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2권 6화
그 말에 나는 말 그대로 대경(大驚)하고 말았다.
“뭐?! 다, 다시 전생한다고?!”
“……!!”
“으음.”
놀란 건 나 뿐이 아니었고 천우진과 아수라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것이 달마가 했던 말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생을 끝낸 전생자가 다시 전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세계가 다시 그를 중심으로 돌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달마는 고요히 말했다.
[그렇다. 시련관에게 주어진 당근이란 바로 그것이다. 그 때문에 전생자들은 이 시련에 소환되었을 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소환이라고? 그럼 평소에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니란 건가? 당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전생자도?”
[…….]
어째서인지 달마는 내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한지 살짝 회피하듯 다른 얘기를 꺼냈다.
[도전하는 자가 어떤 보상을 얻는지는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전생자이던 당시 여기까지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그 말은…….”
[여기가 어디인지 잊었는가? 여기는 바로 그대가 말하는 천암비서의 가장 깊은 심연이며 끝자락. [꿈]을 직접 파고들 수 있는 장소. 나는 이곳의 존재는 알았으되 너무 위험하다 생각하여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으음.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나 또한 전생자일 때 [단말]을 지니고 있었지. 그대와 마찬가지로 단말과 오래 지내다보면 좋든 싫든 알 수 있게 되는 사실…… 나는 그걸 알고도 진공가향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강했기에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서의 진실까지는 추구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달마는 잠시 후 후회하듯 뇌까렸다.
[……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 번 정도는 도전해봤어야 했다. 진공가향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면…….]
“진공가향이 끝이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이지?”
[그대는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굳이 내 입으로 확인받을 필요는 없을것이다. 어차피 제약 때문에 이 이상 말해줄 수도 없다.]
잘라말한 달마가 말을 이었다.
[허나 아마도 내 뒤에 기다리고 있을 자들은 여기까지 와 봤겠지. 그들과 대화해본 바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그런가!
달마의 말에는 상당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달마는 막강한 힘을 쌓았음에도 막상 천암비서 최후의 시련에는 진공가향이라는 대의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으나 다른 전생자들은 와 본 것이리라. 그리고 달마와는 다른 걸 느꼈을 확률이 높았다.
그 때 옆에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백웅. 눈치챘나?”
“뭘?”
“달마의 힘이 나일라토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진공가향의 의무감 때문에 도전하지 못했지만 다른 전생자 놈들은 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겠나.”
나는 잠시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뭔가를 앗 하고 깨달았다.
“……아……!!”
“알아차렸군.”
천우진이 내게 알려준 건 바로 진공가향이라는 이념을 다른 전생자들도 갖고 있었느냐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천우진의 언질 덕에 깨달은 것이다.
‘다른 전생자들은 진공가향을 시도하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거고!’
그리고 진공가향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건 결과적으로 그들이 가진 전생자로서의 최종목표가 진공가향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전생자들이 노린 게 진공가향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이었을까?
‘설마 전뇌자가 내게 그런 얘기를 했던건……?’
내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맴돌 때 천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달마. 언급금지의 제약이 생각보다 약해보이는군.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의적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직접 언급은 피하고 있지만 본디 그런 제약은 편법을 쓰더라도 피시전자가 다치게 되어 있거늘.”
[제약이 약한 건 아니다. 단지 나는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뿐…….]
츠츠츠츠!
“……!!”
달마의 말이 끝나는 순간 달마의 영체에서 팔이 뚝 떨어져서 사라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놀라자 달마가 말을 이었다.
[제약을 어긴 덕에 내 힘이 줄어들었군. 그래도 상관없다.]
“상관없다니. 이런 방식의 제약은 차츰 힘을 없애다가 결국엔 영겁의 소멸이…….”
중얼거리던 천우진은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달마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나는 사실 후대의 전생자를 이기면서까지 새로이 전생하고픈 생각이 없다. 그저 영원토록 소멸하고싶을 뿐. 본디 그리 되어야 했을 터인데 이 서(書)가 전생자의 욕망을 건드려 억지로 아귀지옥에 가둬놓고 있으니, 내 어찌 이런 모순에 순응하겠는가.]
