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17화
나는 자연검이라는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자연검?’
그것은 과거 여동빈과의 대화에서 들은 적이 있는 무술경지였다.
[그리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자신의 뜻이 천지와 통하게 되는 천지교태(天地交泰)에 이르게 되며, 절대의 경지(絶大地境)에 오르게 된다. 이 경지에서 인간의 심상을 초월하여 천지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며, 자연검(自然劍)이 되는 것이다.]
여동빈의 설명에서 그 경지는 절대지경에 속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인가?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의념천주로 대개의 절대지경 고수는 자연에 의념을 담아 무기로 쓸 수 있지만…… 당신은 그 기술을 신역(神域)까지 갈고닦은 것입니까.”
풀잎에 검강을 담아서 멀리있는 적을 격살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손대랑의 풀잎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서 단숨에 모든 방어를 꿰뚫고 의지대로 적을 타도하는 경지에 이르러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연검이라고 부르는 별개의 신역절기가 틀림없었다.
또한 내 추측이긴 하지만 여동빈 또한 생전에 자연검을 시전하던 공손대랑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무공을 완성한 듯했다.
공손대랑은 내 말에 잠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직도 눈에 투지가 살아 있구나. 과연 여동빈이 인정한 자 답다.”
“…….”
“동시에 억울한 빛이 눈동자에 담겨 있는 게 보이는구나.”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먹먹한 심정으로 잠시 먼 산을 쳐다보았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처럼 귀신처럼 사람의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후 진심을 토해내었다.
“그렇습니다. 이곳이 무신궁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당신에게 쓰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신력이 천문학적으로 위력이 약해지는 이 무신궁의 특성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리 신역절기를 쓰는 공손대랑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공손대랑의 신역절기가 말도 안 되는 위력을 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수준의 적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싸우더라도 절대 지지는 않을 것이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억울할 수밖에 없다. 장소와 시운 또한 무사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으로 반강제로 끌려오듯이, 그것도 도전할 준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패배를 어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패자는 유구무언이었기에 방금 전 공손대랑에게 치명타를 당한 나로서는 먼저 입밖에 낼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자 공손대랑이 나직이 말했다.
“이 무신궁에서 내가 싸워서 이김은 정정당당하지 못한 게 맞다. 인과율이 무제한이라는 건 사실 무신이 일부러 신들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나는 뜻밖의 소리에 고개를 들어서 공손대랑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 무신궁이 백좌(百座)의 본진이라 생각하는가?”
“……아닙니까?”
내 반문에 공손대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 무신궁에 기거하는 게 아니다. 백좌의 자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니, 우리는 잠시 이곳에 불려온 것에 불과하다.”
“……!!”
“무신궁은 처음부터 사냥터. 우리는 사냥꾼의 역할이다.”
그렇게 말한 공손대랑은 아마 수십 리 밖에 있을 브라흐마를 쳐다보듯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자와 같은 존재들이 바로 사냥감이고.”
뭐라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이윽고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 [검은 산양]은 나를 강제로 옥좌 앞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옥좌에서 외신의 노래를 피해서 살아나갈 길은…… 이 옥좌 내부로 오는 것밖에 없었어. 그렇다면 [검은 산양]은 처음부터 내게…….’
무신궁(武神宮)으로 가도록 유도했단 말인가?
“…….”
근거가 빈약해 보였지만 정황과 내 직감으로 봐서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일 그 외신이 나를 여기로 유도한 거라면 어째서 일부러 유도한 걸까? 굳이 [신의 사냥터]라고 할 수 있는 이 무신궁으로 보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 걸까?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번득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한마디를 기억해 냈다.
[무신(武神)은 그대를 놓아주기를 원하니 존재의 자율의지가 무엇인가를 가늠해보고자 함이라.]
분명히…… 무신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신의 사냥터인 무신궁에 내가 왔다는 건…….
‘천암비서의 끝자락…… 옥좌…… 전생자와의 전투…….’
마구 흩어져 있던 온갖 단서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기 시작되었다.
