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3권 17화
나는 황제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만나는 건가……?’
[큰 굴레]의 과거로 와서 가장 주목하게 된 인물. 인류 사상최강의 초상능력자이며 신들조차 그 힘을 탐내는 존재, 소녀! 뿐만아니라 지금 강대한 신격들의 모든 갈등의 중심에 존재하는 태풍의 눈 같은 존재였기에 그 의미는 남달랐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황제는 홱 하고 뒤돌며 말했다.
[전욱, 소녀에게 가는 길을 터 줘라.]
[…… 알겠소.]
슈슈슉!!
다음 순간 전욱을 제외한 나머지 삼제의 화신이 동시에 사라졌다. 장내에는 나와 전욱만이 남았고 전욱의 화신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한참 침묵하던 전욱이 말했다.
[황제에 대한 적의가 무척 강하군. 이유가 무엇이냐?]
“…….”
[황제가 누군가에게 저토록 후한 대우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 그것도 너처럼 건방진 놈에게…… 그래서인가 본좌도 네놈에게 흥미가 생기는구나.]
응?
내가 전욱을 바라보자 전욱의 화신이 앞으로 손을 슥 하고 뻗었다.
우웅!
그러자 곧장 어디론가 향하는 문이 생성되었는데, 나는 그 문의 형상을 보자마자 뭔가를 알아챘다.
‘저 형태는 오거천문!!’
오거천문은 거인도 지나다닐 수 있을 것처럼 거대했지만 지금 생성된 것은 크기가 작다는 차이일 뿐, 전체적인 형태가 거의 똑같았다. 이런 데서 기시감을 느낀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고 이곳이 역시 [큰 굴레]의 과거인 건 틀림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전욱은 먼저 차원문 안으로 걸음을 성큼 옮기며 말했다.
[한 번 만에 여와에게 갈 수 없으니 본좌를 잘 따라와라.]
“네.”
우우웅…….
잠시 후 차원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기묘한 빛과 도형이 날아다니는 형이상학적인 차원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별세계와 같이 현란한 이세계에 오자 나는 깜짝 놀랐다.
“응? 여긴 아예 다른 차원…….”
[여와의 뜻이다.]
전욱은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정사각형의 입방체에 거꾸로 매달린 채 팔짱을 끼며 말했다.
[놈은 우리를 경계하여 궁전 내에서도 분리된 차원계로 경계를 만들었지. 우리가 기습하는 걸 막기 위해서이다.]
“그, 그렇다는 건…….”
[본디 이곳은 필멸자로서는 결코 뚫지 못할 죽음의 함정. 너 혼자 왔다면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고생했으리라.]
그렇게 말한 전욱은 한쪽 손으로 무언가를 잡아채는 동작을 취했고, 그의 손에는 암창이 한 자루 들려 있는 게 보였다.
휘오오오 -
번쩍!
한 줄기 어둠의 섬광과 함께 현란한 차원계에는 구멍이 뻥 하고 뚫렸고, 전욱은 그걸 보더니 훗하고 웃는 것 같았다.
[이미 우리는 여와의 결계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다 파악했지만.]
“…….”
역시 오제는 무서운 놈들이다.
슈욱
나는 전욱을 뒤따라 무려 열 번이나 차원계의 함정을 이동했고, 그때서야 전욱은 암창을 던져서 차원계에 구멍을 뚫는 일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마치 안개가 가득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차원계였고 전욱은 하늘을 휙하고 쳐다보더니 말했다.
[여와. 황제의 뜻으로 백웅이 소녀를 만나러 왔음을 전한다. 마지막 문을 열어라.]
전욱의 말은 분명히 여와에게 직접 신언으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번엔 직접 경계를 뚫지 않으십니까?”
[여기는 여와의 집 앞이나 다름없다. 이 차원계를 넘으면 바로 여와가 있는데 경계를 뚫고 들어가라니 본좌에게 분노한 여와와 싸우라는 것이냐?]
“…….”
[여와가 거부하면 본좌도 방법이 없다. 넌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정확히는 방법이 없는 게 아니리라. 전욱이 강짜를 부리며 대신 여와와 충돌해준다면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겠지만, 전욱은 나를 위해 그 정도의 의리를 발휘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뭐 그때는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
그때였다.