그 순간 나는 믿기지 않아서 달마를 쳐다보았다.
“전생하고픈 생각이 없다고? 웃기지 마! 나랑 싸울 때는 있는 대로 비겁한 수를 다 쓰면서 열심히 싸웠으면서.”
내가 사납게 외치자 달마는 태연히 대꾸했다.
[딱히 전생하려고 열심히 싸운 게 아니다. 자신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 주제파악도 못하고 마구 들이대는 어리석은 자라면 차라리 여기서 떨어뜨려 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
“엉?!”
[그대여. 만일 그깟 하찮은 힘으로 2번째 시련에 가서 시련관에게 순식간에 패배하면 어찌될 것 같은가?]
“내가 영원히 소멸하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시련관이 새롭게 전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달마의 말에 내가 흠칫하자 달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그대나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 그들이 전성기의 힘과 지혜를 가지고 다시 전생을 시작한다면 세계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공가향으로 세계를 멸하는 게 자비라고 느껴질지도 모르는 지옥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찌 함부로 그대를 다음번 시련에 보내겠는가?]
“뭐?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보다 더한 지옥이 어디 있냐.”
[정말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깔끔히 세계를 멸하려 했던 것은 지옥과 같은 세계를 구원하려 했음이지만, 존재의 욕망이 관여하게 되어 세계를 변화시키게 된다면 그대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
[초월자들의 욕망은 감히 우리가 잴 수가 없는 차원에 존재하느니, 여태껏 그대가 지옥이라 생각했던 게 우스워질 정도의 사태를 초래할 수가 있다.]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옛 지배자]나 외신들이 상상이상의 사악함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강대한 전생자들이 그들에 못지않을 수도 있다는 걸 충분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기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달마가 한쪽 팔로 반장(半掌)의 자세를 취하더니 말했다.
[허나 그대는 어찌 되었든 전생에서 쌓아둔 역량으로 나를 쓰러뜨렸으니 그대 백웅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대가 여기서 물러나기로 한 선택 또한 현명하도다.]
“……아무튼 좋아. 도전자가 무엇을 얻는지는 모른다 그 말이지?”
[그렇다.]
“흠.”
그렇다면 결국 두 번째 시련에 도전해서 승리해야 무엇을 얻는지 알 수 있다는 소리인가?
…… 아니, 생각해보니 아니다.
그건 아까 말했던 대로 난이도와 반비례하는…… 순서가 바뀐 선택이었다.
‘다른 전생자들은 모든 걸 알고 천암비서의 끝자락까지 왔다. 그 말은, 달마와 달리 자기만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도전자가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아냈다는 소리다.’
결국 나 또한 언젠가는 그 이득을 알아내서 여기에 도전하게 될 것이리라.
나는 그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며 달마에게 말을 걸었다.
“달마. 당신은 수많은 마력을 흡수하다가 그 지경으로 타락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결국 나 또한 힘을 축적하다 보면 당신처럼 된다는 건가?”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강해질 수 있는지, 그 부작용이 무엇인가를 언급하는 건 그대에게 수많은 단서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셈이기에 제약에 직접 걸린다. 하지만…….]
“하지만?”
[전생자들에게나 적용되는 새로운 힘의 기준이 따로 존재한다. 단순비교는 되지 않으나 그건 분명히 기존의 우주에서 강자들이 논하던 기준과는 차원이 다른 것. 그대가 신력을 모아 표면적인 강자들을 거꾸러뜨릴 수 있음에 만족한다면 그 기준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라 느끼게 될 것이다.]
“…….”
[나 또한 그 기준에 따라 그대를 재어봤을 뿐…… 그대는 아직 견습생 수준에 불과하다.]
도, 도대체 그건 무슨 기준인 거지?
나는 달마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일관된 기준이 있다는 사실에 기가 질렸다. 단순한 기 죽이기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달마 다음에는 말도 안 되는 천외천(天外天)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천외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기랄…… 도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거야?’
내가 탈력하자 옆에 있던 아수라가 말했다.
“백웅. 너무 기운빼지 마라.”
“아수라.”
