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3권 14화
아른거린다. 아까 느꼈던 [죽음]과 비슷한…… 창백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윽고 그 예감조차 뛰어넘는 압도적인 ‘공허감’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는 아무것도…….
그 순간 내 눈앞에는 잠시동안 환영이 비춰졌다.
***
[역시 이번에도 실패했군.]
일전에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존재.
어두운 석재건축물의 내부에서 옥좌처럼 보이는 장소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존재는 형형한 안광을 흘리며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전과 달리 뇌우가 몰아치지 않는 평범한 밤하늘이 존재했다.
우우웅
그 존재의 손 위에는 다섯 개의 광구가 띄워져 있었다. 그 광구를 힐끔 내려다보던 존재는 휙하고 손을 움직여서 깨버리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흘리는 듯했다.
[전생 시작부터 니알라토텝을 쓰러뜨려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무리 ‘두 번째 가면’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놈을 빠르게 없애면 트리거(trigger)가 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은.]
이윽고 그 존재는 뭔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두 번째 가면’은 없다고 가정한다면…… 설마…….]
…….
한동안 침묵이 떠돌았다. 그 존재는 잠시 후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래, 꿈의 시작과 끝을 이을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었구나!]
쿠구구구
석재건축물이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천공의 별이 떨어져 내리며 세계가 멸망하기 시작했으며 온 우주에 혼돈이 창궐하는 게 눈으로 보였다. 그 존재는 광기로 번득이는 눈으로 옥좌에 몸을 뉘인 채 중얼거렸다.
[그렇다 해도 나는 끝까지 합리적으로 판단하리라…….]
그리고 약간의 증오를 담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낱 아지랑이를 따라가지 않으리라.]
***
“……허억!!”
두근!! 두근!!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찰나 동안에 보았던 환영이 끝나는 순간 전신에 힘이 들어오는 걸 느꼈고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워 있던 나를 내려다보던 전륜성왕이 삿갓무사의 모습으로 장도를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떤가? 형태뿐인 죽음보다 훨씬 죽음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
나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 몸이 원상복구된 걸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대각선으로 길게 몸이 반 토막 났는데 다행히 전륜성왕이 회복시켜준 모양이었다. 나는 고통도 거의 다 사라진 걸 느끼고는 손을 몇 번 움켜쥐고는 대답했다.
“도대체 방금 전 그 공격은 무엇입니까?”
“절연(絶緣)이다.”
“절연이라는 건……?”
“말 그대로 연(緣)을 끊는(絶) 것.”
그렇게 대꾸한 전륜성왕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緣)이란 바로 인과율(因果律)의 연결상태이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연결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연(緣)이라고도 볼 수 있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걸 보라.”
슈슉
전륜성왕이 권능으로 허공에 두 개의 구체를 창조했다. 흑색과 백색으로 빛나는 두 구체를 만들어낸 전륜성왕은 말을 이었다.
“흑색은 원인(因)이고 백색은 결과(果)라고 가정하지. 그렇다면…….”
띠딕!
구체 사이를 잇는 선이 청량한 소리와 함께 감쪽같이 이어졌다.
“이 두 개를 잇는 게 바로 연(緣)이다.”
“…….”
나는 연이라고 불린 새하얗고 가느다란 선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질문했다.
“그럼 절연이라는 건 원인과 결과를 잇는 선을 끊어낸다는 건데 그게 어째서 이렇게 강력하다는 말입니까?”
“보아라.”
스칵!
전륜성왕은 빠르게 장도를 발도(拔刀)해서 연의 실을 끊어 버렸다. 그는 휘리릭 하며 묘기처럼 장도를 칼집에 수납하며 말했다.
“절연으로 연을 끊는다는 건, 이 두 구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인 없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둘의 연결고리는 이제 사라졌기 때문이다. 허나 원인 없는 결과라는 게 과연 인과율이라는 우주의 법칙에서 허용이 되는가?”
“안 되겠죠.”
“우주라 하는 [큰 굴레]가 허용할 수 없는 존재는 어찌 될까.”
