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11화
나는 브라흐마의 생뚱맞은 제안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이오?”
브라흐마는 내 동료도 친구도 아니다. 그저 이 의문의 장소에서 만나서 잠시 합류한 동반자일 뿐이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적이 될 수도 있고, 사실 지금도 그가 적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브라흐마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난데없이 처음 보는 내게 천축 삼대신의 신력의 정수(精髓)를 알려준다는 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제안인 것이다.
그러자 브라흐마가 말했다.
“의심할 만하지. 허나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나? 눈앞의 저 궁(宮)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에게 패배는 허용되지 않아.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소멸하던가 아니면 간신히 탈출하더라도 억겁의 윤회 동안 이곳을 떠도는 망령이 될 뿐이지.”
“…….”
“그리고 내가 볼 때 자네는 어정쩡해. 다룰 수 있는 신력의 양에 비해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 잘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니, 자네의 전력(戰力)을 늘려줘야 나도 목표를 성취할 확률이 올라가기에 제안한 거네.”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신력을 잘 다루지 못하는 건 사실이오. 내가 신력을 자유롭게 휘두르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니까.”
“그럼 배워보겠…….”
“하지만 배우지 않겠소.”
내가 단호하게 칼처럼 제안을 자르자 브라흐마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팔짱을 꼈다.
“중대한 시련이 닥칠 때마다 신력에 의존하게 된다면 나는 무공의 경지를 더 올릴 수 없을 거요. 방금 전 동료의 희생으로 이곳을 헤쳐나올 때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소.”
“…….”
“이 자리에서 내 여정이 끝나도 좋소. 나는 내가 익힌 무공을 좀 더 믿어볼 생각이오.”
그러자 브라흐마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무공이라. 무신(武神)의 뜻에 따라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좋겠지.”
흠칫
나는 브라흐마의 말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오? 당신은 무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소?”
브라흐마는 노골적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장난기가 강해 보였다.
“흐흐. 그 메아리 같은 존재에 대해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내가 무신에 대해 안다고 하면 기만일 걸세. 허나 거짓까지는 아니겠지.”
“말장난을 하는군.”
“글쎄. 이 거대하고 위대한 굴레에서 불가해(不可解)한 존재는 셀 수도 없이 많으나, 무신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자도 따로 없을걸세. 어찌 되었든 그는 외신조차도 섣불리 건들 수 없는 것 같으니까.”
“…….”
젠장. 말려든 건가?
겉으로는 잘 모른다고 하고 있지만, 저 말은 틀림없이 무신의 실체에 대해 뭔가 단서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흐마는 그것까지 고려해서 내가 궁금해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잔머리를 굴리는군.”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브라흐마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러운 수라고 생각해도 좋네. 허나 나는 자네를 만나 기회를 얻었지만, 여전히 실패하면 뒤가 없는 건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차라리 인과의 흐름에 커다란 파문(波紋)을 일으킬 셈으로 자네에게 내가 가진 역량을 전수하고 싶다는 걸세.”
“웃긴 소리를 하는군. 내가 비슈누와 시바의 권능을 배워서 당신의 형제들을 살해하면 어쩔 셈이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소만.”
내가 거칠게 말했지만 브라흐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게 자네의 원하는 바라면 그렇게 하게. 힘에는 선악이 없는 법이며 내가 선택한 길이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형제들의 원한을 내가 업보로 받아들여야겠다면 그리 해야 할 것이야. 물론 내 형제들도 상황을 이해한다면 원망 따위 할 리가 없겠지만…….”
“……?”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자네에게 권능을 가르쳐주고 싶네. 일종의 유산(遺産)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거지.”
원망을 안 할 거라고? 형제가 자기 능력을 적에게 가르쳐서 자기가 죽게 되었는데도?
브라흐마의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브라흐마에게서 느껴지는 초탈함에 약간 흥미가 생겼다.
“……좋소. 하지만 나는 신력을 주 무기로 삼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알려준 걸 평생 쓰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건 맘대로 하게. 그저 나와 내 형제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기만 하면 되네.”
