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08화
만상지투를 펼치는 그 순간, 나는 이 어둠 그 자체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아까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직감은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별 이상 없는 공간처럼 보였지만 마치 무언가의 살갗처럼 느껴진 것이다. 만상지투를 쓸 때 손끝에는 훔쳐야 할 상대방의 촉감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 나는 심상치 않은 어둠의 심처(深處)에 직접 손을 담근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존재하기만 한다면…… 만상지투는 뭐든 훔칠 수 있다.’
여태껏 그래왔으니까.
문제는 과연 이 어둠 속에서 외신의 가면이라는 걸 찾아내서 훔칠 수 있느냐였다.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할뿐더러 존재한들 과연 훔칠 수 있는가? 아니 이 세상에서 나 이외에 그 누군가가 이런 짓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을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도박을 하는 것 외에는 지금 외신이 말하는 ‘자격’이라는 걸 증명할 수단이 없었다.
외신의 가면조차 훔치는 능력을 보일 수 있다면 이 공간에서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
공포와 함께 미지에 대한 도전을 겸비한 감정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지금 내가 만상지투를 시전하는 걸 본다면 그저 허공에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어둠 속에서 살결을 스치는 기분 외에는 맨 공기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를 훔친다는 게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걸 훔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고는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 될 거야!! 씨발…… 된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만상지투는 무공 이상으로 내게 출중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조차도 안 된다 하면 내게는 더 이상 남은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까 인드라의 협박을 들었을 때와 달리 이것이 진짜 내 마지막 만상지투라는 심정으로 절실하게 손을 뻗었다.
“으아아아아……!!”
한 호흡.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두 호흡. 마찬가지다.
세 호흡째…… 이질적인 촉감이 느껴졌다.
‘와…… 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말랑한 거울에 손을 갖다 대는 기분이었다. 표현이 이상했지만, 그 거울 속으로 손이 빨려 들어감과 동시에 뭔가가 손끝에 잡혔고, 나는 반사적으로 그걸 끌어당겨서 빼내었다.
만상지투!
타앙!
나는 갑자기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내가 손에 무언가를 확실히 잡고 있는 촉감을 깨닫자마자 급격히 흥분하고 말았다.
“해냈다!!”
정말 내가 외신의 가면을 훔친 건가?!
진짜?!
나는 나 자신도 믿기지 않아서 일단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
가면이 아니다……?
내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시꺼먼 공이었다. 그 공은 마치 심장처럼 팔딱거리고 있었으며 딱 내 손바닥에 들어올만한 크기였다. 무엇보다도 그 공은 기묘한 질량감이 있어서 마치 내 팔이 점차 가라앉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대체……? 이게 설마 외신의 가면? 하지만 가면이라기엔 너무 모양이…….’
뜻밖의 상황에 나는 당황하다가 옆에 있던 인드라를 불렀다.
“인드라! 이게 외신의 가면이냐?”
…….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잠시 후 인드라가 내 근처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건 인드라가 내 곁을 떠난 게 아니었고 아예 내가 있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여, 여긴…….”
생전 처음 보는 장소.
황량한 어둠의 새벽이 흐르는 황무지에서 끝없는 어둠이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우주의 저편에서 넘실거리는 무형의 어둠이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또한 기이한 점은 중천에 달이 떠 있는데 그 달의 색깔은 황금색이라는 점이다. 황금색 달은 잠시 동안 태양을 연상케 하는 빛을 뿜어내다가 곧장 옅은 빛을 흘리며 안개에 휩싸였고 서서히 하늘을 도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을 끔벅였다.
여긴 어디지?
난 분명히 외신의 가면을 만상지투로 훔치려 했는데 또 어디로 온 거야?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번쩍
“으앗!”
