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0권 20화
나는 나일라토프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가면]이다.
“……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럽지만 지금 느낀 것은 뻔한 사실 이상의 실감(實感)이었다. 아까부터 내 정신이 기묘한 각성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는데 지금의 감각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가면]이라는 걸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 증거로 나일라토프의 하얀 가운과 병약해 보이는 안경 쓴 외모 같은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도리어 그런 외모를 그저 윤곽으로 삼은 채 그의 심장 근처에서 [가면]처럼 보이는 게 맥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나일라토프의 인간적인 외형은 아무 의미 없으며 저 가면이야말로 본체라는 걸 마음속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나일라토프는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긴 해. 이제 이 문만 열면 나는 목적을 달성하거든.”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침묵하자 나일라토프는 그제서야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위기가 좀 다른데? 그렇다고 분신이나 화신체를 보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아무튼 여기에 왜 온 건지 대답해줄 수 있겠나, 백웅?”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왜인지 대답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와의 대화가 영양가 있어 보여도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화 그 자체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기만전술에 불과하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한마디의 의지가 감돌았다.
전뇌자를 구해야 해.
스윽
나는 그대로 일월지혼의 힘을 실어서 아까처럼 총천연색의 끈을 잡아채며 내 쪽으로 살짝 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나와 나일라토프가 서 있던 공간 전체가 크게 일렁였고, 나일라토프 뒤편의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는 게 보였다.
콰칭!!
마치 유리창을 깨듯 풍경을 꿰뚫고 튀어나온 것은 바로 함선 가이아!! 나일라토프의 전용함선인 거대한 가이아의 동체가 나일라토프 후방의 상공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초과학의 기류가 가이아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자 나일라토프의 안색이 일변했다.
“……가이아를 감싸고 있는 확률변동식 양자왜곡장을 한 번에 다 걷어냈다고? 대체 무슨.”
저놈이 당황하는 걸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나일라토프의 반응에 즐기거나 대꾸하지 않고 그저 가이아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눈에 일월지혼의 힘이 살짝 집중되자, 곧바로 주황빛으로 무언가가 빛나면서 내게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치리리링!
치리리링!!
함선 가이아의 내부에 무언가가 벽에 묶여 있다. 어둠속에서 치직거리는 환영, 그 곁에는 갈가리 찢어진 너구리인형이 솜덩어리와 함께 해체되어 있었으며 환영은 벽에 손발을 사슬로 묶인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묶여 있는 소녀(少女)의 모습을 보자마자 침음성을 흘렸다.
“……전뇌자…….”
틀림없다. 저건 전뇌자다.
그렇다면…… 나일라토프와의 대결에서 전뇌자는 이미 패배했던 것이다. 그리고 포로로 가이아에 붙잡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고, 그런 나를 쳐다보던 나일라토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는 갑자기 불가해(不可解)할 정도의 엄청난 성장을 이뤘군. 어떻게?”
“……
“자기가 가진 신력도 다 쓰지 못하는 어설픈 자가 고작 300년의 수련동안 이만큼이나 강해지다니, 흥미로워.”
나는 처음으로 나일라토프의 말에 제대로 대꾸했다.
“전뇌자를 놓아줘.”
그러자 나일라토프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 [문]의 정체가 궁금하진 않은 건가? 그깟 단말 따위를 걱정하다니…….”
원래라면 나일라토프의 말에 꽤나 화를 냈을 것 같다. 그런데 일월지혼과 함께 하고 있는 지금 상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적고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또한 잘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내가 지금 올바른 선택과 올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건 마치 미래예지와 같이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해주고 있는 듯했다.
“놓아주지 않는다면 널 죽이겠다.”
담담한 한마디의 엄포.
그러나 나일라토프는 내 엄포를 무시할 수 없는 듯했다. 그는 잠시 떫은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귀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귀에 끼고 있던 어떤 기계를 톡톡 두드렸다.
“가이아. 전뇌자를 해방해.”
[알겠습니다.]
푸쉬익 -
가이아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뇌자의 신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정체불명의 힘을 각성한 전생자와 굳이 싸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아. 그보다는 자네도 지금 내가 하려는 대업(大業)에 협력해줬으면 해서 전뇌자를 해방해 준 걸세.”
