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18화
공손대랑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무심(無心)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나는 그 감정없는 시선에서 그녀가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며, 그 평정심의 원인도 알 수가 있었다.
‘내가 어떻게 자연검을 막았는지를 알아차렸다.’
당연한 일이다. 깨달음의 경지라 한다면 공손대랑이 나보다 훨씬 위에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수가 하수의 수법을 알아채는 것은 무림세계에서 매우 흔한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고수 또한 하수가 지금 머물러있는 경지를 한때 겪어보고 올라간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공손대랑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것을 베어 버렸구나. 내가 베어 버린 것은 너의 미망(迷妄)이었느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우연이 아니라는 걸 다시 보고싶구나.”
스으
공손대랑의 손에는 다시금 풀잎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 풀잎을 보는 순간 모든 집중력을 쏟아서 내 의념천주를 가장 강렬하게 발현했다.
‘오는 게 아니야…… 이건…… 속도로 오는 공격이 아니다!’
반대로 속도는 필요 없다!
속도와 힘으로 막으려 하니까 못 막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되뇌이며 마음을 한없이 평정한 상태로 낮춰눌렀다. 투지조차도 마치 죽은 것처럼 내리누른 채 모든 힘이 자연체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한없이 유연해져서 내 자신의 감각조차도 잊어버리려 할 때, 나는 [흐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일렁…….
속도나 힘으로는 판정할 수 없는 영역.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고도 할 수 있는, 그 한없이 시간이 멈춘듯한 아슬아슬한 영역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의 파장이 오는 방향으로 무심지경(無心之境)의 일검(一劍)을 내리쳤다.
빠르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상대의 공격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촤앗!!
다시 한번 공손대랑의 풀잎이 허공에서 내 검에 베였다.
나풀거리며 정확하게 두 조각이 되어 흩날리던 풀잎을 보던 공손대랑이 찬탄했다.
“정녕 신역(神域)의 초입을 깨달았구나!”
“…….”
아직까지는 괜찮아.
나는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과거 암야참을 가르쳐 준 아수라가 해줬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 잘 들어. [흐름]이야. 다섯 개나 되는 의념이 보조를 맞춰서 하나의 흐름에 섞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위적인 흐름. 만일 상대가 그 하나의 흐름을 파악해서 이음새를 베어 버릴 수 있다면.]
[ 적멸무극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 이 흐름을 읽는 법을 따로 가르쳐 줄 수 있어. 오직 적멸무극 한정이지만. 그럼 파해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수라가 직접 보여주었던 적멸무극의 파해법.
‘아수라는 흐름을 읽어 적멸무극의 ‘이음새’를 부수는 파해법이 적멸무극에만 적용된다 하였지만…… 그건 아니다.’
암야참은 진정으로 깨달을 경우 적멸무극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공의 이음새를 가를 수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 그런 암야참의 특성을 이용해서 자연검(自然劍)의 방어에 나선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나는 암야참을 갓 수련하던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암야참의 숙련도를 키운 상태였기에 그 때의 아수라가 내게 일부러 거짓말을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만일 네가 어떤 고수와 수만 초 이상 격돌한다 칠 때, 누가 네 검류의 흐름을 완전히 읽고 승기를 잡는다면 어떻게 할 거냐?]
[ 속도나 힘에서는 되레 네가 여동빈보다 훨씬 앞서는데 여동빈이 마치 네 공격이 어떻게 올지 다 알고 있어서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적 있었지?]
[ 사실 나도 비슷한 걸 할 수 있다.]
[ 수련에 너무 의심이나 불만을 갖지 말고 따라와라. 성취가 잘 안 늘어서 초조하더라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아수라 또한 월공투계 같은 기술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
그 당시에는 아수라가 하던 얘기가 단순히 자신이 고수임을 자랑하려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수라가 했던 말은 결국 단순했기 때문이다.
월공투계.
마치 미래를 예지하듯 모든 공격을 미리 예측하는 후발선제의 극의.