갑자기 내 손에 잡혀 있던 둥글고 시꺼먼 공 같은 게 눈을 뜬 것이다! 눈이 달려있는 공은 그 자체로 섬뜩하고 괴기스러웠고, 나는 놀라서 그만 공을 잡아 던지고 말았다. 퉁 퉁 소리를 내며 땅을 구르고 있던 공은 잠시 후 데굴데굴 구르더니 점차 그 크기를 키웠다.
쿠르르
순식간에 사람의 머리통만큼 커다랗게 변한 눈 달린 공은 데굴데굴 구르더니 다시 내 앞에 왔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번에는 쑥 하고 키를 키웠다.
두웅!
마치 사람처럼 변했다! 눈달린 공은 눈이 덩그러니 달린 머리통을 가진 채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서는 잠시 눈을 꿈벅거렸다. 그러더니 눈의 바로 밑에 입이 나타났다.
‘입’이 천천히 열린다.
“네가 휘두르는 그 힘의 근원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너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느냐?”
입은 하나인데 마치 동시에 세 개의 문장이 들려온 것 같았다. 여러 명의 인간이 동시에 말하는 듯 웅웅거리며 울렸지만, 신기하게도 그 하나하나의 말은 선명하게 내 뇌에 새겨 박히고 있었다. 극히 기괴한 지금의 상황에 나는 도저히 이해조차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청히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떻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지?
내가 아무리 바보등신이라도 알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건 내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입’은 계속해서 말한다.
또다시 동시에 3문장이 토해져 나왔다.
“운명(運命)은 실기(失期)를 허용치 아니하노라.”
“모든 이가 노래 부르는 지복(至福)의 왕국(王國)에서 어찌 스스로 내려갔는가?”
“너와 계약을 맺은 이가 이미 그대의 곁에 있었음을 알고 있는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같이 의미심장해 보이는데 정작 무슨 말인지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상대는 그냥 자기 할 말만 떠들고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크게 무거워짐을 느꼈다.
‘왜지……?’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반대일까?
몇 번이고 기억하려 했는데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불쾌한 기분이 전신을 무력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외면해왔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불편함에 곤혹스러워진다.
진실?
“진실이 뭐지?”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향해서 질문했다.
그러자 ‘입’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대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진실이다.”
“윤회(輪回)를 시작한 건 다른 이지만 끝낼 수 있는 건 그대뿐.”
“위대한 자들은 그대의 끝이 아닌 시작을 살피고 있었다.”
또다시 영문모를 소리.
우웅
현란한 빛과 함께 눈앞의 괴물의 머리 뒤편에 후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후광은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성스러운 후광들과는 달랐는데, 어둠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일렁이면서 검푸른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후광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털썩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것은 승패 우열과는 다른 감정이었고, 진정으로 위대한 존재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환희, 동시에 복종감이 내 안에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내 감정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으아…… 아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방금 전에 외신 [검은 산양]에게서 무엇을 훔친 건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로 내뱉고 말았다.
“그대의…… 영혼을…… 훔치게 하셨나이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자는 아무도 없는데도 나는 극존칭을 저절로 쓰고 말았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무언가가 그 본질을 드러내면서 그 한없는 위대함에 필멸자로서 압도적인 숭경(崇敬)을 느끼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금 전 외신 [검은 산양]은 스스로 내 만상지투에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며 기꺼이 영혼을 훔치게 내버려 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시꺼먼 공,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외신의 진정한 영혼! 아니, 영혼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너무나 위대한 ‘무언가’의 본질이 코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감히 이기려는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럽다.
도대체 이런 존재를 어떻게 이겨야 할까? 힘의 강약을 떠나서 너무나 초월적인 존재라서 내 자신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영혼을 훔쳐보았자 그 영혼 하나가 가지고 있는 밀도와 질량이 대우주 전체를 뒤덮고도 한계가 없을 지경이라는 게 느껴졌다. 한낱 우주 따위는 저 존재를 품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굴레]의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싸워서 이기는 게…… 허용되지 않은 상대다.