나는 떨어진 전뇌자를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 같았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치잉
그리고 잠시 후 전뇌자의 모습이 빛의 가루처럼 변하더니 조그마한 전자칩 같은것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전자칩을 들고 있자 나일라토프가 훗 하고 웃었다.
“데이터소모를 막기 위해 무기물 형태가 되었군.”
“…….”
나는 전뇌자의 칩을 품속에 넣었다.
일단 필요한 일은 했다. 나는 이제 정보를 좀 얻어보기로 했다.
“너는 내가 너 대신에 [문]을 열어주길 원하고 있는 거겠지.”
“호오!! 바로 그거야!”
나일라토프는 기쁜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을 열 수 있는 건 바로 전생자 뿐일세.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이 문만큼은 열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나일라토프의 말을 끊었다.
“너를 막아섰던 전뇌자를 붙잡아서 인질로 만든 후 수련세계로 찾아와서 나를 협박하려고 했겠군. 내가 수련세계를 나가기 전에는 무조건 찾아오려 했던 거겠지.”
나일라토프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체불명의 에너지는 자네의 지능도 올려주는 모양이군. 세계수의 핵이 따로 필요 없었잖은가?”
“……
“맞아. 그렇다 해도 나는 과학자니까 일단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과학을 동원해서 할 만큼 해 보다가 자네가 있던 수련세계를 찾아갈 생각이었네.”
“너무 여유롭군.”
“응?”
나는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나일라토프를 노려보았다.
“말로는 과학자의 도전이라 하지만 눈앞에 있는 문을 여는 건 네게 있어서는 최후의 목표.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목표다. 하루라도 빨리 나를 데려와서 협박하면서 문을 열려고 애를 써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는 거잖아.”
“……
“네놈은 수련세계에 뭔가 수작을 부렸어. 그렇지 않나?”
내가 추궁하자 나일라토프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지. 지금 자네의 지능을 볼 때 이미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도 대충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당연히 그렇다.
나는 불쾌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나일라토프. 너 이 새끼.”
“이런, 적의를 내뿜지 말게. 나는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전뇌자와의 전투도 단말인 그녀가 나를 막아서기에 방해물을 치운 것뿐이고, 자네와도 딱히 적이 되고 싶진 않으나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자네가 필요하기에 적절한 수단을 마련한 것뿐이야. 자네가 내 입장이라도 똑같이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인간의 표현으로 친다면 그런 말이 되겠군. 후후…….”
나일라토프가 빙긋 웃었다.
“참고로 방금 해방시킨 건 전뇌자의 본체가 아니라 그녀의 연산기능 중에서 10 퍼센트를 떼놓은 분체(分體)야. 90 퍼센트의 전뇌자는 아직도 구속 중일세.”
그렇군.
여전히 인질극을 계속할 셈인가…….
나는 나일라토프를 노려보던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 평안 하게 대꾸했다.
“예전에 제갈사가 나한테 말한 적이 있지.”
“……?”
“배짱 싸움에서 밀려서 남 좋은 일만 시켜주었다고. 나는 결과적으로 여와 좋은 일만 시켜주었고 내가 상황을 주도하지 못해서 28번째 삶에서 시간을 낭비했고, 그 낭비한 시간 때문에 동료들을 도와줄 기회가 더욱 사라졌던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는 똑 같은 실수를 또 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이어진 내 말에 나일라토프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 마음대로 해 봐. 어차피 내가 안 도와주면 너는 절대로 이 문을 열 수가 없어. 내가 전뇌자를 구하지 못해서 아쉬운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지만 진짜로 아쉬운 건 나일라토프, 바로 네 놈이다.”
“……!!”
“전뇌자도 천암비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면 원하던 바일 거다.”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나일라토프는 약간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웅. 이렇게 나올 셈인가?”
“이렇게 안 나오면? 네 놈 협박에 휘둘려서 해달라는 걸 다 해주고 얌전히 죽어달라는 말을 하고 싶나?”
“……”
“웃기지 마라. 여기까지 와서 그런 얼빠진 짓은 하지 않아. 원하는 게 있다면 네 놈이 내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하아…….”