그 [눈]이 있어야 심어검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지만…… 사실 내가 너무 빙빙 꼬아서 이해했을 뿐이다.
단순하다.
월공투계는 특정한 기술이 아닐 것이다.
그저 아수라나 여동빈 수준의 고수가 되면 월공투계는 당연히 얻게된다는 얘기일 뿐!
나는 월공투계가 깨달음의 부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가 마치 그걸 별개의 기술처럼 말했으니 여동빈이 어이없어할 만 하지.’
나는 잠시 고소를 머금은 채 생각했다.
‘방금 전 공손대랑도 내 뇌신지혼을 상대로 월공투계나 다름없는 방어술을 시전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심어검을 자유자재로 쓰고 마음을 깨달은 자들은 월공투계를 특정한 기술로서 연마한 게 아니라 그저 경지가 오르며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경지로 다뤘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암야참을 갓 배우던 시절의 나는 너무나 무공의 깨달음이 낮아서 그런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너무 높은 경지를 억지로 설명하려 들면 도리어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길을 엇나갈 수 있는 것이기에 아수라는 일부러 내게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때는 일단 어떻게든 암야참을 배우는 게 제일 중요했기에 기지도 못하는데 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거짓말을 한 이유는 또 있었겠지…….’
만일 적멸무극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공을 [흐름]을 관통하여 해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나는 부질없이 모든 무공의 파해법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무공에 각자 다른 파해법이 적용된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이었기에 아수라만큼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지 않는한 그걸 맘대로 쓸 수는 없었고 애시당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기에 헛된 고생하지 말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리라. 차라리 그 시간에 진짜 경지를 올리는 게 더 빠르기에!
그걸 고려한다면 암야참을 같은 절대지경의 전투에서 막 써먹을 수 없다는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암야참의 원리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암야참의 선검이 역륜(逆輪)을 돌려서 의념이 완전히 소멸되는 그 순간. [고리]를 역회전시킬 때 모든 혼돈을 허무의 영역까지 되돌리는 ‘끈’이 생겨나며 그 끈을 이용하여 상대를 베는 기술! 그러나 나는 이 중에서 의념을 완전히 소멸시킨 후 상대에게 날리는 것까지만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이상의 단계는 인식할 수 없는 상태다.
대신에 나는 삼백 년 동안 수련을 해왔기 때문인지 선검에서 ‘의념’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 [마음]처럼 느껴지는 파동(派動)이 움직이는 기척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선검이 없을 경우 아직 암야참을 제대로 쓸 수는 없지만, 이제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을 해석할 수 있었으며 [마음]의 기척을 파악하여 그걸 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역근세수경에서 [마음]을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스으으
나는 검을 똑바로 잡으며 뇌신류의 기수식을 취했다.
‘어차피 [마음]을 쳐내는 것이니 자세야 어떻든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내게 가장 익숙하고 편한 검술로서 행하고 싶은 게 무인의 기본적인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영향인지 나는 아까 전보다 훨씬 긴장이 줄어들고 자연체를 유지하기 쉬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몸에 결계를 두른 것 같은 느낌이었고, 나는 이 종이 한 장이 뚫리기 전에 상대의 심어검을 암야참으로 튕겨내는 것이다.
그런 내 임전태세를 보고 있던 공손대랑이 말했다.
“너는 무신을 만난 적이 없는가?”
뜻밖의 질문.
나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공손대랑에게 말했다.
“만난 적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구나. 너 정도의 고수라면 무신이 흥미를 느껴 접근할 만도 하거늘…….”
“…….”
“그렇다면 이제 자연(自然)을 네 검(劍)에 품을 수 있겠느냐?”
스윽…….
공손대랑의 손에는 자연스럽게 나무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막대기에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움찔하고 살짝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이젠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내 감각이 그 차원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암야참을 펼치려고 모든 정신을 집중하는 지금 상태에서는 [마음] 그 자체가 유동(流動)하는 걸 알 수 있었고, 그 유동을 느끼는 것은 여태껏 내가 인지해왔던 칠감(七感)의 영역을 훨씬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에 이르러서야 공손대랑이 쓸 수 있는 검기를 인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검(自然劍).