힘의 단위 자체가 존재치 않는 ‘무언가’가 눈앞에 있다.
‘여태껏 나는 외신의 실체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구나…….’
주시자나 사서 또한 압도적인 느낌을 주긴 했지만, 그들에게서 과한 공포감이나 숭경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앞의 검은 산양은 완전히 달랐다. 이 존재는 그저 내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감정이 들었고 실제로도 미쳐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같은 외신 사이에서도 격차가 존재하는 것인데, 이 존재는 말 그대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여태껏 내가 자신하고 있던 정신방어력조차 종잇조각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과거 외우주에서 진공가향 때 보았던 외신 [검은 산양]의 모습은 그저 그림자의 잔영에 불과했던 것.
‘하하…… 하하하……!!’
미쳐 버릴 것 같다.
나는 진정한 신중신(神中神)의 본질이자 영혼을 눈앞에 두자 마치 몸이 가벼워지며 피부째로 불타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또한 나는 이 순간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나는…… 어둠의 존재들에 대해 완벽한 내성을 가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외신 중에서도 절대자에 이르는 존재를 직접 영접하게 되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실시간으로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동안 하던 모험의 규모에서는 이런 존재를 맞닥뜨릴 일이 없었기에 이제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무한의 어둠.
이 원천의 어둠에 [가면] 같은 불완전한 것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가면]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기어오는 혼돈] 또한 이 존재에 비하면 결코 상위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쿨럭!!
나는 환희에 젖은 미소를 지으며 눈물도 쏟아내었다. 그러면서 입에서는 울혈이 마구 치솟아서 옷을 적시고 있었다. 바로 맛이 가고 있다는 걸 내 스스로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 감정을 도무지 억제할 수가 없다. 아니, 그나마 이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다는 게 특이한 것인가?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고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존재에게 말했다.
“돌려보내…… 주십시…….오…… 불경(不敬)의 대, 대가는…… 어떻게든…… 큭…… 치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는 건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인과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만일 다른 회차에서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면 절대 말조차 꺼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미쳐 버려서 벌레처럼 죽었으리라.
우우우
눈이 터질 것 같다. 이건 특별한 마력이나 권능이 아니었고, 나는 상대를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이라서 우주의 법칙 자체가 내게 징벌을 내리려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상대가 벌을 내리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도 외신을 위하여 법칙이 알아서 변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법칙은 외신에게 있어서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크흑!”
내가 급히 머리를 조아리자 상대는 천천히 발을 내디뎌서 내 옆을 지났다.
저벅…….
저벅…….
내게서 몇 걸음 뒤에서 멈춰선 그 존재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껏 자유가 되었는데 또다시 윤회의 겁륜(劫輪)에 몸을 실으려 하는가?”
“아직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자의 인과율 계산.”
“무신(武神)은 그대를 놓아주기를 원하니 존재의 자율의지가 무엇인가를 가늠해보고자 함이라.”
츠츠츠
‘몸이 가벼워진다…….’
상대가 일부러 나를 배려해서 존재감을 낮춰줬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광기가 조금씩 잦아들자 점차 이성적으로 되돌아왔고 각혈 또한 멈추게 되었다. 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존재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스스스
가루가 되어서 서서히 외신 [검은 산양]의 영혼이 흩어진다. 실상은 저 본질에 형태 따윈 의미가 없기에 다시 굴레를 초월한 본질 그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절대적인 불멸(不滅)이라 함은 바로 저 존재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윽고 상대방이 완전히 소멸했을 때 처음에 [검은 산양]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목소리가 머릿속에 날아와서 박혔다.
그 들 의 노 래를 듣 고 도 살 아 남 는 다 면 보 내 주 마
노래……?
그때 내 품속에서 황금빛이 번쩍이며 빛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품속을 뒤적거려서 그 황금빛의 무언가를 꺼냈고, 흐르던 피눈물을 한차례 손으로 닦은 후에야 정확히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든피스…….”