“…….”
“소멸(消滅)하게 되는 것이다.”
슈르륵!
잠시 후 흑색과 백색의 구체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쳐다보자 전륜성왕이 훗하고 웃었다.
“알아차렸나 보군. 그래, 이것이 바로 통상적인 죽음과는 다른 [소멸]. 그대 전생자가 아무리 죽음의 권능과 신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회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죽음이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인과율의 법칙 그 자체를 역이용해서 절대적인 죽음을 내릴 수가 있다니!’
여태껏 책사들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원리! 신조차 거스를 수 없는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 죽음이라면 확실히 이 세계의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으리라!
나는 절연의 위력에 경악하고 있다가 문득 뭔가를 알아채고는 급히 전륜성왕에게 말했다.
“저…… 전륜성왕께서는 어떻게 이 절연의 힘을 쓰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삿갓무사 놈은 어떻게…….”
“…….”
“설마 전륜성왕님이 그 삿갓무사인 겁니까?!”
내가 약간 공포를 느끼고 외치자 전륜성왕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툭 하고 말했다.
“내가 삿갓무사라면 진작 그대를 절연의 힘으로 죽여 버리고 그대가 전생하는 마을에 대기하면서 계속 죽이겠지. 그대가 30번씩이나 전생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아…….”
그, 그것도 그렇네.
‘절연의 권능을 떠나서 전륜성왕의 힘이라면 나를 죽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아마 전륜성왕은 절대로 삿갓무사가 아니리라.
내가 멋쩍어서 머리를 긁적이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우선 본좌가 절연의 힘을 쓸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지. 이유라고 말하기도 너무 단순하지만, 본좌가 바로 절연사막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
“그대도 보았듯이 절연사막은 절연의 기운이 가득한 우주 최악의 사지(死地). 그곳에서 인과율에 따라 탄생한 본좌는 당연히 절연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다. 아니, 본좌의 죽음의 권능은 사실 본질적으로 절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나는 그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전륜성왕에게 반문했다.
“하지만 평소에 쓰시던 죽음의 권능은 방금 썼던 절연과는 많이 달랐습니다만…….”
“일부러 열화(劣化)시킨 것이다.”
“열화? 일부러 약화시켰단 말입니까? 어째서…….”
“진정한 절연의 권능을 쓰면 나 또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한 전륜성왕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내게 보여주었다.
“보이는가?”
“……!!”
전륜성왕의 손은 완전히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마치 석탄처럼 시꺼메서 손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그것은 딱 봐도 심각한 저주에 당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놀라서 주춤거리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절연의 권능을 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절연의 기운을 몸과 영혼이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사용한 후에 반드시 그만큼 반동(反動)을 받는다는 걸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으음.”
“지금은 인간의 모습이라서 손이 저주를 받은 모습으로 형상화를 했지만 본디 그 반동은 신체(神體)에서 신력을 영구적으로 소멸당하는 식으로 찾아온다.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지만 그만큼 자기자신도 피해를 입는 이 권능은 결코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힘을 약화시켜서 반동을 없앤 것이다.”
“그렇군요.”
신력이 영구적으로 소멸당한다는 결코 만만치 않은 대가였다. 전륜성왕의 말을 이해 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전륜성왕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그 삿갓무사라는 존재는 무척 흥미로운 존재이다.”
“흥미롭다뇨?”
“그놈은 최소한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지. 그 말은 인과율이 해제될 정도의 악랄한 힘의 파장에서도 버틸 수 있는 몸과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혹은 본좌처럼 절연사막에서 태어난 존재라던가.”
“……!!”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전륜성왕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시꺼먼 손을 다른 주먹으로 쳐서 깨버리고 말았다. 마치 석고상처럼 부숴져서 깨진 주먹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자 전륜성왕은 곧장 멀쩡한 손으로 복구시키며 말했다.
“본좌의 생각으로는 그자가 쓰는 기묘한 검술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비밀이 있겠지.”
“검술…….”
