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2권 19화
누트?
나는 그 말을 듣고 언뜻 생각이 안 나다가 이윽고 기억을 해냈다.
‘아. 그때…….’
처음 누트를 마주쳤던 것은 내가 지남거를 찾으려고 돌아다닐 때 그 물건을 수호하는 신격인 누트를 마주친 것이었다. 그때 누트는 지남거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내게 [달의 수호자]의 몸에 감춰져 있던 신체를 달라면서 거래를 제안했고, 나는 하필 그때 신체인 흑요석을 망량선사에게 공양한 상태였기에 누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에는 이번 생에 외우주로 갔을 때 황제가 만신전의 전력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 시바, 비슈누, 응룡 등과 함께 출현했던 누트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누트는 허망하게 흉신에게 살해당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출현했던 자들 중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여신 누트와 마주쳤던 기억을 되새기며 그녀의 말을 기억해 냈다.
[나는 초고대문명 멤피스를 이끌고 있었지…… 황제가 내 문명을 종말 후에 부활시키는데 협력키로 했다.]
분명 누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누트의 자식인 오시리스가 멤피스와 영계 만신전을 이끄는 걸 보면 누트는 영계 만신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였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설마 앞으로는…….’
멤피스와 영계 만신전이 모종의 이유로 한 번 파멸해 버린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런 멤피스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누트가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굴복하여 수하가 되는 건가?
나는 일련의 과정을 머릿속으로 파악했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내가 누트와 왜 인과율이 있다는 거야? 나랑 별로 마주친 적도 없고 약속한 것도 없는데…….’
사실 나는 누트와 별 인연이 없다. 인연이라 해 봤자 거래제안을 거절했을 뿐이다. 그 후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보았을 뿐인데 이걸 인연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소을촌 서씨조차도 누트보다는 더 인연이 있을 정도였기에 나는 한눈에 오시리스가 나와 누트의 인과율을 보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그보다 당신은 어떻게 인과율이 이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는 것이오?”
“창조자 아툼이 시조(始祖)로서 혼돈 속에서 탄생하였을 때 우리 멤피스의 후손들이 서로에게 이어진 인과율을 확인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혈육이 지니고 있는 인과율에 한해서는 소상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다시 묻겠다. 나의 어머니 누트와 인과율이 이어져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
이 녀석 의심이 많은 성격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대꾸했다.
“지금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인 누트를 직접 대면하면 생각이 날지도.”
“흐음…….”
오시리스는 뒤에 있던 천칭을 힐끔 보더니 약간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바뀌었다.
“참 이상한 일이군. 그만한 이야기를 고하는데도 ‘거짓’은 아니라니…… 자네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져.”
“우선 서로의 용건을 해결합시다. 나머지 얘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잖습니까?”
“옳은 말이군.”
스윽
오시리스가 천천히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따라오게. [태양신의 배꼽]을 줄 터이니.”
위이잉!
다음 순간 오시리스와 내 앞에 허공을 유영하던 은빛 원반들 중 하나가 날아왔다. 그러고는 충분히 사람 여럿이 올라가고도 남을 넓이로 확장되었고, 오시리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측근으로 보이는 개머리 신들과 함께 원반 위에 올라타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슥
위이잉!!
내가 원반 위에 몸을 올리자 나 또한 빠른 속도로 원반을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이 원반에 올라타자 상당히 빠른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관성이나 반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주변의 풍경만 바뀐다고 느낄 뿐 이 원반 위에 누워서 한숨 자도 미동도 느끼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 이거 왠지 십이율주의 본거지에서 비슷한 걸 봤던 것 같은데…….’
묘한 기시감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은빛 원반이 멈췄다. 무수한 피라미드 내부의 벽과 통로를 지나쳐서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듯, 내 앞에 가고 있던 오시리스가 이미 원반에서 내린 게 눈에 보였다. 나 또한 원반에서 내려서자 눈앞에 빛나는 거대한 광석(鑛石)을 쳐다보고 있던 오시리스가 입을 열었다.
“자. 이게 [태양신의 배꼽]이다.”
쿠궁…….
광석의 크기는 무려 육 장이 넘는 것 같았다. 이건 단순히 커다란 바위라는 수준이 아니었고 조그마한 지형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이만큼 거대한 광석이 통짜로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게 제일 먼저 놀라웠고, 그다음으로 내가 놀란 것은 광석이 시커먼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시커먼 빛을 뿜어내는 광석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서 외쳤다.
“……흑요석!!”
틀림없다. 수백 번은 다뤄온 데다가 동영에 가서 직접 광선에서 흑요석 캐기까지 했는데 내가 저걸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흑요석이 눈앞에 있었기에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오시리스에게 말했다.
