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2권 03화
나는 옆에 있던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현실세계로 온 거 같긴 했지만, 왠지 명계로 오기 전에 있었던 곳과는 꽤 다른 풍경이었다. 광활한 수림(樹林)이 펼쳐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세부적인 지형이 다른 걸 알 수 있었다. 그러자 흑웅이 대답했다.
[천공의 피라미드에서 수백 리가 떨어진 남부요.]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왜 들어갈 때의 위치로 나오지 않은 거냐?”
[고대신들의 결계에 걸려서 저절로 차원의 좌표가 튕겨 나온게 아닌가 싶소. 달리 말하면 여기는 고대신들의 결계 바깥쪽인 셈이지.]
“그렇군…….”
어찌 되었든 아직은 남미대륙 내라는 소리였다.
‘그럼 복희와는 떨어진 건가…….’
복희는 피라미드로 진입하는 나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었으니 아직도 피라미드 근처, 마야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다시 복희를 만나러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움직이려 했지만, 순간 멈칫했다.
“…….”
나는 힐끔 옆에 있던 동방삭을 보며 말했다.
“동방삭. 날 따라와라.”
“엉?”
“어차피 내게 죽음을 회피하는 기술을 가르쳐 줘야 할 텐데 겸사겸사 앞으로 나와 함께 다니자. 네게는 나쁠 거 없는 제안 아니냐?”
“흠…….”
동방삭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네 동료가 되어달라는 말이냐?”
“그래.”
“네 실력을 보면 딱히 나 같은 놈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나를 동료로 받으려는 거지?”
“필요해. 세상은 전투력이 전부가 아니니까.”
“…….”
“거절한다면야 그냥 기술만 배우고 나서 보내줄 것을 약속하겠다.”
내 말에 동방삭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뭐, 딱히 갈 데도 없었던 참이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 한동안 동료가 되어주지.”
“다행이군.”
나는 동방삭을 동료로 영입한 후 옆에 있던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냐?”
[주인의 말씀은…… 전륜성왕과의 의뢰도 완료된 지금 당장 눈앞의 목표가 확실치 않으니 그 이정표를 내게 듣기를 원한다는 말이오?]
“바로 그거야.”
흑웅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 이제는 유소와 소녀를 찾을 때요. 소녀는 천하에서 가장 중대한 폭풍의 핵이니 찾아 가보지 않을 수가 없고, 유소 또한 무슨 꿍꿍이로 사라진 건지 알아내야만 하오. 허나 유소는 그 행적이 묘연하며 소녀의 행적은 서왕모의 근처라고 확정이 되었으니, 당장 찾아가기에는 소녀가 우선일 것이오.]
“그런가.”
[주인. 어떻게 할 생각이오?]
흑웅의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건 좀 있다 얘기하자고. 우선 복희가 있는 곳으로 가보자.”
[알겠소.]
우웅!
흑웅이 차원문을 열자 우리는 다시금 피라미드가 있는 마야 근처로 갔다. 아까 처음에 도달했던 장소에 오자 역시나 복희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람쥐 한 마리를 손바닥에 올리고 귀엽다는 듯 머리를 긁어주고 있던 복희가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왔군.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복희에게 대충 오시리스를 만나고 전륜성왕을 만나서 동방삭의 건을 담판을 지은 이야기를 했다. 다만 전륜성왕과 따로 만나서 했던 이야기는 그에게 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복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헌데 전륜성왕에게 유소의 행적을 물어보기로 했었는데 왜 물어보지 않았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통보한답시고 속을 긁었는데 그런 상대한테 어떻게 넉살 좋게 유소가 어디 갔냐고 물어봅니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아쉽군.”