자연을 검에 품은 상태.
나는 그 말을 잠시 속으로 되뇌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했다.
“어째서 진짜 검(劍)을 쓰지 않고 그런 나무막대기를 쓰는 것입니까? 검에 자연을 담을 수 있다면 형태란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까?”
“…….”
“그렇다면 자연검과 무형검(無形劍)이란 같은 것입니까?”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의문이었다.
예전부터 무형검이라는 경지를 알고 있었으며 자연검 또한 여동빈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실 자연검과 유형검은 같은 경지를 다르게 말하는 것인가? 어쩌면 두 개가 서로 다른 근원을 갖고 있는 것인가?
내 질문에 공손대랑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막대기를 하단으로 내리며 말했다.
“너의 말은 자연(自然)과 무위(無爲)가 같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 또한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네게 질문을 되돌려 주겠다. 너는 자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음…….”
자연이 무엇이냐고?
나는 주변의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폭포, 그리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누가보아도 신록이 우거진 아름다운 자연풍경이었다. 나는 잠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다가 말했다.
“이 산천초목(山川草木)과 대자연을 가리켜 자연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공손대랑은 아무런 감정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은 건물과 문명, 그리고 문화(文化)란 자연이 아닌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 인위(人爲)와 반대되는 것을 자연(自然)이라 하니까요.”
“무공 또한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만든 것. 광대한 대자연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무공은 근본부터 자연에 위배되는 존재인가?”
“…….”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연검이란 근본부터 모순이 되노라. 자연검 또한 무공일지니, 자연검이 아니라 인위검(人爲劍)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 무공과 자연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으음!”
뭔가 심오한 얘기다…….
내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자 공손대랑이 말을 이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란 자연을 법도로 삼는다. 허나 삼라만상에서 무인이 자신의 법도로 삼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무공일 뿐. 무공(武功)이란 도(道)인가 자연(自然)인가?”
“…….”
나는 순간 알아차렸다.
공손대랑은 지금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고 있으며, 동시에 내게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는 걸.
“다시 묻노라. 너는 자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야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저 생각을 굴리는 것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현기가 느껴졌다. 과연 공손대랑은 그 여동빈조차도 모범으로 삼을 만한 전설상의 무인이며 검신이었다.
‘안 돼. 두뇌로 생각해선 안 돼. 무(武)란 그저 이성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무예의 경험이 있는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무공을 과학처럼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사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자가 가장 뛰어난 무공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무공은 어느 정도의 정합성이 있을지라도 결국 무(武)에 쏟는 마음과 정성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았기에, 심득을 그저 두뇌로만 이해하려 들면 결국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걸 나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함을 퍼뜩 깨달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사실……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말입니까?”
공손대랑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종이 한 장 차이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인위(人爲)와 산천초목을 딱히 구별할 것 없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에 속하고 있기에 자연검이라고 칭하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무공(武功) 그 자체가 도(道)니까요. 그렇다면 도를 법으로 삼는 자연이 인위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러하다.”
부웅
그 순간 공손대랑의 막대기가 한 번 허공을 휘저었고, 그녀가 휘저은 공간만큼 저만치 멀리에 있던 커다란 산이 동강나서 반토막났다. 마치 정밀한 칼날로 자라도 대고 자른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절단된 산은 천천히 미끌어지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산을 일검에 베어 버린 공손대랑이 산을 막대기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자연을 벤 것은 명백히 자연현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인위(人爲)다. 그러나 기실 무공은 법(法)이며 도(道)이므로 내 마음이 가는 곳에 의지를 행한 것은 그 어떠한 모순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인(因)도 과(果)도 내 안에 있으며 [마음]만이 인과의 매개체가 되었을 따름이니, 여기서 인위를 따로 정할 수가 없으며, 기실 이 또한 자연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자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의 현기를 음미하다가 대꾸했다.
“그 말은 설마 인위란 처음부터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반대로 인위라는 단어가 오만하다 생각지 않는가?”