나는 여태껏 오리무중처럼 완전히 흐려져 있던 내 앞길이 갑자기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다가 처음으로 중심이 잡힌 것만 같았다. 책사들이 별다른 조언을 주지 않았음에도 지금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감각에 약간의 전율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단순히 여기에 오게 된 내막을 깨달은 것만으로는 눈앞의 공손대랑에게 이길 수 없다. 지혜를 얻는 것과 이 자리에서 공손대랑과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찰나에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심득(心得)을 갈무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내 말에 공손대랑은 특유의 무심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무런 준비없이 자연검을 상대했으나 방금 전의 싸움에서 느낀 게 있습니다.”
그러자 공손대랑이 나직이 대꾸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다 잡았는데 놓아주는 경우가 있는가?”
공손대랑의 한마디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그만큼 잔인할 정도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공손대랑이 사냥터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자신이 이 전투에서 여동빈과 달리 나를 봐주지 않는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한 것! 나는 공손대랑의 제자도 인연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사냥꾼으로서 소환된 임무를 저 버리고 내게 후의를 베풀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를 해치우는 건 사냥꾼으로서 사냥감을 잡는, 당연한 일에 불과한데 왜 나를 봐줘야 하는지를 묻고 있으리라.
‘침착해.’
위기일수록 더욱 배짱을 부려야 길이 나는 법이다.
나는 도리어 여유를 띄며 말했다.
“죽이시려거든 어쩔 수 없지요. 재전(再戰)할 경우 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 싹을 끊어놓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
그녀는 찬찬히 들여다보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속셈을 모르는 건 아니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도 무인의 역량. 백웅 너의 실력이라 인정해주겠다.”
잠시 후 공손대랑은 휙 하고 자신의 나무막대기를 아무데나 던져 버리고는 말했다.
“폭포 아래의 연못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가 되면 찾아오너라.”
후웅
공손대랑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사라져 버렸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고도 넘어가줬군…….’
만일 공손대랑이 조금만 변덕을 부렸다면 나는 죽었을 테지만 다행히도 공손대랑은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어서 쪼잔한 짓은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하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긴장이 풀리는 순간 심장에서 격통이 치솟아올랐다.
“크윽!”
그러고 보니 여전히 심장이 터진 상태였지!!
‘이런 제기랄!’
공손대랑한테 죽는 건 모면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의념천주로 잠시 가짜 심장을 만들어서 모면했지만 무한히 이런 억지술수를 연장할 수는 없다! 의념천주라는 것도 힘의 한계가 있었기에 이대로라면 심장이 터진 상태로 되돌아가서 그대로 절명하고 말 것이리라.
“끄으으윽…….”
내가 심장 쪽을 부여잡고 고통에 신음만 흘리고 있을 때였다.
“정말 그 가공할 자연검에 대항할 심득을 얻은 것인가?”
어느 새 근처에 브라흐마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멀리서 몰래 전투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약간의 의혹을 담은 채 나를 쳐다보는 브라흐마를 발견한 나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아니오. 내가 천재도 아니고 어떻게 한 번에 그런 걸 깨달을 수 있소?”
“뭐? 그럼 어째서…….”
“지금까지는 얻지못했다 해도 숨만 붙어 있으면 앞으로 미래에 얻을지도 모르니까.”
“…….”
이윽고 브라흐마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전생자…… 전생자! 과연 어째서 전 우주의 명운이 그대에게 달려 있는지 지금 이해했노라.”
“웃고 있을 때가 아니오…… 내 심장이 터져 버려서…….”
“심장을 [창조]하게.”
“……!!”
“자네도 아까 느꼈겠지. 공격적인 권능이나 전투에 쓰이는 것들은 거의 못 쓸 지경이 되어 있지만 물체를 창조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제약이 없어. 마침 자네도 창조의 힘을 쓸 수 있으니 심장을 다시 만들어 넣는 거야.”
그렇게 말한 브라흐마가 수인(手印)으로 삼각형을 만들며 말을 맺었다.
“트리무르티로.”
나는 브라흐마의 조언대로 트리무르티의 기법을 쓰기 위해 눈을 감았다.
‘중앙의 보석이 빛난다…….’
나는 세 개의 신력을 각각 다른 영역에 배치하고는 바로 트리무르티를 발동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내 심장을 생각했고, 이윽고 삼위일체의 기운이 융합되면서 점차 내 비어 있던 가슴 속에 무언가가 생성되는 게 느껴졌다.
두근…….
심장이 다시 생겨나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휴우.”
