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3권 02화
균형이 사라지면 절연사막이 된다고?
나는 그 말에 다시 한번 이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체 모를 괴이한 혼돈이 마치 부정형(否定形)의 뱀 머리처럼 굼실거리며, 알 수 없는 흉흉한 기세가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내가 다른 곳에서 느껴보았던 것과는 뭔가가 달랐다.
‘이건 실재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온갖 흉흉한 혼돈과 괴이를 겪어 보았지만, 그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 그것은 이 절연사막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은 아무런 목적성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無機質)적인 성격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마치 붕 뜬 구름과도 같은 존재들이 그저 최소한의 악의(惡意)만을 남긴 채 흩어져 있는 유해(遺骸)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인지 이 어둠의 사막에서 절망적인 사악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죽음’ 그 자체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륜성왕에게 말했다.
“[균형]이 사라지면 이 세계가 절연사막이 되어서 [계시]가 찾아오기 전에 멸망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성왕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그럼 [균형]이 사라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전륜성왕이 차분히 대답했다.
“백웅이여. 이 세계는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우주를 주름잡는 강력한 사신(邪神)들이 부리는 것은 하나같이 혼돈의 권능이며 또한 온갖 하위속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바로 혼돈입니다.”
내가 자신 있게 대꾸하자 전륜성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허나 만일 순수한 혼돈만 가득하다면 그 어떠한 존재도 형성될 수가 없다. 심지어 신(神)조차도 진정으로 순수한 혼돈이라고는 할 수 없지.”
“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잠시 혼란스러워하자 전륜성왕의 말이 이어졌다.
“혼돈의 대극(對極)이 바로 [질서]. 그 질서의 힘은 비록 겉으로는 미약해 보이나 혼돈에게 뼈대를 부여하고 세계의 근원소(根元素)를 창조하여 존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우주의 초창기에는 도리어 혼돈보다 질서의 기운이 강력했으니, 반고 또한 그 당시에는 진정한 신중의 신으로 불릴 만했다.”
반고!
나는 창조신 반고의 이야기가 나오자 흠칫했고, 전륜성왕은 그런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러나 혼돈의 악의가 반고를 침범하여 질서의 쐐기인 그를 봉인하였으매…… 그 후부터는 혼돈의 신들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혼돈의 신들이 날뛰는 것을 경계하여 고대신이라 불리는 자들이 나섰는데, 이들은 혼돈의 신과 어떤 점이 다르다 생각하는가?”
“으음…… 질서의 권능을 주로 사용하는 겁니까?”
“전혀. 도리어 혼돈의 신보다 혼돈의 기운을 잘 사용하는 고대신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복희 아닌가?”
“……”
그러게……?
뭐가 다른 거지?
나는 전륜성왕의 지금 이야기가 내가 그동안 궁금해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던 부분을 찌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고는 말했다.
“고대신과 [옛 지배자]의 본질적인 차이가 뭔지 아시는 겁니까?”
“그렇다. 그들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그들의 영혼과 뼈대를 이루고 있는 [질서]의 밀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옛 지배자]들은 좀 더 혼돈에 가까운 신체(神體)를 갖고 있으며 고대신들은 우주의 법칙과 순리가 새겨진 신체를 갖고 있는데, 몸의 차이가 바로 성향의 차이를 만들어내었다.”
“음…… 그 말은…….”
“그들은 사실 거의 같은 존재다. 인간의 표현으로는 사촌이나 친척…… 혹은 배다른 혈육이나 마찬가지인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일족들이다. 단지 혼돈과 질서의 배합이 조금 차이 날 뿐.”
그런 거였나…….
이제야 [옛 지배자]와 고대신의 차이를 명확히 알고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전륜성왕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의 우주는 혼돈이 6이면 질서가 4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상태는 한쪽에 편중되어 있지만, 꽤 균형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헌데 만일에 한쪽 진영이 크게 승리하여 9대 1 이상으로 편중된 균형이 생겨나면 어찌 된다고 생각하는가?”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언뜻 떠오르는 게 있어서 외쳤다.
“절연사막이라는 게 발생하는 겁니까!”
“그렇다. 바로 그대가 서 있는 이런 처참한 것이 우주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 절연사막이 생겨 버리면 결코 없앨 수가 없게 되어 있지.”
전륜성왕은 문득 나를 향해 손을 뻗더니 말했다.