슈아아악…….
전욱이 암창으로 파괴하던 차원계의 구멍과 달리 오색찬란하며 정결한 빛의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문을 본 전욱은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여와가 너만 들어오라는군.]
“음.”
[그럼 다음에 본좌의 만귀전으로 오거라.]
이어진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갑자기 왜…….”
전욱의 화신은 턱에 손을 갖다대며 흥미로워했다.
[너는 재밌는 놈 같군. 그리고 황제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줄 생각도 있노라.]
“……!!”
[그럼 다음에 보자.]
슈욱!!
전욱의 화신이 사라지자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내 곁에 흑웅이 조그마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주인. 부탁이 있소.]
“부탁?”
[웬만하면 전욱을 찾아가 주시오. 만일 그가 좀 더 주인에게 음신지력이나 축복을 준다면…… 분명 내가 더욱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고 있소!]
“…….”
흑웅이 이렇게 강하게 부탁하는 건 별로 없는 일인데?
나는 흑웅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강해진다면 나도 좋지.”
[고맙소.]
“그럼 어디 가볼까…….”
저벅
내가 빛의 문으로 한두 걸음을 옮기자, 그곳에는 거대한 궁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만 그 모습은 아까 처음에 서왕모의 궁전에 왔을 때 보았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아서 실제 공간으로는 별로 이동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몇십 걸음 사이에 수십 개의 차원계와 함정으로 벽이 쳐져 있었던 건가…….’
또한 여기야말로 서왕모이자 여와의 본진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빛의 문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힐끔 바라본 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기둥 십여 개를 지나쳐서 큰 어전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기품 어린 외모의 절세미녀가 옥좌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미호…….”
아닌 게 아니라 그 외모에서는 미호의 모습이 너무 많이 보였다. 물론 비슷할 뿐 다른 외모였기에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저 화신의 모습은 예전에도 복희를 만날 때 보았던 적이 있는 것이다. 내 반응을 본 그 절세미녀는 눈에 이채를 띄더니 말했다.
“네가 아는 자들 중 이 화신과 닮은 존재가 있었나 보지? 복희처럼 인간의 미의식에 맞춰서 빚어낸 형태인데.”
“비슷하오, 여와.”
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뚫어져라 여와의 화신을 바라보았다.
“서왕모의 모습으로 나타날 줄 알았는데 설마 다른 화신을 갖다 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그랬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여와의 화신!
하지만 여와의 화신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며 그 자체로 대신에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는 서왕모의 모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화신의 모습이었다. 서왕모의 궁에 서왕모가 없다는 뜻이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자 여와의 화신은 다소 냉막한 말투로 말했다.
“복희의 말대로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놈이군. 원하는 게 뭐냐?”
“복희 님께서 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까?”
“나중에 직접 물어보거라. 지금은 네가 여기 온 목적을 밝힐 때다.”
“…….”
오제와 달리 상당히 험상궂고 깐깐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게 원래 내가 보아왔던 여와의 평소 모습 그 자체였기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황제는 제게 소녀의 거취를 맡긴다 하였습니다. 또한 만나게 해준다 하였기에 이 궁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흥! 제 놈이 뭔데 소녀의 거취를 맡긴다 한단 말이냐?”
코웃음을 친 여와는 진심으로 경멸 어린 표정을 지으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여와는 굉장히 황제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와는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헛소리에는 응대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여기에 찾아온 목적이 따로 있을 테니 그걸 알아야겠다.”
“진짜 목적이라니요?”
“시치미 떼지 마라. 황제가 네놈에게 모든 걸 맡긴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네가 이 궁에 찾아온 목적부터가 존재하는 것. 그 목적을 밝히라는 말이다.”
“…….”
아무래도 어설프게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여와의 말에 대답했다.
“전 원래 황제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소녀를 만나보겠냐고 제안해와서 겸사겸사 온 것입니다.”
“황제의 이야기를? 네놈도 황제에게 굴종해 한자리 얻어보려는 비루먹은 놈이었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솔직하게 말해라! 네놈이 어떤 경과로 여기에 온 것인지.”
