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1권 2화
내가 이번 사신지혼의 윤회에서 선택한 흐름은 바로 수화풍뢰(水火風雷). 사실 순서야 자기 마음이었지만 중요한 건 윤회의 마지막에 어떤 속성을 선택하느냐가 윤회의 바퀴를 돌린 후 기술의 위력을 결정짓는 법칙이었다.
‘제일 번개처럼 만상지투를 펼칠 수 있는 건 뇌전의 속성이겠지.’
사실 사신지혼에 만상지투를 섞어서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신지혼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했기에 굳이 이 힘까지 써서 만상지투를 강화하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사신지혼의 힘을 이용해서 만상지투를 쓴다면 - 어쩌면 지금까지 대충 썼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으로 훔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릇’이 요란하게 한 바퀴 회전을 끝냈고 그 정제된 힘이 갈무리되어 손끝에 맺히는 게 느껴졌다.
번쩍!
내 손이 번개덩어리처럼 변하더니 평상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속도로 움직인다!
‘오옷!!’
위력은 잘 모르겠지만 이거 왠지 멋진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만상지투로 전뇌자의 심장을 노렸다.
‘인과율을 훔친다!’
근데 인과율이 뭐지? 그걸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건데 어떻게 훔치지?
이런 허상 같은 뜬구름 잡는 개념을 훔칠 수는 있는 걸까?
찰나지간에 온갖 망상과 상념이 떠돌았고 나는 일순간 모든 생각을 정지했다.
귀찮다.
생각 그 자체가 나를 붙잡아서 옭아맨다.
사실 진정한 만상지투에 생각 같은 게 필요한 적이 있었던가?
‘훔친다!’
잡다한 가능성을 살피는 이성보다는 그저 한 줄기의 의지만이 희미하게 남았고 그 의지가 저절로 내 몸을 움직였다. 마치 제 3자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관조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나는 그저 손을 내뻗었고, 다음 순간 무언가에 손이 닿았다.
이것은 촉감(觸感)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할 뿐인가?
그 찰나지간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다음 순간 내 머릿속에 무수한 정보가 쏟아지면서 알게 되었다.
쏴아아앗 - !!
“……!!”
뇌신지혼을 머금은 만상지투가 ‘무언가’에 닿자마자 뇌에 쏟아지듯이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영상과 대화! 그리고 과거의 사건! 나는 마치 수십 년 치의 사건을 대신 경험하는 듯한 감각에 잠시동안 정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뭐야?
치링 -
번개가 울린다(雷鳴). 동시에 그 번개가 시간의 축을 거슬러서 역행(逆行)하는 듯한 흐름이 꿈틀거리며 솟아오르기 시작했고, 그 번개를 뒤따라 내 영혼이 마저 이동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끌려들어 오는 무수한 정보와 기억들이 내게 진흙처럼 달라붙는다.
후와아악…….
나는 그 순간 뇌신지혼으로 만상지투를 행한 게 어떤 효과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시간……!!’
뇌신지혼의 힘으로 시간의 축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건가!
그것이 번개의 권능인 건가?!
치치치칭……!!
만상지투의 손끝이 마치 새하얀 문자 덩어리로 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찰나에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이 단 하나를 의미한다는 걸 직감했다.
‘내 만상지투가 시간을 훔치는 중이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게 인과율을 훔치는 게 맞는지도 아리송했기에 엄청나게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뽑은 칼을 다시 넣을 수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끝까지 이를 악물고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또다시 거대한 정보가 내 뇌를 휩쓸고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 정보를 무감각하게 흘려보내려고 애쓰면서 파동의 흐름에 맞추어서 끝까지 만상지투의 손을 밀어 넣었다. 만상지투는 한 번 손이 닿기만 하면, 그 나머지는 알아서 상대에게서 가져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 이거다!!
터엉!!
무언가가 단단하게 튕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 손이 바로 튕겨져 나왔고, 나는 형태가 없는 무형(無形)의 무언가를 내 손에 잡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마치 공기를 잡고 있는 듯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내가 이미 훔치고 난 뒤라는 걸 뒤늦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상지투로 이 정도로 무형의 무언가를 훔친 경우는 없었기에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슈슉…….
내 손에 있던 무형의 무언가가 사라진다. 나는 그게 도둑질을 완료했다는 표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윽고 전뇌자를 쳐다보았다.
‘인과율을 훔친 걸까?’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훔칠 때는 그것의 존재를 ‘인식’해야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인식한 게 인과율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영 엉뚱한 걸 훔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파지지직…….
만상지투에 당한 전뇌자는 잠시 동안 전신에서 뇌전의 기류를 흘려내면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러더니 전뇌자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백웅…… 당신은 이미 신투지존을 뛰어넘었을지도 몰라.”
“전뇌자.”
