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06화
촤라락
마치 종이가 연속으로 접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왜 내 몸이 멀리 있지?’
촤라락 촤라락
일률적이고 단정하기까지 한 그 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메아리치는 동안 나는 내가 현실감과 잠시 동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꿈속을 헤매이는 듯한 몽환적인 기시감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여긴 빛 속이 아니다. 어둠 속도 아니다. 혼돈을 관조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나는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투과해서 살펴보듯 내 몸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제 3자가 된 것처럼 나 자신을 관찰하는 경험이었다.
저게 ‘나’라면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 거지?
나는 내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내 몸을 더듬거리고 모양을 살펴보려 했으나 이내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無).
의지만 이곳에 존재할 뿐 내게는 육체도 오감도 없었다. 아니, 육체라면 바로 저기에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지금은 아마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상태가 아닐까?
‘하지만…… 이게 영혼 상태라고……?’
뭔가 다르다. 지금 내가 단순히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었다고 여기기에는 뭔가가 걸렸다. 그것은 이혼대법(移魂大法)을 완숙의 경지로 터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직감이었다. 영혼을 자주 만져왔던 나로서는 지금 내 상태를 ‘영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뭔가가 걸렸다.
촤라라락…….
종이 접히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나]의 전방에 있던 달마가 [나]의 육체를 향해 말을 거는 게 보였다.
[이건 대체 무슨 힘이지? 설마 수천 번을 전생한 내가 모르는 힘이 있었다니…….]
“…….”
[나]의 육체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특이한 점은 이마에 나 있는 소뿔이었다.
파지직
소뿔의 겉표면에서는 알 수 없는 뇌전의 기운을 흘리고 있었으며 내게 원래 달려 있던 뿔보다 크기가 두 배는 커져 있었다. 또한 달마가 소환한 어둠의 힘 때문에 전신의 피부가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으나, 상처는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소뿔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때문인 게 분명했다.
여전히 내 목을 잡고 있던 달마가 눈에서 광망을 뿜어내었다.
[외신의 권능을 소환했어도 버틸 수 있다니 이미 규격을 초월한 존재구나. 그렇다면 더 강하게 염원하여 힘을 빌어올 수밖에.]
쿠구구구
달마의 몸을 뒤덮은 어둠이 더욱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어둠의 농도가 한층 깊어지는 걸 보아서 달마가 자신의 마력을 수백 배나 되는 농도로 압축하고 있는 게 분명했고, 계속해서 그에게 소환되고 있는 무한의 마력이 그 농도가 짙어짐과 동시에 새로운 마력을 보충했다. 그 과정이 짧은 기간 동안 반복되자 달마의 마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폭되었고, 이윽고 달마가 입에서 기이한 괴성을 내질렀다.
[끄오오오……!!]
번쩍
달마의 사지에서 빛이 떠오른다. 그 빛은 틀림없이 13의 마핵 중 하나였으며 황도십이궁을 상징하는 별자리이기도 했다. 성좌와 연동되어 [옛 지배자]의 마핵이 더욱 강한 힘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핵 사이에 선(線)이 그이면서 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치치칭
이윽고 만들어진 것은 바로 달마의 미간을 정점으로 사지에 선이 그여 만들어진 오망성!
나는 달마가 빠르게 오망성을 만들어낸 걸 보자 흠칫했다.
‘정식이 아니라 약식(略式)으로 오망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정말로 방금 전의 대결에서 달마는 나를 많이 봐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약식으로 오망성을 만들 수 있다면 공략이고 뭐고 단숨에 자기자신을 강화시킨 달마가 밀고 들어왔을 경우 내가 손쓸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약식으로 끌어올린 힘만 하더라도 황제의 완전체 수준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신성(神聖) 따위는 가볍게 씹어먹을 정도의 범우주적인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마 달마 본인도 그걸 알고 있기에 ‘수준차’를 언급했던 게 분명했다.
내 예상이 사실인지 달마는 오망성의 힘까지 끌어올린 후 말했다.