나는 여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복희는 내 아군이다. 그러면 복희의 쌍둥이 형제인 여와 또한 현 시점에서 나를 배신할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나를 배신하면 복희를 배신하는 것과 같은데 여와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여기서 전륜성왕, 봉황 등에게 얽힌 전말을 여와에게 다 이야기하는 것은 안 좋은 선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끝에 나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말한 게 전부입니다. 복희 님께서도 제 신원을 보증해주실 텐데 왜 이리 의심하십니까?”
“…….”
“여와 님께서 정말로 저를 의심하신다면 당장 때려눕혀 죽이려 하셨겠지요. 그게 아니라 일단 말로 하신다는 것부터 저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여와 님께 감히 기만을 하려 들 정도로 못된 놈이 아닙니다.”
자못 간절하게 연기를 하자 여와는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약간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좋다. 우선은 그 말을 믿어주마. 그래서 소녀를 꼭 봐야겠느냐?”
“네. 그런데…….”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이렇게 오제들과 같은 공간에 있으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는 철천지 원수이자 앙숙인지라 본디 각자의 신계에서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굳이 이 궁에 그들이 와 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것만은 복희도 모르고 있던 이유였다.
여와는 황제를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어째서 자기 궁에서 그들과 원치 않는 동거를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질문하자 여와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본디 가장 처음에 소녀를 보호한 것은 여(余) 였노라.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돌봐주었고 줄곧 지켜보았지.”
“……!!”
“허나 그 아이가 황제의 편으로 가고자 하여 막으려 하다 보니 피치 못하게 이 궁에 억누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말에 황당해서 말했다.
“신농도 그렇고 여와 님도 그렇고 왜 인간의 운명을 억지로 바꾸려 하십니까?”
“…….”
여와는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찡그러고는 말했다.
“네놈이 내 앞에서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을 텐데?”
“네?”
“힘이다.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해도 여는 네놈을 섣불리 죽이거나 불태우지 않는 것이다. 복희와의 인연도 힘이며, 네가 지니고 있는 강대한 신력 또한 힘이다. 이 세계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누르는 게 당연한 순리이거늘 여가 필멸자의 운명을 억눌렀다는 게 비난받을 일인가?”
“…….”
“그리고 소녀는 평범한 필멸자가 아니다. 그 존재 자체가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정도로 강력한 자이니 약자를 억누른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여는 그 아이의 뜻을 바꾸고자 설득하고 있을 뿐이지.”
“설득이라 해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억누르고 있다면 그건 폭력 아닙니까.”
“그래서 싸우자는 말이냐?”
쿠구구구!!
순간 여와의 모습이 서서히 서왕모의 것으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빈말이 아니라 여와의 인내심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해서 진짜 나를 죽여 버리려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와를 더 이상 자극했다가는 진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만일 소녀의 뜻이 옳다면 여와 님도 뜻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내 반박에 여와의 기운이 잠시 수그러드는 게 느껴졌다. 여와는 형태의 변화를 멈추더니 다시 절세미녀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후 팔짱을 꼈다.
“절대 그럴 일은 없다. 그 아이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건 입이 아프구나. 네가 직접 만나보도록 하라.”
그렇게 말한 여와는 가녀린 손가락을 뻗어 옆에 있는 조그마한 문을 가리켰다. 저 문으로 나가면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 분명했고, 여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 버렸다.
“…….”
고대의 여와도 내가 알고 있는 여와와 다를 게 없었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그마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덜컹
목재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된 통로가 나왔다. 그 통로를 한참 걷자 또 하나의 비취빛 문이 출현했고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오셨군요.”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흠칫 놀랐다.
“유소……?”
유소 아닌가?!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다르다!
완전한 검은빛의 비단옷이라는 것만이 유소와 다른 점이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훗 하고 웃더니 근처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역시 오해받네요.”
“설마…….”
“저와 유소는 쌍둥이예요. 생긴 게 많이 비슷하죠. 자세히 보면 다르지만.”
“…….”
아니, 그런 얘기는 탁록촌 사람들한테 못 들었는데!
왜 말 안 해준 거야?!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그 여인은 내게 말했다.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마도사와 싸우느라 고생하셨어요.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
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당황해서 말했다.