“그런데 복희 님도 저한테 숨기는 게 있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소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빤히 복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천암비서의 세계로 들어갔다 나왔더니 인간세상의 시간이 36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리고 복희 님은 제가 들어가기 전에 서왕모의 궁에 있는 소녀의 행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겠다 하셨죠. 저는 복희 님이 36년 동안 친남매인 여와를 상대로 아무것도 못 알아낼 정도로 무능한 존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
“뭔가 소녀에 대해 따로 알아내신 게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제게 말해주십시오.”
내가 복희를 의심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다른 존재들이 복희를 의심하라고 해서 의심한 게 아니라 이 세계에 복귀하자마자 들었던 의문이기 때문이다.
‘서왕모의 궁에 소녀가 있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여와가 소녀를 데리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야. 서왕모는 여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화신이니까.’
그리고 여와와 복희는 종말의 시대까지도 황제에 대항하여 끝까지 서로를 도왔던 돈독한 친남매였다. 그토록 절친한 관계라는 걸 생각하면 36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에 복희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의문을 품었던 36년 전 바로 그 시점에 웬만한 걸 다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내 질문에 복희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네. 단지 지금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소녀의 일이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을 뿐.”
“소녀에 대해 뭘 알고 있으십니까?”
“자네 말대로 나는 36년 전에 이미 웬만한 조사를 끝마쳤네. 직접 여와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했지. 허나 자네가 없이는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아서 자네가 귀환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네.”
그렇게 운을 띄운 복희가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여와가 적대 진영이라 할 수 있는 황제의 수하들까지 화신 서왕모가 거하는 궁에 들이는 상황이 이상한 거지. 자네는 왜 그리되었다고 생각하나?”
“흠, 그러고 보니…….”
그건 확실히 이상했다. 저번에도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소녀라는 존재와 일면식도 없고 난데없이 과거에 뚝 떨어져서 경황도 없었기에 따질 생각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복희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엿듣고 있잖아? 나머지 얘기는 천계로 돌아가서 하지.”
후웅
복희가 부채를 강하게 휘두르자 일진광풍이 일어나더니 우리 일행을 감쌌다. 그리고 바람에 휩싸여서 공간이동을 하기 직전,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 쌍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의 주인이 신언(神言)으로 내게 말을 거는 게 느껴졌다.
[나는 태양신 라…… 우리를 다시 찾아오라…… 전생자…….]
파앗!
나는 이윽고 복희의 술법으로 천계에 와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후, 젠장.”
나한테 관심을 안 가지는 신이 없군!
앞으로도 일이 복잡해질 거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자 복희가 말했다.
“보나마나 멤피스의 지배자가 그대에게 말을 걸었나 보군.”
“귀신같군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으셨습니까?”
“그것까진 듣지 못했네. 허나 그대를 영입하려 했다는 건 뻔하지.”
“…….”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와가 황제의 부하들을 서왕모의 궁에 들인 이유는 단 하나야. 지금 여와는 황제와 소녀의 거취를 놓고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
나는 뜻밖의 말에 약간 놀랐다. 그러고는 황당해서 말했다.
“기 싸움이라고요?”
“그래. 본디 소녀는 신농의 품인 탁록을 떠나서 천하를 헤매다가 황제에게 납치되었다. 그런데 그 납치장면을 보았던 게 바로 서왕모였지.”
“으음!”
“서왕모는 여와이니 당연히 소녀만 한 강대한 능력자가 황제의 휘하에 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그래서 서왕모의 모습으로 만신전에 잠입하여 소녀를 도로 물질계에 데려온 거지. 그러자 황제의 부하들이 떼로 몰려와서 소녀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했고, 여와는 결코 내놓을 수 없다고 그들과 맞서고 있는 중이다.”
그런 거였나.
나는 전후사정을 듣자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리 황제의 위세가 대단하더라도 여와 또한 천하를 주름잡는 강력한 고대신입니다. 기백천사 같은 게 몰려와도 물리칠 수 있을 텐데 대치상태인 이유가 있습니까?”
“그걸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군. 지금 서왕모의 궁에서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황제의 부하는 바로 전욱(顓頊)과 소호(少昊)야.”