[실력차가 너무 난다고 말했었지. 적당히 상대하다가 외신의 권능으로 그대를 이 시련에서 쫓아내려 했거늘…… 어설픈 잠재력 때문에 봐줄 수가 없겠구나.]
“…….”
[내 뒤에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나 따위는 손가락으로 죽일 수 있는 악몽 같은 자들이다. 이 정도 힘으로 도전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소멸되는 게 자비일 것이리라!]
꾸드드득
내 목을 쥔 달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외신의 힘을 주입해서 내 몸을 터뜨리려 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육체와 떨어져 있는데도 그 가공할 압박감에 나도 모르게 내 목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크읍……!!’
제길! 대체 뭐야!
외신의 힘에 한 번에 소멸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어째서 내 육체와 떨어지게 된 거고, 그럼에도 내게 고통은 그대로 느껴지는 거지?!
촤라라라락…….
종이 접히는 소리가 계속 해서 들려왔다.
희끄무레한 것이 이 공간 속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
나는 그제서야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책!!
나는 거대한 책(冊) 안에 들어와 있었고 저 멀리 아득한 공간에서부터 무한대의 개수나 다름없는 무수한 책장들이 넘겨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책장 넘기는 소리가 선명해질수록 희끄무레한 종이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는 무형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 이게 무슨……!!’
쿠르르르
새하얀 종이가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저 종이에 휩쓸리게 되면 그대로 소멸당할 것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시련 같은 게 아니야. 공격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내 몸과 정신이 따로 떨어진 것은 치우의 뿔이 빛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고, 지금 종이가 덮쳐오는 것은 아마 그것과는 별개로 나를 공격하는 것이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것은 수도 없이 기괴한 상황에서 싸워온 자 특유의 직감이었고,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면 그대로 소멸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의 파도를 어떻게 피하지? 여기서 무공을 쓸 수 있나?!
‘제기랄!! 치우의 뿔아!! 기껏 멋있게 각성했으면 나 좀 도와줘!!’
나는 속으로 부르짖어 보았지만, 치우의 뿔은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그니! 바루나! 바유!…… 바즈라!! 아무거나 나와봐!’
나는 급한 대로 사대신기를 불러 보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대신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태껏 영혼상태든 뭐든 무조건 사대신기는 내 의지에 감응해서 나타났던 걸 생각하면 진짜 이상한 일이었다.
쿠르르르
나는 지척까지 다가온 종이의 파도를 보자 반사적으로 무공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멸혼보!
투웅
단숨에 극성의 멸혼보를 이용해 공간을 튕겨서 물러서자 종이의 파도와 거리가 크게 멀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무공을 쓸 수 있구나!’
육체도 없는데 무공을 쓸 수 있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숨 돌렸다!
내가 한 고비를 넘겼을 때 기이한 울림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뜻 밖 에 그 대 를 잡 을 기 회 가 왔 군
“……?!”
이 목소리는 대체……?!
날 잡으려 한다고? 대체 왜?
내가 마음속으로 반문하자, 마치 그 울림은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대꾸했다.
종 언 (終 焉) 은 그 대 에 게 의 미 가 없 음 이 라…….
연이어서 그 울림은 약간의 집착을 품은 말투로 말했다.
때 로 는 가 장 오 래 된 이 야 기를 끝 내 는 것 도 재 미 있 지…….
스스스스스…….
잠시 후 허공에서 거대한 책장이 소환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활짝 펼쳐진 책장에는 마치 수백 마리의 칠흑같은 어둠이 안개처럼 뭉쳐져서 괴기스러운 형태를 품고 있었으며, 그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덜컹
“……!!”
나는 그 기이한 삽화를 보자마자 하나의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제갈사에게 마도의 수업을 받을 때 들었던 존재였다.
[가장 위대한 신격이 [아버지]라고 한다면 그다음으로 위대한 게 누구냐고?]
[그야 당연히 만유의 왕인 허공록이지.]
[허공록 다음은 누구냐고? 이 병신아, 지금 굴레를 초월한 초월자들이 동네 패싸움하는 줄 아냐? 줄세우기나 시키게.]
