 아닐까 하오.]
“엥? 뭔 소리냐?”
[지금은 과거에 비해서 주인의 근처에 지혜로운 자나 책사가 너무 부족하다는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눈을 멀뚱히 뜨고 흑웅을 바라보았다.
“너도 있고 여차하면 복희에게 조언을 구해도 되고 수보리도 똑똑해서 부족한 걸 느끼지 못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내면에 있는 지능을 최대한 끌어낸 거라서 주인보다는 훨씬 똑똑하지만 그래봤자 범부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소.]
“너 참 말을 기분나쁘게 한다?”
내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흑웅은 날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복희는 지금 여차하면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라서 터놓고 얘기하기가 힘들고 수보리도 술법계의 노괴라서 생각하는 방식이 술수에 치우쳐져 있었소. 주인을 도와줄 만한 유연한 책사가 없기 때문에 지금 주인의 행동은 굉장히 불안정하오.]
“야. 그게 사실이라도 지금까지 별문제 없었잖아.”
[그건 주인이 예전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딱히 머리를 안 써도 힘으로 해결해도 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오. 힘이 좋으니까 대가리가 고생을 안 했던 거요.]
“…….”
[하지만 앞으로의 적들은 주인의 힘도 잘 안 통하는 자들. 이젠 그 돌대가리를 굴리셔야 하오.]
말투는 거칠었지만 나는 흑웅이 내 생각을 해준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지금 제대로 된 책사가 없는 건 사실이긴 하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어쩌자고?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인류가 원시인인 시대라서 책사 같은 게 아예 없는데.”
[굳이 이 시대에서 찾을 필요 없소. 그자를 데려옵시다.]
“그자라면…….”
[내가 볼 때는 그 자야말로 주인의 새로운 책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소. 그자는…….]
흑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 나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엉? 진심이냐?! 그놈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데…….”
흑웅은 단호하게 말했다.
[진심이오. 내가 볼 때 그자는 가장 새로운 유형의 책사가 될 수 있소. 주인이 여태껏 한 번도 안 만나본 유형의 책사 말이오.]
“……으음.”
[주인의 지금 고민에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을 만한 존재요.]
설마 흑웅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래도 흑웅의 제안이 솔깃한 마음이 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어디 가볼까.”
파앗
나는 이윽고 아공간에 넣어두었던 천암비서의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어딘가에 도착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련세계에 다시 온 것이다.
“엉? 여긴 대체…….”
하지만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청룡무관의 지형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곳곳에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고 21세기에나 볼 수 있는 고가도로가 세워져 있는 커다란 도시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인간이 하나도 없었고 온통 기계만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워서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잠시 후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웅, 왔나?]
내 눈앞에는 커다란 모니터를 얼굴에 매달고 있는 로봇이 한 대 서 있었다. 내가 멍청한 눈으로 그 모니터를 쳐다보자, 그 모니터에는 알고 있는 얼굴이 씩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10분만 기다려줘. 바로 거기로 갈게.]
그리고 10분 후, 내 앞에는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미래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가 세워졌다. 도로를 날듯이 달려온 그 자동차에서 내린 ‘그놈’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한 10년은 더 있어야 올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더 빨리 왔네.”
“……야…… 여긴 청룡무관이었을 텐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놈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별거 아냐. 당신한테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지를 생각 해봤는데 내가 아무리 무공을 익혀도 당신한테 큰 도움은 못 되겠더라고? 그래서 무공을 익히면서 동시에 메피스토를 활용해서 이 수련세계에서 과학을 발전시켜 보기로 한 거야.”
“……!!”
“유사 이전의 초고대라면 간단한 과학도구만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거 아냐? 어차피 이 세계에 몇십 년씩 있던 참이라 널널하게 진행하고 있었어. 아, 그래도 무공도 열심히 수련했으니까 너무 뭐라 하지는 마.”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황당해서 말했다.
“조금이 아닌데…….”
이 정도라면 대웅제국의 최첨단 과학기술에는 미치지 못해도 최소한 20세기 최후반 정도의 과학력은 될 것이다. 겨우 수십 년 사이에 이만큼이나 발전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메피스토의 힘이겠지.’
나일라토프의 직계제자로서 메피스토를 물려받았다는 게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 몰랐기에 나는 감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상대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했다.
“이광과 심수력은 외딴곳에서 따로 수련하고 있어. 스마트폰을 줬으니 금방 부를 수 있는데 불러줄까?”
“……일단 불러봐. 그리고 할 말이 있다.”
“뭔데?”
나는 이윽고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환웅, 임시로 내게 지혜를 빌려줄 수 있느냐?”
“…….”
“상담할 일이 있어.”
내 물음에 이환웅은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전생자께서 이런 애송이의 의견이라도 좋으시다면야 얼마든지.”
외우주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
[기어오는 혼돈]의 과학의 가면이자 대신급의 힘을 지니고 있던 과학자 나일라토프 - 그자의 직계제자이자 강인공지능 메피스토를 물려받은 존재인 이환웅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