“넌 아직 햇수로 치면 천 년도 살지 않은 싱싱한 뉴비다. 게다가 재능도 없어서 수많은 분야를 대충 손만 대봤을 뿐 제대로 끝을 본 것도 아니고 30번밖에 전생하지 않았잖나? 눈앞의 달마는 최소 천 번 이상 전생했을 테니 그런 달마가 말하는 만렙의 기준에 너무 기죽을 필요 없다.”
“……나 원래 명제국 시대 사람이었어. 뉴비니 만렙이니 대웅제국 시대 게임용어를 말해대면 원래 못 알아듣잖아.”
“흐흐. 다 알아듣는 거 안다.”
“나 참.”
아수라의 격려에 나는 피식 웃으며 약간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확실히 난 아직 해보지 않은 것도 많이 있고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도 너무 많았다. 벌써부터 기죽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천우진이 끼어들었다.
“잡설이 너무 많군. 그래서 달마 당신이 진짜 하고싶은 말이 뭔가? 백웅한테 약하다고 기죽이려고 여기까지 힘들여 버티는 건 아닌 것 같은데.”
[…… 조언을 해주고 싶다.]
“조언이라.”
[백웅이여. 잘 들어라.]
달마는 내 쪽을 응시하더니 말했다.
[그대가 만일에 시련관들을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치우(蚩尤)의 힘을 얻을지어다.]
“…….”
[그 치우의 힘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며 통상적인 신력이나 마력의 축적과정으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는 힘이다. 그 힘이라면 충분히 초월자들의 영역에서 그대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야 그럴 것이다. 내 육체가 치우의 뿔을 각성해서 싸운 덕에 지금 달마를 죽여서 혼령 상태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치우의 뿔이 가진 힘은 어마어마해 보였고 달마의 조언은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마의 말을 듣고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말했다.
“달마! 당신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전생횟수를 거쳤을 건데 정말 치우나 치우의 힘을 겪은 적이 없다는 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거 같은데…….”
이게 제일 수상쩍은 점이었다. 달마의 전생횟수는 아무리 봐도 최소 수천 회를 넘을 것이며 살아온 햇수는 어쩌면 몇십만 년이 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달마조차도 치우의 힘을 보자 생경하게 느꼈고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마합신 같은 변태 같은 술수까지 쓸 정도의 존재가 모르는 초능력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달마는 단호히 말했다.
[없다. 아마 그 치우라는 존재는 그대와 밀접한 인과율이 맺어져 있을 것이며, 적어도 내 시대에는 그런 존재가 발호한 적이 없었으며 흔적조차 없었다.]
“……!!”
[치우가 그대에게 뿔을 제공했다는 것은 그대에게 힘을 줄 용의가 있다는 것…… 그러나 명심하라.]
이어진 달마의 말에 나는 마음이 약간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과정 없는 결과는 없다. 결국 그대는 치우에게 힘을 받을 정도의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인과율은 언제가 되었든 그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리라!]
“…….”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얘기였다. 인과율이라는 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 있다는 걸 최근의 전투에서 많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치우라는 존재가 단순히 선의로 내게 힘을 줬다면 좋겠지만 만일에 그게 아니라면? 어떤 사정이 개입되어 있을지 몰랐기에 나는 무척 껄끄러웠다. 창힐 같은 놈한테 당했던 경우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고생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 그래서 그런건가.’
나는 순간 신들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어떤 인과’로 발생된 일인지 모르는 경우 손도 대지 않는 신들의 소극적인 태도!
내가 마음대로 신의 사도를 사칭하고 다니거나 신의 권능을 휘둘러도 섣불리 내게 신벌을 내리거나 접근하려 들지 않았던 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가락 하나로 나를 눌러죽일 수 있는 존재들이 너무 소심하게 구는 것 같아서 내심 비웃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과율의 무서움을 깊게 느끼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보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신의 영역에 도달해 버린 이상 그들의 행동양식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달마는 그렇게 말한 후 내 육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더 이상 할 얘기는 없으니 이제 육체와 영혼을 합일시키도록 하라.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여 여기서 탈출함을 축하하겠다.]
“……알았어.”
나는 조심스레 내 몸에 다가갔다. 내 몸은 팔짱을 끼고 있었으며 감정없는 눈으로 전방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이마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었다. 생김새야 내가 처음 여기에 왔을 때의 생김새와 그대로였지만 왠지 이질감이 들었다.