전뇌자는 약간의 당황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내 안에 부숴져 있던 메이저 코어(核)를 뇌신지혼으로 바꿔치기하면서 강제로 일월지혼의 유지시간을 늘리다니. 뇌신지혼에 제한적 시간역행의 힘이 있을 줄은…….”
나는 전뇌자의 말에 반색했다.
“뭐야!! 그럼 되살아난 거 맞지? 그렇지?”
“…….”
“인과율을 훔친 거겠지?”
전뇌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두근!
전뇌자의 시선을 받자마자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아까처럼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게 어떤 현상인지 알아채고는 외쳤다.
“전뇌자!! 또 나노봇으로 내게 마비를…….”
“……당신한테는 늘 놀라게 되는 것 같아. 인과율을 훔치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방금 한 건 그에 버금가는 기적이었으니까.”
“제기랄!! 당장 마비 풀어!! 한 번 해서 안 되는 거면 또 시도할 거니까!!”
내가 버럭 소리를 치자 전뇌자가 대꾸했다.
“당신은 이미 [시간]을 훔쳐서 바꿔치기를 하는 데 성공했어. ‘나를 살린다’는 목적에 가장 가까운 기적을 행해버렸어. 도리어 한 번 더 하게 되면 당신이 인과율의 역풍을 입게 될 거야.”
“……!!”
“진정하고 내 말을 듣는다고 약속하면 마비를 풀어줄게. 약속할 수 있겠어?”
저 녀석, 내가 바로 만상지투를 또 시도할 거라는 걸 예측하고 선수를 쳤구만!
우드득
나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서 전뇌자의 나노봇 조작으로 인한 신체속박을 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는 극도로 약해져 있던 전뇌자의 속박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전뇌자를 회복시켜줬기에 나노봇의 능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화된 전뇌자의 힘이라면 방금 싸웠던 나일라토프에게도 못지않은 수준이다. 나는 내 무덤을 팠다는 걸 알아채고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슈욱
전뇌자가 나노봇의 속박을 풀었지만 나는 약속대로 전뇌자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일단 약속은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뇌자가 밝게 말했다.
“당신 덕에 내가 소멸하지 않을 수도 있겠어.”
“정말이냐?”
“응. 어찌 됐든 시간을 치환해서 내 핵을 어느정도 되살려줬으니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걱정 마.”
나는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인과율은 못 훔친 것 같지만 어떻게든 전뇌자를 구하긴 한 것 같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전뇌자가 시선을 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보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전생자가 들어가면 바로 전생이 끝날 수 있는 시련이 시작된다면서? 아까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전뇌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당신이 내 힘을 더 강하게 회복시켜준 덕에 지금의 나라면 당신을 도와서 저 문 안에 뭐가 있는지 정찰한 후 도로 꺼내줄 수 있어.”
“……!! 진짜냐?”
“그래. 시간을 훔쳐서 핵을 전성기 때로 원상복구 시켜줬으니 최대의 연산력을 쓰면 그쯤은 가능해.”
“호오…….”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이 꿈의 끝자락에 있는 [문]이라고 하는 최후의 시련!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앞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건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민하자 전뇌자가 말했다.
“어차피 여기에 다시 오기도 힘들 거야. 원래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없게 통제되어 있고 나일라토프가 침입했다는 명분으로 이 앞까지 와서 싸우고 있었을 뿐. 지금 [문]의 안쪽을 살펴보는 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제안하는 거야.”
저건 맞는 말일 것 같았다. 달리 말하자면 나일라토프처럼 [서]의 안쪽까지 침입할 만한 강대한 외적이 없다면 여기까지 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전뇌자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이윽고 의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정말 이제 괜찮은 거지?”
전뇌자는 너구리인형을 던지려는 자세를 하며 역정을 냈다.
“뭘 자꾸 걱정하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걱정스러우면 수련세계로 바로 되돌아가면 되잖아. 다음에 여기까지 와 보려고 또 수십 회차 동안 생고생하면 되겠네!”
“……아니, 싸가지없는 말투 하고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툴툴거렸지만 전뇌자가 괜찮은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소멸지경이면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는 것이다.
‘좋아. 어디 도전해 볼까.’
그래서 나는 전뇌자에게 말했다.
“알았어. 어디 저 문짝 안에 뭐가 있는지 한번 보자고.”
내 전생을 시작하게 한 천암비서의 가장 깊은 곳 -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째서 전생을 시작했으며 누가 그 힘을 주었는지 여태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 문의 안쪽을 들여다봄으로써 그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치링!
전뇌자가 눈을 파르스름하게 빛내며 자신의 손 위에 금빛 회중시계를 소환했다. 히든피스가 자신의 손 위에 나타나자 전뇌자는 입을 열었다.
