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557화 (1,456/1,615)

전생검신 83권 05화

그러자 집 안에 들어와서 얘기를 듣고 있던 청양(靑陽)이 불쑥 말했다.

“너무 독단적이군요.”

나는 그 말에 청양을 쳐다보았다. 청양의 앞머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눈을 가릴 정도로 덮은 상태였고 그는 거의 노화하지 않은 상태라 여전히 청년의 몸이었다. 36년이나 지났는데도 거의 변하지 않은 청양은 가린 앞머리 사이로 약간의 기세를 담은 안광을 실어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은 알겠지만, 이 탁록촌의 운명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탁록촌?”

“탁록촌은 염제 신농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웅 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일이 아무리 좋게 풀린다고 하더라도 우리 탁록촌은 백웅 님을 따르게 된 걸로 간주되어 더 이상 신농 님의 보호를 받게 되지 못할 확률이 크지 않습니까.”

“…….”

“당신에게 배운 무공이라는 것 덕분에 우리는 더 강해지긴 했지만 바깥 세상에는 지금의 우리 힘으로도 감당치 못하는 존재가 너무 많습니다. 거신족의 비호를 버리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청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내가 하려는 건 양자대결을 다자대결로 바꾸어 삼황 신농이 황제와 전면전을 벌이려는 걸 막으려는 것이니, 자신을 막아 세운 걸 알게 된 신농은 내게 불쾌감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따르는 탁록촌 인간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까 청양의 의문에 대해 미리 생각해 놓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탁록촌의 인간들은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

“……!!”

“신농을 대신해주지.”

그 말에 청양은 흠칫하고 놀란 듯했고 그 옆에 있는 상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내가 단숨에 얘기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청양은 여전히 약간의 불신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백웅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몽 같은 신마(神魔)가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할 정도로 강하다는 건…….”

청양의 말에 내 옆에 시립해 있던 흑웅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나직이 말했다.

[감히 네놈 따위가 주인의 힘을 의심하는 것인가?]

쿠구구!!

음산한 어둠의 기운이 마치 별빛을 에워싸는 흑암처럼 내려온다.

“……!!”

“으음!”

흑웅이 내 신력을 불러와서 기세를 끌어올리자 잠시 좌중이 흑웅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청양과 상아는 흑웅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힘이 꺾인 표정이 되어 버렸다. 뿐만아니라 수보리와 건달파 등도 기세가 꺾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힘의 차이가 명백히 느껴졌다. 유일하게 기가 죽지 않은 건 의외로 열산이었는데 그 또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흑웅이 시꺼먼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주인이 네놈들과 같은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하여 감히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말지어다! 주인은 이미 천지를 가름하는 신왕(神王)과 대등한 영역에 올라서려는 존재이니, 도리어 주인이 너희를 보호해주려 함은 분에 넘치는 것임을 깨달으라!!]

쿠구구구……!!

“으으윽.”

청양에게 좀 더 압력이 집중되자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눈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더니 상단전의 힘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힘이 응결되자 잠시 후 청양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흘러라!”

촤악

그 순간 청양 근처의 공간이 마치 물 같은 기류를 형성하더니 흑웅의 기세를 흘려내었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생각했다.

‘청양은 자기가 지정한 공간의 시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지. 시간을 멈춘 후 흘려보낸 건가?’

아무리 봐도 강력한 초상능력이었다.

청양은 힘겹게 버텨낸 후 자신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는 걸 닦으며 말했다.

“수십 년전 사라진 후로 갑자기 나타난 백웅 님만 믿고 거신황제 신농의 보호를 포기하라는 말에 어떻게 응할 수 있습니까. 탁록촌 모두의 운명이 걸려 있는 데다가…… 저는 백웅 님이 그렇게까지 강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흑웅은 자신의 압박에 저항하는 청양을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흐흐, 혼돈의 재능 하나 믿고 건방진 소리를 한 건가? 시간조작 따위…….]

따악

흑웅이 손가락을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청양은 그대로 눈을 부릅뜨더니 울혈을 토해내고는 쓰러졌다.

“크허어어억!!”