“소녀(素女). 당신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지?”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여인이야말로 소녀! [큰 굴레]의 과거에 신들의 전쟁의 중심에 있던 최강의 초상능력자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녀가 천암비서의 존재와 최근 수련세계에 있었던 내 근황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말한 건 틀림없이 전생자의 시련에서 달마와 싸우는 걸 말한 거 아냐?!’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분명히 그때 ‘인과율이 이어진 물건’으로 기억을 전송하게끔 해놨을 텐데요? 제 모습을 보지 못하셨나요?”
“……?”
“잘 기억해 보세요. 당신은 아마 저를 본 적이 있을 거예요.”
그 순간, 나는 기억 속에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점괘에 따르면 탁록촌은 물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더군요. 어디로 가신 건가요?]
[어쩔 수 없이 당신이 돌아올 때 인과율이 이어진 물건을 통해 바로 기억이 전송되게끔 해 두었어요. 어떤 물건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 푸념이에요. 그 아이는 벌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이며, 과거이자, 동시에 현재.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열린 결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느 쪽도 나쁠 게 없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아직 제 운명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큰 굴레]를 되돌린 존재의 실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
나는 그제서야 그 일이 기억나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그래 분명히…… 달마를 상대한 직후에…….’
알 수 없는 여자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건 그냥 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당신이었나?”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하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당신한테 전언을 남겼던 거예요.”
“……어떻게? 거긴 아직 서 내부였기 때문에 외부의 누군가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을 리가 없었어.”
그것도 달마와 싸우던 장소는 천암비서 중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였기에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말이 만들어준 그 수련세계는 물론이고 천암비서의 시련 또한 현실의 시공간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녀가 말했다.
“단순해요. 언제가 되었든 당신이 현실세계로 되돌아올 건 분명했기에 되돌아오는 순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당신에게 전달되도록 한 것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분명히 안에서 그 얘기를 들었어. 그런 방식으로는 내게 말을 걸 수 없어.”
“당신이 환상의 시공간에서부터 현실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 있었겠죠? 저는 그 순간을 매개체로 해서 역으로 과거의 인과에 손을 뻗은 거예요.”
“뭐?”
달각
소녀는 어느새 새하얀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맑은 차가 채워지는 동안 소녀의 말이 이어졌다.
“제 말을 [들었다]는 결과가 덮어씌워 지게 된다면, 전언은 언제가 되었든, 당신에게 환영이든 꿈이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달되는 거죠. 물론 그 시점은 제가 정할 수 없지만요.”
“…….”
나는 소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의미하는 게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설마…….”
“네, 예상하시는 그게 맞아요.”
소녀는 차를 기품있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무한]의 능력을 이용하면 사건의 원인을 조작할 수 있거든요.”
“……!!”
인과율 조작!!
인간이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천암비서 내부까지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 능력을 쓰면 얼마나 대단한 게 가능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이 순간 소녀가 최강의 능력자인 이유를 실감하고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놀라서 말했다.
“……시, 신들이 당신을 두고 전쟁을 벌이려는 이유를 알 것 같군.”
“그런가요? 이 능력이 부러운가요?”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
달각
소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는 당신이 더 부럽군요, 전생자 백웅 님.”
나는 그 말에 소녀를 쳐다보았고 소녀는 나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듯 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나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맑은 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유소에게 들은 얘기인가?”
“그래요. 저는 무한의 능력을 갖고 있지만 유소처럼 모든 걸 예지하지는 못하죠. 그래서 지금까지는 유소가 저의 길을 인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소는 말하더군요…… 당신이 바로 전생자이며 [큰 굴레]를 넘어 과거로 온 존재라고.”
다 알고 있군.
나는 차를 들어서 한 모금 마시며 대꾸했다.
“그래봤자 나는 이 시대에 뚝 떨어진 이방인일 뿐이야. 진짜 내 동료들은 이 시대에 없다고.”
“탁록촌 사람들을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믿고 자시고…… 그리 오랫동안 같이 있지도 않았고 신뢰관계가 쌓일 정도도 아니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복희는요?”
“복희는 내 동료…….라고 할 수 있겠지.”
“…….”
나는 소녀가 갑자기 복희 얘기를 꺼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갑자기 복희 얘기가 나오는 거지?
그러자 소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백웅 님.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건데?”
“전에도 말했지만…….”
소녀는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의지를 담아서 내게 말했다.
“복희는 당신의 동료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