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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572화 (1,471/1,615)

전생검신 83권 20화

소녀의 대답에 수보리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것참 안타깝군. 제일 쉬운 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는 수보리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백웅. 그래서 자네는 어떤 길을 선택하고 싶지?”

“무슨 말이오?”

“결론적으로 혼돈, 질서, 중용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자네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듣고 싶군.”

봉황이 내게 걸어놓았던 발설금지의 제약이 있었지만 목을 베어가면 허공록을 알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면 셋 중에 누구를 선택하려 한다는 방향성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수보리를 비롯한 동료들도 내가 세 개의 세력 중 어디를 택하려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

세 개의 길…….

나는 수보리의 말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모르겠소.”

“모르겠다? 아무래도 황제가 어지간히도 싫은가보군.”

나는 수보리가 뜻밖의 지적을 하자 움찔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야 전륜성왕의 조건보다 황제의 조건이 훨씬 후하니까…… 그는 실제로 자네가 이렇게 소녀를 데려가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는가? 전륜성왕이 지닌 기술이 뭔지는 몰라도 일단 표면적인 조건만으로는 황제야말로 한 편이 되어야 할 존재일세.”

“…….”

“세력으로 보더라도 황제의 세력은 굉장히 강력하지. 아마 자네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제일 쉬울 거야. 그런데도 자네의 마음이 황제에게 기울지 않았다는 건, 그 이상으로 황제의 존재를 혐오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황제가 셋 중에서 제일 싫소.”

“흐음…… 역시 대웅제국의 운명을 그에게 농락당한 것 때문에 큰 원한이 맺혔나 보군.”

“굳이 그것만은 아니오. 나는 사실 그 자를 이런 식으로 마주치기도 싫었소.”

내가 혐오감을 숨기지 못하고 내뱉자 수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졌네.”

“내가 뭘 해야 하오?”

“당연히 복희를 찾아가야지.”

“…….”

“혼돈과 중용의 제안을 하나씩 들었다면 당연히 질서를 대표하는 복희의 제안도 들어봐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걸세.”

나는 수보리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대놓고 셋 중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 2 세력을 없애 버리겠다고 설명한다면 아무리 복희라지만 냉정하게 나를 대할 수 있겠소? 전륜성왕은 내 기억을 읽어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런 얘기를 어찌 솔직하게 하란 말이오.”

“일리 있는 걱정이군. 허나 백웅……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네.”

“왜 그렇소?”

“복희 또한 자네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자네의 선택에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현자일세. 그는 억지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자신이 제안할 수 있는 걸 제안할 것이 분명하네. 그게 먹히지 않는다면 빠르게 납득 하겠지.”

“…….”

정말 그럴까?

내가 내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야기 중에 미안하다만 할 말이 있다, 백웅!”

옆에 있던 열산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가 열산을 쳐다보자 열산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내 혈육인 소녀를 데려와 준 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헌데…… 유소의 행방은 모르는가?”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소녀를 쳐다보았고, 소녀가 나 대신에 대답해주었다.

“유소가 어딨는지는 저도 백웅 님도 몰라요, 오라버니.”

열산은 크게 당혹감을 담은 얼굴로 외쳤다.

“그럴 수가…… 그럼 이젠 그 아이를 볼 수 없단 것이냐?”

쿠르르르

그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그의 몸에 응축되어 있던 강대한 힘이 소용돌이처럼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가공할 힘의 흐름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신력……? 아니, 다르다. 완전히 다른 미지의 힘!’

그것도 전에 혼돈의 하급신을 쓰러뜨릴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해져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열산이 지닌 이 정체 모를 힘을 상대하면 무척 위험할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지지는 않겠지만 무조건 크게 당할 거라는 선명한 직감이었다.

그러자 소녀가 열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진정해요. 유소는 분명히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거예요.”

“무슨 말이냐?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유소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에 그녀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요.”

소녀는 또렷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인과율이 이어져 무한의 힘 그 자체가 탄생하는 그 순간에 자기는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저와도 그때 다시 만날 거라고 했답니다.”

“으음…….”

“무슨 말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아이를 믿고 있어요.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니 절대 틀린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알았다. 나도 그 아이를 찾으며 기다려야겠구나…….”

스스스

열산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힘을 추스르는 게 보였다. 나는 소녀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질문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무한의 힘이라면 네가 지금 갖고 있는 무한의 권능을 말하는 게 아니냐?”

