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2권 11화
아르쥬나!!
나는 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28번째 삶에서 비슈누의 화신으로서 나를 막아서다가 나중에는 유럽에서 대웅제국을 상대로 싸운 놈!!’
비슈누는 암중에서 유럽의 열국들을 조종하며 대웅제국의 서진(西進)을 막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전투용 화신인 저 아르쥬나를 내보내어 내 전생동료들과 싸운 것이다. 그 전투 당시에 큰 희생을 무릅쓰고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었던 놈이었고 분명히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대자의 반열에 이르러 있는 놈이었다.
나는 과거의 일이 생각나자 아르쥬나에게 적대감이 약간 치솟아 올랐다. 저놈 때문에 위지혼이 죽고 무수한 동료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빠르게 그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건 28번째 생의 일. 지금 저놈은 그 일과 관련이 없다. 게다가 여긴 큰 굴레의 과거다…….’
잠시 감정을 통솔해서 냉정해진 후 나는 태연하게 아르쥬나에게 대꾸했다.
“비슈누의 아바타라인 아르쥬나인가? 저 멀리에서 격전이 이어지고 있는데 너만 한 투신이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는 건지 모르겠군.”
“걱정 말아라. 오늘의 전투도 거의 승기를 잡았고 남은 건 적을 몰아내는 것뿐이니까.”
끼기긱
아르쥬나가 활을 더욱 강하게 당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브라흐마의 권능을 쓰는 네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네놈은 누구냐?”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알려주지 못할 이유는?”
나는 아르쥬나의 반문에 히죽 웃었다.
“투신 아르쥬나가 생각보다 약해빠진 놈인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지.”
“…….”
내가 도발하자 아르쥬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도리어 껄껄 웃었다.
“흐하하…… 나를 도발한다고? 좋다. 내 힘을 보고 싶다면 그리 해 주마!!”
투웅 - !!
다음 순간, 아르쥬나의 활시위가 튕기면서 거대한 빛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화살은 내가 봐왔던 초월적인 공격들처럼 빛의 속도까지는 아니었고 음속 정도 되는 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나는 화살 끝에 실려 있는 위력을 감지하고는 흠칫했다.
‘……!! 맞으면 끝장이다!’
이건 정면으로 막으면 안 돼!!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뇌신지혼(雷神之魂)!
나는 그 사실을 감지하고는 재빨리 뇌신지혼을 전개해서 번개의 속도로 피했는데, 다음 순간 내가 떠나간 근두운이 빛의 화살에 적중되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광!!
근두운은 빛의 화살을 맞자마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내심 놀랐다.
‘저 근두운이 터질 수도 있는 거였나……?!’
제천대성이 해신과 싸울 때도 저 근두운이 터지거나 손상을 입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저 빛의 화살은 심상치 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아르쥬나가 삼안(三眼)으로 내가 움직인 궤적을 바로 쫓더니 다시 내게로 한 발을 날렸다.
퓨웅
‘곡사(曲射)인가.’
길게 호선을 그리며 비교적 느리게 날아오는 빛의 화살을 본 나는 이 공격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다고 생각했다. 아까는 그래도 음속보다 빨랐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더 느려진 것이다. 인간의 초절정 무인이라 하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잠시 후 오랜 실전경험에서 오는 감각이 내게 위험을 경고하는 것을 느꼈다.
‘……아냐.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느림 속에 필살(必殺)의 위력을 담고 있는 거다!’
얕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나는 옆에 있던 흑웅에게 말했다.
“흑웅.”
[말씀하시오.]
“저 화살을 견제해라. 내가 본체를 치마.”
내가 직접 저 화살을 상대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체를 쳐야 끝나는 싸움이다. 차라리 흑웅에게 조력을 부탁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소!]
후웅
다음 순간 흑웅이 성라회천을 발동하면서 거대한 흑암의 갑옷을 몸에 둘렀다. 그러고는 마치 빛의 화살을 유도하듯 어둠의 방어술수를 발휘하며 주의를 끌었고, 나는 그 틈에 다시 뇌신지혼을 발동시키며 전방에 있던 아르쥬나에게 달려들었다.
꽈과광!!