“그리고 내가 그 기술을 배우는 대신에 무신에 대해 아는 걸 내게 말해줘야 하오.”
“물론 말해주겠네.”
이렇게까지 부탁한다면 안 배우기도 이상하다. 게다가 무신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도리어 신력을 배우는 건 부차적인 것이리라.
“전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오? 그렇다면 배우지 않을 건데.”
“별로 오래 걸리진 않네. 길어봤자 한두 시진이겠지.”
한두 시진?
예상한 것보다 훨씬 짧았기에 도리어 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짧소?”
“자네도 알다시피 신은 수련 따위 하지 않아. 다만 새로운 영역에 대한 [길]을 개척할 수는 있지.”
그렇게 말한 브라흐마가 자신의 손을 천천히 가슴팍으로 갖다 대더니 이윽고 양손을 합장했다. 그리고 합장을 한 브라흐마가 말했다.
“신력에 여러 가지 영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알다시피 내가 쓸 수 있는 건 [창조]의 권능이며 내 형제인 비슈누와 시바는 각자 유지와 파괴의 권능을 갖고 있네. 나는 자네에게 [유지], [파괴]의 권능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겠네.”
나는 합장한 브라흐마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진 [창조]의 능력은 왜 안 가르쳐 주시오?”
브라흐마는 뭘 물어보느냐는 듯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 능력은 자네가 이미 갖고 있잖나.”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알았소?”
흑웅에게서 간단히 신력을 배웠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신력의 계열이 [창조]와 [소환]이라는 걸 알게 되었었다. 또한 그 이후에 복희에게서 신력을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우기까지 했으니 잊어버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나와 만난 지 몇 시진도 되지 않은 브라흐마가 어떻게 내 신력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것인가?
그러자 브라흐마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창조신 범천 브라흐마. 내가 태고적부터 지니고 있는 권능인 [천지를 보는 눈]은 모든 신이 지닌 고유한 권능과 계통을 알 수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다. 그대는 물론이고 만신(萬神)의 정보와 초능력을 모두 알고 있지.”
“……?!”
“이 계승지의 유적이 우리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음도 내 능력 덕분일세.”
뭐, 뭐 그런 개사기 능력이 있단 말인가?!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대, 대단하긴 한데 다른 신들은 자기 능력을 개발해서 당신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소?!”
“흐음. 자네는 왠지 신력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것 같군…… 신들이 약간만 노력하면 신력의 계통을 발전시킬 수 있긴 해. 허나 발전시켜봤자 각각의 신이 탄생시점부터 갖고 있던 고유한 권능은 다른 신들이 절대 가질 수가 없어.”
“……!!”
“자네가 복희의 모습을 빌리고 있으니 간단히 복희를 예로 들어주지. 복희가 쓰는 우주태룡후의 권능 같은 건 그 어떠한 신도 사용할 수 없네. 초능력을 써서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위력은 절대 따라 할 수 없지.”
“으음…… 그렇군…….”
내심 오랫동안 전생자로 살게 되면 언젠가 신력을 발전시켜서 모든 신의 능력을 다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라흐마는 그게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나는 뭔가를 깨닫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 그러면 비슈누와 시바의 권능은 어떻게 배운다는 소리요?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비슈누와 시바의 권능 또한 배울 수 없어야 정상이잖소. 그들의 권능 또한 고유한 권능일 테니까!”
“호오. 잘 깨달았네. 논리적 모순을 훌륭히 지적했어.”
“…….”
너무 반응이 초탈해서 왠지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이 된 느낌이다.
브라흐마는 합장을 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렇지만 우리 삼대신은 예외를 적용할 수가 있네. 왜냐하면 우리는 태초에 하나였다가 셋으로 갈라진 존재이기 때문이지.”
두웅!!
다음 순간 갑자기 합장한 브라흐마의 머리가 셋으로 늘어났다!
“……!!”
삼면육비(三面六臂)!
아수라의 마왕형태가 딱 저런 형태였기에 나는 삼면육비를 봐도 그 모습 자체가 놀랍진 않았다. 내가 정말 놀란 것은 아수라와 달리 브라흐마의 삼면(三面)에 붙어 있는 얼굴 때문이었다.
