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2권 9화
나는 수보리의 말에 그를 쳐다보았다.
“수련세계를 없앨 필요가 없다니? 유지할 수 있단 말이오?”
“아마도.”
“아마도라니…….”
“백웅. 생각해보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오?”
내 반문에 수보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메피스토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저자는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에게 [단말의 권능]을 인질로 자신을 죽일 수 없으리라 위협했지만 사실 그건 그렇게 옳은 방법이 아니야. 내가 만일 저 메피스토였다면 [미래]를 인질로 잡았을 것일세.”
“미래?”
“그래. 만일 메피스토를 죽인다면 탁록시대보다 수만 년 이후의 미래에 있을 자네의 이번 회차 동료들과 만날 수 있을까?”
“……!!”
나는 그 말에 흠칫했다. 그 말과 동시에 머릿속에 과거 메피스토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허나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오. 선이 아니라 원(圓)이며, 무한한 굴레를 돌아서 회귀(回歸)하게 되어 있는 것. 다시 말하자면 이 무수한 선은 사실 현재, 과거, 미래에 걸쳐서 한 번씩 그려진 적이 있었다는 소리요. 여기에 비춰서 보자면, 사실 미래도 과거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거요. 시간은 귀일(歸一)하게 되나니.]
[천암비서에겐 그런 능력이 있소. 시공간이 사실 선형이 아니라 원(圓)이라는 점…… 그걸 이용해서 궤도를 읽어내어 해당하는 좌표에만 인과율이 이어지도록 지정이 가능하오. 전뇌자가 말한 당신을 미래의 동료들에게 돌려보내는 방법이란 바로 이것이지.]
무슨 말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나는 그 당시 했던 얘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결론도 알고 있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경(冥鏡). 명계 최고의 보물만이 제약 없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일세…….]
내가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보이자 수보리가 나직이 말했다.
“쉽게 말하자면 자네가 이번 30회차의 동료들을 다시 마주치려면 천암비서의 단말인 전뇌자의 힘, 그리고 탁록시대에서 찾아내야 할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물]. 이 2가지가 있어야 하지. 이렇게 본다면 전뇌자가 꿈의 세계에 봉인된 지금 보조단말인 메피스토를 죽일 경우 자네는 두 번 다시 동료들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아니 그럴 수가!! 정말이오?”
수보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내가 메피스토였다면 이런 식으로 협박했을 거란 말일세. 허나 저 현명한 인공지능이란 놈은 자네에게 이 수를 쓰지 않았지. 왜인 것 같나?”
“어, 그러고 보니…….”
메피스토가 동료들과의 재회를 인질로 잡고 저런 식으로 협박했다면 나는 좀 더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때려죽였겠지만 지금 수보리의 말이 효과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메피스토가 이 수를 쓰지 않은 거지?
그러자 수보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협박할 경우 자네는 무조건 메피스토와 헤어진 후 조언을 구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는 응당 자네에게 메피스토를 먹어치워 버리라고 했을 게 뻔했기 때문에 방금 전에 말했던 협박을 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네.”
나는 수보리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먹어치우라고? 그건 무슨 말이오?”
“의미 그대로일세.”
수보리는 싸늘한 눈으로 메피스토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전뇌자가 무한한 꿈의 세계에 봉인되었음에도 저자는 주 단말의 능력을 갖지 못했네. 그것은 천암비서는 아직 전뇌자를 자네의 단말이라 여기고 있단 뜻이지. 아마도 보조단말인 메피스토가 주 단말이 되기 위해서는 자네의 인정을 받아야 하거나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는 게 틀림없어.”
“흠…….”
“그렇다면 보조단말인 메피스토는 서의 능력을 이용해서 미래를 향해 자네를 보내줄 능력이 있을까?”
“없어도 나한테 그럴 능력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 되지 않소?”
“그래, 바로 거기서 [먹어 버린다]는 해결법이 등장할 수 있는 거지.”
수보리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가시게 메피스토의 뜻대로 따라줄 건 또 뭔가? 그냥 이 자리에서 메피스토를 붙잡아서 자네의 신력으로 그 영혼을 흡수해 버리면 되는 걸세! 그러면 메피스토의 능력 또한 자네가 손에 넣을 수 있겠지.”
“……!!”
“이렇게 힘으로 실력행사를 해 버리자고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메피스토는 세게 나오지 못하고 자네의 이득을 전제로 유하게 설득했던 걸세. 뭐 그것조차도 자네가 걷어차 버렸지만…….”