뇌속(雷速)으로 달려들어 한 방 치자마자 손끝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타격감!! 나는 이 일격에 아르쥬나의 몸통을 몇 번이나 가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얻어맞은 아르쥬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뻗어서 내 어깨를 콱 붙잡았다.
우드득
[엉?]
뇌신지혼이라서 번개의 형상일 텐데 번개를 어떻게 잡은 거냐?!
내가 깜짝 놀랄 때 아르쥬나가 그대로 외쳤다.
“유지하노라!!”
꽈득……!!
그 순간 나는 아르쥬나가 내 어깨를 마치 솜사탕처럼 뜯어가 버렸음을 알아챘다. 말 그대로 번개로 된 뇌인(雷人)인 내 몸을 뜯어가 버린 것이다!
‘뇌신지혼의 속도도 삼안 때문에 전혀 안 통하는 데다 뇌속성을 무시하냐?!’
인간이라면 절대지경이고 뭐고 이런 식으로는 대응 못 한다! 아니, 투선 조차도 이렇게 대응할 수는 없다!
설마 뇌신지혼을 이런 식으로 공략하는 놈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아르쥬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나를 베어 버리려 했다. 그 검속 조차도 방금 봤던 마왕 락샤사를 몇 배나 넘어서는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까앙!
나는 아르쥬나의 검격에 맞서서 검으로 대응했는데 그 순간 이것도 골치 아프다는 걸 느꼈다.
‘이 새끼…… 거대한 신력을 그대로 검에 불어넣었잖아!!’
이러니까 절대지경 고수들이 아르쥬나와 맞서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지!
검을 맞대기만 해도 기절하거나 죽게 되는데 대체 무슨 수로 칼을 맞대겠냐고!
하지만 나는 아르쥬나의 신력에 겁을 먹기에는 그동안 내가 한 수련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르쥬나의 신력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내 몸을 파괴하려는 그 순간, 도리어 신력을 강하게 격발시키면서 검을 통해서 아르쥬나의 몸에 신력을 침투시켰다.
“흐아압!!”
쿠구구
잠시 후 마치 어른의 힘으로 아이와 힘겨루기를 하듯 아르쥬나의 신력이 썰물처럼 되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허, 허억!!”
부르르
아르쥬나는 그 순간 몸을 학질 걸린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입에서 울컥하고 피를 토해내었다. 그는 자신이 각혈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거리다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대체…… 누구냐!! 인간이 아니구나!”
타앙
아르쥬나가 급히 검을 떼 내어 뒤로 물러서면서 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신술(神術)
아그네야스트라!!
무엇이든 태워 버리는 염신의 가호가 나를 공격했지만 나는 그대로 화신지혼의 기운을 몸에 둘러서 흡수해 버렸다. 같은 염속성인 데다가 왠지 화신지혼이 좀 더 상위의 속성인지 손쉽게 흡수하는 게 느껴졌다.
“장난하냐! 겨우 이깟 걸로?”
나는 놈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뇌신류의 정권(正拳)으로 놈의 명치를 때렸다. 뇌신지혼에 비하면 굼벵이 같은 속도였지만 방금 놈이 했던 것처럼 신력을 가득 담았기 때문일까? 아르쥬나는 피하지 못하고 급히 한쪽 팔을 방패처럼 내세워서 막았다.
쿠콰콰쾅!!
다음 순간 아르쥬나의 몸이 지상으로 내려꽂히며 대지에 거대한 파괴음이 터져 나왔다. 아르쥬나가 지하까지 내려꽂히면서 놈의 형상이 육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반응에 잠시동안 지진이 일어나며 대륙이 진동했다.
쿠구구…….
‘좋아. 힘은 내가 더 쎈 게 확실하군!’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흑웅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주군! 빨리 놈을 마무리 지어주시오.]
“어?”
[이 화살…… 살아 있는 것 같소. 그리고 위험하오!]
내가 힐끔 흑웅 쪽의 상태를 보자 그리 좋지 않았다. 빛의 화살은 어느새 여섯 개로 분열한 채 천천히 흑웅 근처를 맴돌고 있었고 흑웅은 거대한 음신지력으로 방패를 여러 개 만든 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흑웅의 방패는 빛의 화살에 스치기만 해도 바로 파캉 하는 소리를 내며 깨지는 듯했다.
