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3권 06화
산명이라고?
유망의 말을 듣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이 번뜩하고 떠올라서 외쳤다.
“아아……!!”
산명(山鳴)!
그것은 내가 수련세계에 들어가기 전 명계에 갔을 때, 유망과 일대일로 겨루기 직전에 그가 언급했던 몇 마디에서 들었던 단어였다. 나는 그 당시의 기억을 희미하게 더듬다가 점차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알 수 있었다.
[흐하하. 그 얘기를 할 줄 알았다. 산명(山鳴)을 따르는 무사라면 으레 그런 얘기를 하곤 하더군.]
[허나 순수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약해서 패배하더라도 신의 힘을 쓰지 않는다면 그게 순수한 건가? 순수한 강함만을 추구하는 건 어째서 너희 족속들이 이야기하는 무(武)라고 할 수 없는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에서 반칙이 어디 있나? 되레 나는 그 순수성이란 게 의문이 가는군. 약해도 순수하면 만족하는 거냐?]
[알았소. 그럼 당신 말대로 전력을 다할 테니 약속해 주시오. 내가 이긴다면 당신이 말하는 산명(山鳴)이란 게 뭔지 알려주시오!]
[그럴 줄 알았다. 너희 족속들은 늘 정체도 모르는 그 존재를 갈구하고 있으니…….]
[약속한다.]
그 당시에 나는 응결되는 신력의 조화 속에서 흑웅을 부활시키고 흑웅의 힘을 이용해서 유망과 대등한 접전을 펼친 바가 있었다. 그 이후에 갑자기 명계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되면서 복희와 돌아다니는 등 정신없다 보니 유망과 그 이상 얘기하지 못하고 결론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체감시간으로는 수백 년 전 일이라 바로 기억이 안 났군…….’
나는 기억을 떠올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말했다.
“……응? 난 그때 나 자신의 정체를 흑웅이라 밝혔는데 어떻게 나라는 걸 눈치챘습니까?”
나는 그때 전륜성왕에게서 받은 가면을 쓰고 나온 데다가 내 이름 또한 흑웅으로 위장했기에 유망이 전혀 내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망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내게 내기의 결과를 마무리 지으러 온 것인가?
그러자 유망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넌 정말로 날 속였다 생각했느냐?”
“네?”
“당연히 전륜성왕의 가면 때문에 네 본질적인 힘과 기척이 감추어져서 원래라면 알 수 없다. 허나 너는 그 때 네 외양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았잖나? 외팔이 또한 그대로였고.”
“……!!”
“게다가 말투도 태도도 티가 났고 심지어 명계까지 올만큼 특출난 인간은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너뿐이었다. 물론 전륜성왕의 가면이라면 다른 놈들을 상대로는 속일 수 있었겠지만, 나는 다른 신족과 달리 권능만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기에 당연히 너라는 걸 한눈에 눈치챘지. 이름도 백웅에서 흑웅으로 한 글자밖에 안 바꾼 주제에 참 양심이 없구나!”
논리정연한 유망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게 된 거였던가?
“하, 하지만 그때는 전혀 모른다는 듯이 말했잖소.”
“당연히 모른 척 한 거지. 전륜성왕과 신농께서 다 보고 있는 자리였는데 거기서 널 아는 체 했다가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라고? 관리부실이랍시고 탁록촌이 엄한 불벼락을 맞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럼 다 알고 싸운 거였단 말인가!
수백 년 만에 알게 된 진실에 내가 내심 충격을 받고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옆에 시립해 있던 흑웅이 말했다.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소. 전력은 다하지만 살기가 적다는 걸 느꼈지.]
흑웅을 본 유망이 씩 웃었다.
“그때 백웅의 몸을 빌어 나와 싸운 게 바로 너로군. 크흐흐…….”
[헌데 그날의 전투는 피차 백중세였소. 당신이 졌다고는 볼 수 없으니 굳이 내기를 결말지으러 올 필요는 없지 않소?]
흑웅의 반문에 유망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나는 이래 봬도 거신족 최강의 전사 중 하나임을 자부한다. 수억 년 동안 거신왕 수인을 제외하고는 나와 제대로 겨뤄볼 만한 놈도 변변히 없었던 거다. 그런 내가 너희를 압도하지 못했으니 진 거나 마찬가지지!”