공손대랑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인위……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게 마치 당연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생각하여 인과의 흐트러짐을 걱정하는 것이지. 허나 인간이 만든 조잡한 그 어떠한 문명의 결과물도 대자연처럼 완벽무결하지 못하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한 것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었기에 흠결이 생기며 모순(矛盾)이 생기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간 따위가 감히 대우주의 법칙과 인과를 걱정하는 게 주제에 맞는 이야기인가?”
“…….”
“신역(神域)에 이르는 자는 세계의 [마음]에 도달하게 되노니, 그 기준 또한 인간세상을 벗어나야 하는 것. 자연(自然)이란 결국 우주의 인과(因果) 그 자체에 흐트러짐이 없음을 인정(認定)하는 것이다.”
“!!”
그런 정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공손대랑이 말했다.
“무위(無爲)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대도(大道)를 깨달은 자는 자신이 행함이 인위일까 아닐까 걱정하지 않는다. 기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하는 것이다.”
“어렵군요…….”
“그대가 어렵다 생각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무리(武理)를 학문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대는 사실 의미따위는 생각지 않아도 되리라.”
공손대랑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심어검을 막아내어 나와 겨룰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머리가 아닌 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아마 그럴 것이다.
“물론 여동빈의 무형검과 나의 자연검은 극한의 수준에서는 서로 추구하는 게 달라진다. 여동빈의 무형검만이 지닌 특징이 따로 존재하는데, 그건 아마도 그가 강렬히 구세(求世)를 염원하기에 만들어진 특징이겠지…….”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중에 이 무신궁에서 본인과 부딪히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
공손대랑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와 공손대랑 사이는 점차 좁혀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시시각각 그녀와 나 사이의 [간격]이 서로의 영역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수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간격다툼이었지만 더욱 각별한 이유는 공손대랑의 간격은 본디 내게 전혀 읽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간격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심어검으로 한 수에 내 방어를 뚫어도 반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암야참을 제대로 쓰기 시작하니 보이는군.’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공손대랑의 간격이라 부를 수 있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확연히 공손대랑이 말했던 대로 신역의 초입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였다. 아까까지는 신역의 전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허망하게 지고 있었지만 이제야 같은 차원에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치명적인 문제를 알아채고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큰일났다…….’
이기려면 반격을 하던가 공격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다.”
내 곤란한 기색을 알고 있다는 듯 공손대랑은 여유롭게 앞으로 한 걸음을 옮기며 막대기를 선선히 횡(橫)으로 베었다. 무척 느리고 단순한 한 동작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전혀 예기치 않은 자연검의 일격이 그대로 덮쳐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속도나 박자는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인 [마음]의 파장을 느껴서 쳐 낸다!!
암야참(暗夜斬)
투웅!
나는 다시 한번 암야참으로 공손대랑의 자연검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나 반격 따위는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음]의 낌새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심력과 집중력을 다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격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무형(無形)이기 때문에 초식(招式) 자체가 없어…… 즉…… 상대의 공격을 적절히 무효화시켜봤자 초식이 없기 때문에 반격할 틈 자체가 나지 않아!!’
자연검이자 실체가 없는 무형검이라는 게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나?!
보통 이 세상의 무공이란 건 모두 초식이 존재하기에 그 초식을 적절하게 무효화시키거나 약점을 끊어내게 되면 무조건 반격하거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건 절대지경에서도 무조건 통하는 법칙이었는데, 자연검은 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초식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암야참으로 베어보았자 상대에게 틈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상대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공격할 수 있는 것인데 초식이나 동작의 헛점 따위가 어디에 있을까!
이런 특징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기에 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무형검이나 자연검은 굉장히 높은 경지겠구나 정도만 생각했을 뿐 설마 방어는 몰라도 반격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니?! 이런 건 막상 당사자와 싸워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순간 머릿속에 그래도 초상능력이나 신력을 쓰면 반격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이 무신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공간에서 신역의 무인들이 철저한 [사냥꾼]의 역할을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났다.