“확실한 것은 지금 이대로는 삿갓무사와 정면으로 싸웠을 때 그대가 이길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흠칫!
나는 전륜성왕의 말에 놀라면서도 자존심이 상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이렇게나 강해졌는데도 말입니까?”
“지금 그대의 강함은 사실 신력이 9할 9푼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방금 전 내 일참(一斬)에는 속절없이 당했지.”
“…….”
“그대가 내 공격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건 전륜성왕께서 신력으로 시공간의 인과를 무시해서…….”
내 대답에 전륜성왕은 피식 웃었다.
“자기자신을 속이는군. 방금 전 그대가 임전태세에 들어가며 신력까지 끌어내서 스스로를 보호했지. 강대한 신력으로 스스로를 감싸면 신력끼리 상쇄되어 인과무시의 효과가 크게 사라지는 것 정도는 이제 전투경험으로 알고 있을 텐데.”
“아…….”
“정답은 바로 절연이다. 그 삿갓무사는 자신의 검술 그 자체에 절연의 힘을 담을 수가 있기에, 일반적인 신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과를 무시할 수 있는 것이지.”
“인과를 무시할 수 있다고요?”
믿기지 않아서 반문하자 전륜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모든 초식에 그 힘을 담을 수 있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대가 여태 도주 정도는 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진심으로 나와서 절연의 힘을 쓰면, 그대에게 공격을 적중시키는 결과(果)만 남기고 원인(因)을 무시하여 공격할 수 있다.”
“……!!”
“혼돈의 권능은 시간 자체가 혼돈과 비슷한 속성이라서 물 속에서 물길을 조종하는 것과 같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방식이야. 그리고 현재로서 그대는 절연에 대항할 방법이 전무(全無)하다고 볼 수 있다.”
“…….”
“다음번에 만나서 정면으로 전투한다면 그대는 무조건 죽는다.”
나는 전륜성왕의 말에 큰 정보를 얻었다는 생각에 약간 기뻤지만 동시에 암울한 기분이 들었다.
‘내심 이제 신력이 이만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신력조차도 안 통하는 필살절초를 쓸 수 있는 괴물이었다니!
‘도대체 놈은 어떻게 그런 힘을…….’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내심 초조해하고 있을 때 전륜성왕이 말했다.
“허나 이길 수는 없어도 대항하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나는 전륜성왕의 말에 눈이 번쩍 뜨여서 외쳤다.
“정말입니까?! 알려주십시오!!”
“서두르지 말고 거기에 일단 앉아라.”
“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전륜성왕은 그런 내 일 장 앞에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었다.
전륜성왕은 심유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방금 전까지 편의상 절연의 권능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건 권능이라 부르기 힘든 것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큰 굴레]를 넘으려는 망집이며 악몽이며 원한. 그 원념(怨念)의 집합체는 처절할 정도로 신과 불멸자들을 증오하고 있으며, 그저 우주를 멸망시키려는 의지의 총체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 본좌가 아니고서는 이 우주의 그 누구도 다룰 수가 없는 힘이다. 아무리 강대한 신이라 하더라도 절연의 권능을 쓰면 무조건 파멸하게 되어 있지.”
“…….”
“본디 그곳에서 태어난 본좌는 그 누구보다도 사악하고 잔인한 사신(邪神)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본좌가 약자와 필멸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중용의 선(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절연에 [큰 굴레]의 가르침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했다.
“[큰 굴레]의 가르침이라고요? 큰 굴레가 살아 있는 존재란 말씀이십니까?”
“그대는 이미 그걸 무엇이라 부르는지 알고 있지. 그대뿐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인간과 필멸자들이 그 존재를 경애하며 존경한다.”
“……?”
“수보리.”
“……아!!”
내가 그 한마디에 뭔가를 깨닫자 전륜성왕의 말이 이어졌다.
“부처(佛). [큰 굴레] 그 자체가 법리(法理)로서 형상화한 그 존재야말로 본좌를 탄생시킨 진짜 창조주이며…… 본좌가 악을 견제하는 중용의 신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한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