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3권 18화
나는 소녀의 말에 기억이 점차 확실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선명해지는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넌 그때도 그렇게 말했었지.”
수련세계 내부에서 소녀가 내게 접촉했던 바로 그때.
[복희를 너무 믿으면 큰일 날 거예요]
그 당시에도 소녀는 [복희가 내 편이 아니다]라는 걸 마지막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워낙에 스쳐 가는 기억이라서 흐릿했었는데 소녀의 말을 듣고 보니 저 녀석은 그 때부터 줄곧 얘기해온 듯했다.
나는 동시에 불쾌감을 느끼며 말했다.
“네가 뭔데 복희를 믿으라 말라 강요하는 거지? 너 또한 나를 말으로 조종하려는 거냐?”
이제 나를 이용하려는 놈들은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내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소녀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약간 놀라는 듯했다.
“제가 당신을 조종하다니요? 그럴 순 없어요. 반대라면 몰라도…….”
“그럼 복희를 믿지 말라는 이유가 뭔데? 복희가 나를 배신한다는 거냐.”
내 말투가 거칠어지자 소녀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복희는 끝까지 당신을 도와줄 것이고 배신또한 하지 않아요.”
“그럼 왜?”
“하지만 복희와 함께한 길의 끝에 파멸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신의 동료가 아닌 것이고, 당신은 그를 동료로 삼아서는 안 돼요.”
“……,”
파멸이라고?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머리를 곰곰이 굴렸다. 그러고는 애써 이해 한 만큼 소녀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복희가 나를 배신하려고 계책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그저 복희를 믿고 따른 끝에 다가올 미래가 파멸이기 때문에 그냥 복희를 동료로 삼지 말라는 말인건가?”
소녀는 내 말에 기쁜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잘 이해해 주셨네요!”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진짜.”
나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복희를 믿으면 어떻게 파멸한다는 소리지?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고? 네 말을 믿으려면 일단 그것부터 자세히 설명해.”
“그건…….”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자신의 차를 크게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킨 소녀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약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와 유소의 관계예요.”
“너희는 자매잖아. 그 이상의 관계가 따로 있는 거냐?”
“음, 뭐라고 해야 할지…… 백웅 님께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혼돈의 재능]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인간이 우연히 각성하게 된 초상능력이지. 그리고 너는 그 초상능력, 불멸(不滅)을 이용해서 [무한]을 설정할 수 있다고 들은 적 있어.”
복희가 신농에게 들었다는 내용을 나 또한 전해 들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 말에 소녀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맞아요. 제 능력은 그런 능력이죠. 그러면 백웅 님은 유소의 능력 또한 알고 계신가요?”
“그야…… 그 녀석은 미래를 모조리 알고 있더군. 황제조차 뛰어넘는 절대적인 미래예지 능력 아냐?”
“아뇨. 그건 사실 부산물에 불과해요.”
“부산물?”
내 반문에 소녀는 자기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전능(全能)을 상징하는 자이며 유소는 전지(全知)를 상징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희는 자매가 아니에요.”
“……?!”
“유소의 진짜 능력은 전지에 닿아 있지만,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저 예언능력으로만 발현될 뿐이고요.”
뭐, 뭐라고?
나는 소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멍하니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자매가 아니라니, 그럼 친자매가 아니라는 말인가?”
“……,”
소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태어나기 전을 기억하고 있어요.”
“태어나기 전이라면…….”
“이 세계와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전혀 다른 세계…… 법칙도 역사도 모든 것이 다른 그 세계에서 저는 분명히 존재했어요. 그리고 세계가 멸망함과 동시에 저의 의식은 한계를 알 수 없는 절대적인 혼돈에 흡수되었고 그대로 영겁의 세월이 흘렀죠. 정말로…… 아주 긴 시간이…….”
소녀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혼돈이 말을 걸었어요. 이제 여기서 나가라고.”
“……,”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갓난아이였어요. 그리고 저와 쌍둥이로 태어난 존재를 보면서 기분 나쁜 가능성을 생각했죠. 그리고 그 생각은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우게 되자 확실해졌어요.”
이어진 소녀의 말에 나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저건 [나 자신]이라고요.”
“……?!”
뭐, 뭐라?!
내가 유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해하자 소녀는 말했다.