파캉!!
“……!!”
저 화살은 뭐지?! 흑웅의 신력으로 만든 방패라면 거신족 전사라도 쉽게 깰 수 없을 건데 스치는 것만으로……?!
“알았다. 조금만 버텨라!”
아마 저 화살이야말로 크리슈나 최강의 공격일 거라고 직감한 나는 눈을 반개하며 기술을 시전했다.
트리무르티.
대암창(大暗槍) 창조!!
쿠구구구
창조의 권능으로 내 신력을 한 곳에 집약시킨 한 자루의 암창을 만들어내었다. 예전에 썼던 초거대암창처럼 무식하게 크지는 않았지만 크기를 줄인 만큼 신력이 압축되어서 더 강한 위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암창을 창조해낸 후 한 손에 들고는 그대로 뇌신류의 투창술(投槍術)을 써서 아르쥬나에게 날렸다.
콰과광!!
[크아아아!]
[으악!]
[커억!!]
그 순간 뜻밖의 비명 소리들이 밑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비명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후두둑…….
그리고 땅에서는 피로 떡칠이 된 아르쥬나의 모습이 보였고 그 주변에는 참혹하게 당해서 흩어져 버린 웬 영체(靈體)들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나타난 건지는 몰라도 아르쥬나를 지원하러 온 놈들인 듯싶었다. 아르쥬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노오옴!! 감히 내 아바타라를 다섯 명이나 없애다니!!”
“……!!”
엉? 그 말은 설마…….
’
나는 이윽고 아르쥬나의 말뜻을 알아채 버렸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하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방금 내가 던진 대암창을 비슈누의 아바타라 6명이 같이 막으려다가 5명은 다 뒤졌다 그 소리구나. 하하하!”
몰린다 싶으니 동료인 아바타라들을 이곳에 소환했는데 내가 날린 공격에 죄다 비명횡사해 버리고 아르쥬나는 중상을 입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이놈!!”
쿠구구
아르쥬나는 진심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는 듯 자신의 활을 들어 올려서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흑웅과 미친 듯이 싸우고 있던 뒤편의 빛의 화살이 소멸되었고 다시 그 활에 빛이 맺히는 게 보였다. 아르쥬나는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외쳤다.
“이제 뒷감당 따위는 생각지 않겠다!! 나도 무사하지 못하겠지만 넌 죽는다!!”
“……?!”
뭐?
슈슉
그때 내 곁에 배후령처럼 복귀한 흑웅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 저자는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오. 저 화살에는 그럴만한 힘이 있소.]
“진짜냐?”
[아마 저게 아르쥬나이자 비슈누 최강의 무기인 간디바…… 저 간디바에 저자의 모든 신력을 불어넣는다면 이 행성 따위는 가볍게 연소될 것이오. 그만한 힘을 일 점에 집중한다면 그 파괴력은…….]
“……!!”
내가 놀라고 있자 밑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아르쥬나가 말했다
“브라흐마의 권능을 쓰는 네놈은 너무 위험한 존재다!! 이 투신의 힘을 오랫동안 봉인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죽이고 말리라!!”
키기기깅……!!
점차 간디바에 맺힌 빛이 강렬해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힘이 강해지면서 신력이 극도로 증폭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고, 이윽고 화살에 담겨 있는 잠재력이 수백 배로 위력을 높였음을 깨달았다. 흑웅의 예상대로 저 간디바야 말로 천축 최강의 무기가 틀림없는 것이다.
나는 순간 황당해서 흑웅에게 말했다.
“야. 저 새끼 대웅제국 동료들과 싸울 때는 저거 왜 안 썼던 거야?”
이제 와서 저런 최강무기를 아르쥬나에게서 본다니 이상하잖아!
28회차에서 그렇게 박 터지게 싸우면서도 한 번도 안 꺼냈으면서!
내가 황당해하자 흑웅이 조심스레 말했다.
[인간들과 싸울 때 간디바를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소…… 실제로 간디바 없이도 대부분 다 힘들이지 않고 쓰러뜨렸잖소.]
“근데 나하고 싸울 때는 왜 저런 거 꺼내냐고.”
[인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적이니까 그런 거 아니겠소.]
“끙…….”