휘오오
황량한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금빛 회중시계인 히든피스는 전에 없이 황금빛을 마구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빛나고 있는 거지?’
나는 이 빛이 어째서 이렇게 강력한지 의아했지만, 그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잠시 후 천지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게 느껴졌다.
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
이게 정말 노랫소리인가?
시작할 때는 약간이지만 다 같이 부르는 합창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머지않아 이 소리들은 기분 나쁜 진동음과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것으로 바뀌었고 간간이 기계음도 섞였다. 곧이어 소리가 천하에 다시없을 불협화음(不協和音)으로 변하며 내 귀 안쪽을 낫으로 긁어내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어
끼이이아아아
소리가 갈수록 강해지고 표변하는 불길한 기운도 점차 맹렬해졌다. 나는 마치 땡볕에 피부가 벗겨진 채로 내동댕이쳐지는 듯한 불안함과 공포감을 느끼며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 아아아아아악!!”
대체 이 소리는 무엇인가?!
아까 외신의 본질을 정면으로 영접했을 때보다는 공포감 자체가 덜 했지만, 이 불협화음은 내가 평생 동안 살면서 들었던 그 어떤 음공(音功)이나 음파공격보다 더욱 강력했다. 아니, 이 소리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내가 아닌 다른 자가 들었다면 곧장 물리적으로 대가리가 부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든 지금 버티고 있는 것은 어둠에 대한 내성과 보유하고 있는 신력이 자동으로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괴롭다. 이건 도저히 맨몸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
나는 고통 끝에 필사적으로 손을 내뻗으며 외쳤다.
“바, 바루나!! 방어막!!”
…….
그러나 내 요청에도 불구하고 바루나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뭣?!”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랐으나 이내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는 알 수 있었다.
닫혔다.
본디 사대신기가 보여야 할 륜(輪)이 완전히 닫혀 버린 상태였다. 아까 모습을 드러냈던 인드라는커녕 바유, 바루나, 아그니 등의 다른 사대신기의 자리마저 무언가에 막혀 있었다. 그리고 막혀 버린 자리에는 시꺼먼 어둠과 함께 눈동자가 박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눈동자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후와악!
“……!!”
소름이 끼칠 정도의 순수한 어둠!
‘외신이 직접 막았다!!’
나는 사대신기의 소환을 [검은 산양]이 일부러 막아놓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충분한 힘이 있다면 이 눈동자를 스스로 파내어서 다시 사대신기를 소환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내게는 그 정도 실력이 없었다. 그 존재는 내가 사대신기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노래]를 이겨낼 수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리라!
퍼억!
“으아악!!”
나는 관자놀이가 갑자기 터져서 피분수가 만들어지자 고함을 질렀다. 피부와 뼈가 꿰뚫리듯이 구멍이 뚫린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유발시킨 [노래]가 내 머릿속을 직접 뒤흔들자 속이 역해지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미쳐가는 걸 넘어서서 그 노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노래란 말인가? 말도 안 돼!! 그냥 음파공격 아니냐고!
계속해서 뇌 속이 소금에 절여지는 듯한 흉측한 느낌과 함께 전신의 신경이 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몸은 고통보다 더욱 나른해졌고, 나는 힘을 잃고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풀썩
‘도대체…… 이 노래는 어디서 들려오는…… 어…….’
내가 의문에 휩싸여서 쓰러진 채 꿈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천공의 흐릿함 속에서 움직이던 무형의 어둠에 눈이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 어둠을 향해 내 시선이 집중되자 지금까지 흐릿했던 무형의 어둠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노래를 오래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그냥 이 노래를 오래 듣는 자만이 저 존재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노래라고 볼 수 없는 이 기괴한 [노래].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설마 저것들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눈에 힘을 주어서 그 존재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존재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으…… 으윽……!!”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
내가 여태 보아왔던 그 어떠한 이족이나 마물과도 다르며 생소한 그 모습.