나일라토프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전생자가 직접 저 [문]을 여는 게 전생(轉生)의 끝이라고 해도 말인가?”
나는 그 말에는 흠칫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반응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좋네. 애초에 단말인 전뇌자가 내가 여기까지 침입하는 걸 극구 말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저 문이야말로 전생자에게 마련된 최후의 시련이기에 천암비서라는 시스템의 일부인 전뇌자는 나를 막을 수밖에 없었던 걸세. 그리고 최후의 시련이라 한다면 당연히 자네 스스로가 전생을 끝내고 윤회의 고리를 탈출하는 [끝]일 수밖에 없지.”
“……”
“내 가설을 말해주지. 저 [문]을 열고 나서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존재가 바로 다음번 전생자가 되는 거야. 혹은 자네가 직접 들어가게 되면 바로 승천에 도달하는 것이고.”
미친 소리 같다.
그러나 동시에 혹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일라토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네 놈이 전생자가 되고 싶다 이거냐?”
나일라토프는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럴 생각은 없어. 전생자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라는 걸 내가 모르겠나? 그리고 나는 전생하면서 더 힘을 쌓기에는 이미 극한에 도달해 있으니 귀찮기만 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전생자가 될 생각이 없으니 저 문을 이용해서 [중앙]에 갈 것이고 거기서 내 가면의 숙명을 벗어 해탈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
“……”
“그 방법 외에는 니알라토텝의 주박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까.”
“수보리처럼 불법을 깨달아 [큰 굴레] 그 자체에 이름을 맡기면 되잖나.”
“아아…… 그 방법 말이지.”
나일라토프는 설핏 비웃음을 짓는 듯하더니 말했다.
“이름만 빼놓으면 뭘 하나? 어차피 그래 봤자 본체는 큰 굴레의 회전에 순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하찮은 현실도피가 아니야. 저 [외신]들과 동급의 지위를 향유하며 이 세계를 흥미롭게 관찰하고 싶은 것이다.”
“……외신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후 나일라토프를 쳐다보았다.
“결국 너도 목표는 외신이었구나.”
“그런 셈이지. 따지고 보면 일석이조인 셈이지만.”
나일라토프가 안경을 고쳐 쓰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중앙]에 가게 되면 이 세상에 남겨진 자네를 위해 종말의 사건을 최대한 유예해 주지. 외신의 경지에 도달하면 수십억 년 정도는 충분히 유예할 수 있을 거야. 자네는 동료들과 함께 즐겁게 살다가 즐겁게 생을 마감하며 전생자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 아닌가? 종말만 없다면 자네가 가진 힘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
“나는 과학자 나일라토프. 황제 공손헌원과는 달라. 그자처럼 굳이 이 세계를 지배할 생각은 없어. 관찰자로 만족할 수 있으니 내 제안을 들어주게.”
혹하는 제안이긴 하다. 아니, 황제가 억지로 나를 조종하려 했을 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좋은 제안일 듯했다. 아마 눈앞의 나일라토프도 황제 못지않게 음흉한 놈이겠지만 그만큼 내가 놈에게 있어서 절실한 대상인 탓도 있었다. 나를 꼭두각시처럼 갖고 놀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나름 호의적인 대가를 베풀어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나일라토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이 조금만 더 진실했다면 지금 제안에 응했을지도 모른다.”
“뭐?”
이어진 내 말에 나일라토프가 흠칫했다.
“왜 천암비서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지?”
“……!!”
나일라토프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짓자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뻔하겠지. 너는 외신이 되면서 천암비서도 동시에 가지려는 거다. 그리고 내겐 말하지 않았지만 천암비서를 가짐으로써 할 수 있는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거겠지. 나는 더 이상 너처럼 음흉한 놈한테는 쉽사리 속지 않아.”
“……
“나일라토프, 준비해라.”
스으…….
나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나일라토프에게 검극을 겨누었다.
“너와 나, 악연(惡緣)을 끝낼 때가 왔다.”
정적이 감돈다.
나일라토프의 눈이 잠시 후 홍옥처럼 붉은빛으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좋아…… 싸움은 내 취미가 아니지만 상대해주지…… 전생자 백웅.”