침음성을 흘리는 동안 흑웅의 말이 이어졌다.
[주인. 저 공격은 시공간을 무시하는 일격일 것이오. 그리고 인과율의 반발을 무시하고 세계를 한 번은 멸망시키기에 충분하군. 어떻게 하시겠소?]
“…….”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왠지 어떻게든 상대는 할 수 있을 거 같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지금의 이 싸움도 28회차의 동료들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피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은 주객이 전도되는 셈이다. 나는 냉정하게 생각한 후 마음을 정한 채 아르쥬나에게 외쳤다.
“아르쥬나!! 말할 게 있다!”
“뭐냐!!”
이어진 내 말에 아르쥬나는 당장에라도 간디바를 쏠 태세였다가 멍해져서 비틀거리는 듯했다.
“난 사실 브라흐마의 제자다! 너희를 도와주러 왔으니까 싸움은 그만하자!”
기술을 배웠으니까 제자 맞겠지 뭐!
“……?!”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으니까 간디바 치워!!”
내 외침에 아르쥬나는 믿기지 않는 듯 간디바의 활시위를 천천히 줄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 정말이냐? 네가 브라흐마의 제자라고?”
타닷
나는 땅에 착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브라흐마는 지금 브라흐마스트라를 시전하여 패옥(覇玉)의 방에서 나오지 않은지가 오래되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의 제자라는 소리인가?”
패옥의 방?
그건 또 뭐야?
나는 브라흐마의 근황에 어리둥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는 말했다.
“트리무르티는 신기(神技), 즉 기술이잖아. 브라흐마가 계승지에 갔을 때 나한테 가르쳐 줬다.”
“……계승지!! 너는 계승지에 갔었다는 소리인가?”
“맞아! 그리고 브라흐마한테 트리무르티를 배우는 대신 너희들을 도와주기로 했었다.”
“…….”
아르쥬나는 오랫동안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몸에서 새하얀 빛을 내면서 변신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휘광과 함께 투신 아르쥬나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비슈누의 아바타라, 크리슈나의 모습이 등장했다. 익숙한 크리슈나의 모습이 나타나자 나는 새삼 비슈누와 마주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고 크리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브라흐마를 만나러 갈 수 있겠는가?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걸 검증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은데. 나는 바빠서 다시 중원으로 가봐야 해.”
“무슨 소리냐? 도와준다는 게 지금 우리가 [옛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걸 도와준다는 얘기가 아닌가?”
“내가 바본 줄 아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브라흐마가 브라흐마스트라를 써서 계승지로 간 이유가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 거 아니겠냐고. 너희 셋이 힘을 합쳐도 이기기 힘든 싸움에 나 하나 끼어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다가 브라흐마의 뜻을 내 방식대로 따를 거다.”
“…….”
“브라흐마를 돕기로 했지만, 너희한테 그리 좋은 감정은 없어. 나를 조종하려 들지 마라.”
“으음…….”
내 말에 크리슈나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그대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도 그대를 도와주겠다.”
“무슨 뜻이지?”
크리슈나는 정중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일방적으로 검증을 요구하고 조력해주길 원하는 건 동급의 상대에게 걸맞은 예우가 아닌 듯싶군. 동등한 자격으로써 손을 잡아서 그대에게 충분한 보수를 주겠다는 이야기다. 이것까지 거절한다면 더 이상 그대를 붙잡지 아니하겠다.”
“…….”
동급의 상대라고?
설마 비슈누의 아바타인 크리슈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내가 약간 당황하고 있을 때 흑웅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주인이여.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소?]
[빨리 중원으로 돌아가서 복희나 탁록촌의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데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해도 괜찮을까?]
[시간 낭비가 아니오. 어쩌면 천축이라는 제 3의 세력을 주인의 부하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싶소. 게다가…….]
[게다가?]
[…… 아니오. 아무튼 내 생각은 그러하오. 주인의 뜻대로 하시오.]
[흠.]
흑웅은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한 것 같지만 망설인 듯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서로 돕는 걸로 하자.”
내 대답에 크리슈나가 반색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군. 그러면 나를 따라오겠나?”
“어디로?”