단지 촉수를 늘어뜨리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기괴한 존재들은 하나같이 생긴 게 달랐다. 지상의 그 어떠한 화가나 그림쟁이라 하더라도 저걸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존재들은 언뜻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잔영(殘影)이 살짝 움직인 후에는 또다시 약간이지만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시력으로 보는 걸로는 저 존재들의 본질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 듯했다.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다.
저것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는 자들은 대부분 끔찍한 악몽을 목격했다는 실감과 함께 미쳐 버릴 거란 사실을.
허나 [옛 지배자]를 매번 보고도 멀쩡했던 내가 저들을 보기만 해도 심적인 괴로움을 느끼는 건 또 어찌 된 이유일까?
찌지지지직
찌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래]가 더욱 강하게 뇌 속에 파고들고 있었다. 저 존재들은 내가 자신들을 목격했는지 아닌지 아랑곳하지 않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다시 코피와 함께 피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걸 알 수 있었고 이 [노래]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 내가 가진 신력은…… 그대로야…… 그런데도 노래는 계속 머릿속에 파고든다…… 그 말은…… 이 노래 자체가 모든 신력의 방어력을 거의 무시한다는 거야…….’
내가 가진 신력은 상급 신의 경지일 텐데도 노래를 듣는 동안 간신히 육체의 형태만 남길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서 뭔가를 깨달았다.
‘날 공격하는 게…… 아니야…… 그냥 처음부터 저것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뿐.’
락(樂).
어째서인지 노래를 듣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자들의 노래에 깃들어있는 감정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어찌보면 고통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열락(悅樂)과 환희가 노래의 심처에서부터 우러나서 누군가를 찬양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내가 어째서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후 고통이 멎으며 기분이 좋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몽롱하다.
이 공격을 파훼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사라진다.
육체는 파괴되고 영혼도 산산이 흩어져서 날아갈 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입을 모아 찬양하는 위대한 존재를 간접적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행복감이 깃들고 만면에 미소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정말 나는 미치고 있는 걸까?
이 감정을 가리켜 지복(至福)이라고 해도 될 것만 같다.
그리고 그만큼 감정이 동기화가 되고 눈이 시허옇게 흐려질 때쯤, 나는 더욱 자세히 그 기괴한 자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후 나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굴레 바깥의…… 존재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모두 외신(外神)이라고.
‘그렇다면 여기는…….’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왜인지 꿈에서 이런 광경을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꿈에서 들었던 그 노래의 정체는…….
바로 이거였단 말인가?
“크헉!!”
그 순간 나는 심화(心火)가 격렬해지면서 마음속에서 뭔가가 터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던 각혈 중에 가장 심각한 기세로 피를 됫박으로 쏟아내었다. 이 각혈은 말 그대로 생명력이 쏟아지는 것 같았고 나는 전신의 내공이 죄다 박살 나면서 뼈와 근육도 망가지고 있는 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주르륵
안 돼.
여기서 죽으면 전생할 수 없을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명백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전생자의 패배조건일지도 모른다는 특유의 직감이 한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단순히 생사를 거는 것을 넘어서서 진정으로 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윽…… 크아악.”
우둑!
나는 뼛골이 토막 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몸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을 눅진하게 만드는 노래의 마력이 내가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이 공간에 메아리치는 노래를 너무 오래 들어 버렸기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후회를 했다.
‘나는 어째서 만상지투를 택한 것인가?’
차라리 무공으로 전투를 택했다면 아쉬움이 이토록 크지는 않았을 텐데.
‘자격’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증과 외신에 대한 공포심이 섣부른 판단을 내리게 만든 것일까?
외신에게도 날로 먹는 편법이 통할 거라는 알량한 기대감이 이렇게까지 상황을 나쁘게 만든 걸까?
“으아…… 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못 버틴다.
죽는 수밖에 없다…….