번쩍!!
그 순간 잿빛으로 가득하던 협곡 전체가 너울거리더니 우주공간으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뒤바뀐 우주공간에서도 여전히 찢어진 책장과 온갖 책들이 날아다녔고, 그 너머에서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암천(暗天)으로 가득한 우주공간을 잠시 쳐다보던 나는 알아차렸다.
‘이건 환영이 아니야.’
진짜 우주공간이다!
그리고 나일라토프는 어느새 내 앞에서 사라져 있었고 대신에 멀리에 부유해 있던 전함 가이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우주공간이라서 어마어마한 거리였지만 그 멀리에서도 가이아에서 나일라토프가 하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말해두는데 여긴 원래 이런 곳이었다네. 무한성계(無限星界)를 돌파하는 것도 [꿈]의 끝에 도착하기 위한 전생자 전용 시련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지금의 자네는 얕볼 상대가 아닌 것 같으니, 가이아로 만들어낸 가상필드를 해제했다네.]
“……
가이아에 탑승한 건가.
치치칭!
갑자기 전 우주공간 전체가 먹빛에서 새하얀 광명(光明)으로 뒤덮였다. 나는 이게 어떤 현상인지 순식간에 깨달을 수 있었고, 나일라토프의 이어진 말이 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사전에 깔아둔 1조 6천억의 반물질광선포로 선공하겠네.]
쿠콰콰콰콰쾅!!!
순식간에 나는 내 주변에 말도 안 되는 폭열(爆熱)이 덮쳐오며 셀 수 없는 다발과 같은 선(線)이 광속 이상의 속도로 날아와서 꿰뚫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일라토프가 말한 1조 6천억이라는 숫자가 사실이라면 이미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공격이 분명했다. 아마도 저 반물질 광선포가 몇 개만 터져도 인류문명 따위는 손쉽게 멸망시킬 수 있으리라.
쿠쿠쿠쿠…….
쩌저적
광선이 쉴새 없이 날아와서 부딪히자 마치 내 주변의 공간은 폭발이 고체덩어리처럼 뭉쳐서 거대한 구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행성의 공전궤도만큼 거대한 폭발의 위력이 계속 쌓이면서 시각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두세 가닥의 반물질광선포가 어떤 태양만큼 큰 항성의 중심부를 꿰뚫는 게 눈에 보였다.
투두둑!
쿠오오오 - !!
잠시 후 실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항성이 광대한 폭발과 함께 적색 빛으로 물드는 걸 보자 나는 이 공격의 진짜 위력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고작 몇 발만으로도 거대항성을 즉석에서 폭발시키는 위력!
나는 생각했다.
‘이게 과학력 하나만으로 상위신을 초월한 [가면]의 힘인가.’
가벼운 견제기에 불과할 텐데 이미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 공격이 나를 전력으로 소멸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대라신선은커녕 웬만한 마왕이나 사도조차 한방에 쓸어버릴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미 내가 있던 성계 전체가 공전궤도 채로 초토화된 듯했다.
이놈은 정말 황제나 흉신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아니, 이 정도가 아니면 애초에 외신의 눈을 피하면서 외우주를 돌아다닐 수도 없었겠지.
순간 내 머릿속에는 과거 처음에 놈과 마주쳤을 때, 나일라토프가 나와의 전투를 꺼리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전함 가이아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전생자 백웅과 싸우는 시뮬레이션도 재미있군. 가이아의 승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게 흥미로워.]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였다.
‘……뭐가 가이아의 승률이 안 높단 말이냐.’
아마 그때 나일라토프가 마음먹고 날 죽이려 들었으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수천 번은 살해당했을 것이다. 지금 보이는 힘을 생각하면 내 실력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저놈은 처음부터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위존재였다. 그러나 전생자의 진짜 가치는 현재의 전투력이 아니라 미래에 전생하면서 쌓아갈 능력치이며, 동시에 천암비서를 통해 쉽사리 승천할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이었다. 놈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다른 상위존재처럼 내 앞에서 잘난척하지 않고 도리어 약한 척하면서 내게 접근했던 것이다.