비슈누!!
시바!!
언젠가 보았던 그놈들의 인간형 얼굴이 브라흐마의 얼굴 바로 곁에 붙어 있는 것이다!
“이익.”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고 브라흐마가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그저 내 영혼의 본질을 꺼낸 것뿐이며 내 형제들이 나타난 건 아닐세.”
“영혼의 본질이라고? 그 흉측한 모습이 당신의 본질이란 말이오!”
“흉측하다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허나 이건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존재라는 뜻일 뿐일세.”
“……?”
브라흐마는 자신의 비슈누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를 섬기는 필멸자들은 우리를 가리켜 삼천(三天, Trimurti)이라 부르지. 즉, 이건 비슈누의 영혼을 내가 절반 떼어서 갖고 있는 것이며 시바 또한 마찬가지.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게끔 준비되어 있는 것일세.”
“영혼을 절반 떼어서 갖고 있다고?”
내 의문에 브라흐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숨기겠나? 비슈누와 시바는 아무리 신들의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어도 얼마 후 반드시 부활하는 불멸의 능력으로 이름 높았으나 사실 그 비밀은 이것일세. 그들의 영혼이 내게 절반 존재하는 한 나머지 절반이 아무리 상처입고 괴멸하더라도 내게 회귀(回歸)하여 회복할 수 있지. 그렇기에 우리는 전쟁에서 고작 세 명이서 수백 명의 [옛 지배자]를 상대할 수 있었네.”
“……!!”
브라흐마는 유쾌하게 웃었다.
“영혼의 절반을 내가 갖고 있는 한 그 어떠한 초능력과 주술로도 비슈누와 시바를 완전소멸시킬 수 없었지, 큭큭.”
나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즉…… 브라흐마 당신을 없애지 않는 한 비슈누와 시바는 무한히 부활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렇네. 물론 영혼의 절반이 소멸당한 대가로 일정 기간 회복기를 가져야 하긴 하지만 내가 창조의 권능을 쓰면 그 기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가 있었지.”
“호오…….”
“전쟁하는 내내 둘은 나가서 싸우고 나는 은신처에 숨어서 형제들을 부활시키는 역할이었네.”
정말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세상에는 비슈누와 시바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범천 브라흐마는 그 행적이 무척 적어서 알려지지 않았는데 설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앞으로 전생할 때 비슈누와 시바를 완전히 죽여 버리려면 브라흐마를 죽여야…….’
나는 심도있게 생각하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브라흐마. 나한테 그런 비밀을 말해줘도 괜찮소? 당신 형제들을 정말 없애 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리 봐도 이건 삼대신이 지닌 최고의 비밀 중 하나였다. 이걸 다른 존재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틀림없이 위기에 처할 게 뻔했다.
“아까 말했잖은가? 개의치 않는다고. 어차피 언젠가는 알아낼 게 뻔하니 자네한테 숨길만 한 비밀도 아니야. 그만큼 이 자리에서 우리가 패배하면 뒤가 없다고 생각해주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브라흐마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자네에게 지금 내가 가진 형제들의 영혼을 전해줄 생각이네. 전부는 아니고 절반 정도? 그러면 영혼의 본질을 취득하는 셈이니 당연히 비슈누와 시바의 권능도 쓸 수 있을걸세.”
생각지도 못한 방법! 나는 눈을 부릅뜰 정도로 놀라 버렸다.
“……!! 그래도 되는 거요?”
“아, 설마 신의 영혼이 자네를 잠식할까 봐 두렵나? 어차피 이건 진짜 영혼의 일부에 불과하니 창조의 권능을 갖고 있다면 쉽게 통제할 수 있어. 그 방법도 지금 알려 주지.”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나는 꺼림칙하게 브라흐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뭘 믿고 생전 처음 보는 내게 이렇게 다 퍼준단 말이오? 당신 같으면 이렇게 나오는 상대를 믿고 받아들일 수가 있겠소?”
“으음…….”