“이, 이게 [태양신의 배꼽]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나의 이름을 걸고 이것이 바로 [태양신의 배꼽]이다.”
“괜찮다면 이 물건의 유래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태양신의 배꼽]이라는 저 흑요석을 달라고 하면 오시리스가 군말없이 넘겨줄 것 같긴 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덜컥 받아봐야 무의미했다.
내 말에 오시리스는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백웅이여. 본디 우리 멤피스의 영계 만신전이 주로 활동하던 장소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대륙이었다. 허나 이 대륙에 존재하던 인간들이 너무나 강한 염원으로 구원해주기를 호소했던 탓에 우리는 마음이 움직여서 잠시 이곳에 왔노라.”
“네? 인간들이 염원했다는 말은…….”
“이 대륙에 본디 거하고 있던 [옛 지배자]가 너무 사악하고 잔인하여 인간들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전 세계에 있던 신들에게 구원요청을 보낸 것이다. 허나 그 구원요청에 응한 것은 우리 멤피스뿐이었고, 우리는 다 같이 넘어와서 이 대륙을 지배하던 사상최강의 악신(惡神)을 토벌했다.”
오시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양의 마신, 테스카틀리포카를.”
“……!!”
“그자는 나조차도 일대일로 이기기 힘든 무척 강력한 자였지만 우리가 다 같이 힘을 합치니 물리쳐서 봉인할 수 있었다. 허나 테스카틀리포카는 우리의 봉인에 갇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물을 남겼는데 바로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흑요석, [태양신의 배꼽]이다.”
“[태양신의 배꼽]이 테스카틀리포카의 유물이라고요?”
“그렇다. 우리는 이것이 테스카틀리포카가 봉인에서 풀려나려고 쓴 술수라고 짐작하고 파괴하려 했으나, 우리의 힘으로는 이걸 절대로 파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괴할 수 없다고요? 고작 흑요석을…….”
흑요석은 결코 강한 광석이 아니다. 강하기는커녕 인간의 원시적인 힘으로도 쉽게 깨거나 연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거대하다고는 하지만 고작 흑요석 따위를 강대한 멤피스의 고대신들이 파괴할 수 없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자 오시리스가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 흑요석에 특별한 술법을 걸었다. 그건 [조건]이 걸려 있는 술법으로서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순수한 힘으로는 절대 깨지 못하게 되어 있는 식이지. 필멸자 술사도 아니고 상위 신격이 이런 식으로 술법을 걸면 아무리 우리라 해도 해제할 수가 없다.”
“그 술법의 정체도 모르시는 겁니까?”
“그렇다.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던 [옛 지배자]가 쓸 수 있는 술수가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는가? 심심풀이로 1년에 1개씩만 만들어도 1억년이면 1억개가 넘노라. 조건을 모르는 한 본인 이외에는 풀 수가 없지.”
“음…….”
“무언가 흉측한 의도가 담겨 있는 건 분명하지만 파괴할 수도 없는 이상 하는 수 없이 우리가 우리 본거지에 놔두고 물리적 봉인을 하고 있었지. 정작 이 [태양신의 배꼽]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군요.”
나는 오시리스의 상황에서 어째서 아까 세트라는 고대신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강력한 마신인 테스카틀리포카의 봉인이 해제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기껏 열심히 싸워서 물리친 강적이 봉인에서 풀려날 수도 있다 생각할 테니 피라미드에서 잠을 자고 있던 고대신들 입장에서는 외부인에게 섣불리 [태양신의 배꼽]을 넘겨줄 수가 없는 거야.’
나는 전후사정을 이해했지만 그랬기에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오시리스에게 말했다.
“저한테 이 흑요석을 주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이 흑요석의 봉인을 풀어서 테스카틀리포카를 부활시키는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오시리스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닐세. 다 이유가 있어서 그대에게 넘겨주는 것일세.”
“이유라고요?”
“세트는 저걸 타인에게 넘겨주는 게 우리 고대신들에게 흉사(凶事)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야. 나는 줄곧 저걸 누군가가 가져가 주길 기다리고 있었네.”
“……?!”
오시리스는 잠시 나를 그윽한 눈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내가 임시로 영계 만신전을 다스리고 있지만 본디 우리의 수장은 태양신 라일세. 라의 권능은 전 우주를 통틀어 그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지. 힘도 지혜도 나는 라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하지. 허나 태양신 라는 지금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네.”
“어째서입니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 뭐라구요?”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오시리스를 바라보자 그는 훗 하고 웃더니 말했다.