“……?!”
뭐, 뭐라고?!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말했다.
“오제(五帝) 중 두 명이 와서 여와와 대치 중이란 말입니까?”
“그래. 아무리 여와라도 그들과 정면으로 싸우면 피해가 막심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와가 바로 나와 신농을 끌어들인다면 천하를 뒤엎는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니 여와는 여태껏 인내하며 대치만 하고 있었던 거지.”
“으음!”
그 말인즉슨 내가 소녀를 구출하려고 서왕모의 궁으로 간다면 곧장 전욱과 소호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는 건가?
문득 내 머릿속에 얼마 전 신농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가 우리 거신족의 전사장(戰士將)이 되어주게.]
[본제는 그동안 백웅 그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가 도착했으니 조만간 황제의 수중에 있는 소녀(素女)를 탈환하려는 작전을 시행할 것이다.]
[복희는 소녀 탈환전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거신족의 단독작전이다.]
그 당시에는 신농이 왜 이렇게 과격하게 나서나 의문이었지만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삼황인 여와의 코앞에서 오제가 두 명이나 찾아와서 무력시위를 하며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칫하다가는 소녀마저 빼앗길 수 있는 상황!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 신농의 입장에서는 내가 귀환하자마자 나와 힘을 합쳐서 당장에라도 전쟁을 해서 오제를 소탕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복희 님은 어째서 신농의 뜻대로 황제세력과의 전면전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리고 또 하나…… 여와가 소녀를 보호하고 있는데 어째서 신농은 소녀가 황제의 수중에 있다는 표현을 썼던 겁니까?”
그러자 복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그게 복잡한 거지.”
“……?”
“소녀의 육신은 서왕모의 곁에 있으나 사실 소녀는 이미 황제를 부활시킬 때 한 번 만신전에 갔었어. 여와가 그런 소녀를 구출했으나 소녀의 정신이 만신전에 귀속되어 있기에 소녀는 황제의 세력을 상대로 자기가 지닌 [무한]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
“……!!”
“그렇기에 신농이 원하는 건 소녀의 만신전 귀속을 풀기 위하여 아예 황제의 만신전까지 쳐들어가서 황제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 것. 황제에게 소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아붙이려는 것일세. 그래서 거신족의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서 총력전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나는 복희의 말을 듣다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그 말은…… 사실 신농은 서왕모의 궁전에 있는 소녀를 구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만신전에 쳐들어가서 황제와 싸우려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신농의 의견에 반대한 것일세. 지금은 그런 총력전을 벌일 때가 아니니까.”
“…….”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제, 젠장…… 만일 신농이 전사장의 자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상황도 모르고 오제와 미친 듯이 싸우다가 부활한 황제까지 단번에 생사결을 벌이게 되는 상황을 맞이했으리라는 게 아닌가? 소녀의 구출로 끝나는 게 아니라 황제를 타도하는 결론까지 간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경우였기에 나는 신농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오싹해하고 있을 때 복희가 나직이 말했다.
“신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녀를 수중에 넣으려고 집착하고 있네. 이대로라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신농 혼자서 거신족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황제와 전쟁을 벌이겠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황제와 싸우면 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복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신이 가득하군. 설마 자네는 전생자로서 이런 전투의 결과도 본 적이 있는 건가?”
“……네.”
나는 사실 외우주의 [꿈]에서 비슷한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삼황이 몰려가서 황제와 싸웠지만 황제 측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고 도리어 삼황 쪽이 크게 밀렸다. 그러다가 복희와 여와가 각성하여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황제가 비장의 한 수인 [기어오는 혼돈]을 소환함으로써 떼 몰살을 당했던 것이다.
지금 상황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농이 그냥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결국 황제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게 분명했다.