“제길. 게다가 당신이 지금 전해주려는 영혼은 당신 자신의 힘이기도 한 거 아니냔 말이오. 나한테 힘을 전해주는 만큼 당신의 힘은 약해지는 걸 텐데 거기서 거기 아니오?”
브라흐마는 태연하게 내 의문을 인정했다.
“그 말도 맞네. 본디 나는 삼대신 중 최강으로써 이 2개의 영혼을 이용해 내 힘을 증폭시킬 수 있었는데 약해지긴 하겠지.”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헌신적인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오? 단순히 이 자리에서 이겨야 한다는 한마디만으로는 납득 할 수가 없소!”
나는 상식을 벗어나는 브라흐마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자기 형제들의 생사가 걸린 비밀을 다 털어놓고도 모자라서 그들의 영혼 자체를 넘겨준다니? 물론 신뢰가 엄청나게 쌓인 동료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나와 브라흐마는 절대로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이걸 의심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이는 놈이 이상한 놈일 것이다!
그러자 브라흐마는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거야 자네가 전생자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
아, 알고 있었다고?
내가 당황하자 브라흐마가 말했다.
“우주의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없는 계승지에 비술을 써서 온 내가 설마 전생자라는 존재 하나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자네 같은 식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건 전생자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지.”
“…….”
“전생자에게 비밀을 숨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지? 그것도 여기에 올 정도의 전생자라면 이미 웬만한 신들과 맞먹는 존재일 터이니 고작해야 미움을 사서 언젠가 다 같이 멸족당할 뿐이겠지. 어쩌면 이미 내 형제들이 자네에게 미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고. 그래서 서로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지만, 자네는 생각보다 남을 많이 의심하는 성격인 듯하군.”
나는 브라흐마의 지혜가 굉장히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천축 삼대신의 필두, 범천 브라흐마인가…….’
어찌 보면 복희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지만 브라흐마는 좀 더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존재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이 아니라 바깥에서 적으로 만났다면 이 존재 또한 만만찮은 강적이었으리라. 브라흐마는 잠시 후 나를 보며 씩 웃더니 말했다.
“그리고 단순히 자네가 전생자라는 게 두려워서 베푸는 것만은 아닐세. 자네 또한 내게 분명히 이득을 줬으니 상부상조하는 것이지.”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이득을 줬단 말이오?”
“만난 것 자체가 이득일세. 아니, 기적이지. 원래라면 자네와 내가 만날 일은 우주가 수억 번 끝날 때까지 없었을 텐데.”
“……?”
“이건 인과율에 걸릴지도 몰라서 설명하기가 힘들군. 아무튼 중요한 건 자네가 내 호의를 받아들이냐 아니냐 그것뿐일세.”
“…….”
확실히 브라흐마의 말대로였다.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마침내 브라흐마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소.”
“자, 그러면 가부좌를 틀고 상단전에 정신을 집중하게.”
우웅
나는 브라흐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상단전에 정신이 집중되자 이윽고 인지능력이 급격히 상승하더니 순식간에 초인을 넘어서는 감각이 전신을 메우는 것 같았다. 동시에 내가 품고 있던 신적인 능력의 영기(靈氣)가 저절로 새어 나오게 되자 브라흐마는 놀란 듯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신의 힘을 이토록 많이 갖고 있다니…… 과연.”
“문제가 될 거 같소?”
“아닐세. 오히려 이 정도로 다양한 신력을 받아들인 상태라면, 이제 와서 내 형제들의 영혼을 추가한다고 별문제는 없겠군.”
그렇게 말한 브라흐마가 내 뒤편에 앉은 후 육비(六臂)를 뻗어서 내 등에 갖다 대었다. 여섯 개의 손이 얹혀지자 그 손에서 제각각 다른 종류의 신력이 발현되어서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잠시동안 그 상태로 마치 내공전수를 하듯 앉아 있던 브라흐마가 말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 있군. 어마어마한 전륜의 힘이 강제로 수많은 종류의 신력을 갈기갈기 찢어서 안정화시키고 있다.”
탁록대전의 시대에 우연히 명계에 갔을 때 전륜성왕이 내 신력의 안정화를 도왔던 것까지 바로 파악한 듯했다.