아니, 정상적이라면 300년 동안 수련세계에서 미친 듯이 수련해봤자 별 차이가 없다. 저놈은 격이 다른 존재였고 고작 300년으로 그 격을 메우는 건 보통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나일라토프와 싸우는 건 원래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원래라면 말이다.
“……”
우우우우 -
나는 어마어마한 폭열 속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희미하고 투명한 원구 안에서 얌전히 눈을 반개했다. 내 전지적인 감각과 함께 저절로 힘이 감응해서 나를 공격에서 지켜주었기에 여유롭게 나일라토프의 첫 공격을 버틸 수가 있었다.
‘일월지혼.’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일월지혼의 힘을 쓰더라도 이만큼 어마어마한 공격을 상대로 버텨내리라는 확신이 들어서는 안 되는데, 처음부터 나는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일라토프가 그 어떤 초과학을 이용해 공격하더라도 나를 쉽사리 해치지는 못하리라고. 이 알 수 없는 전지적인 감각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그 말대로라면 지금 나는 나일라토프에게 뒤지지 않는 힘을 갖고 있었다.
받아라.
스윽
나는 검을 들어서 전방을 겨눈 후, 그대로 일섬을 내질렀다.
일월지혼(日月之魂)
무량단(無量斷)
쓔욱……!!
다음 순간, 우주 공간 전체가 통째로 베였다. 그것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공간 전체가 마치 일직선으로 잘려서 균형을 잃은 채 비틀어진 것 같았고, 그 범위에 있던 함선 가이아까지 함께 베여나간 것이다. 동시에 베여나간 일직선에 걸려 있던 모든 별의 궤적(星座)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투콰아아앙!!
가이아가 무형의 방어막과 함께 크게 튕겨서 뒤로 날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낭패한 듯한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뭣……?! 이 정도라고?! 대체 이 에너지의 정체는 뭐냐!]
나일라토프도 일월지혼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듯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공포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퍼엉!
가이아가 내 일격을 완전히 견디지 못한 듯 함선의 한편이 폭발하는 게 멀리에서도 느껴졌다. 단숨에 저 초과학 함선의 방어를 뚫고 유효타를 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일라토프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 무한히 그 정도의 힘을 쓸 수는 없겠지! 초고차원계로 이동! 보이드 펜듈럼(void pendulum) 발동해!]
스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여태 날아오고 있던 반물질광선포의 세례가 멈추고 갑자기 우주의 넓이 자체가 크게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공간이 말도 안 되는 배율로 확장되면서 나와 가이아 사이의 거리가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더욱 넓어진 것이다.
퓨퓨퓨퓽
그리고 지금까지 주변 우주공간에 있던 별들이 극히 미세하게 작아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별이 뭉쳐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별들의 단위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은하(銀河)……!!’
슈슉…….
내 눈앞에 드러난 은하 또한 점차 갈수록 작아지는 게 느껴졌고, 이윽고 은하가 원래의 10분의 1 이하의 크기로 줄어들자 그런 은하가 더욱 뭉쳐서 나타난 은하군(銀河群)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현상을 옥좌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기에 지금 나일라토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차원계의 경지를 과학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높이면서…… 자기가 타고 있는 가이아는 고차원계로 올리고 나를 저차원계에 두려는 건가! 그렇게 해서 내 공격은 무효로 만들고 자기만 일방적으로 공격하려고…….’
이런 기술 자체도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고차원적이다. 어찌 보면 종말의 [옥좌]에서나 구현되는 현상을 과학으로 만들어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니 신조차도 엄두를 못 낼 기술이 아닌가? 새삼 내가 얼마나 미친 괴물과 상대하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일월지혼은 신기하게도 내가 평상시라면 금방 깨닫지 못할 것을 금방 깨닫게 해주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듯했다. 전지적인 감각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를 대신해서 무형의 정보를 계속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지능이 높아졌다고 나일라토프가 말하는 것도 괜한 말은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일라토프의 수법인 보이드 펜듈럼이 다 펼쳐지게 내버려 두면 나는 무조건 진다. 왜냐하면 나일라토프가 이미 자신의 승리 조건을 깨달은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저놈은 내 일월지혼에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령 내게 유효타를 주지 못해도 시간을 끌면 자기가 무조건 이긴다는 걸 알아챘어!’