[…….]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호의를 베풀면 감사하게 받아.”
흑웅이 힐끔 내게 시선을 돌렸고,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때 말했던 산명이란 무엇인지 묻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오냐.”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망 당신은 틀림없이 무공(武功)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절대지경 이상……!!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겁니까?”
이건 그 당시에 느꼈던 최대의 의문이었지만 속 시원히 풀리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었다.
유망은 단순히 권능이 강력한 외계인 신족 같은 게 아니었다. 축융이나 형천과 달리, 그는 그 자체가 뛰어난 무공의 고수였으며 그것도 무술경지로 치면 초절정을 진작 넘어서서 절대지경에 이르러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은 그때 흑웅과 한 몸이 되어서 싸우던 내가 절실히 느꼈던 것이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의념을 가득 실은 정중동의 도강(刀罡). 거기에 무형(無形)의 경지라면 미야모토 무사시의 도법이라고 하더라도 순수 기술의 경지에서 그를 이기기가 난해할 것이다.’
실제로도 유망의 무예기술로 인한 압박을 이기지 못한 흑웅이 먼저 반격하면서 후수를 두었어야 했을 정도로 유망의 경지는 탁월했다. 의념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자가 아니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지금까지 무공은 인간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는데, 신족 중에서도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 중 하나라고 하는 거신족의 전사장이 무공의 절세고수라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러자 유망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절대지경? 흠, 이걸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경지를 말하는 거군.”
두웅!!
“……!!”
그 순간 나는 유망의 정수리에서 강하게 표출되는 의념천주를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저 선명하고 강렬한 기운은 도저히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크게 당황하다가 말했다.
“맞…….습니다. 어떻게 그 경지에 오르게 되신 겁니까?”
“어떻게라니. 무예를 열심히 연마하다 보니까 가장 강한 무예가 무엇인지 찾게 되었고, 그걸 또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니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를 습득했을 뿐이다. 내가 무예에 바친 세월을 생각하면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라는 의문을 가지는 게 더 건방지지 않느냐?”
“…….”
할 말이 없다. 유망은 최소 수십억 년을 사는 신족이기에 그가 1억년 만 수련했다고 해도 인간의 세월로는 아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이외의 거신족은 무공이란 걸 쓸 수 없어. 혹시나 여기저기 다 물어보고 다닐까 봐 미리 말해둔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러자 유망이 낄낄거렸다.
“크크. 그게 참 재밌는데 말이야…… 내가 이 무공의 이점을 살려서 형천과 축융을 일대일 대결에서 쉽게 이기거든? 한 삼만육천 번 넘게 싸워봤는데 내가 진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두 놈이 하루는 자존심을 접고 자기들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나에게 무릎을 꿇었던 거다.”
“……!!”
그 오만한 축융이 유망의 제자가 되겠다고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고?
이건 왠지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망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한 5천 년 정도 전사장 두 놈에게 무공을 열심히 가르친 적이 있다. 결과가 어찌 되었겠나.”
“못 배웠겠지요.”
축융은 미래에도 무공을 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못 배웠으리라.
내 짐작에 유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거신족은 원래 무공을 못 배워. 왜냐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혼돈의 신력을 모조리 무(無)에 가깝게 버리고는 오로지 무(武) 그 자체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거신족이라면 갓난아이마저도 웬만한 마(魔)를 맨손으로 분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타고나니, 어찌 자신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력을 포기하며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겠나? 유망이나 형천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르쳤던 그 어떠한 거신족 전사도 무공은 배우지 못했다.”
“…….”
“뭐 거신족은 무공을 안 배워도 충분히 강하니까 아무 문제 없었지만.”
왠지 씁쓸하게 말하는 유망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흑웅이 불쑥 말했다.
[유망, 당신은 거신족이면서도 모든 신력을 포기할 각오로 무(武)를 수련할 수 있었던 별종인 거구려. 그렇기에 당신만이 거신족에서 유일하게 무공을 익힌 것이오.]
흑웅의 말에 유망이 히죽 웃었다.