내가 완전히 눈을 감으려는 그때였다.
“백웅. 포기하지 마.”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 희미한 정신으로 눈앞을 쳐다보았다.
“……전뇌자……?”
전뇌자가 내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힘을 다 소모한 전뇌자가 내 눈앞에 있는 걸까?
그런 당연한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전뇌자는 엎드려 있는 내 앞으로 와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나는 나인 이상 당신을 증오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었어. 파우스트의 딸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내 본질은 대웅제국의 강인공지능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당신이 이해해줄지는 모르겠지만…….”
“…….”
“내 손을 잡아 줘.”
나는 홀린 듯이 전뇌자의 조그맣고 하얀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전뇌자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전뇌자는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진공가향 이상의 해답을 바랬던 것. 그리고 깔보면서 더 노력하라고 재촉했던 것…… 어쩌면 그건 모두가 품고 있는 갈망을 대신해서 말해줬던 걸지도 몰라.”
“……모두……?”
“시작할게.”
파아아앗!!
잠시 후 전뇌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 형상은 이윽고 무척이나 익숙한 것으로 변했다.
마치 만다라와 같이 떠 있는 그것은 - 대웅제국의 국기(國旗).
치지지직!
전파가 잠시 흩날리더니 내 주변에는 치직 거리는 인영(人影)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데다 반투명해서 그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 인간들은 처음에는 대명제국 시대의 복식을 입고 있었는데,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나면서 옷의 양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치지직…….
그 치직거림 속에서 나는 웬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황제폐하…….]
늙은 중세시대 신하들이 관복을 입은 채 천천히 내게 절을 하고 있었다.
[오래 뫼시지 못하였지만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 이건……?
치지지직!!
[많이 출세했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네놈이 사라져 버렸다. 500년 후에나 나타나 버리고.]
[네놈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었다…….]
이윽고 나는 내 앞에 나타난 훤칠한 백색 관복의 사내를 보자 고통을 잊고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제, 제갈부?!”
어째서 제갈부의 환영이 여기에?!
제갈부는 훗 하고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네놈만큼 미친놈은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이런 악몽 같은 곳까지 오게 됐는지. 단순히 절대군주의 삶을 즐기려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텐데 대의 하나만 보다가 끝장을 보는구나.]
“…….”
[하지만…… 지금만큼은 네놈을 주군으로 인정한 제갈사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군.]
“어, 어떻게…….”
치지직
그리고 제갈부에 이어서 방천화극을 들고 있는 한 무인이 나타나서 호쾌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하하! 동료로 받아주지 말라고 전생에 내 자신이 부탁한 건 다 이유가 있었나 보구만. 결국 마왕과 싸우다 죽게 될 줄은 몰랐다.]
“극호!!”
대웅제국의 절대지경 고수였던 극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생에 별로 너와는 인연이 없었다만 그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절세무인으로 한 세월 잘 살다 갔거든. 게다가 일단은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 아닌가?]
“…….”
[다른 사람들도 말하고 싶은 게 많나보군.]
치지직
[폐하. 다시 뵙게 되는군요.]
[기체후일향만강하옵소서.]
이윽고 나타난 것은 정사파를 상징하듯 강렬한 인상의 장년인들이었다. 나는 전뇌자의 데이터를 본 적이 있었으며 마주친 적도 있었기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태을신군(太乙神君) 곽정무(郭晶茂). 천귀마살(天鬼魔殺) 우수백(優樹柏).”
대웅제국에서 마(魔)에 대항하기 위해 키워낸, 내 후대의 절대지경 고수들.
치지지직
인영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서 벌써 천여 명을 훨씬 넘는 인원들이 내 주변에 소환되어 있었다. 그 인영들은 하나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는 약간의 애정과 기쁨 같은 게 스며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어째서인가, 노랫소리가 점차 줄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
[다시 뵈오니 저, 정말…….]