복희는 정자의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백웅.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네.”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야. 내가 나서봤자 적대진영의 한 축일 뿐이니 무슨 수를 써도 전면전을 막기가 힘들어. 그렇다고 내가 신농을 때려눕힐 수도 없는 게 아닌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혼돈의 신과 질서의 고대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존재가 필요하네.”
“…….”
“그게 바로 자네야.”
나는 복희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전륜성왕 또한 중립입니다. 그를 내세워서 화해를 시도하는 건 안 됩니까?”
“안 돼. 얼마 전 전륜성왕과 오제가 크게 다투었지 않은가? 전륜성왕이 중립이긴 하지만 두 세력 모두에게 미움받는 중립이기에 그가 나서면 더 상황이 악화 될 수가 있어. 완전히 새로운 얼굴이 끼어들어야 그나마 협상을 할 길이 열릴 걸세.”
“저를 과대평가하시는군요.”
“과대평가? 후후, 그럴 리가.”
복희는 껄껄 웃다가 부채를 촤륵 접어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은 탁록촌으로 되돌아가게. 신농은 대략 일 년 후에 전면전을 시작하겠다 했으니 그 전에만 자네의 의지를 내게 말해주게나.”
후웅!
다음 순간 나는 복희의 신술으로 일행과 함께 탁록촌에 와 있었다. 그러자 동방삭이 옆에 있다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뭔 알아먹을 수도 없는 얘기만 잔뜩…… 오늘 하루 동안 엄청나게 싸돌아다니는군.”
“…….”
“이봐!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고 있는 거야?”
동방삭이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방삭. 당장 죽음을 회피하는 기술을 전수해 줘.”
“알았으니까 밥이나 줘. 배고파 뒤지겠네.”
따악
나는 손가락을 마주쳐서 동방삭의 밥을 대충 창조했다. 그리고 사람 팔뚝만 한 크기의 거대한 닭다리를 받아든 동방삭이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너 나한테 불만 있지? 불만 있으면 말로 해라…….”
“안 먹을 거냐?”
“에이 씨부랄.”
우걱우걱
동방삭이 거대한 닭다리를 열심히 먹고 있을 때 나는 옆에 있던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넌 어떻게 생각하냐? 복희의 말대로 내가 신농이 전쟁을 하려는 걸 막아야 할까.”
[…….]
흑웅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한의 능력을 지닌 소녀의 거취는 2개의 세력 모두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오. 복희는 싸울 때가 아니라고 발을 빼긴 했지만 사실 그로서도 정면충돌 외에는 이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거요. 이 상황에서 주인이 중재자로 나서봤자 그저 이용만 당할 뿐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소.]
“음…… 역시 그렇냐.”
[그런 거요. 소녀의 존재는 미래의 세계로 비유하자면 핵무기와 같은 것. 한순간에 모든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대칭 전력은 결코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오.]
그렇게 말한 흑웅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주인. 너무 위험한 상황인데 그냥 발을 빼는 게 어떻소? 복희가 엄살을 피고 있지만 사실 그 정도 되는 자라면 어떻게든 해결법이 있을 거요. 주인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는 어디에도 없소.]
“…….”
나는 흑웅의 말에 고민했다.
‘흑웅의 말이 맞아. 하지만…….’
어째서 이 판은 내가 등장해야만 굴러가게끔 되어 있는 걸까?
내가 이 판에서 발을 빼면 모든 게 망가지고 즉시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폭풍의 눈이 되어 버린 소녀라는 존재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나는 좀 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지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삼황과 오제, 두 개의 세력은 결코 서로가 소녀를 양보할 수 없다.
그 전제에서 어떻게든 결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
어라…… 꼭 저 전제여야 하는 건가?
전제를 조금 다르게 해도 될 것 같은데…….
“……!!”
순간 나는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에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답을 찾아냈다!”
[정말이오? 대체 어떤 답을…….]
나는 흑웅의 반문에 씩 웃으며 말했다.
“합종연횡(合縱連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