‘대체 내 몸이 왜 멋대로 움직여서 싸운거지?’
이것만큼은 지금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저 몸에 다른 인격이 들어가 있기라도 한 건가? 이대로 접근해서 몸과 영혼을 합체시키면 다행이지만 만일에 불의의 사고가 생길까봐 긴장이 되었다.
“이익!!”
에라이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
파앗
나는 잠시 후 용기를 내어서 내 몸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영혼이 몸에 흡수되는 느낌과 함께 치우의 뿔이 번쩍거리며 뇌광을 튀겼다.
파지지직……!!
그리고 치우의 뿔이 흘리던 뇌광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잠시동안 뇌리에 어떤 [기억]이 보였다.
“점괘에 따르면 탁록촌은 물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더군요. 어디로 가신 건가요?”
알 수 없는 목소리.
“어쩔 수 없이 당신이 돌아올 때 인과율이 이어진 물건을 통해 바로 기억이 전송되게끔 해 두었어요. 어떤 물건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어떤 여인의 신형이 아련한 윤곽으로 비춰보였다.
나는 자세한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여인이 무척이나 미형이며 궁궐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있는 화려한 궁궐의 건축양식이 슬쩍 보였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잠시동안 흐릿하게 비치는 윤곽을 뒤척거리다가 말했다.
“……푸념이에요. 그 아이는 벌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이며, 과거이자, 동시에 현재.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열린결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느 쪽도 나쁠 게 없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아직 제 운명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큰 굴레]를 되돌린 존재의 실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횡설수설하듯 말한 여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뒤편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언니가 부르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한마디…….”
그러고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복희를 너무 믿으면 큰일날 거예요.”
번쩍!
다음 순간 나는 내 몸과 영혼이 합일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이마로 손을 뻗어서 뿔이 돋아나 있는지 확인했고, 뿔이 여전히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작아졌네…… 손가락 한두 마디 크기인가.’
아무튼 뿔이 작아졌으니 외관상으로는 좀 나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뿔에 대해서 오랫동안 신경 쓰지 못하고는 방금 보았던 기억을 되새겼다.
‘그건 대체 누구지?’
그 궁궐 속의 여인은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백웅이라고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그 얼굴 또한 흐릿해서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그 기억을 보고 당황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복희를 믿지 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아니, 그 전에 그 여자는 대체 누구지?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달마가 말했다.
[백웅이여. 몸을 무사히 되찾았구나. 허나 이제 어찌할 셈인가?]
“어찌할 셈이냐니? 당연히 수련세계로 되돌아가야지.”
[어떻게?]
“…….”
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천우진을 쳐다보았고 천우진은 불쾌한듯 전자담배를 까득 깨물며 말했다.
“뭘 쳐다봐? 나도 어떻게 되돌아가는지 모른다!”
“야! 그런 게 어딨어.”
“그런 게 어딨냐니 너야말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정체불명의 천암비서에서도 가장 끝자락까지 맘대로 찾아올만한 존재는 나일라토프 정도고 그나마도 무슨 수로 여기까지 왔는지 추측도 안 된다. 게다가 애초에 넌 일월지혼을 각성해서 차원을 찢어 버린 채 찾아왔는데 난 그런 방식은 할 줄도 몰라.”
“아…… 일월지혼!”
나는 그제서야 일월지혼의 존재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일월지혼을 각성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였지?’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문제해결법도 간단하다 생각해서 씩 웃었다.
“좋아. 조금만 기다려 봐라. 내가 일월지혼을 써서 도로 수련세계로 되돌아가면…….”
…….
잠시 후 나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되네?”
저주받은 팔이 회복된 덕분에 저번에 일혼과 월혼을 합일할 때처럼 심각한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혼과 월혼은 그저 겉돌기만 할 뿐 저번처럼 융합할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일혼과 월혼이 서로를 삼키려하는 위기는커녕 마치 자석의 대극(對極)이라도 된 것처럼 일월지혼을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곤혹스러워하자 아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일월지혼은 너 대신 누군가가 대가를 바쳐서 발동했던 힘이다. 하지만 지금 네게는 대가로 바칠 게 없기에 아예 일월지혼을 시전하는 것 자체를 막아 버린 모양이군.”