풀썩

흑웅은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차라리 의념으로 이겨냈다면 인정해주었을 텐데 시공간의 초능력이 얼마나 신 앞에서 하찮은 건지도 깨닫지 못했구나.]

나는 청양이 피까지 토하는 걸 보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봐 흑웅, 그만해!! 너무 심하잖아!”

슈욱

내가 급히 흑웅이 빨아들이던 신력의 통로를 막아 버리자 흑웅은 여전히 청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이여…… 이깟 인간들에게 얕보여서는 이 시대를 주름잡는 신왕들을 상대로 교섭 따위는 불가능하오!]

“뭐?”

[주인이 이제부터 교섭하려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소? 본디 저 머나먼 우주에서 수백만의 별과 성계(星界)를 거느리며 수많은 외계종족을 창조했으며 아득한 지식과 힘의 주인이자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혼돈의 왕좌들이오! 본디 수백만 광년 내에서 신중의 신으로 군림했던 은하계의 제왕들이 전 우주에서 계시 하나를 보고자 이 좁아터진 지구라는 행성에 몰려들었으니 삼황오제에 준하는 존재들이 그리도 많은 것!!]

불끈

흑웅은 주먹을 쥐며 약간의 분노를 머금은 채 강변했다.

[주인은 인간으로서 신에게 대항한다는 생각을 버리시오! 그런 태도로는 그자들이 결코 얘기조차 들어줄 리가 없소!]

“…….”

나는 흑웅의 강경한 태도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언제나 오만하긴 했으나 내 일에 한해서는 절대적으로 내 뜻을 따라주었던 흑웅이 이렇게 자기 의지를 표출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흑웅의 태도에 화가 나기보다는 약간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여태껏 신들과 수많은 교섭을 해서 성공했잖나? 내 방식이 틀리다고 단정 지을 이유는 없을 터인데.”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입장이 다르오! 주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소?]

“뭐가 다르다는 건데?”

[주인은 여태껏 신비한 특이점으로서 신들의 애정과 흥미를 끌어 교섭을 했소.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과 다름없소. 허나 지금 주인이 행하려는 합종의 계(計)를 진행코자 하면, 그때부터 주인은 새로운 연맹의 맹주(盟主)가 되어야 하는 것이오!]

“매, 맹주?!”

나는 약간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무슨 맹주라는 말인가?

그때 흑웅의 기세가 줄어들어서인지 옆에서 듣고 있던 수보리가 입을 열었다.

“흑웅의 말이 맞네. 맹주가 되어야 하겠지.”

수보리에게 좌중의 시선이 향하자, 수보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다자(多者)의 대화로 시선을 전환한다 하더라도 제 3 세력은 기존의 양대세력에 비해 동기도 구심점도 약해. 만일 양대세력 중 어느 한쪽이 강경한 수단을 써서 엄포를 놓는다면 백웅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사리 꽁무니를 빼려 할 가능성이 높네. 안 그래도 삼대신의 경우는 자기들 일이 더 바쁘지 않은가?”

“……!!”

“그리고 다자간 대화를 시도해서 양대세력을 귀찮게 한 백웅 자네는 회담이 성사되지 못할 경우 몇배나 되는 원망과 적의의 대상이 될 걸세.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회담만 진행했다가는 회색 박쥐가 되어서 모두에게 공격받게 될 거야. 엄청난 위험성을 끌어안는 셈이지.”

“그게 맹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란 말이오?”

“그렇네.”

수보리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한번 그 계책을 진행한 후에는 자네는 더 이상 독립된 용병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어. 제 3 세력을 통째로 끌어안은 채 그 자체로 세력의 지배자가 되어야만 후환을 피할 수가 있지. 흑웅은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자네에게 신세력의 맹주로서의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걸세.”

“…….”

“자네가 신세력을 끌어모으는 축이 되어 양대세력에 대한 압박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계책이 성립할 수 있네.”

신세력의 맹주……!!

“으음.”