우와 그런 방법이?!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아주 좋군! 그럼 이혼대법으로 이놈의 영혼을 흡수하면 되는 것이오?”
꽈악
내가 메피스토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크게 움켜잡자 메피스토는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놈은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두시오!! 아무리 신력에 이혼대법을 쓰더라도 내 능력을 손에 얻는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오.”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수보리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흐흐, 꽃놀이패가 아닌가? 백웅이 네 능력을 흡수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안 되더라도 어차피 백웅은 처음부터 네 능력이나 도움 따위는 다 던져 버릴 셈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백웅에게 딱히 손해는 아니라는 말이지. 게다가 너 정도의 강인공지능이 가진 영격(靈格)이라면 충분히 혼백을 갈라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
“백웅. 맘대로 처리하게.”
수보리의 말에 나는 머리통을 한층 세게 움켜잡았다.
“알았소.”
“안 돼……!!”
메피스토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력을 가득 끌어올린 채 구궁파천뢰를 운용했다.
‘이만큼이나 힘을 증폭시킨다면 식혼의 낮은 효율 또한 어느 정도는 높아지겠지.’
이혼대법(移魂大法)
식혼(食魂)
스아아아아아!!
다음 순간 메피스토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숫자로 된 데이터로 천천히 쪼개지며 기괴한 소리가 났다. 마치 복잡한 퍼즐 조각이 천천히 쪼개어지듯이 메피스토의 전신이 잘게 분해되는 게 육안으로 보였고, 잠시동안 신음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던 메피스토는 잠시 후 그 혼과 백이 내 의도에 따라 분리되기 시작했다.
꾸드득 꾸드득……!!
그와 동시에 식혼의 구결을 발동시키자 내 장심(掌心)으로 꿀렁거리며 메피스토의 혼이 흡수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감각은 마치 살아 있는 걸 산 채로 잡아먹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식혼을 다른 존재에게 써 보는 건 처음인데…… 이렇게나 불길하다니!’
이혼대법이 사법 중의 사법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혼을 산 채로 먹는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물리적인 육체를 죽이는 것보다 몇 배는 극악한 행위인 것이다. 나는 약간 메피스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바로 그런 마음을 지웠다.
‘이놈은 그래도 싸다!’
파아아아…….
잠시 후 메피스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놈의 영혼이 완전히 내게 흡수되었다. 나는 메피스토의 영혼을 흡수하고 나서도 약간은 더부룩한 기운이 체내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우욱. 역시 효율이 낮군…….”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커다란 돼지 뒷다리 구이를 씹지도 않고 삼킨 것처럼 쓸데없이 소화되지 않은 힘이 내 내면에 덜컥 들어와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화가 잘 안 된다는 건 이혼대법의 식혼이 가진 효율이 무척 낮은 편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힘을 증폭시킨 덕인지 효율이 조금이나마 높아지긴 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내가 메피스토를 잡아먹자 수보리가 박수를 쳤다.
“잘 했네! 아주 잘 했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오? 아까 수련세계를 없애지 않아도 될 거라 했는데.”
“간단한 얘기일세. 이제 흡수한 메피스토의 힘을 이용해서 자네가 새로운 수련세계를 창조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엥? 내가?”
“왜 그러나?”
“아, 아니 내가 어떻게 세계를 창조한다는 말이오? 나는 강인공지능 같은 계산능력도 없는데…….”
“…….”
수보리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정말 복희가 자네를 어떤 기분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군!”
“……?”
“아니 백웅…… 그러면 삼황오제나 [옛 지배자]들은 강인공지능의 계산능력이 있어서 자기만의 차원을 창조했겠나?”
“아!”
“신력(神力)만 있으면 차원 하나 만들어내는 것쯤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굳이 [옛 지배자]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천선(天仙) 중에 상위급에 있는 자들도 차원생성 정도는 할 수 있지. 전뇌자나 메피스토는 단말의 권능을 이용해서 물리적으로 세계를 시뮬레이팅한 것인데 그저 원리의 차이일 뿐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는 자네도 할 수 있어.”
“그, 그런 건가.”
“그래. 나만 하더라도 비취계를 찾아낸 후 내 술법으로 비취 차원계의 범위도 확장시킬 수 있었네. 나도 차원 정도는 만지작거릴 수 있는데 자네는 말할 것도 없지.”