타탕!
타앙!!
그로부터 약 이십여 번의 공격이 날아들었고 나는 그때마다 암야참을 써서 공손대랑의 자연검을 버텼다. 그러나 나는 점차 수세에 몰리는 걸 깨닫고는 이마에 구슬땀이 났고, 공손대랑은 그때쯤 자신의 나무막대기를 선선히 거두며 말했다.
“네가 신역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건 이런 차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
“[마음]의 경지를 깨달았으되 그 [마음]을 온전히 검에 담을 수 없다면 결코 반격을 할 수 없노라. 네가 깨달음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쓰는 건 아마 구천현녀의 선검(仙劍)일 터인데, 과연 그런 식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
한마디 한마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확실히 아무리 내 방어가 잘 된다고 하더라도 상대를 공격할 수 없다면 결국 질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암야참을 편법으로 쓰기 위해 소환한 선검 또한 그 유지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선검의 힘을 모두 소모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자연검에 당하고 말 것이리라.
‘[마음]의 검을 되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파장을 인식하는것만으로는 안 돼. 나 또한 마음의 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이 단시간에 깨달을 수 있는 걸까?
신역의 초입을 넘어서 완전한 신역절기를 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 찰나지간에 나 같은 둔재가 깨달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천재 진소청이라 해도 확신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이대로 가면 패배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감이 일어났다. 절대지경의 자제력으로 간신히 동요를 감추었으나 그 미세한 동요조차 읽었는지, 공손대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일 검(一劍)으로 내게 파고들었다.
명치를 노리고 날아오는 일격!
나는 다시금 암야참으로 걷어내려 했지만 뭔가 다르다는걸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뒤늦게 실제로 검을 휘둘렀다. 절대지경의 기준으로 꽤 대응시간이 늦었기에 나는 저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막아지나?’
따당!
다행히도 내 검속이 굉장한 쾌검의 영역에 이르러 있었기에 나는 간신히 공손대랑의 일격을 막아낼 수가 있었다. 공손대랑은 헛점이 보인다는 듯 유연하게 나무막대기를 휘둘러 마치 조그마한 폭풍 같은 검권(劍圈)을 형성했고, 나는 그 칼바람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는 전력을 다해 검을 전개했다.
뇌신검무(雷神劍舞)
채채챙!!
치직거리는 번갯불이 허공을 마구 스치는 동안 나는 공손대랑과 찰나간에 무려 이백 번 이상을 격돌했다. 나는 미친 듯이 몰아치는 공손대랑의 검기(劍技)가 마치 파죽지세처럼 느껴졌지만 구궁파천뢰를 끌어내어서 어떻게든 밀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리고 잠시동안의 공세를 버텨내자, 공손대랑은 더 이상은 재미를 볼 수 없음을 깨달은 듯 가볍게 나무막대기를 거두어 뒤로 물러섰다.
“헉…… 헉…….”
나는 방금 전 공손대랑의 공세가 엄청났기에 숨을 몰아쉬었다. 말 그대로 숨도 못 쉬고 막아내었는데 온전히 내 실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극한의 집중력과 운 덕에 막아낸 듯했다. 만일 평범한 집중상태였으면 무조건 공손대랑의 검기에 팔다리가 썰렸으리라 생각하니 손발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그런 점이 아니었다. 나는 공손대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연검만으로도 승부를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허실(虛實)을 써서 직접 공격하는 건 나를 얕보아서 그런 겁니까?”
방금 전의 공격은 마음의 검이 아니라 진짜 검격이었다. 그래서 암야참을 쓰지 않은 다른 수법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손대랑이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 비대칭전력을 버리고 일부러 비교적 불리한 수법으로 공격했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얕보였다는 불쾌감이 들었다.
그러자 공손대랑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얕보기는커녕 최선을 다하고 있다.”
“뭐라고?”
“여동빈을 생각해보거라. 과연 무엇이 자연검의 본질인지…….”
“…….”
설마 저건 내게 자연검의 단서를 준 것인가?