“그래, 맞다. 내가 또라이라서 가능한 거야. 그래서 내 권능도 무예를 펼치기 좋은 방향으로 진화시킨거지.”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유망과 싸울 때 유망은 거신족만의 강력한 초상능력을 쓰기보다는 ‘자세변환에 시간이 안 걸리는’ 종류의 보조적인 권능만을 사용하는 편이었다. 도끼를 투척했다가 회수하는 능력 같은 것도 유망이 써서 위협적일 뿐이지 권능의 위력만으로 치면 굉장히 심심한 3류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유망 자체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그런 보조적인 초능력이 도리어 웬만한 능력보다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헌데 유망 님은 산명이라는 걸 언급하셨습니다. 그 말은 유망 님, 당신 외에도 이 우주에서 무공을 익힌 존재를 발견했다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까?”
“…….”
내 질문을 들은 유망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 많지는 않았어. 아니, 도리어 극도로 적었지.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수억 년 동안 고작해야 40명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
역시 있었던 것이다.
외계인 중에도 무공을 수련한 존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거 같긴 했지만!!’
28회차 종말의 시점에 나타났던 다섯 자루의 대검을 쓰던 신역절기의 육비(六臂)의 청면무사! 그 존재는 사실 외계의 아르겔도라는 무류(武流)를 다스리는 외계인 검성(劍聖)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긴가민가했지만 역시 전 우주를 놓고 보면 무공수련자가 인간만 존재하는 건 아닌 듯했다. 외계인의 몸에 맞춰진 무공도 따로 존재하리라.
유망은 흠, 하고는 허리춤에 있던 술병을 꺼내서 다시 꿀꺽꿀꺽 마시고는 말했다.
“수련자들의 모습도 경지도 각양각색이었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산명(山鳴)이었지.”
“산명이라는 건……?”
“마치 보이지 않는 산속의 메아리처럼, 그들이 무(武)의 길로 접어들려 할 때 인도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거다. 본디 무예와는 눈곱만큼도 관계없는 촉수괴물이나 어둠의 용족, 혼돈의 용암괴물 같은 놈들이 그 목소리에 이끌려서 무예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거지. 그리고 그들은 그 목소리를 일컬어 산의 메아리, 산명이라고 불렀다.”
“……!!”
나와 흑웅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틀림없다.
저 산명이라는 건 무신(武神)을 의미한다는 것을!
나는 기대에 휩싸여서 유망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유망 님은 혹시 무신을 만나보신 겁니까?! 아니, 무신백좌(武神百座)에 들어가신 겁니까!”
가장 기대되는 질문!
이 질문에 따라서 나는 어쩌면 미래와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기대감에 부풀어 있자 유망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절반이라고 할까. 네가 무신이라고 부르는 그 산명은 만나보았지만 백좌라는 건 들어가지 못했다.”
“……?!”
뭐, 뭐라고?
“무신을 만나보았긴 하다는…… 거지요?”
내가 조심스레 반문하자 유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봤어. 꿈에서.”
“꿈…….”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놈은 분명히 내 꿈에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내게 말했다. 무예가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도와주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의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거지.”
“무신이 도와준 겁니까.”
“뭐, 그런 셈이야.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알아?”
이어진 유망의 말에 나는 어이없음을 느꼈다.
“거신족은 원래 잠을 안 자. 그래서 나는 꿈을 꾼 게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는 거야.”
“……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심심할 때마다 잠을 자려고 노력해봤지만, 그때 이후로는 그놈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언뜻 이해가 안 되어서 머리를 굴리다가 역시 이해가 안 되어서 말했다.
“그 말은 무신은 강제로 상대가 잠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혼돈의 기운을 극한까지 소멸시켜서 무(無)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정신이 수면상태에 들어간다는 거지. 보통의 거신족은 생명력이기도 한 신력을 그렇게 소비해서 아사상태에 가까워질 이유가 없으니까 겪을 일이 없어. 다만 나는 그 당시에 간절함 때문에 혼돈의 기운을 끝까지 태우다가 그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할까…… 그걸 ‘잠’이라고 부른다면 잠이겠지.”
“…….”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겠지?”
나는 유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신은 혼돈과 반대인 질서 상태가 될수록 만나기 쉬워지는 거군요!!”
“…….”
그러자 유망은 뚫어져라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갑자기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술병 한 개를 또 꺼내서 나한테 던졌다.
턱
내가 내 몸뚱이만큼 커다란 술병을 받아들자 유망이 퉁명스레 말했다.