“우리는 태초의 혼돈 속에서 이 세상으로 문득 소환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육체는 다르지만 유소는 분명히 저였고 저는 유소였어요.”
“자,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간단해요. 예를 들어 백웅 님께서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하셨는데 쌍둥이로 태어난 존재가 사실 백웅 님과 똑같은 힘과 기억을 갖고 있는 동일인물이였던거죠. 상대도 똑같은 생각을 하며 백웅 님을 쳐다보고 있는 거고요.”
“……!!”
“물론 유소와 저는 자라면서 점차 다른 인간이 되긴 했지만, 영혼의 본질은 여전히 같아요. 원래 하나였으니까요.”
그,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나는 놀라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육체로는 자매이지만 사실은 동일인물이다 그 말이군.”
“맞아요.”
“그럼 태어나기 전의 이름은 뭔데?”
“잊어버렸어요. 이름은 물론이고 모든 기억이…… 너무나 기나긴 억겁 속에서 사라져 버렸죠…… 그저 남은 것은 내가 나였다는 정체성뿐.”
그렇게 쓸쓸하게 대꾸한 소녀가 말했다.
“저희는 처음에는 영혼이 분열된 이유를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자라면서 초상능력이 발현하게 되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죠.”
“이유가 뭔데?”
소녀는 두 개의 손가락을 서로 마주치는 듯했다.
“저는 [힘]. 그리고 유소는 [지혜]를 각각 상징하는 그릇인 거죠. 두 개의 능력을 합치면 완벽한 전능이 되는데 인간 따위가 그 전능을 흉내라도 내는 건 불가능하기에, 불완전한 힘과 지혜로 분열시켜서 나눠진 거예요. 그래서 동일인물이 2명으로 나뉘어서 환생하게 된 거였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나뉘어진 그릇조차도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서 저와 유소의 능력은 불완전하고 약해요. 진정한 능력의 주인들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미물이나 다름없는 거죠.”
소녀는 자조적으로 얘기했지만 나는 이야기의 규모가 갑작스럽게 커져서 놀라움을 느꼈다.
‘전능과 전지……?’
확실히 그렇게 보면 소녀와 유소의 능력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소녀는 불완전한 전능이기 때문에 [무한]을 [설정]한다는 전제조건을 가져야만 했고, 유소는 불완전한 전지이기 때문에 본디 모든 것을 알아야 하지만 고작해야 미래를 읽는 게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너희에게 그 능력을 준 존재는 대체 누군데?”
“[누구]라고 표현을 못 하겠어요. ‘그것’은 시작이자 끝이며, 모든 존재의 종말이며, 멸망 후의 혼돈이며, 지옥 끝의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굳이 말하자면 무한의 혼돈 그 자체가 마치 거대한 악몽처럼 변해 있었던 것 같아요.”
“……,”
“다만…… 이 얘기를 황제 공손헌원에게 하니, 그는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더군요.”
황제 공손헌원은 그게 누군지 알고 있다고?
뜻밖의 단서에 내가 호기심을 느끼고 있을 때 소녀의 말이 이어졌다.
“저와 유소가 최강의 능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단순해요. 다른 자들이 간접적으로 혼돈의 기억을 되살린 것과는 달리, 저희는 직접 그 안에서 나온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능력의 순도가 높은 만큼 강하다는 단순한 법칙인 거예요.”
“그런가…….”
“그리고 또 하나. 유소와 저는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에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성이 있어요.”
스스스스
잠시 후 소녀의 머리카락이 흑발에서 은발로 변했고, 은안이 흑안으로 변했다. 상이한 색깔로 변화한 그녀의 외모는 상당히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고, 소녀는 그 상태에서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능력을 열화(劣化)시켜서 잠깐동안 쓸 수 있어요.”
열화?
‘설마……!!’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외쳤다.
“지금 너는 유소의 미래예지능력을 쓸 수 있는 상태라는 건가?”
“그래요. 대신 유소처럼 모든 것을 볼 수는 없고 단편적인 미래만 볼 수 있어요. 원래보다 수준이 많이 낮아지는 거죠.”
슈르륵
소녀는 다시 머리카락과 눈의 색깔을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또한 이렇게 상대의 능력을 열화시켜서 시전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원래 능력을 쓸 수 없어요. 이런 약점 때문에 사실 우리는 이 특성을 거의 쓰지 않죠.”