헷갈려하고 있을 때 공손대랑은 천천히 나무막대기를 들어서 자신의 가슴팍 정중앙에 똑바로 검기를 세웠다. 그러고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내려서 조그마한 원을 그리더니 말했다.
“이번에는 공손검법으로 겨루어보자. 네가 어느 정도로 그 검술을 쓸 수 있는지 보고싶다.”
“후회할 것입니다.”
“후회하게 만들어 보거라.”
타앗!
공손대랑은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쇄도했다. 딱히 뇌신지혼 같은 걸 쓰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빠를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뇌신지혼을 상대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설마 [마음]을 먼저 옮기고?’
그리고 대응할 수도 없는 순간에 공손대랑의 횡격이 어깨를 노리고 날아왔고, 나는 그 초식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공손검법 제 19결 주성관검(酎星慣劍)!’
공손검법은 살면서 수천번을 넘게 연습하고 익혔기에 나는 모든 초식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나는 주성관검에 맞는 파해식을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 초식에 맞게 하단을 베며 역공을 했고, 공손대랑은 주성관검의 파해식의 파해식을 아는 듯 마치 물흐르듯이 연속으로 제 8결인 우수경참(雨睡競斬)을 빠르게 전개하여 내 목젖에서 갈비뼈까지를 빠르게 내려베었다.
까앙!
나는 가볍게 우수경참을 막아내었고 몸을 반회전하며 간격을 잡았다. 그리고 그 간격을 잡는 짧은 순간에 나와 공손대랑 사이에 무언의 약속이 맺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까가강!!
어느 새 나는 공손검법 내의 초식만을 써서 공손대랑과 검을 겨루고 있었으며 공손대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와 공손대랑은 둘 다 이 검술에서 대가(大家)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에 하나하나의 초식을 무척 미세한 배율까지 신경 쓰며 시전했고, 이윽고 검술의 대결은 순수한 기술의 정밀도를 겨루게 되었다.
나는 일백여 초수를 겨루는 동안 경탄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 인정하긴 싫지만…… 엄청나다.’
도저히 공손대랑의 공손검결 이해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사실 원래는 정확한 파해식의 해답이 모두 존재할 터인데 나는 9할 7푼 정도의 확률로 정답을 맞추고 있었고 공손대랑은 10할, 말 그대로 무결(無缺)하게 공손검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내가 손해를 보고 있지만 그 조그마한 손해가 축적되다 보니 나는 같은 검술을 쓰고 있는데도 계속 공손대랑에게 밀리고 있었다. 사실 일 초식을 펼칠 때마다 수백 수천개의 변화가 파생되는데도 저만큼 완벽하게 파해식을 쓸 수 있다는 게 말도 되지 않았다.
나 또한 눈감고도 공손검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수련을 해왔는데 그런 나보다도 공손검법을 훨씬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니! 이것이 공손검법의 종사(宗師)인가?!
물론 이 상황에서도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 삼보절기를 쓴다면 내 기술의 부족함을 때우면서 완벽히 피하고 막는 게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다른 무공을 끼어들게 할 경우 무인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이 공손검법의 대결에서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따당!!
내 검과 나무막대기가 부딪히자 검명(劍鳴)이 맑게 울렸고 검기의 반탄력에 주변의 흙거죽이 치솟았다. 잠시동안 토사 때문에 서로의 시야가 막혀 있었지만 이미 서로가 심안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다음 순간 나는 용의 역린을 올려베듯 크게 베었고 공손대랑은 공손검법의 주하선인(週霞仙人)의 검초로 내 공격을 확실히 막았다.
슈슉
그리고 갑자기 처음으로 공손대랑의 검결이 일변했다. 그녀의 검은 여태껏 공손검결에 없었던 것 같은 변초를 파생시켰고, 나는 마치 뱀처럼 간교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단천처럼 깔끔하게 뻗어져나오는 검기에 그만 넋을 놓고 말았다.
‘이, 이건…….’
공손검법이라는 검술의 완성인가?
투콱!