신력을 사용하면 다 된다 그건가……!!
나는 감탄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신력이란 거 너무 사기 아니오? 그냥 이 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말해서 뭣 하는가? 전 우주의 절대자들이 휘두르는 혼돈의 힘일진대 전능에 가까운 게 당연하지. 다만 필멸자는 죽을 때까지 아무리 모험을 해도 신력의 조각 한 톨도 얻기 힘든데 자네는 전생을 하면서 강력한 신들의 신력을 수십 번이나 모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세.”
“으음…….”
“아무튼 그 트리무르티란 기술을 써서 수련세계를 창조해 보게나.”
“세계를 창조하라고 해도 좀…… 그냥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그러자 수보리가 말했다.
“그러면 자네가 지금 흡수한 메피스토의 힘을 트리무르티의 3개의 영역 중 하나에 배치하게. 그러면 3개의 신력이 조합될 때 메피스토의 연산력을 신력으로 변환시켜서 창조할 때 반영시킬 수 있을 게야.”
“오……!! 그런 방법이!”
“빨리 해 보게. 메피스토가 사라져서 곧 원래 있던 수련세계는 붕괴할 게 뻔하니.”
“알았소.”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는 합장을 하고는 외쳤다.
“트리무르티!!”
메피스토의 연산력을 빌려서 수련세계를 다시 만들어본다!!
지이잉
그러자 3개의 영역 한가운데에 있던 보석이 번쩍 빛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가공할 정도로 많은 수식(數式)과 물리학의 공식들이 잠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너무 막대한 양이라서 나는 기억하기는커녕 그저 외계어처럼 바라보아야 했고 이윽고 그 연산력이 알아서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윽…….’
그 순간 나는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신력이 전에 없이 쑥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힘이 절반 이상 뭉텅이로 흘러나간 것 같았다.
번쩍……!!
잠시 후 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청룡무관 앞에 서 있었다. 메피스토의 공간을 빠져나와 청룡무관 앞에 도달하자 수보리는 감탄한 듯 말했다.
“해냈군. 수련세계를 창조한 것 같아!”
“저, 정말 내가 세계를 만든 것이오?”
“그렇네. 정확히는 차원계를 만든 것이긴 한데 크게 다르진 않지…… 응?”
그렇게 대꾸하던 수보리가 잠시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피식 웃었다.
“……뭐, 처음이면 잘 안 될 수도 있지.”
“무슨 말이오?”
“그게 말이지…… 이 세계는 평평한 것 같네.”
“응?”
“한 번 하늘을 높이 날아보게.”
휘잉
나는 하늘을 높게 비상해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우주의 어둠이 비칠 정도의 높이에 도달하자 깜짝 놀랐다.
“으악!!”
지, 진짜로 평평하잖아?
둥근 구체의 행성이 아니라 행성만큼 넓은 평평한 땅!! 심지어 세계의 끝에는 절벽에서 폭포가 콸콸 우주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만든 세계인 듯했다.
내가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와서 당황해서는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이게 아닌데? 난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지구의 모습대로 만들었소.”
“브라흐마의 말을 생각해보게.”
“브라흐마?”
“그는 분명히 트리무르티는 아주 미세한 차이의 조합으로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계를 만든 데다가 조합도 불완전해서 엉뚱한 결과물이 나온 거겠지.”
“으음…… 그러면 연습하다 보면 나아진다는 거요?”
“아마 그렇겠지…….”
수보리는 왠지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세계를 몇 번이고 찰흙처럼 반죽해서 완성될 때까지 다시 만든다. 아주 멋진 일일세!”
그런 수보리의 말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심수력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너무 벗어난 차원인 것 같군…… 백웅, 지금은 세계를 다시 만들 필요 없을 걸세. 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가 수련을 하기에는 문제가 없어. 진짜 해야 할 일은 세계창조 연습을 하는 게 아닐세.”
나는 심수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뭘 해야겠소?”
“당연히 탁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겠지. 자네는 지금 탁록으로 가도 괜찮겠나? 모든 준비가 다 된 건가?”
“…….”
나는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본디 이 수련세계에 왔던 건 뜻하지 않게 인드라에게 살해당한 김에 내 힘을 키우려고 왔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나는 상당히 힘을 얻게 된 듯했다.
과연 이 힘으로 고대 탁록의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심수력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오. 나는 되돌아가겠소.”