“어디 절연사막의 맛 좀 보겠는가?”
뭐?
투확!!
다음 순간 나는 뜬금없이 절연사막의 유사(流沙) 내부로 처박혀 있었다. 전륜성왕이 뭔가 힘을 발휘한 것 같았는데 영문도 모르고 당해 버린 것이다! 나는 최소 몇 장 이상 모래사막의 지저로 들어와 버렸다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제…… 젠장!’
전륜성왕이 시공간을 조작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내가 그의 기습을 눈치채지 못한 거지? 신력을 늘 몸에 두르고 있어서 그 어떤 기습에도 대항할 자신이 있었던 나로서는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설령 뇌신지혼 같은 걸 써서 뇌속으로 공격해와도 대응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전륜성왕의 공격에는 반응하지 못한 걸까.
‘뭔가 수수께끼가 있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빠르게 신력을 사용해서 바깥으로 솟구쳐 나가려고 했다.
…….
어? 왜 안 돼?
나는 신력이 전혀 발동되지 않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거의 만능으로 써먹던 힘이었기에 신력이 없어지자 당황스러웠다. 발동되지 않는 걸 넘어서서 내 몸에 있던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알아차린 나는 위기라고 생각했다.
‘크윽! 그럼 어쩔 수 없지!’
뇌신류(雷神流) 강기(罡氣)
멸혼보(滅魂步)!
콰과광!!
나는 그대로 전신에 강대한 내공으로 강기를 두른 후 멸혼보를 전력으로 펼쳐서 유사의 내부를 탈출했다.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모래 덩어리가 터져 나와 허공을 수놓았고, 나는 가볍게 모래 위로 안착할 수 있었다. 나는 앞에 있던 전륜성왕을 노려보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진정하라. 죽일 셈이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진 않았으니.”
“……”
“백문이 불여일견. 한 번 절연사막에 휘말리니 신력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절연사막이 타고난 속성이다.”
전륜성왕의 말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군요.”
“절연사막은 불균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그 영토를 넓히게 되어 있지. 보다시피 신력을 모조리 무효화 하고 소멸시키는 영역이기에 그 어떠한 신도 절연사막의 맹진을 막지 못하고 도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번 기세를 탄 절연사막이 전 우주를 다 메우는 데는 인간의 시간으로 1000년도 걸리지 않는다.”
“……!!”
1000년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기준으로는 매우 긴 시간이었지만 수십억 년을 사는 신들의 기준으로는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막이 넓어지고 강해질수록 이 사막의 지저(地底)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와서 재액(災厄)으로서 탄생한다는 것이지. 종래에는 신들도 회피하지 못하고 그 ‘재액’과 싸워야만 한다.”
“……이 사막에 뭔가가 봉인되어 있었다는 말입니까?”
“봉인…… 그런 표현은 맞지않다. 그저 구제할 길 없는 원념(怨念) 그 자체가 윤회(輪回) 속에서 악의를 지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게 맞겠지.”
“……?”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절연사막이 탄생한 의미였을지도…….”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전륜성왕이 말을 이었다.
“그대의 기억 속에서 절연사막은 출현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삼황의 세력을 전멸시키면서도 그들을 신격으로서 살해하기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봉인, 유폐, 회유, 등용 같은 방법으로 고대신들을 자기 휘하에 굴복시켰지. 아마 황제는 절연사막의 존재를 인과율을 읽는 능력으로 미리 예지하고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왕도(王道)를 걸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을 좀…….”
“예를 들어서 황제가 삼황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그들을 봉인하지 않고 처절한 악의를 쏟아부어 실질적으로 부활하기조차 힘들어지도록 해 버렸으며, 사실상 살해해 버렸다고 치지. 굉장히 힘든 일이긴 하지만 황제 공손헌원쯤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고대신들이 질서]의 축이며 세계의 버팀목 중 하나였기에, 삼황이 한꺼번에 사라진 공백만큼 세계의 저울추는 혼돈의 진영으로 쏠리게 된다. 그리고 쏠려 버린 저울추만큼 절연사막이 등장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
내가 그제서야 전륜성왕의 말을 알아듣고 눈을 부릅뜨자 전륜성왕이 말했다.
“신들의 전쟁이 인간의 전쟁처럼 극단적으로 끝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 간에 최소한의 균형을 지키지 않으면 모두가 멸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거군요…….”