다음 순간 나는 견정혈을 꿰뚫리고 말았다. 처음으로 검술의 대결에서 크게 밀린 것이다. 피가 솟아오르는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서자 공손대랑이 말했다.
“공손검법의 원류(原流)를 아예 쓰지 않고 내가 창작한 변형류만 쓰는구나. 왜인가?”
“당연히 당신이 개발한 변형류가 훨씬 더 실전성이 높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방금 내가 쓴 초식이 무엇인지 아는가?”
“…….”
나는 망설이다가 대꾸했다.
“무적삼검(無敵三劍).”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랬다. 실전성이 하나도 없는 그 제사의식의 춤사위와 같은 세 개의 동작 - 무적삼검이 방금 전 내 견정혈을 꿰뚫은 절세검초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보통 검수라면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충분히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세 개의 초식이 융합되어 원래 모습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지만 나는 오랫동안 공손검법을 수련하며 검초에 남아 있던 미세한 흔적을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손대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황제 공손헌원의 영향력을 봉인하기 위해 원류를 봉인하였지만, 그게 원류가 약하다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 반대로 무적삼검을 연구할수록 여기에 고차원적인 전투를 염두에 둔 현기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지.”
“정말입니까?”
“그렇다. 제사의식의 무공이라 하여 약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단지 인간의 수준에서는 그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 없을 뿐이었던 것이지.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스윽
나무막대기로 나를 가리킨 공손대랑이 말을 이었다.
“너는 [마음]을 깨달았기에 너의 진정한 검술을 개화(開花)할 자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거라.”
“?”
나의 진정한 검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나한테 저 무적삼검의 초식을 배우라는 건가?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공손대랑은 나무막대기를 중단세로 잡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가르침은 여기까지다. 이제 끝을 내자꾸나.”
“…….”
어찌되었든 끝까지 와 버린 건가…….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리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 모든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트리무르티를 끌어올려 방금 전 입었던 견정혈의 부상을 치유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 공손대랑이 공격해오면 이런 사소한 치료가 아무런 의미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깐…… 그렇다면…… 대비를 해야지.’
트리무르티(三位一體)!!
그 순간 나는 몰래 트리무르티의 힘으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술수를 펼쳐두었다. 공손대랑은 그 술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내 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고, 나는 암야참을 펼칠 준비를 하며 그녀를 고요히 응시하였다.
쿠르르르…….
여전히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풀벌레 소리조차 천둥처럼 들려올 정도로 집중력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는 뇌가 통째로 울리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런 감각 하나하나에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절대지경의 칠감을 온통 끌어올리고도 모자라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눈앞의 상대가 언제 [마음]의 검을 쓰는지 감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손대랑의 눈에서 파르스름한 안광이 흘러나온다.
신역절기(神域絶技)
자연검(自然劍)
그 순간, 나는 공손대랑의 모든 기운과 의념천주가 하나의 거대한 광검(光劍)으로 변모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광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어느샌간 공간에 나타나서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그 광검이야말로 공손대랑이 쓸 수 있는 최대의 기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광검의 [마음]이 나를 향하는 순간 - 나는 그 기술의 진짜 이름을 들을 수가 있었다.
최종절기(最終絶技)
유성검(流星劍)
빛이 쏟아지는 순간, 나는 천천히 날아오는 광검의 압력에 그만 무릎에 힘이 크게 풀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마음]의 파장을 쳐내기도 전에 그 기세에 꺾여서 내가 저절로 심공에 굴복해 버린 것이다. 나는 광검에 담겨 있는 마음의 힘이 여태껏 사용했던 자연검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뒤늦게 암야참으로 광검을 쳐내려 하는 순간, 빛의 검이 우주를 가로지르는 듯한 환영과 함께 나는 내 가슴팍이 쩌억 갈라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커억…….”