내가 회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브라흐마가 말했다.
“이 무신궁에서는 잘 못 느끼겠지만 그냥 쓰는 창조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사물과 달리 트리무르티로 만들어진 사물은 보다 더 견고하며 인과율의 반동이 거의 없네.”
“알았소.”
“그나저나 어찌할 셈인가? 심득도 없이 공손대랑과 다시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
“…….”
잠시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지금부터 어찌할지가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대로 다른 수를 내어서 공손대랑에게서 도주하는 게 최선이다.’
공손대랑은 딱히 언제까지 찾아오라는 유예를 두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 단시간에 자연검을 꺾을 심득을 얻을 확률은 너무나 적었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모든 걸 걸고 도전하는 건 용기있다기 보다 멍청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웃기는 건 그렇다고 도주하는 것조차도 가능한가 하면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법.
지금 나와 브라흐마는 진법 속에 갇혀 있는 셈이었다. 이 진법은 겉으로는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적인 존재들조차 사냥할 수 있는 걸로 봐서는 무신의 힘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달리 말하자면 공손대랑에게서 달아나려면 이 진법부터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잔잔한 초원에서 근처의 바위를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바위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서 새삼 의아함을 느꼈다.
‘어째서 무신궁은 팔괘를 이용한 진법을 쓰고 있을까? 팔괘는 근본적으로 복희의 지혜이자 힘이거늘.’
물론 복희의 권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실 팔괘를 이용한 모든 효과가 복희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라고 봐도 좋았다. 복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팔괘진법의 효과 또한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무신쯤 되는 존재가 아무리 삼황이라지만 복희의 팔괘에 이토록 얽매일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팔괘를 매만지며 옆에 있던 브라흐마에게 말했다.
“브라흐마. 무신은 어째서 무신궁에 들어오는 신을 사냥하려 무신백좌를 이곳에 소환하는 것이겠소?”
“…….”
브라흐마는 옆에서 침묵하다가 약간 고통스러운 기색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그 또한 인과율의 혼란을 막으려는 게 아니겠는가? 어찌 되었든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시련을 통과하여 [큰 굴레]를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무신은 그렇게까지 의무감에 넘치는 존재가 아니오.”
지금까지 봐왔던 바에 따르면 그랬다. 무신이 외신들에게 하청을 받듯이 임무를 받거나 세상을 지키려는 의무감에 행동하는 것도 뭔가 말이 되지 않았다. 무신은 절대적인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고 사실 이런 무신궁의 존재 자체가 그동안 보아왔던 무신의 행동양식과 철저히 위배되고 있었다.
“단정을 짓는군. 하긴 방금 전 내 생각은 내 상황에만 매몰된 확증편향일수도 있지. 그러면 나보다 비교적 무신을 잘 아는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소화.”
“응?”
“여동빈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소화를 시키려는 거라고 생각하오.”
브라흐마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생각대로라면 무신은 더 무서운 존재일수도 있다.’
상식적이라면 브라흐마의 말대로 [큰 굴레]의 혼란을 막고자 의무적으로 출현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철저히 무신이 자신의 행동양식에 맞게 행동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신궁의 시련에 얼떨결에 끼어든 부외자(部外者)가 아니다.
도리어 지금 내 옆에 있는 브라흐마보다 훨씬 더 이 사태의 중심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생각을 마친 후 천천히 바위에 새겨져 있는 팔괘에 손을 대었다.
지잉
마치 처음부터 새겨져 있던 각인처럼 존재하던 팔괘가 내 의지에 감응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탁록시대에서 복희의 신력에 익숙해져 있던 덕인지는 몰라도 팔괘의 이론적 구조를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본능의 영역에서 팔괘를 다루는 게 가능했다.
‘신력을 직접 다루는데 익숙해진 이상 더 이상 신술이나 술법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어…… 팔괘에 대해서는 그동안 알고 있던 정도의 지식이면 차고 넘쳐…… 숨을 쉬는 것과 같다.’
복희가 나를 가리켜 ‘신’이라고 칭했던 게 무슨 의미인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아마 팔괘를 수백 년간 연구한 인간 대술법사도 지금의 나 정도로 숨쉬듯이 팔괘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는 없으리라.