“창조신 아툼이 예지한 진정한 멤피스의 지도자이자 제왕, 태양신 라는 [계시] 직전에 탄생하게 되어있네. 그전까지는 우리 멤피스의 만신(萬神)들에게서 지속적으로 신력과 인과율을 흡수하여 미래의 육신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게 되어있지. 그리하여 최정점에 이른 힘을 얻게 되어 탄생하게 될 태양신 라는 사상최강의 고대신이 되어 [계시]를 압도하게 될 예정이라네.”
“……!!”
“우리는 태양신 라가 탄생할 때까지 그의 요람이 되어 돌보는 역할일 뿐이야. 또한 그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니 태양신을 자처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칠 수밖에 없었지.”
그, 그런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미래에 탄생할 사상최강의 고대신이라니!
나는 태양신 라에 대해서는 꿈에도 몰랐기에 지금 오시리스의 말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말한 대로라면 태양신 라는 흉신이나 황제에 못지않은 우주의 절대강자 중 하나일 게 분명한 것이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오시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신 라의 [정신]은 이미 존재하며 우리를 영도하고 있지. 그리고 태양신 라가 꿈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흑요석을 누군가가 가져가 줘야만 멤피스가 생존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나는 내심 자네의 방문이 필연이라 생각했네.”
“……흑요석을 누군가 가져가 줘야 한다고요? 그 말은 설마…… 이 [태양신의 배꼽]이 멤피스에 파멸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허나 섣불리 버릴 경우에도 그것대로 파멸이 일어나게 되어있었어. 정해진 인과율에 따른 해결책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강력한 신이라도 흉사를 피할 수 없는 법…….”
“……“
“자, 전후사정은 다 설명하였으니 이제 가져가도록 하게. 기꺼이 가져가 주었으면 하네.”
나는 오시리스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뭔가 이상하군요. 방금 말한 것은 만신전의 극비정보일 텐데 오늘 처음 보았을 제게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해줄 일이 절대 아니잖습니까? 제가 다른 이들에게 태양신 라의 정보를 말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오시리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모든 게 태양신 라의 의지일세.”
“으음……!!”
“그는 미래에 우주최강의 육체를 얻어서 탄생할 최강의 신…… 황제 공손헌원 정도는 아니라도 이미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지. 그런 라가 인과율을 읽어 자네를 선택한 셈이라고 보는 것일세.”
“……“
“라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네. [태양신의 배꼽]을 가져갈 자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으니, 그가 우리를 선택할 가능성 또한 열어두게 하라고. 그래서 나는 그대가 우리에게 후의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 것일세.”
“그렇습니까…….”
나는 대꾸하면서도 태양신 라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불완전하지만 인과율을 읽는 능력…… 그리고 수백의 고대신에게 비호받으며 그들의 신력을 흡수하여 성장하는 잠재력…… 어떻게 보더라도 황제나 흉신에 못지않은 절대신이다!’
또한 그자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내가 전생자라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걸로 보였다. 그리고 전생자로서 내가 수많은 신의 세력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미리 짐작하고는 포석을 깔아둔 것이다.
정녕 이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과거에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미래의 세계에서 태양신 라는 절대신의 능력을 갖추어 부활하지 못하였단 말인가.
‘아직 내가 모르는 고대의 비사(秘事)가 있다. 멤피스에 어떤 일이 생겼던 건지 알아내야겠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태양신의 배꼽]을 가져가도록 하지요.”
어찌 되었든 일단은 동방삭과의 내기에서 승리하여 전륜성왕에게서 받은 임무를 진행시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대한 육 장 크기의 흑요석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벅
스윽…….
흑요석에 손을 뻗어서 손바닥을 접촉하는 그 순간이었다.
[내 영혼을 의탁할 곳은 백웅일지언저 [기어오는 혼돈] 그대가 아니다! ]
번쩍
갑자기 번개가 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시공간이 멈춘 것 같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 속에서 불호령 같은 한마디가 떨어져 내리며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목소리는…… 어디선가……?
내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다.
치리리링 - !!
갑자기 내 내부에서 사대신기의 원(圓)이 눈앞의 흑요석과 감응을 하는 게 느껴졌다. 특히 뇌신기 바즈라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마치 당장에라도 터져 나오려고 하는 뇌력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지기 직전처럼 느껴졌기에 나는 황급히 [태양신의 배꼽]에서 손을 뗐다.
“으윽!”
뭐야?! 사대신기는 또 왜 여기에 반응하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내가 당황스러워하던 그때였다.
“제기랄. 한발 늦었군!!”
장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성난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동방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