“나 전뇌자, 천암비서의 단말로서 요청하노라. 진정한 진실의 업(業)에 도전하는 전생자의 조력자로서 문 안에 힘을 행사할 권위를 부여해 주소서.”
우우우우…….
잠시 후 전뇌자의 몸 위에 시꺼먼 안개 같은 어둠이 내려앉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 어둠은 마치 방금 보았던 사서를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위압감이 있었기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 살면서 난다 긴다 하는 상위존재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지금 전뇌자에게 덧씌워진 것은 그런 힘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괘, 괜찮냐?”
그러자 전뇌자가 말했다.
“걱정 마. 서(書)에게서 조력의 권한을 받은 것뿐이니까. 이제 당신을 도울 권리가 생겼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돼.”
“흐음…… 알았어.”
나는 거대한 문짝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자 내 괴력이 적용되었는지 다소 거대하고 무거운 문짝이 어렵지 않게 열리는 게 느껴졌고, 육중한 일 장짜리 문짝이 굉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문짝을 반쯤 열자 그 안에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같은 암흑이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런 심연에 발을 들이미는 건 누구든 무서운 일이었기에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뒤에서 보고 있던 전뇌자가 나를 부추겼다.
“그 어둠은 우주가 태초에 생겨날 때 전지의 왕이 창조의 업을 휘감으며 강림했을 때의 혼돈이야. 시원(始原)의 혼돈은 가장 악랄한 독기를 품고 있지만, 당신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는 독기니까 안심해도 돼.”
“뭐? 시원의 혼돈이 가장 악랄한 독기를 품고 있다면서 왜 나한테는 해를 못 끼치는데?”
“그 독기의 근원은 업보(業)이기 때문이야. 이전의 세상이 파멸하면서 생겨났던 모든 흉행과 의지 있는 자들의 원한이 업이 되었기에 시초의 혼돈이란 가장 독랄한 혼돈일 수밖에 없는 것…… 황제나 흉신이라 해도 그 혼돈에서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당신은 그 업을 이미 수십 번이나 체현했으니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면역인 존재야.”
“……?”
“일월지혼의 효과가 완전히 끊겼나 보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니까.”
“아무튼 괜찮다 이거지?”
“그래. 들어가 봐.”
저벅
전뇌자의 말대로 내가 몇 걸음을 걸어 들어갔는데도 의문의 대지가 내 발을 받쳐주었으며 새까만 어둠은 그저 아늑하게만 느껴질 뿐 내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 이 정도면 그동안 겪었던 별의별 흉악한 지형에 비하면 아주 안전한 편이었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저벅…….
한참을 걸었는데도 어둠만이 느껴질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험은 꽤나 많았기에 그다지 무서움은 느끼지 않고 계속 걸었는데, 나는 어느새 옆에서 누군가가 내 손을 잡는 걸 알 수 있었다.
“전뇌자?”
꼬옥 하고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전뇌자의 고사리 같은 손이었다. 손이 작아서인가 완전히 내 손을 붙잡지 못하고 손가락 두세 개를 붙잡고 있는 형상이었다. 어느새 나를 따라서 문 안에 들어온 전뇌자는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젠 손잡는 것도 안 돼?”
“뭐 안 될 건 없다만…… 독랄한 혼돈이라면서 같이 들어와도 되냐?”
“그래서 아까 권한을 받아서 나도 면역이 생긴 거야. 다음번에 동료들과 도전할 때는 이 과정을 잊으면 안 돼.”
“아하.”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씩 웃으며 손을 더 넓게 펴서 전뇌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알았어. 내 손 정도는 마음껏 잡으라고, 맹랑한 녀석아.”
“…….”
순간 전뇌자의 표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변했지만 녀석은 다시 냉막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저벅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서서히 빛이 보이면서 눈앞에 생소한 풍경이 나타나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저건…….”
무척 환하고 넓은 장소다. 나는 햇살이 비치는 신록의 내음이 가득한 평화로운 언덕에 와 있었고, 낮은 언덕 근처의 연못에 가득 꽃이 피어있는 게 보였다.
‘이 연못의 꽃은…….’
백련(白蓮)이다.
나는 마치 백련교의 뒷마당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고 한참 동안 백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전뇌자가 말했다.
“저기를 봐.”
“…….”
어느새 누군가가 약 십여 장 밖에 출현해 있었다. 내가 전혀 낌새를 채지도 못한 걸로 봐서는 느닷없이 나타난 게 틀림없었다.
전면에 나타난 것은 웬 장포 같은 걸 뒤집어쓴 존재였다.
‘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놈인데.’
나는 그 존재에게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고 왠지 저 장포 안에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 존재 또한 나를 발견한 듯 석장(石杖)을 짚은 채 굳게 버티고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요?”
상대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대답을 하지 않아서 내가 속이 답답하고 느낄 때쯤, 그자는 기괴한 이족의 언어인 괴어로 내 말에 대답했다.