나는 팔괘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마치 깊지 않은 열쇠고리의 조그마한 걸쇠의 합을 맞추듯, 딱 하고 정해진 팔괘의 흐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붙잡고 조금만 조작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웅!!
이윽고 눈앞에는 딱 사람 하나가 통과할 만한 초차원의 통로가 생겨났다. 총천연색의 통로를 본 브라흐마가 감탄한 듯 말했다.
“복희의 힘에 무척 숙련되어 있는 것 같군. 나도 그렇게 빠르게는 출구를 찾아내지 못할 텐데.”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신궁을 나가시오.”
“응? 무슨 말인가?”
나는 물끄러미 내가 만들어낸 통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당신은 창조신이 아닌 사냥감에 불과하오. 또한 나는 당신을 보호하며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주제넘은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니, 일단 이 무신궁에서 탈출하기를 바라오. 이건 내게 트리무르티라는 비기를 가르쳐준 당신에 대한 의리요.”
“……그 말은, 자네 혼자서 공손대랑과 결판을 내겠다는 말인가?”
“맞소.”
브라흐마는 실소를 터뜨렸다.
“크큭…… 갑자기 왜 배려해주는 척인가? 어차피 이 시련을 외면해봤자 나는 더 이상 뒤가 없네. 무신궁 밖을 헤매이고 있다 해도 결국 우주의 흐름에 휩쓸려 영겁토록 망자가 될 뿐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내게 무신궁을 탈출하라고 하는 것인가?”
“당신은 역시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군. 말은 그렇게 해도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소.”
“뭐?”
이어진 내 말에 브라흐마가 흠칫했다.
“시련을 포기할 생각만 있다면 당신이 왔던 그 폭포를 거슬러 올라 등용문(登龍門)을 오르듯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지 않소? 아니 반대겠지. 이 계승지에 오는 게 폭포를 거스르는 것이라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반대로 다시 그 폭포에 몸을 싣는다면 아주 쉽게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은 이 시련에 도전하지 않으면 뒤가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시련을 통과하여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을 뿐.”
브라흐마는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놀랍군. 어벙하고 둔한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지혜로웠단 말인가?”
“그저 지금까지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오. 아무튼 내 말이 틀렸소?”
“아니, 맞네. 자네 말대로 무신궁의 시련을 포기하고 원래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어.”
그러더니 브라흐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브라흐마스트라를 시전하여 계승지에 오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알고 있는가? 이대로 원래 세계로 귀환하더라도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비참한 꼴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포기하지 않는 브라흐마를 쏘아보며 냉막하게 말했다.
“그것 또한 엄살이오. 당신은 그저 전쟁에 패배하여 자존심이 긁힐 뿐, 아무리 수백 마리의 [옛 지배자]라 하더라도 당신들 정도 되는 최상위 신을 추살하거나 나포할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시바와 비슈누가 후대까지 멀쩡히 살아남은 걸 알고 있단 말이오.”
“…….”
“당신은 [계시]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지구에서 도주하는 굴욕을 참을 수 없을 뿐이오.”
“그게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계시]의 시대까지는 수만 년이 남았지만 신들의 시간으로는 찰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 번 이 시련을 포기하면 영겁토록 나는 재도전할 수 없는데 이리도 쉽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약간 사납게 말을 이었다.
“좋게 말하니까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군. 결국 나를 이용하여 무신궁에서 삼전(三戰)의 결투에 얹혀가듯 통과해서 은근슬쩍 소원을 이루겠다 그 말 아니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이용당할 생각이 없기에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도전을 포기해달라 말하는 것이오.”
“네놈이…….”
쿠르르르…….
그러자 브라흐마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그 기운을 보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소? 당신의 소원 따위는 외신들에게 그저 놀잇감에 불과하단 말이오. 하잘것없는 희망 때문에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농락당하는 당신의 행동이, 신들이 인간을 갖고노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이오.”
“……!!”
“이쯤 되면 눈치챌 때도 되었을 텐데.”
브라흐마는 진정으로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동안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더니 이윽고 장탄식을 했다.
“……그런가…… 나야말로…… 운명에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건가…… 내가 아닌…… 그대가 바로 시련의 주체…….”
“…….”