“저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서 질문했었거든요. 그런데 유소는 완전히 다른 거라고 말했어요. ‘힘’이 힘 그 자체로 완성되는 건 복잡하게 얽힌 인과율이 이어지는 순간이라고…….”

“뭔 개소리인지 모르겠군…….”

“유소는 뭔가가 완성되는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요. 백웅 님이 유소를 만나려면 그 순간을 알아내야 할 거예요.”

“흠…….”

그렇게 말해도 지금으로서는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무튼 복희를 만나러 가야겠군. 조금 기다리…….”

“잠깐.”

그때 내 말을 끊고 수보리가 나섰다. 내가 힐끔 수보리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몇 가지 말할 게 있는데 잠시 따라오겠나?”

스윽

나는 모두가 있던 자리를 떠나서 수보리를 따라갔다. 그리고 수보리를 따라서 마을에서 약 일 리 도 떨어진 곳으로 가자, 그곳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고 그 절벽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저건……?”

크기가 무려 일 장에 가까운 거대한 한 자루의 도(刀)!

뿐만아니라 내게 무척 익숙한 형태였다.

“뽑아보게.”

타닷

나는 절벽으로 뛰어올라서 곧장 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도를 들고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자, 수보리가 말했다.

“자넨 이미 그 무기가 뭔지 알고 있겠지.”

나는 도에서 일렁이는 푸른 기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유망의 도가 아니오.”

“그렇네. 유망은 청양을 제자로 삼아서 떠나기 전에 자신의 신병 중 하나인 그 칼을 저 절벽에 박아놓고 갔지. 자네가 되돌아오면 그 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

“거신족 최강 전사의 무기라면 앞으로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걸세.”

유망의 도는 강력한 신력을 머금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반발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원래 주인인 유망이 내게 귀속되도록 이미 허락을 했기 때문이리라.

‘마침 무기가 아쉽던 참인데 좋은 무기를 얻었군.’

슈슈슉

나는 곧이어 신력과 염원을 불어넣어서 유망의 도를 딱 내가 쓰기 좋은 크기로 줄어들게 만든 후 허리춤에 장비했다. 나는 유망의 도를 획득한 후 물끄러미 수보리를 보았다.

“하고싶은 말이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소만.”

“눈치챘나? 그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얼른 얘기해 주시오. 나는 빨리 복희를 만나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으니.”

“결정을 너무 서두르지 말게. 자네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무슨 말이오?”

내 반문에 수보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지. 지금 삼계의 지배자들이 자네에게 삼중택일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데, 과연 자네가 그 선택을 서두를 처지인가?”

“…….”

“아니야. 결국 선택권은 자네에게 있어. 또한 어찌 생각하면 그 지배자들은 자네의 한마디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는 처지가 아닌가? 그리고 신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시간관념이 거북이처럼 느리기 짝이 없으니, 사실 자네는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후에 선택을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네. 왜냐하면 신들에게는 수백 년조차도 찰나에 불과하거든.”

“최대한 삼중택일을 늦게 선택하라는 뜻이오?”

“그것도 본질은 아니지. 왜냐하면 수백 년 후에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시간을 괜히 질질 끌어도 의미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수보리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말했다.

“중요한 건…… 자네가 셋 중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그 선택 이후 자네가 편들었던 진영의 지배력을 벗어나서 홀로 설만 한 실력이 있느냐일세!”

“……!!”

“예를 들어서 황제와 협력해서 전륜성왕과 복희를 모두 처치했다고 가정하지. 그렇다면 그 후에 황제가 정말 자네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여 끝까지 계속 동료가 되어갈것이라 생각하나?”

“아닐 것이오.”

“전륜성왕과 복희의 경우 그런 배신의 위험성은 덜하지만, 경우는 마찬가지일세. 결국 자네는 사방천지에 그자들의 영향력이 가득 깔린 세상에 살게 될 것이고, 자네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제약이 생길 게야. 지금은 아니지만, 그들이 호적수를 쓰러뜨린 순간 그들은 그 순간 격이 다른 힘을 얻게 되지.”

“음. 정말이오?”

“괜히 하는 말이 아닐세. 자네는 이미 황제가 승리한 경우에 역사가 이어진 세계에서 살다 온 게야. 자네가 살던 시대의 황제는 이미 역사의 지배자였어. 모든 인과율을 제멋대로 떡 주무르듯 주물렀으며 종말까지 완벽한 승리자였지 않은가.”

“…….”

“복희나 전륜성왕이 승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될 게야. 옥좌에 누가 앉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실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는 건가?”