[전생자여. 생사입멸(生死入滅)의 업(業)을 깨닫고 예까지 온 것이냐?]
“……?”
[그렇지 아니하다면 여기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를 권하겠다. 지금 그대의 힘으로는 나조차 이길 수가 없다.]
뭐?
나는 의문의 괴인이 다짜고짜 나를 폄하하자 왠지 발끈했다. 보자마자 자기가 나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 셈인데 무인이라면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제기랄! 여기가 천암비서의 마지막 시련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왔소! 근데 당신이 나보다 강하다는 보장이 어딨지? 그리고 당신이 누군지 대답이나 하시오!”
장포의 괴인은 도리어 감탄한 듯했다.
[호오…… 정녕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깟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게 도리어 대단하다 해야겠군…… 그대는 최단기간에 찾아온 도전자일 수도 있다…….]
“뭐?”
아니 저 새끼는 뭘 믿고 저렇게 오만방자한 거야?
당연히 내가 약하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얕보일 정도인가?’
내가 기가 막혀 하자 상대가 석장을 바닥에 꽝 하고 내려치며 말했다.
[동도(同道)로서의 후의(厚意)로 권하노라. 이 시련은 그대의 수준에 맞지 않으니 되돌아가거라.]
“…….”
[나 다음에 기다리는 자들은 나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자들이니…… 나의 후의를 허투루 넘기지 말라.]
나는 상대를 개무시하는 괴인의 말에 이미 속이 꼬일 대로 꼬여 있었지만, 놈의 말에서 한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잠깐 냉정해졌다.
“그 말대로라면 당신을 이기고 나면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적이 또 있단 말인가? 그놈들을 다 쓰러뜨리면 된다는 말이지?”
[할 수 있다면.]
나는 호승심이 끓어올라서 검을 신력으로 창조해서 들었다. 이 공간에서 신력은 멀쩡히 써지는 것 같았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아가리를 턴 만큼 강한지 한번 보자!!”
[…….]
“싸우기 전에 네 이름을 밝혀라. 내 이름은 백웅이다.”
괴인은 잠시 후 한탄하는 듯 말했다.
[업보로구나…… 큰 굴레의 저편에서 그대의 메아리를 들었기에…… 그대가 선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돌아가기를 권했거늘! 허나 도전의 의지를 밝혔다면 나는 이 업보에 묶인 자로서 전력을 다해 그대의 도전에 응할 수밖에 없노라…….]
“뭔 말이 그렇게 길어? 이름이나 밝히라니깐.”
스스스
괴인이 자신의 석장을 놓자 석장은 저절로 허공에 띄워졌다. 그리고 괴인은 석장을 놓고는 자신의 양손을 들어서 합장했는데, 그 양손은 마치 이족과 융합이 된 것처럼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합장을 한 괴인이 자신의 장포에 가려진 얼굴에서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그대…… 아직도 나의 정체를 모르겠는가?]
“…….”
[인과의 흐름이 그대와 나의 만남을 속삭여 주고 있다…… 나는 직접 그대를 만나지 아니하였으나…… 외우주의 굴레에서의 인연 또한 전생자에게는 현재진행형이나 마찬가지인 것…… 굴레를 벗어난 지금 그 속삭임은 선명히 내게 들려오고 있노라.]
외우주?
어……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기시감이 이윽고 통찰력과 함께 다가옴을 느꼈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까먹고 있었던 과거의 존재를 금방 머릿속에서 떠올렸고, 나는 상대의 정체를 바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부릅!
나는 이걸 이제야 깨달은 게 믿기지 않았기에 당황해서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는 설마…….”
괴인은 약간 착잡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머나먼 과거, 그대가 새로이 전생자로 출현하기 전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나의 제자들이 인연이 되어 그대와 이어졌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허나 그 기쁨은 오늘 그대가 시련에서 패배하게 되면 영영 사라지게 되겠구나…….]
“…….”
[그럼 사투를 시작해보자.]
쿠구구구…….
합장한 괴인의 몸 주위에 거대한 만다라(曼茶羅)가 수백 개나 떠오르는 게 보였다. 백련교주의 것과는 다소 달라 보였지만, 그 또한 무한의 내공을 사역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범상치 않은 신력(神力) 또한 마치 물감이 번져 나오듯 주위의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저 자는 아직 힘을 다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그 존재감만으로도 시공간을 왜곡하고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내가 가진 잠재력으로 그 한계를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 아마 그 예감은 사실일 듯했다.
나는 상대방의 정체를 이제 깨달은 상태였다.
‘설마…… 천암비서 최후의 시련이라는 건……?’
그리고 괴인이 내 예상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백웅이여. 전생자 달마(達磨)가 그대를 상대해주겠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백련교의 창시자이자 전생자 - 달마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