나는 생각지도 못한 국면의 전환에 침음성을 흘렸다. 단순히 전쟁을 막기 위해 움직이려 했을 뿐인데 설마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전개될 줄이야? 하지만 이야기를 곱씹어볼수록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고민하면서도 흑웅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흑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흑웅. 그럼 하나 물어보자. 인간으로서 신에게 대항하는 자세를 가지는 게 좋지 않다면…… 신왕의 맹주로서의 자세란 무엇이냐?”

[패주(覇主)요.]

“패주?”

흑웅이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저깟 인간 놈들에게 능멸당하지 않고, 군주이자 신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여,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자연스레 표출하는 것!! 거슬리는 필멸자 따위는 방금 내가 했던 것처럼 가볍게 짓눌러 죽일 수도 있는 냉혹함을 지니는 것!! 그러한 패도를 걸을 수 있어야 저 강대한 신왕들이 자신들과 동격의 존재로 인정해줄 것이오.]

“…….”

[주인이여. 무엇이 껄끄러운 것이오?]

“아니 하지만 그건…….”

나는 여태껏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을 간신히 내보내었다.

“[옛 지배자] 아니냐? 나보고 이제부터 그렇게 행동하라고……?”

그렇다.

흑웅이 이래저래 말을 잘 포장했지만, 결국 여태껏 내가 수도 없이 보아왔던 [옛 지배자]처럼 행동하라는 소리다!

그러자 흑웅은 움찔하더니 슬그머니 말했다.

[정말로 주인이 그렇게 바뀌라는 건 아니오. 나로서는 그렇게 바뀌어도 상관없지만 정 내키지 않는다면 그런 척이라도 하고 있는 편이 좋을 것이오. 지금까지처럼 ‘인간’으로서 신을 대하듯이 한다면…… 혼돈이든 질서 진영이든 왕좌들은 주인을 대등한 이야기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소.]

“흠.”

나는 왠지 흑웅이 이 문제에서 강경하게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웅에게는 전욱(顓頊)의 성격이 많이 스며들어 있어.’

외양도 그렇고 쓰는 기술도 그렇고 흑웅은 전욱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흑웅의 성격도 전욱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테니 패도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런 흑웅이 볼 때 내 행동은 답답해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 건 둘째치고 흑웅의 말은 일리가 있다. 충분한 위엄을 가지지 못하면 천하를 아우르는 대신들이 얘기를 안 들어줄 게 뻔하다. 하지만 그 위엄은 오로지 패도로만 채워야 하는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여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왕(王)이란 무엇이지?

“…….”

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내게 인간의 왕이 되라고 말했지. 다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딴 걸 고민하기에는 눈앞에 난관이 너무 많았거든…….”

[…….]

“하지만 적어도 흑웅, 네가 한 말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왕이 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가 있을 것 같다.”

[주인은 어떤 왕이 되려 하오?]

저벅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저 앞에 혼절해 있는 청양에게 갔다. 그리고 청양의 몸을 바로 신력을 이용해서 회복시켰고, 청양은 혼절에서 깨어나자 입가의 피를 급히 닦았다.

나는 그런 청양을 일으켜 세우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내 마음을 따르는 왕이 되고싶다.”

내 말을 들은 흑웅은 멍하니 있다가 당황한 듯 말했다.

[그, 그런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 있소? 이 세상의 모든 왕이 자신의 욕구대로 행하려 하는데 그건 왕의 속성이 아니라 그저 기본조건에 불과하오.]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왜 기본조건이라고 단정 짓는 거야? 내가 봐 왔던 왕들 중에는 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는 놈들이 많았어.”

[…….]

“지금 내가 철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진짜 위대한 왕이라는 게 따로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청양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 삶은 언제나 내 마음 가는 대로 행하는 게 정답이었어. 아마 왕이라는 것도 그렇겠지!”

[……!!]

내 말에 흑웅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 나직이 말했다.

[나는…… 주인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구려.]

“뭘 또 그렇게까지 얘기하는 거야.”

[좋소. 주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나는 주인의 왕도(王道)를 이룰 수 있도록 끝까지 곁에서 보필하겠소!]

쿠웅

흑웅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런 흑웅에 이어서 바로 내 앞에 있던 청양이 무릎을 꿇었다.