“지금으로서는 절연사막이 우주에 출현할 확률이 존재치 않아. 왜냐하면 본좌가 절연사막을 봉인하여 세상에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만일에 우주의 균형이 사라지게 된다면 절연사막은 반드시 나타나겠지.”
“봉인했다구요? 도대체 이 절연사막을 우주의 어디에 봉인했단 말입니까?”
모든 신력이 통하지 않고 신조차도 소멸당할 확률이 높은 이런 천하의 흉험한 지역을 대체 어디에 봉인할 수 있단 말인가!
“……”
전륜성왕은 내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했다.
“백웅이여. 그대가 선인지 악인지에는 관심 없다. 본좌가 그대를 돕는 이유는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
“허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이 필요하지. 혼돈이든 질서든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대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본좌는 그대가 균형을 지킬 존재라고 보았기에 그대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칠보를 하사한 것이다.”
나는 전륜성왕의 설명에 전후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균형을 수호하여 우주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전생자인 내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
그의 설명은 무척 조리가 있었으며 정당성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남아 있어서 그에게 말했다.
“저한테 칠보를 주지 않고 그냥 본인이 강대한 힘으로 계속 균형을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당신이 약해지면 도리어 더욱 현재의 균형이 위험해질 텐데요.”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뭘 모르고 있단 겁니까?”
“이미 나는 균형을 지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균형을 망가트렸기 때문이지.”
“……?!”
무, 무슨 말이지?!
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내가 언제 균형을 망가트렸다는 겁니까?”
“그대가 복희와 함께 여러 번 돌아다니던 일련의 움직임을 생각해보아라. 복희는 그대에게 신력을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여러 가지 국면에 그대를 효율적으로 써먹었지. 결과적으로 그는 본디 가지지 못했을 힘, 반고의 적자(嫡子)로서의 권능을 지니게 되었다.”
“……!!”
반고의 도끼를 말하는 건가!
전륜성왕의 눈빛이 잠시 음울해졌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지. 그대는 인지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미 현재의 복희는 그대가 알고 있던 말세시대의 허약한 복희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복희를 막지 못한다.”
“……그렇군요. 복희가 강해졌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제게 칠보를 줘서 균형을 도모한다는 건 뭔가 인과관계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아니, 인과관계가 맞다.”
전륜성왕은 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균형을 망가트린 자만이 그 균형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 이 또한 우주의 법칙이기 때문이지.”
“……”
“백웅이여. 인간 동방삭의 거취 따위는 네 맘대로 하여라.”
후웅
서서히 주변의 풍경이 바뀌면서 나와 전륜성왕의 몸이 절연사막에서 현실로 되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전륜성왕은 나 ‘백웅’의 모습에서 빠르게 변신을 하더니 시꺼먼 죽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흑암(黑暗)의 동체(動體)를 드러내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었지만 진정한 죽음의 신이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위압감에 내가 잠시 말을 잊자 전륜성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로써 그대는 본좌와 복희의 의지를 모두 들었구나.]
전륜성왕의 거대한 흑암의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말이 이어졌다.
[중용(中庸)이란…… 어느 한쪽만이 선악을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닌 법…… 그대가 진정으로 칠보의 필요성을 깨닫고 싶다면, 마지막 한 사람의 의지를 듣고 오거라.]
“전륜성왕…….”
[그때는 원하는 대로 기꺼이 목을 내어 주마.]
슈욱!!
다음 순간, 나와 흑웅은 동방삭과 함께 현실 세계로 되돌아와 있었다.
동방삭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듯 눈을 껌벅이고 있다가 내게 외쳤다.
“이봐 백웅!! 그래서 담판은 지어진 거냐?”
나는 멍하니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이제 명계에 쫓기지 않을 거다. 전륜성왕이 네 운명을 내게 맡겼어.”
“하, 이젠 부하로 부려먹겠다는 소리냐?”
“……”
하지만 나는 동방삭의 핀잔 섞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전륜성왕이 말했던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전륜성왕은 알고 있었어.’
기꺼이 목을 내어주겠다는 의미.
그것은 허공록의 사도인 봉황이 내게 맡긴 삼두살해(三頭殺害) - 황제, 복희, 전륜성왕 중 하나의 목을 베어가는 의뢰를 의미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