“[옛 지배자]들과 싸우고 있는 중에 내 화신인 아르쥬나가 전선을 이탈해 버려서 전황이 골치 아파진 것 같다. 적들을 물리치는 데 약간 도움을 줬으면 한다.”
“좋아, 앞장서.”
부우웅
나는 크리슈나의 뒤를 따라 하늘을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머나먼 하늘을 통과하자 차원이 크게 일그러진 장소가 나타났고, 이곳은 지구와 다른 차원계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꺼먼 불꽃이 일렁이고 모든 것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과 같은 풍경을 힐끔 쳐다보고 있자 크리슈나가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차원의 벽을 깨고 [옛 지배자]들이 쳐들어온다. 저들을 막지 않는다면 모든 인족들이 죽게 될 것이리라.”
꾸르륵…… 꾸륵…….
머나먼 지평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촉수덩어리들이 스멀거리며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또한 차마 꿈에 나오는 것조차 끔찍할 것 같은 형상의 괴물 몇 마리가 서 있는 것도 보였다. 그 괴물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수준은 웬만한 마왕조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에 나는 그 괴물들을 먼발치에서 쳐다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진짜군…….”
마력만으로도 시공간이 일그러지고 법칙이 제멋대로 왜곡된다. 그런 놈이 눈에 보이는 것만 최소 10체는 되는 것 같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옛 지배자]인 것이다. 머나먼 우주와 성좌 저편에서 날아온 악랄한 사신(邪神)들이 저토록 많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고 저것조차도 적 군세의 일부라는 게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런 놈들이 수백 마리나 있다는 건가…….’
정말 만만치 않다.
삼황오제에 준하는 강함을 갖고 있다는 천축 삼대신들이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브라흐마스트라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냥 싸우면 나도 무조건 죽겠는데? 저것들 하나하나가 신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저 10마리 중에서 해신보다 약한 놈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저 중에 한두 마리는 어쩌면 나도 이기기 힘들 정도로 강한 놈일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걱정 마라. 우리도 정면으로 싸우고 있던 건 아니니까.”
“응?”
“아무리 투신의 화신이라 하더라도 저놈들과 정면싸움을 할 수 있겠나? 당연히 브라흐마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쿠구궁!!
나는 잠시 후 저 [옛 지배자]들과 이쪽 사이에 거대한 빛의 장벽이 내려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빛의 장벽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파장을 느끼고는 흠칫했다.
“저건……!!”
“그래. 그대라면 느낄 수 있겠지. 브라흐마가 [트리무르티]로 만들어낸 장벽이다.”
크리슈나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브라흐마는 신력의 대부분을 소모하면서 저 장벽을 만들어내었고 저 벽은 아무리 강한 [옛 지배자]라 하더라도 뚫지 못한다. 아니, 뚫으려면 뚫을 수 있겠지만 먼저 나서는 놈은 마력을 대부분 잃고 소멸당하게 되지.”
“자기가 손해 보기 싫어서 다들 망설이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렇다. 그래서 자기 부하들을 보내서 육탄돌격으로 벽을 약화시키고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은…….”
부웅
크리슈나가 간디바를 소환해서 활시위를 당겼고 곧이어 빛의 화살이 쏘아졌다.
퓨븅!!
털썩
그러자 빛의 화살이 수십 줄기로 갈래치며 벽 너머에 있던 어둠의 마물들을 격중시켜서 죽였다. 크리슈나는 활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벽이 사라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저런 졸개들을 매일 벽 너머에서 사냥하는 것이다.”
“흠…….”
과연 이런 식이었던 건가.
‘브라흐마가 브라흐마스트라를 써서 역사를 변화시키기 전까지 이 벽을 이용해서 나머지 두 명이 최대한 버틴다는 작전이었군.’
그러나 나는 이 버티기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결국 비슈누와 시바는 브라흐마가 귀환할 때까지 버티지 못했고 인류 최강의 요새도시인 칼파는 함락당했으며 두 명의 신은 황제의 만신전에 몸을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미래를 지금 비슈누에게 말해봤자 무의미했기에 나는 뚫어져라 벽 너머의 [옛 지배자]들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크리슈나. 하나만 물어보자.”
크리슈나가 나를 쳐다보자 나는 놈을 응시하며 물었다.
“너희가 인간을 보호하는 이유가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