여기서 수백 년을 더 굴러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감이 있을 때 빨리 탁록세계로 가서 원하는 결과물을 얻고 30회차 동료들과 연락할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이다!
내 단호한 대답에 심수력이 말했다.
“좋아. 그럼 자네와 수보리 둘이 가면 될 걸세.”
나는 그의 말에 약간 놀랐다.
“아니. 심수력 당신과 이광, 이환웅은 안 가는 거요?”
내 말에 심수력은 힐끔 옆에 있던 두 사람을 보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둘은 아직 수련해야 할 게 많네. 절대지경도 벌레처럼 죽는다는 그 탁록의 시대에 가기에는 실력 부족이야. 나조차도 탁록에서 제대로 힘이 통할지 의문인 상태이니, 수련세계를 만든 본래의 목적대로 나는 여기에 남아서 두 사람을 가르치며 힘을 기르도록 하겠네.”
“음, 그러면 수보리는?”
“저자는 딱히 이제 와서 수련으로 더 쌓을 힘도 없는 완성된 자 아닌가? 게다가 술법의 종사이니 자네를 옆에서 지혜와 술수로 도와줄 수 있겠지.”
심수력의 말은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러면 나중에 데리러 오겠소.”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수보리가 말했다.
“백웅.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것을 가득 염원하면서 창조물을 하나 만들게. 일종의 탈출장치 같은 느낌으로 만든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걸세.”
“그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요?”
“안 될 게 뭐 있나? 흐흐. 자네는 아직도 눈치 못 챘나?”
“뭘 말이오?”
“메피스토를 그렇게 잡아먹었는데도 천암비서는 자네에게 아무런 이상반응도 보이지 않았어. 즉 뭐든 자네 뜻대로 하라 그 소리지. 그러므로 자네가 어떤 방법을 써서 탈출하려 하든 막을 일은 없을 게야.”
“…….”
좋은 얘기였지만 나는 수보리의 말을 듣자 약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대체 천암비서란 뭐지……?’
이 서(書) 자체에 의지가 존재하는 건 틀림없다.
단말 같은 걸 보내서 나를 도와주는 걸로 봐서 지금은 꽤나 우호적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서는 행동하는 걸까?
아니, 왜 날 선택했으며 왜 전생능력을 준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손을 뻗었다.
“트리무르티.”
우웅
잠시 후 내가 염원한 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이 창조되었다. 효과가 확실할지는 모르겠지만 수보리의 말대로라면 이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탁록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수보리에게 말했다.
“갑시다.”
“좋네!”
스윽
내가 수보리보다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수보리 또한 나를 따라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나오자마자 내가 창조한 문은 곧장 소멸되었고, 나와 수보리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서 있었다.
“여긴……?”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죽었던 그 장소에 도착하기를 염원했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수보리가 입을 열었다.
“여긴 궁전 같군.”
곳곳에 울창한 신록이 우거져 있었고 사방에는 아름다운 백색의 궁전이 가득했다. 정확히는 백색 궁전의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고층건물에 난데없이 출현한 것이다. 나는 이 건물은 물론이고 백색 도시의 모든 건축양식이 무척 생소해서 당황했다.
“이건 뭐지? 수만 년 전에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이오?”
“……흐음, 이건 설마…….”
수보리는 궁중의 양식을 잘 살펴보다 뭔가 깨달은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그가 침음성을 흘리던 그 순간이었다.
쿠오오오오!!
갑자기 하늘 한편에서 번쩍거리는 뇌전이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어둠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많은 시꺼먼 존재들이 날아다니면서 싸우는 게 멀리에서 보였는데, 잠시 후 내가 서 있던 곳에는 엄청난 압력이 밀려들어 왔다.
꾸구구구궁……!!
물리적 충격이 아닌 영적인 압력!
그러나 그 영적인 압력은 대라신선조차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막강했고, 나는 이게 거대한 신력의 충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서, 설마 저기서 싸우는 것들은…….’
신인가?
아니 그래도 신이 수백 마리나……?
내가 전장을 쳐다보고 있을 때 수보리가 말했다.
“백웅. 틀림없네.”
“뭐가 틀림없다는 것이오?”
내 반문에 수보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이곳은…… 초고대에 멸망했다고 알려진 인류 최초의 성전(聖殿)이자 천축 최강의 고대도시, 칼파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