나는 브라흐마에게 반문했다.
“문제있소?”
“없네. 과연 전륜성왕이군. 이 강대한 신력들을 전륜의 힘만으로 찢어서 제압할 수 있다니…… 과연 우주의 죽음을 다루는 자.”
약간 찬탄하고 있던 브라흐마가 문득 말했다.
“허나 이건 자네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안정이 아니야. 자네가 이 전륜의 권능을 과연 이해하고는 있는가? 자네의 상단전에서 위용을 발휘하는 이 전륜을 통제할 수는 있는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오?”
“전륜에 의지하는 것은 남의 칼에 의지하는 것. 자네가 앞으로도 전륜성왕과 대적할 일이 없다면 이해하지 않아도 좋네.”
“……!!”
그 순간 나는 브라흐마의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함정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런 건가?’
뼈 있는 한마디에 나는 조심스럽게 브라흐마에게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겠소?”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가 스스로 전륜을 이해하여 자신의 권능으로 소화하는 것이지. 어찌 되었든 전륜 자체에 악의는 없고 자네에게 빌려준 칼이기 때문일세. 허나 전륜을 이해할 자신이 없다면, 전륜과 균형을 이루는 삼법(三法)을 자네의 내부에 구축하는 방법이 좋다고 보이네.”
“삼법?”
“전륜에 의해 모든게 잘게 썰려 나가는 이 단순한 체제를 다리 세 개의 균형으로 바꾸는 것. 그걸 위해서는 전륜만큼의 힘을 지닌 두 개의 주축이 더 필요하지. 그 주축 중에 하나는 자네가 여태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 자네 본연의 힘이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까지 통제되지 않은 수많은 야생마들을 몰아넣으면 되네.”
“으음…… 어렵구려.”
“지금부터 내가 창조의 권능을 써서 구획을 만들어주겠네. 시작하지.”
파앗!
다음 순간 브라흐마의 여섯 개의 손을 통해서 거대한 신력이 내 몸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밀려들어 온 신력 중에 두 개의 거대한 덩어리가 느껴졌는데, 나는 단숨에 이 덩어리들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비슈누와 시바의 영혼인가!’
고오오
영혼의 흐름이 갈수록 격렬해진다. 그와 동시에 평소에 내 신력을 안정시켜주고 있던 전륜성왕의 전륜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치지징
전륜은 마치 회전하는 원형의 칼날처럼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계속해서 튀어 오르는 잡스러운 마력과 신력을 모두 제압해주고 있었다. 저 전륜 덕에 나는 신력을 자유자재로 시전하기가 쉬웠으므로 고맙긴 했다. 하지만 나는 저기에 완전히 의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브라흐마가 전해주는 흐름에 집중했다.
치킹! 치킹! 치킹!!
갑자기 의식의 세계에서 세 개의 서로 다른 색깔의 보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청적(白靑赤)의 세 가지 색깔은 아마도 삼대신의 힘을 상징하는 게 분명했고, 그 보석은 잠시 후 세 방위로 흩어지더니 커다란 구획을 만들어서 신력을 가름하기 시작했다.
홀린 듯이 그 과정을 느끼고 있던 내게 브라흐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간다!!]
파아앗!!
이윽고 밝은 무지갯빛과 함께 세 개의 보석이 구획의 중앙에 박혔고 ‘균형’이 만들어졌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고, 뒤에 있던 브라흐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란 탄생할 때 부여된 속성에 강하게 얽매이는 법. 파괴를 업으로 삼은 시바는 당연히 난폭해질 수밖에 없었고 유지의 속성을 가진 비슈누는 세계를 안정시키려 노력하게 되었다.”
“…….”
“그리고 우리처럼 창조의 속성을 지닌 자들은 공통된 소망이 하나 있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염원! 그것이 바로 창조에 가장 중대한 재능인 것이다.”
잠시 후 브라흐마는 왠지 두려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헌데 아주 잠깐, 자네의 심층세계의 편린을 느꼈는데…….”
브라흐마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자네의 진실된 마음…… 그 소망은 어째서 창조에 필요한 재능과 반대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