“벌주(罰酒)로 그거 한 번에 다 마셔라!”
“……네? 벌주요? 왜…….”
“벌주를 왜 주겠어?”
“…….”
내 대답이 틀렸다는 말이군.
나는 그 사실을 직감하고는 어쩔 수 없이 술병을 내려놓고 뚜껑을 찾아서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대나무 냄새가 나면서 향취 넘치는 술 냄새가 동시에 흘러나와서 내 코끝을 찔렀다. 아무리 그래도 이만큼 많은 술을 마시면 탈이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쩍 벌렸다.
콸콸콸
꾸르르르르륵
잠시 후 숫제 상의가 다 젖어 버릴 정도로 술이 콸콸 부어지면서 나는 얼굴이 다 젖을 정도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이미 세간에서 술고래라고 부르는 주량을 넘은 지는 옛날이었고, 내 전신의 수분을 다 뽑아도 이것보다는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술을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뜻밖에 술이 맛있었기에 얼큰하게 취하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들이켰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술 많이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전생하자마자 극호와 함께 주루에서 미친 듯이 술을 처먹은 적이 있었는데…….
꺼윽
어느새 나는 내 키만 한 술병에 있던 술을 모조리 다 마신 후였다. 술독으로 치면 도대체 몇 동이인 걸까? 내가 술에 젖어서 비틀거리자 유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못 마시는 편은 아니군.”
나는 입가를 쓱 닦으며 말했다.
“……술맛이 좋군요. 독은 안 들었겠지요?”
만독불침이라 별 상관은 없지만, 일단은 물어보자!
“크흐흐…… 그래봬도 수인조차 탐낼 정도의 명주(名酒)다. 나중엔 고마워질 거다.”
“으음.”
그 정도로 좋은 술이었다고?
‘향이 좋긴 했는데…….’
벌주 마신 건데 술 마신 거 하나로 고마워지나?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유망이 말했다.
“이봐. 질서의 힘을 갖고 있을수록 무신을 만나기 쉽다면 복희나 신농은 왜 무신을 못 만나? 그들뿐만 아니라 고대신들 중에는 신체 그 자체에 우주의 정갈한 법리(法理)가 새겨진 놈들이 많은데 그런 놈들은 진작 무공을 네가 말하는 절대지경까지 익혔어야하지 않을까?”
“아……!!”
“혼돈인지 질서인지 그런 단순한 성향만으로는 놈을 만날 수가 없다. 그건 태초의 신(神)들이 다루는 규칙이니 무신이란 놈은 그걸 중요하게 보지 않아.”
“하지만 혼돈의 힘이 줄어들수록 무신을 만나기 쉬운 건 사실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 3의 상태.”
그렇게 말한 유망은 문득 자신의 도(刀)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계가 원점(原點)으로 되돌아갈 때 혼돈과 부딪혀서 생겨나는 또 다른 양태가 존재하지. 질서와는 그 상태가 강력하게 구현할수록, 가장 작은 무언가가 진동하게 되어 있다. 그 진동으로 인해 무신이 반응하게 되는 거야.”
“…….”
“하지만 나는 인위적으로 그 상태를 몇 번이고 구현한 적이 있음에도, 무신은 그때 이후로 나를 두 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만나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습니까? 또 다른 조건이 있는 건 아닐까요?”
내 반문에 유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알 수 있어. 놈이 내게 의념천주의 경지를 깨우치게 인도해주었지만 백좌라는 자리에 올리지 않은 이유와 아마 같을 거야.”
“……?”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유망은 천천히 나를 향해 도를 겨누며 말했다.
“네가 신농 님을 방해하려고 뭔가 음모를 꾸미는 거 대충 알고 있다. 그렇지?”
헛! 어떻게 알았지?!
나는 단숨에 정곡을 찌르는 유망의 말에 흠칫할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감정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망은 귀를 후비며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나도 딱히 증거는 없어. 그냥 이 나이 먹도록 거신족 최고참 전사로 뛰다 보면 수억 년 동안 감이라는 게 생기거든. 그 감에 따르면 너는 외부세력을 끌어들여서 분탕질하려고 할 것 같구만.”
“…….”
“아님 말고.”
아니, 증거 없이 대충 찔러보는 게 맞아?! 다 정곡이잖아!