내가 반문하자 수보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 자네... 혹시 셋 중 하나를 택하면 추가적인 보상을 받게 되는 거 아닌가?"

움찔!

나는 발설금지의 제약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수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 예상대로군. 그 조건에 대해서는 모종의 제약이 걸려있겠지? 더 이상 캐묻지는 않겠네."

" ......"

" 머리를 잘 굴려보게. 그 '보상'을 이용해서 자네 스스로를 강화할 방법이 있을지를."

나 자신을 강화할 방법이라고...?

' 셋 중 하나의 목을 봉황에게 가져갔을 때 위대한 허공록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걸 이용해서 나 자신을 강화시킨다면...?'

나는 순간 머리가 빠르게 회전함을 느꼈다.

' 지금까지는 생각지 않았겠지만, 이제 슬슬 허공록을 만났을 때 ‘무엇’을 부탁할지 생각할 때가 온 건가...?!'

나는 수보리의 말에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 허공록을 알현하면 이 우주의 그 무엇이든 알고 싶은 것을 한 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지식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이 '하나의 지식'에 대한 단서를 대체 어떻게 풀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 자신을 강화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식이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때 수보리가 말했다.

" 정 안되면 자네에게 그 제안을 했던 존재의 권능을 달라고 해보는 건 어떤가?"

" 음?!"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는 굉장한 상위존재겠지. 가호나 축복같은거라도 받으면 좀 낫지 않겠나."

" ......!!"

수보리는 내게서 자세한 얘기를 못 들어서 대충 얘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수보리의 말에서 바로 단서를 얻을 수 있었기에 눈을 부릅떴다.

' 허공록의 권능을 얻는 방법... 그 지식을 물어보면 되는 건가?!'

생각지도 못했던 강화법!

' 화... 확실히 엄청난 특권이야!'

허공록...!!

그 존재가 지니고 있는 허공의 권능이 얼마나 강한지는 선지자의 종족이 그 능력의 편린만 사용했는데도 우주에서 알아주는 존재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허공록의 권능을 얻는 조건이 까다롭다고 할지라도 한 번 방법만 알게 되면 전생자인 나라면 어떻게든 성취할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존재는 전 우주의 서열 2위이자 [아버지]에 필적하는 절대자이니, 그 힘을 얻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영역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으리라.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질문 자체가 시간 낭비일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드는 이유는.

“…….”

나는 수보리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소.”

내 대답에 수보리는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후우, 그렇다면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무의미한데 말이지... 자네의 힘이 그 셋에게 충분히 송곳니를 박아넣을 정도로 강해야만 얘기가 될 터인데."

" ......"

" 아무튼 좋네. 자네만의 결론을 내 보게나."

수보리는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복희에게 가기 전에 탁록촌을 좀 더 살기 좋은 장소로 [창조] 해주고 가게. 내 말은 여기서 끝일세.”

“알았소.”

슈슈슉!

나는 트리무르티의 힘을 써서 탁록촌을 미래 낙양의 느낌이 드는 호화로운 마을로 만들었다. 아예 대웅제국 시절의 첨단 과학문명의 도시로 만들면 적응을 못 할 것 같았기에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자, 흑웅!”

[문을 열겠소, 주인.]

파앗

나는 문을 열고 복희가 거하는 장소로 향했다. 이전처럼 복희가 있는 장소 근처의 구름다리로 소환되었고 나를 맞이하러 고대신선 중 한 명이 걸어 나온 게 보였다.

“스승께서 찾아오시리라고 예측하셨는데 그 말대로군요.”

“용길공주.”

“명계에서 뵌 후 다시 뵙는군요.”

용길공주는 살포시 웃으며 내게 예를 차려 인사했다. 나 또한 마주 포권을 했고, 용길공주가 비단옷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용길공주를 따라 복희가 있는 정자로 향했다. 그리고 복희가 정자에 앉아서 기다란 담뱃대를 늘어뜨리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었다.

운무가 가득한 바깥을 쳐다보고 있던 복희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용길공주, 물러가거라.”

“네.”

사아앗

용길공주가 순간이동을 하듯 사라지자 복희가 힐끔 내 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복희가 있는 정자로 다가가서 자리에 앉았다. 복희는 담뱃대를 한 모금 뻐끔 물어서 조그마한 연기를 피웠고 장내에 신비스러운 용연의 향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은은한 향내가 느껴지고 있을 때 복희가 입을 열었다.

“백웅. 혹시 전륜성왕과 황제에게 무언가 제안을 받았나?”