“흐…… 흐흐흐…… 전생자여. 내가 굴레 속의 존재라는 걸 인식시켜줘서 참으로 고맙군. 그렇다면 나는 운명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모든 걸 허상이라 생각하고 굴욕감을 끌어안고 어차피 반복될 무한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으라는 말인가.”
나는 브라흐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구하겠소.”
브라흐마는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나를?”
“그렇소. 당신이 아까 부탁했던 대로 당신과 그 형제들을 파멸의 굴레에서 구해낼 것을 약속하겠소. 내 이름을 걸고.”
“……!!”
“비참하게 황제 공손헌원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해 주겠소.”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거 창조신이라고 해도 구해보지 뭐!
브라흐마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흐하하…… 하하하하하!! 전생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단 말인가! 그래…… 처음부터 내가 인과의 조각이었다는 말이겠지! 좋다, 그 정도면 나 또한 내 운명에 순응할 가치가 있으리라!”
저벅
브라흐마는 통로를 향해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힐끔 나를 뒤돌아보고는 말했다.
“백웅이여. 나는 반드시 버티겠다. 우주가 끝날 때까지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다.”
“잘 가시오.”
“무운(武運)을 비네.”
스아앗
브라흐마가 무신궁을 나갔다. 나는 그가 탈출하는 걸 끝까지 보고 있다가 말없이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
지금 나는 뭔가 묘한 상태였다. 방금 전 브라흐마한테 말할 때도 그렇고 지혜와 힘이 평소보다 몇 배는 도야되어 있는 기묘한 각성감이 들었다. 공손대랑의 자연검에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서 각성했다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마치 평소에는 쓰지 않던 잠재능력을 마저 끌어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동안 나를 얽어매고 있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평소와 달리 상황을 파악하는 시야와 지혜가 엄청나게 상승해 있는 것 같았다. 브라흐마가 의아해했듯이 갑작스러운 변화라서 나조차도 얼떨떨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서 또 한 가지 가설을 세웠고 아마 그게 맞으리라고 생각했다.
‘폭포 아래의 연못이라고 했지.’
지체할 시간은 없으니 바로 찾아가 보자.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폭포 아래의 연못을 찾을 수 있었다.
쿠르르르…….
장중한 소리와 함께 폭포가 떨어지는 광경은 아름다웠고, 그 앞의 연못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백의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는가?”
나는 공손대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공손대랑이여.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하라.”
“당신은 자연검을 이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베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내게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
“혹시 당신은…… 인과(因果) 그 자체를 베어 버릴 수 있는 겁니까?”
공손대랑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역시 그런건가.
‘공손대랑은 방금 전 나를 베면서 내게 걸려 있던 무형의 족쇄도 함께 베어 버린 것이다.’
의도해서 벤 건 아니리라.
그냥 이상한 게 있으니까 같이 베어 버린 것이 불과하리라.
말 그대로 심어검의 정수!
육체에는 거의 부상도 입히지 않고 원하는 것만 벨 수 있는 저 솜씨는 가히 검신(劍神)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공손대랑에게 마저 질문했다.
“그 인과를 베는 검기(劍技)는 이 무신궁에서만 쓸 수 있는 거겠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모든 무신백좌가 현실에서 그 힘을 사용했을 테니까요.”
“맞다. 인과율의 제약이 사라지는 이곳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그 검(劍)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무엇입니까?”
“…….”
공손대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자야말로 무신의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자겠지. 적어도 백좌 내에는 없다.”
“그렇습니까…….”
“여동빈과의 인연으로 네게 베풀어줄 수 있는 온정은 여기까지다. 생사결전을 준비하라.”
스으…….
공손대랑의 손에 풀잎이 들렸다. 저 풀잎 하나가 아까 내 심장을 폭발시켰던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보자마자 움찔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이윽고 공포를 이겨내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하나의 초식을 준비했다.
“간다.”
공손대랑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그대로 빛과 같이 발검(拔劍)했다.
촤악!
다음 순간, 공손대랑의 풀잎이 허공에서 쫙 하고 잘려나가더니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공손대랑이 처음으로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선검(仙劍)을 중단세로 잡으며 공손대랑을 노려보았다.
“신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백좌를 쓰러뜨리는 거라면…… 암야참(暗夜斬)보다 좋은 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아까는 싸우는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이었다.
암야참이야말로 이 대결의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