[…… 하긴 전생자인 너라면 줄을 세울 권리가 있을지도 모르지. 굳이 마도사들이 그 순위를 정하자면 아마도 그 존재일 거야.]
그 권능과 권위를 따지면 니알라토텝에게도 뒤지지 않는 존재.
아니 - 틀림없이 마도사들이 따지는 위계에서는 더욱 위의 서열을 차지하는 절대자.
만유(萬有)의 지모(至母).
그 이름은 - 외신(外神) [검은 산양].
“크흑……!!”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암담한 절망과 공포가 전신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째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건지를 알 수 있었다.
‘달마가 외신의 권능으로 공격한 여파로 외신이 직접 내 정신세계에 강림한 거야!!’
틀림없이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는’ 종류의 권능을 썼는데도 치우의 뿔이 불합리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휘둘러서 그 권능을 쪼개어 버리자, 마치 도탄(倒彈)처럼 기세가 죽은 채로 내 정신만을 따로 타격한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내 육체는 치우의 뿔 덕분에 멀쩡하지만 내 정신은 정면으로 외신 [검은 산양]을 마주하게 된 것이리라.
이런 제기랄!!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잖아!!
스스스스
외신의 본체(本體)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마치 2차원인 책장에서 현실로 끄집어 내지듯 천천히 그 육체의 질감이 현실화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상대가 뻔히 강림하는 걸 보고도 마치 고양이를 앞에 둔 쥐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설령 지금 사대신기를 쓸 수 있었다 해도 외신의 본체를 공격한다고?
외신을 상대로는 무의미하다. 그 어떤 것도 먹히지 않으리라.
이미 달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받은 순간부터 승패는 정해져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억울해서 버럭 외쳤다.
“외, 외우주에서는 진공가향 해보라고 살려줘 놓고…… 이제 와서 죽이겠다니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스스스스스…….
검은 산양의 현신은 멈추지 않았지만 나는 삶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계속 외쳤다.
“내가 뭐 대단한 놈이라고 이러는 거냐고요!! 달마한테 개처발리는 거 보면 별거 없는 놈입니다!! 앞으로도 당신한테 위협이 안 될 테니까 그냥 한 번만…… 살려주십쇼!!”
그때였다.
외신은 잠시 자신의 현신을 멈추고 메아리 같은 소리를 내 머릿속에 직접 울렸다.
시 작 과 끝 이 그 대 에 게 있 거 늘
“……?”
뭐?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려 하는 바로 그 때였다.
번쩍……!!
갑자기 거대한 섬광이 눈앞에서 튀기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는 내 몸뚱이가 갑자기 달마의 손목을 움켜쥐는 게 보였다.
[아니.]
달마가 당황해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하나의 인영(人影)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날아가서 그대로 검은 산양이 소환되고 있던 책장을 공격하는 게 보였다.
대라천제지검(大羅天帝之劍)
우주쇄붕(宇宙碎崩)
꽈앙!!
한 쌍의 거검(巨劍)이 책장에 한쪽씩 박히면서 그대로 소환을 멈추었고 책장에 크게 우그러지며 찢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명백히 외신의 소환을 방해한 행위였으므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직
그리고 번개와 함께 하나의 신(神)이 고고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게 눈에 보였다.
그 신은 출현하자마자 나직이 말했다.
[치우여. 외신에게서 이놈을 보호하는 게 너의 의지란 말인가?]
치지지직
전신에서 번개를 내뿜고 있던 그 신은 마치 망토 같은 것을 창조하여 등 뒤로 흩날렸다. 그 망토는 잠시 후 거대한 한 쌍의 날개처럼 변했으며, 한쪽은 군청색, 다른 한쪽은 시뻘건 홍염으로 물들어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은 거대한 뇌검(雷劍)을 소환해서 검술자세를 잡았다.
[그렇다면 따라주마. 내 유일한 친구였던 너의 마지막 의지에!]
나타난 것은 뇌신(雷神) 인드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