나는 내심 찔려서 비명을 질렀지만, 끝까지 아닌 척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분탕질 같은 거 할 생각 없습니다. 아무튼 그거랑 지금 제게 무기를 들이대는 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너도 뭔가 이상하지?”
“뭐가 말입니까?”
“축융도 형천도 전 우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거신족의 전사장인데 그런 놈들을 상대로 겨우 무공 좀 쓴다고 내가 무조건 이긴다는 거 말이다. 그때 나하고 한 판 붙어서 동수를 이루었던 너로서는 뭔가 애매한 기분이 들겠지.”
“…….”
나는 힐끔 옆에 있던 흑웅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그때 흑웅에게 몸을 빌려주었지만, 실질적으로 싸운 건 흑웅이었기에 실제로 눈앞의 유망이 얼마나 강한지는 흑웅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흑웅은 유망의 말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소. 역시 생각대로 당신은 그 때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구려.]
나는 흑웅의 말에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뭐? 전력이 아니었다고?”
그러자 흑웅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유망이 굉장히 열심히 싸우는 척은 했지만, 그의 공격은 묘하게 과장되어 있었고 실속이 적었소. 힘은 강하게 발현하지만, 정기신(精氣身)이 일치하지 않았소. 뿐만 아니라 그가 그저 무기를 바꿔가며 공격했던 것도 사실 다른 전사장의 권능에 비해 압도적이라 볼 수는 없었소. 특히 축융과 비교한다면 축융의 채찍이 훨씬 더 매서운 게 사실이었소.]
“그 말은…….”
[유망은 주인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때 단순히 친선전으로 끝내기 위해 연기를 했던 것이오. 그는 실제로는 훨씬 더 강하오.]
“……!!”
내가 설마 하는 눈으로 유망에게 시선을 향하자, 유망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인마, 백웅. 내가 왜 너한테 아끼는 명주도 주고 잘 대해주는 줄 아냐?”
“……내가 잘 생겨서?”
번뜩!
그 순간 유망의 눈에 혈광(血光)이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그 안광을 마주 대하는 순간 흠칫하고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느낀 게 유망의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고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 무엇이라도 없애 버릴 듯한 어마어마한 살기!
저 흐늘거리는 성격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피 냄새 자욱한 기운에 나는 그만 긴장해 버린 것이다.
‘헛소리하면 죽는다.’
유망의 기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 헛소리를 기세 한 번으로 일축해 버린 유망은 눈에서 혈광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심심하고 외로웠다. 혼자서 아무리 무예를 수련해도 끊이지 않는 갈증이 반복되고, 무예의 경지란 그 한계가 존재치 않아 수련하고 또 수련해도 해야 할게 태산처럼 많았지. 나는 그 길에서 수억 년의 시간조차 부족하다 여겨 매달렸지만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
“무인에게 있어서 무를 연마하는 자들은 동지이지만 동시에 경쟁자. 하지만 여태껏 만났던 그 어떤 수련자도 내 진짜 상대는 될 수 없었고 제대로 싸울 만하다 싶으면 한 방에 죽어 버려서 늘 곤란했었단 말이다.”
츠즈즈즈
유망의 도에서 선홍색 혈광이 맺혀서 마치 살아 있는 핏방울처럼 튀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핏빛 광선이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는 것과 같았고 동시에 입체적인 기운이 허공에서 뒤엉키면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는 형세였다.
저건 도강(刀罡)인가?
‘아냐…… 저건…… 그런 하찮은 게 아냐!’
검기가 모여서 응축된 검강지기에는 의념이 증폭되어 강대한 위력을 내뿜지만, 저것은 강기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우주적(宇宙的)인 위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아예 인간이 표현하는 무학(武學)과는 힘의 단위부터가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유망의 도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혈광 한 줄기만 하더라도 실제로 부딪히는 순간 미증유의 위력을 뿜어내리라.
내가 저 정도의 기운을 무공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
“…….”
구궁파천뢰의 기운을 단 한 점에 모아 집약시키는 걸로도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만큼 유망의 도는 감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이 결집되어 있었고 지금도 계속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자 흑웅이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흑웅의 말이 이어졌다.