“으음……!!”
생각보다 소녀와 유소는 놀라운 존재였다. 나는 소녀가 밝히는 비밀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설마 네가 나한테 복희를 믿지 말라고 한 건 그 특성을 이용해서…….”
“네. 유소의 능력을 빌려서 당신의 미래를 읽었더니 파멸의 미래가 보여서 경고한 것뿐이에요.”
“……,”
“물론 저는 유소가 아니라서 그 ‘결과’만 봤을 뿐 어떤 이유로 거기에 도달하는가는 전혀 몰라요. 하지만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그건 사실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모르죠.”
그랬던 건가…….
나는 이제서야 소녀가 말했던 상황이 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소에 대한 의심과 적대감은 좀 풀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여전히 유소를 신용하기 힘들었다. 지금 했던 얘기가 다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여태껏 그럴싸한 말로 나를 속이는 놈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소녀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치자고. 그러면 너는 왜 나를 위해서 이렇게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주고 안 좋은 미래를 경고해주는 거지? 심지어 내가 있던 서의 내부까지 간섭해서 관심을 가지는 건 아무 이유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
“너는 내게 뭘 원해서 이렇게 하는 거냐.”
내 질문에 소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운명을 바꾸고 싶으니까요.”
“운명?”
“저는 유소와 사실 동일인물이기에, 어렸을 때 이미 유소에게서 모든 미래의 예언을 들었어요. 유소의 예언에 따르면 저는 유소와 한날한시에 동시에 죽게 됩니다.”
“으음.”
“그 운명을 피하고 싶었기에 유소에게 방법을 물어보았죠. 함께 살아날 방법이 있냐고…… 그리고 유소는 [큰 굴레]의 미래에서 과거로 금기를 깨며 찾아올 존재가 있으리라 했지요.”
소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당신이에요. 오로지 당신, 전생자만이 정해진 운명을 깨고 저를 살려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을 도우려는 거고요.”
“……,”
운명이라.
‘동기로는 그럴듯하군.’
소녀의 말은 논리정연해서 지금까지 그녀가 했던 모든 행동을 설명해줄 만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너처럼 대단한 능력자가 고작해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너라면 죽고 나서도 네 능력을 이용해서 명계에서 탈출하고도 남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들의 도움을 받으면 죽음 따위는 무시하는 몸을 가질수도 있잖아. 왜 굳이 내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데?”
소녀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고?”
“저와 유소는 원래 이 세상의 영이 아니라 태초의 혼돈에서 온 존재들이기에, 죽으면 명계가 아니라 다시 거기로 가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윤회전생에 뒤엉킨다면 인과율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겠죠.”
“……!!”
“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어요. 우리의 능력은 신력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순도 높은 혼돈의 재능을 갖고있는 만큼 불사체가 되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렇게 말한 소녀가 문득 고개를 숙였다.
“……으우…… 윽…….”
그리고 나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한스럽게 울고 있었으며, 그 눈물에는 두려움과 억울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한참 후 소녀는 울음을 그치며 눈가를 소매로 훔쳤다.
“두 번 다시…… 그 혼돈 속으로 가고싶진 않아요…….”
“……,”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그게 바로 제 소망이에요.”
소녀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왠지 소녀와 이야기하다 보니 기분이 풀리는 걸 느꼈다.
‘이 녀석은 유소와 본질적으로 달라. 사람을 기만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속아왔기에 알 수 있다. 사람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경험으로 대충 느껴지는 것이다.
“알았어. 네가 나를 앞으로 잘 도와준다면 나도 네가 그 태초의 혼돈이란 것에 끌려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나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서 너는 왜 황제한테 온 거지? 신농이나 여와의 만류를 뚫고 굳이 황제에게 와서 그 봉인을 풀어준 이유가 뭐냐고.”
“그건…… 유소가 제게 말해준 계책이었어요.”
“계책?”
내 반문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소는 당신이 이 [큰 굴레]의 과거로 오는 순간 황제가 봉인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게 그의 봉인을 풀어 버리라고 했죠.”
“……왜?”
이어진 소녀의 말에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래야 당신의 행보 끝에 반고가 부활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