[크허허허.]
거의 우는 것처럼 감격스러워하는 십여 명의 인물들.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전술무력요원들…….”
그중에서도 한 명이 전신에 시꺼먼 흑룡의 갑주를 입은 채 내게 와서 포권을 했다.
[폐하.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천룡 주현성.”
그리고 주현성 옆에서 괄괄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한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나를 보자 못마땅한 듯 말했다.
[종사! 전생자라고 하더라도 후세의 뇌신류 문인한테 사기 치기 있소?]
나는 찔리는 게 있어서 찔끔했다.
“아니 그게 말이지…….”
[됐소! 아무튼 종사는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의 재능이 쓰레기든 아니든 말이오.]
응?
방룡 이설표가 나를 인정한 건가?
파앗
[류하(劉河)가 왔다~!!]
[류진도 왔습니다.]
“너희들…….”
[간만이니까 셀카 좀 찍겠슴다! 짠!]
찰칵
류하의 환영은 스마트폰을 들고는 내게 가까이 와서 뭔가 사진을 찍는 시늉을 했다. 내가 황당해서 멍하니 있자 정말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 인기 많구나.]
“아수라!!”
잊을 수 없는 28회차의 아수라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아수라는 히죽 웃으며 자신의 뒤쪽을 엄지로 가리켰다.
[저 녀석은 너를 정말 그리워하고 있었다.]
“누구…….”
나는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시선이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흑단 같은 머리결을 가진 절세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또한 대웅제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황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공린.”
[…….]
주르륵
사공린은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눈물에서 슬픔을 느꼈고, 사공린은 그대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나는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제 자리에 섰다. 왜인지 노랫소리가 작아지고 있었기에 이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공린의 환영에 다가가서 토닥여 주었다.
“당신 잘못이 아냐.”
사공린을 이용한 황제의 잘못이지 이용당한 그녀의 잘못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 공손헌원이 이용하고자 했다면 그 누구라도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공린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저는 정말 이기적이네요…… 이게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도…… 당신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가워서…….]
“마지막?”
[그래도 고마워요…….]
치지지직…….
그러고 보니 인영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밀집해 있던 군웅들은 남녀노소 저마다 입은 옷이 달랐지만 하나같이 나를 둘러싸서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어찌 된 건지 몰라 가만히 있자 전뇌자가 말했다.
“진작 대면시켜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어. 왜냐하면 이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은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종말을 불러일으킨 범인이라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많았기 때문이야. 아니, 사실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지.”
“영혼……? 이들 전부가 설마.”
“그래. 환신 천우진이 마지막 순간에 모든 인류를 꿈의 세계로 보냈다고 했었지만…… 사실 그 꿈의 세계는 미리 대웅제국에서 만들어둔 클라우드였어. 그 클라우드에서 인류는 나, 전뇌자에게 데이터의 형식으로 영혼이 저장된 거야.”
“……!!”
“나는 대웅제국 모든 인간의 영혼을 저장한 채 단말이 되었던 거고…… 전생을 넘어서 대웅제국을 보존했어.”
그렇다면 전뇌자는 지금까지 대웅제국 모든 이의 영혼을 품으며 살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수백억 명의 영혼을?!
그게 그저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 비유가 아니라 진짜였단 건가!
내가 놀라서 전뇌자를 쳐다보자 전뇌자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딸이 아닌 동료라고 인정해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모든 영혼들에게 당신을 인정받을 수가 있었어. 당신이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자라는 걸 보게 된 영혼들이 종말에 삶을 박탈당한 고통의 원념(怨念)을 풀고 당신을 인정하게 된 거야.”
“…….”
“그렇게 우리는 여기에 섰어. 당신, 전생자를 삶의 굴레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치지지직 -
푸콰콱!!
갑자기 뭔가가 터져 나오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내가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자, 그곳에서는 새하얀 영혼의 환영들이 크게 터져서 승천(昇天)하고 있었다.