내가 청양을 내려다보자 청양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백웅 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라는 게 악한 게 아니라는 걸 믿고…… 우리 탁록촌 사람들은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

“잘 부탁드립니다. 나의 왕이시여.”

쿠웅

쿠웅

좌중에 있던 모두가 하나둘씩 내게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내키지 않는 듯 버티고 있던 열산 또한 한숨을 쉬더니 무릎을 꿇었다.

“내 누이들을 구해주기만 한다면 너를 왕으로 섬기마…….”

쿠웅

좌중의 전원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은 상황!

나는 그 광경을 둘러보다가 순간 깨닫고 말았다.

과거 대명제국을 쓰러뜨리고 대웅제국의 황제가 되었을 때보다 더한 고양감이 잠시동안 내 몸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아.’

단순히 섬김을 받는다 해서 왕인 게 아니다.

마음이 담긴 복종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잠시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나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반드시 신들의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만들어주마!!”

[큰 굴레]의 과거로 온 이후 전생동료를 찾는 것 다음으로 커다란 목표가 지금 생긴 것이다.

이야기가 정리되자 건달파가 내게 말을 걸었다.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사실…… 주군이 되돌아오는 대로 그자가 자기를 찾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자가 탁록촌에 찾아온 건 얼마 전…….”

건달파는 ‘그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나는 건달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서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린다고 하던가?”

“자신은 계속 기다릴 테니 언제든 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홱 하고 흑웅을 보았다. 흑웅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말했다.

[사실 나도 주인에게 할 말이 있었소만 이 일이 먼저인 것 같소. 먼저 그를 만나고 나서 이야기하겠소.]

“어? 또 할 말이 있었어?”

[왕도를 설파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마시오. 주군의 합종 계책에 도움이 될 조언을 하려 했는데 그건 우선순위에서 비교적 후 순위인것 같소.]

“알았어. 그럼 좀 있다 얘기해주고…… 가자!”

파앗

나는 흑웅과 함께 곧장 청명하고 맑은 호숫가로 이동했다.

쏴아아아 -

‘오랜만에 봐도 물이 맑고 좋구나.’

마지막으로 본지가 벌써 수백 년이라서일까? 나는 이 호숫가도 기억이 나면서도 아주 오래전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느낌이 들어서 새로웠다. 내가 감회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왔군.”

삼장이 훨씬 넘는 거대한 키!

그리고 청동갑옷과 도끼, 거대한 활을 장비하고 있는 그 거인족 전사는 호숫가 맞은편에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내 근처까지 오자 투구를 슬며시 벗으며 씨익 웃었다.

“백웅, 꽤나 자리를 비웠더군. 어디에 갔다 온 건가?”

나는 거인족 전사의 말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말도 마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을 다 이야기하면 놀라서 자빠지실지도 모릅니다.”

“엉? 그렇게나 짧은 시간에 재밌는 일을 하고 왔다고? 그거 부럽구만, 그래…….”

거인족 전사는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이윽고 호숫가에 털썩 걸터앉고는 허리춤에 있던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거기 앉아 봐. 할 말이 있으니까.”

나는 그의 말에 마주 앉았다. 삼 장이나 되는 거신과 마주 앉자 당연히 내가 생쥐처럼 보일 정도로 작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편하게 앉으며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부르신 겁니까? 유망(榆罔)님.”

상대는 유망!

거신족의 삼대 전사장(戰士將)이자 삼황오제 바로 아래의 2인자급의 실력을 가진 강대한 존재이며 내가 이 탁록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신적 존재였다. 또한 유망은 거신족의 원로 격 전사였기에 그 어떠한 전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과거 나는 명계에서 흑웅이 빙의한 채로 유망과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건달파 왈 유망이 얼마 전부터 이따금씩 탁록촌을 방문해서 백웅이 귀환하면 이 호숫가로 와 달라는 얘기를 했다기에 나는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망은 내 말에 술을 한 번 더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잠시 호숫가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새 까먹었나? 반대다.”

“네?”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오라고 한 거다. 네가 하도 안 오니까 말야.”

“무슨…….”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너와 내가 명계에서 싸웠을 때, 네가 이긴다면 산명(山鳴)이 뭔지 알려주기로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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