나는 복희의 말에 움찔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대가 좌충우돌하며 여러 차원계를 넘어 다니는 파장이 멀리서 느껴지더군. 차례로 전륜성왕과 황제를 들렀으며 소녀를 데리고 나왔으니, 아무런 교섭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겠는가.”

“…….”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보게. 기탄없이 듣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복희에게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되는 대로 말해 주었다. 당연히 봉황에게서 받은 추가적인 허공록 알현에 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은 약 한 식경 정도가 걸렸고, 끝까지 복희는 내 이야기를 무심하게 담뱃대를 든 채로 듣고 있었다.

‘전륜성왕의 조건인 절연의 기술은 말할 수 없어…….’

전륜성왕이 내게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복희가 말했다.

“백웅. 자네는 내게 뭔가 숨기고 있군.”

“네?”

“자네의 말투에서 느껴지기를, 자네는 뭔가 한 가지 더 전제조건을 갖고 있어. 그건 아마 전륜성왕만큼은 죽이는 게 좋다는 선호도인데…… 혹시 누군가가 전륜성왕을 죽이라고 요구한 건가?”

“헉!!”

망량선사의 일을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았는데 눈치챈 건가?!

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기에 숨겼는데 복희가 눈치채자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망량선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꿈처럼 나타나서 전륜성왕을 죽이는 게 낫다고 얘기했었습니다. 그래야 현실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망량선사가?”

“네.”

“…….”

뻐끔…….

복희는 담뱃대에서 용연을 흘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이나 담뱃대를 들고 있던 복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웅. 나는 질서에 속한 고대신의 대표로서 자네에게 딱히 내세울 수 있는 게 없다네.”

“네?”

“정확히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대부분의 조건이 자네에게 무용(無用)하다고 할 수 있지. 세력을 준다 해도 그게 황제의 세력보다 클 수는 없으며, 신력 또한 자네가 뛰어나서 딱히 내가 더 보탤 게 없고, 지식이라 해도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만한 건 없을 것 같군. 신술, 보패 같은 것을 자네가 원한다면 주겠지만 그게 정말 전생자에게 쓸모있을 지는 모르겠어.”

“…….”

“지혜를 빌려주겠다 하면 좋겠지만 사실 지금도 잘만 빌려주고 있으니 생색내기밖에 더 되겠나? 하하하.”

복희가 맑게 웃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아…… 아니,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제가 다른 진영을 택해서 복희 님을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 또한 운명이겠지. 그리고 나는 아마 내 지혜를 발휘하면 자네를 내 편이 되도록 설득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네.”

“어째서입니까?”

“소녀가 이야기했다는 그 ‘파멸’. 사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세.”

“……!!”

“자네가 내 뜻을 따르다 보면 그 길의 끝에 어버이 반고가 부활하리라고 이야기했다지?”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녀가 유소에게 듣기로는 그랬다고 합니다.”

“그건 말일세, 태초에 일어난 사건이 엉뚱하게 지금 와서 풀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일세. 나는 그 결말을 막을 수가 없어.”

“무슨 말입니까?”

“…….”

복희는 잠시 담뱃대를 뻐끔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반고가 왜 봉인되었다고 생각하지?”

뜻밖의 질문에 나는 눈을 끔벅거리다가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반고가 질서의 특이점이며 그 존재가 죽으면서 이 우주가 탄생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봉인된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

“반고는 죽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세. 반고가 분명히 외신으로서 이 세계에 강림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던 시기가 있었지. 전륜성왕이 말했던 대로 그 시기는 질서의 힘이 혼돈의 힘을 압도하던 시기였으며 반고보다 강력한 신은 전 우주에 단 하나도 없었다네.”

그렇게 말한 복희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반고는 자의로 죽지 않았어. 그는 혼돈의 염원을 받아 강신(降神)한 다른 외신(外神)의 도전을 받아서 싸우다가 동귀어진(同歸於盡)했네.”

“……?!”

바, 반고가 동귀어진해서 죽었던 거라고?!

다른 외신과?!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크게 경악했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 외신이 대체 누굽니까?!”

“자네도 아주 잘 아는 존재이지.”

“……설마…….”

내가 당혹해하며 중얼거리자 복희는 충격적인 한마디를 했다.

“가면의 군주이자 가장 흉측한 혼돈의 왕…… 종말을 알리는 혼돈의 적자(敵子). [기어오는 혼돈]이 바로 반고와 동귀어진했던 것일세. 또한 일전에 갔었던 오행의 중앙은 사실 그들의 마지막 전투 장소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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