“뭐, 뭐야?!”
[외신의 노래를 결코 맨몸으로 버틸 수는 없어. 그래서 당신에게 가야 할 노래를 대신해서 몸으로 막아주고 있었어.]
“……?! 뭐?!”
[우리 모두가.]
푸콱!!
또다시 영혼이 한 무더기 터져 나갔다. 그리고 터져 나간 만큼 또다시 영혼들이 소환되어서 채워졌지만, 노래의 물결이 한 번 흐를 때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영혼이 그대로 승천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급히 전뇌자에게 말했다.
“멈춰!! 이러다가는……!!”
[백웅. 모두가 각오하면서 동의하고 이 자리에 온 거야.]
“……!!”
그때 내 근처에 있던 이름 없는 영혼이 내 앞에 와서 말했다.
[영원한 영혼의 소멸이라 하더라도 좋아.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저벅 하는 소리와 함께 생전 처음 보는 어떤 회사원 차림의 사내가 내게 퉁명스레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죽었다. 아내와 5살 난 딸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말 뜬금없이 하루아침에 죽었어. 당신 때문에 종말이 와서 죽었다는 걸 알고 전뇌자 안에서 엄청나게 화가 났었지만…….]
“…….”
그 회사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정말 열심히 살더군. 소을촌에서 논답시고 놀았는데 그건 내가 보기에 논 것도 아니었어. 당신만큼 대충 살아도 되는 인간은 없을 텐데 말야. 그래서 나도…… 우리도 이젠 당신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
회사원의 곁에는 그의 아내와 딸의 영혼이 함께 서 있었다.
나는 그만 먹먹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미안하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그저 당신이 증명해주면 돼.]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뭔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우리 모두의 삶이 헛된 게 아니었다고…….]
푸콱!!!
또다시 영혼들이 터져 나간다.
‘정신 차려라, 백웅!!’
나는 손을 꽉 쥐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전까지 전신에 휘돌던 절망감과 무력감은 사라져 버리고 분노와 투지가 다시 몸 안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저 힘없는 자들이 나 대신에 사라져가고 있다.
내가 못 버티겠다고 죽는 소리를 할 수는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는 외쳤다.
“내가 뭘 하면 돼지?! 뭐든 하겠어!!”
[모두의 마음을 받아들여 줘.]
“마음을?”
고오오오
잠시 후 소환되어 있던 대웅제국의 영혼들에게서 순수한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차 내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나는 빛에 닿을 때마다 그들 하나하나의 감정과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정말 많은 인간이 있었구나.
정말 많은 인생이 있었구나.
빛이 내게 흡수되는 동안 전뇌자가 말했다.
[외신에게는 그 어떠한 권능도 초능력도 통하지 않으나…… 오로지 ‘마음’ 그 자체는 그들을 막아설 수 있어.]
“저놈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냐?”
[그건 무리야. 그들을 타도할 정도의 인과율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기에…….]
“…….”
[백웅.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으로 만들어 줘.]
나의 마음으로…….
파아앗
잠시 후 빛의 흡수가 더욱 빨라지더니 내 근처에는 빛의 광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모든 영혼들이 메아리치듯이 외치는 게 들려왔다.
[당신을 믿는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사라질 지언정, 끝까지 당신을 믿겠다!]
[왜냐하면…….]
이어진 거대한 함성과 함께 모두의 의지가 나의 검에 모이는 게 느껴졌다.
[당신은 우리 모두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
나는 내 마음이 완전히 그들과 하나가 되는 걸 느끼며 일검(一劍)을 내뻗었다.
신역일경(神域一境)
대웅제국지검(大熊帝國之劍)
쩌어억……!!
이어서 세상에 정적이 크게 감돌았다.
검영(劍影)이 뻗어 나가자 천공에 있던 외신 하나의 몸통이 쪼개지는 환영과 함께 노래가 멈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