나는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암야참으로 최소한의 급소를 보호하는데 성공했기에 치명상은 입었으되 즉사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명확히 갈려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공손대랑에게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여, 여기까진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토록 확실한 실력차라니! 이 무신궁에서 완성된 실력을 지닌 공손대랑을 쓰러뜨리기에는 아직 내 무공수련이 너무나 부족한 듯했다. 그도 그럴것이 상대는 신역에 오르고도 수천 년 이상 연마했지만 나는 이제 갓 초입에 들어갔기에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을 때 공손대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 다시 도전하거라. 너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구나.”
“크…… 윽…….”
[다음]이라는 게 있을까?
이 무신궁에서 죽어서 원래세계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다행이겠지만, 만일 브라흐마가 걱정하던 것처럼 계승지에서 영겁토록 방황하게 된다면 전생능력조차 의미가 없다. 나는 좋든 싫은 이번 싸움을 이겨야 했던 것이다.
실력차를 인정할 수는 있어도 이대로는 패배할 수는 없다. 내게 걸려 있는 걸 알고 있기에 전생자의 의지로 무조건 버텨야만 했다. 그러나 도저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츠츠츠츠
그 때 내가 걸어놓았던 ‘보험’이 발동했다. 내 의지력과 생명이 빠르게 꺼지고 있는 상황에서 트리무르티가 저절로 내 생명력을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큰 치명상을 입었어도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기에 공손대랑의 절초가 날아오기 전에 미리 대비해놓았다. 그러나 공손대랑의 절초가 생각보다 너무 강력해서 지금 힘을 회복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었다.
그래도 버텨볼까.
승산이 단 하나도 없더라도 끝까지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 집념을 걸고 내가 검을 쥔 손에 힘을 꾹 주는 순간이었다.
[ 백웅.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
…… 이 목소리는?
[ 이제는 내게 맡겨라. 지켜보고만 있기가 근질근질했거든.]
무척 익숙한 목소리.
‘너, 너는!’
나는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고는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어째서 그가 내 안에 있는지를 알아채고는 당황하면서도 반가워졌다. 설마 그런 게 가능했을 줄이야!
“끝이다.”
내가 상황에 적응하기도 전에 공손대랑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까앙!!
“…….”
나를 끝장내고자 마지막 일격을 날리던 공손대랑은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물끄러미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를 쳐다보았다. 흐릿한 환영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반투명한 검으로 공손대랑의 나무막대기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희끄무레한 영체는 나를 잠시 뒤돌아보더니 말했다.
[ 역시 망령의 상태로는 검에 힘이 잘 안 들어가는데? 트리무르티라는 걸로 나한테 육체 좀 만들어줘라.]
“…….”
나는 홀린 듯이 트리무르티의 기술을 써서 그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신체를 현실에 만들어내었다. 그러자 망령은 자연스럽게 그 신체 속으로 흡수되었고, 이윽고 육체의 눈을 뜨면서 신난다는 듯 외쳤다.
“하하! 역시 진짜 육체가 있으면 좋군.”
슈욱
그러자 공손대랑은 그때까지 그 자와 마주치고 있던 나무막대기를 빠르게 휘둘러 다른 변초로 그 존재를 공격했다. 완벽한 공손검법의 연계였기에 굉장히 막기 까다로워 보였지만, 그 존재는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종(從) 베기를 하며 공손대랑의 초식을 걷어내었다.
까앙!
너무나 완벽하게 파해된 공손검법! 그가 완전히 검술의 흐름을 읽고 있었으며 심지어 공손대랑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을 수도 있다는 증거였다. 심지어 뒤로 약간 물러난 공손대랑의 눈에 잠시 낭패한 기색이 서렸다.
투둑
그녀의 나무막대기가 반토막으로 잘린 것이었다. 마치 천하의 명검과 같이 그 어떠한 공격에서도 버티고 있던 나무막대기가 고작해야 새로이 나타난 존재의 반격 한 번에 잘려나간 것이었기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공손대랑은 자신의 나무막대기의 절단면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 존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고수로군. 이름을 밝혀라.”
그 존재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수라(阿修羅)!”
나의 동료이자 검술스승.
28회차의 마지막까지 황제 공손헌원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주었던 그 아수라가 장내에 출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