“제, 제기랄!! 이런 게 어딨냐고!!”
“흠, 천우진. 네 특기를 써서 차원을 돌파해 되돌아가는 건 안 되겠나?”
“…….”
아수라가 천우진을 쳐다보자 천우진은 전자담배를 뻑뻑 피웠다.
그는 잠시 후 연기를 잔뜩 내쉬더니 한숨을 쉬었다.
“시도를 해 봤는데 여긴 그 자체가 불가해(不可解)한 장소다. 내가 차원을 열고 닫으려는 시도 자체가 통하지 않는군.”
“시련장의 문을 열고 나가서 바깥에서 시도하는 건 어떤가?”
“그것도 모르겠다. 다음 시련에 도전하는 문은 저기 있지만 나가는 문은 열리지 않았어. 기본적으로 법칙상 퇴각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으음……!! 악취미군.”
“그리고 아수라. 너도 대충 느끼고 있겠지만 어찌어찌 이 문을 나간다 하더라도…….”
천우진이 말끝을 흐리자 아수라는 뭔가를 눈치챈 듯했다.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래도 나가야지. 백웅의 이야기가 계속되려면.”
“젠장. 거지같군…….”
천우진이 왜인지 짜증을 내고 있을 때 아수라가 말했다.
“이제 네 차례인 것 같으니 나와라, 전뇌자.”
…… 전뇌자?
뜬금없는 얘기에 내가 놀랄 때였다.
파앗!
장내에 전뇌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전뇌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더니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너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걸 알고 있다. 애초에 망령이었던 우리를 되살린 것도 너였고.”
“하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불만은 없어. 미련도 없고.”
“…….”
그러자 전뇌자는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다.
“백웅. 당신을 수련세계로 돌려보내 줄게.”
“정말 할 수 있는 거냐?”
“물론이야. 단말로써 천암비서 내의 심도를 자유자재로 왕복할 수 있는 고유권한이 있으니까.”
“하핫. 그거 다행이군.”
나는 모든 게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씨익 웃었다.
“천우진과 아수라를 데리고 나간다면 천군만마를 얻은것과 다를 바가 없겠구나!”
탁록의 시대에도 저들의 힘은 충분히 통할 것이 분명했다.
동료 하나 없이 따로 떨어진 초고대에서 동료들이 있다 생각하니 마음또한 든든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전뇌자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아니, 그들은 같이 못 가.”
“어? 무슨 말이야?”
“……백웅,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어째서 나는 그동안은 대웅제국의 영혼들을 모두 클라우드 형식으로 저장하고 있으면서 다른 전생시기에는 그들을 해방시키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옥좌의 앞에서만 그들을 소환시킬 수 있었을까.”
“…….”
“백웅. 그건 왜냐면…… 이 시련의 내부…… 그리고 [옥좌]가 있는 장소는 모두 [꿈]이기 때문이야. 꿈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들을 실체화 시킬 수 있었던거야. 단순히 천암비서가 제약을 걸어서가 아니야.”
“꿈?”
전뇌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환신 천우진이 악신에게 인간의 영혼이 붙잡혀 고문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모든 인류의 영혼을 꿈의 세계로 보내고 동시에 클라우드로 저장했어. 하지만 클라우드에 저장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꿈의 일부가 된 것. 꿈의 일부인 이상 꿈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 되어 버린 거야…… 물리적으로는 결코 되살아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어.”
“……뭐?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아니야. 당신은 지금 이성이 견명하고 나름대로 지능도 올라가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이해했을 거야. 그저 인정하기가 싫을 뿐이야.”
“아니…… 무슨…….”
“이곳은 바로 [꿈]. 천암비서의 끝자락만이 본격적인 [꿈]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경계를 지나는 순간 꿈의 존재는 소멸된다.”
그렇게 대꾸한 전뇌자가 이윽고 말했다.
“천우진과 아수라는 이곳을 나갈 수 없어. 심지어 수련세계조차도 갈 수 없어. 그들은 [꿈]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가 되어 버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