[주인이 삼황오제를 상대로 반기를 들 정도의 강자라면 진심으로 몇 수 부딪혀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지금 마각(馬脚)을 드러낸 건가…….]
“뭐, 뭐라고!”
내가 눈을 부릅뜨고 유망을 쳐다보자 유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나 하나 어찌하지 못하면 네가 생각하는 건 절대 이루지 못할 거다, 백웅!”
“엥…….”
“멋지게 싸워보자!”
쿠구구
유망의 전신에서 강대한 기운이 피어오르자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틀림없다.
유망은 지금 만난 김에 나에게 그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면서 생사결을 벌이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미친 소리 하는군. 내가 유망 님의 욕구해소에 어울려드릴 이유가 뭡니까?”
내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유망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 술 먹었잖아.”
“먹으라고 해서 먹었고 벌주였잖습니까. 그런 건 빚으로 안 칩니다!”
“아 거 쪼잔하네…… 누가 진짜 조진대? 어차피 신이라서 사지를 분해해도 죽지 않을 놈이.”
투덜거리던 유망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내 진심이 담긴 십초(十招)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받아낸다면 내 무공을 전수해 주마.”
“……!!”
“네 녀석도 무인 나부랭이라면 이 정도는 받아들여 봐라.”
젠장…… 이런 선사시대에도 눈만 마주치면 싸우려는 전투광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지끈지끈해졌지만, 유망의 제안은 틀림없이 혹하는 것이었다.
‘유망은 도대체 어떤 무공을 쓰길래 다른 전사장을 압도할 수 있는 걸까?’
그의 ‘진심’이라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또한 내가 그동안 쌓아온 수련의 세월도 만만치 않았기에 투쟁심 또한 드는 걸 느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흐흐, 결정됐군.”
유망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볍게 한 칼…….”
쿠구구구구구
모든 은하의 빛이 수백 개의 덩어리가 되어서 모이는 것 같았고, 그 덩어리는 이윽고 거대한 거신(巨神)의 반투명한 팔과 같은 형상으로 변해서 도극(刀戟)에 맺히는 게 느껴졌다.
“……?!”
평상시라면 그저 절세신공이 기의 운용을 극한까지 통제하여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된 찬탄의 묘사로써 생각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에 당황했다. 저건 묘사하고 말 것도 없이 진짜 별 그 자체의 힘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다음 순간 유망의 도(刀)가 백광과 혈광이 뒤섞인 혼탁한 일섬을 내질렀다.
지옥천상도(地獄天上刀)
성신참(星神斬)
콰과과광
파지지직…… 파지지직!!
거대한 폭렬음과 함께 나는 이미 흑웅과 합신한 채 그 자리에서 거신참을 상대로 일 초를 버텨낸 상태였다. 그러나 내 꼴은 크게 참혹하여 시시각각 끔찍한 고통이 팔의 말단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끄으으읍!!’
그 찰나의 순간 - 나는 삼보절기나 무쌍패를 쓰기보다는 무토도리를 써서 상대의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상대가 진심을 다하고 있긴 해도 일단 친선전에 가까웠기에 상대의 무공을 끝까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고, 나는 무토도리를 펼쳐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기는커녕 초식 자체가 처절하게 찢기면서 내 모든 의념마저 상대의 일격에 날아가 버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거력(巨力)!
아까 보았던 혈도(血刀)보다는 몇십 배 약한 게 분명한데도 나는 그 순간 흑웅이 지니고 있는 모든 성라회천의 권능을 방어전용의 신력으로 돌려서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팔 두 개가 통째로 찢기고 상반신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나는 비틀거렸지만, 이윽고 신력을 써서 전력으로 회복해냈다.
‘제길……!!’
한번 지켜보고 싶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이야! 설령 제대로 막거나 피하려 했어도 꽤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내심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래도 보긴 봤다.’
상대가 지닌 우주적인 무공의 본질을!!
내가 몸을 회복시키자 유망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뭐야? 거의 대비 없이 맨몸으로 처맞고도 그걸 버텨? 신력 하나는 정말 엄청나구만…….”
“…….”
“그럼 계속 간…….”
유망이 자세를 잡을 때 나는 나직이 말했다.
“유망 님의 권능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호오? 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호기심 섞인 물음에 나는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대답을 했다.
“……신력을 그대로 의념으로 바꿀 수 있는 권능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