그렇다.
지금 이 일월지혼의 발동은 무한히 계속되는 게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일월지혼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그 총량을 다 소모하면 다시 일월지혼의 힘을 채우기 전까지는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미 꽤 힘을 썼기 때문에 아마 몇 번만 더 사용하면 일월지혼은 다 소모될 게 뻔했고, 그때부터는 나일라토프를 이길 방법이 사라진다.
“……”
하지만 애초에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도 일월지혼이다. 이 일월지혼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다른 ‘그릇’과는 달리 힘 그 자체가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았고, 아까 홀린 듯 공간을 찢어 이 꿈의 끝자락에 도착한 것도 일월지혼의 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월지혼은 패배할 거라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사용자인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지 않았으리라.
‘일월지혼이여. 주인을 죽게 만드는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이기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는 내가 어떻게 이길지를 빠르게 생각했다.
‘몇 번 쓸 수 없다면…… 그 남은 몇 번을 확실하게 접근해서 때려 박는 거야!’
그렇다면 이 보이드 펜듈럼이 완전히 펼쳐지기 전에 고차원계로 접근해야만 한다!
나는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서 도약했고, 검을 휘둘러서 눈앞에 보이는 기이한 총천연색의 실을 베어 잘랐다.
쏴악!
그러자 갑자기 공간이 종이가 베어 날리듯 나풀거리면서 사라졌고, 나는 도약과 동시에 좀 더 고차원계로 진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일월지혼은 차원과 시공간조차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위력이 있기에 보이드 펜듈럼에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따라붙을 수 있는 잠재력을 주는 것이다.
슈슈슉
그러나 보이드 펜듈럼의 차원계가 벌어지는 속도는 갈수록 가속되었고, 나는 몇 번의 도약을 하면서 좀 더 따라잡고는 있었지만, 점차 마음이 급해졌다. 왜냐하면 저놈이 좀 더 속력을 내게 되면 왜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도약한 만큼 더 빠르게 추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윽…… 단순히 공간을 찢어 베는 것만으로는 보이드 펜듈럼의 영향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어쩐지 이 실 같은 끈은 베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쥐고 흔들어야 더욱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외팔이 상태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검이었기에 이제 와서 검을 집어넣기에는 상황이 마땅치가 않았다.
바로 그때 나는 내 한쪽 팔을 힐끔 바라보았다.
“……!!”
여전히 잘린 상태이지만 나는 그 팔에 머물러있던 저주의 잔향조차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순식간에 신력을 시전했다.
번쩍!
빛과 함께 내 팔이 금방 원상복구 되었다!
나는 오랜만에 내 진짜 팔을 찾자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으하하하!! 바로 이거지!”
아까 일월지혼을 얻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월혼이 저주받은 팔에 들어오면서 월혼의 힘이 저주를 모조리 먹어치워 버린 거다!!’
90억 마두나 필요한 어마어마한 저주였지만 그것보다 월혼의 힘이 더욱 강했다는 뜻일까?
일월지혼 덕분에 팔의 저주가 공짜로 해제된 셈이다!
아무리 내가 무술의 달인이라서 외팔이로 싸워도 문제없다고는 하나 그래도 두 팔이 다 있는 쪽이 편하고 강하다! 나는 몸이 원상복구 되자마자 그대로 검을 집어넣고 태극권(太極拳)의 자세를 취했다.
스스스스……!!
내 양팔에 음과 양의 힘이 깃든다. 음이란 월혼(月魂)이고 양이란 일혼(日魂)이니, 두 개의 힘이 내 몸을 축으로 모여서 진정한 태극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태극으로 인해 일순간 일월지혼의 통제력이 가장 고조된 순간, 나는 쌍장을 모아서 앞으로 뻗어 장풍(掌風)을 내질렀다.
“하아압!!”
칠대절학(七大絶學)
합체기(合體技)
삼절무극장(三絶無極掌)!!
장삼봉이 전수해준 극고의 절예가 일월지혼의 힘을 머금고 전방으로 떨쳐졌다. 그리고 패도적인 삼절무극장의 공세는 무려 세 번이나 공중에서 회전하며 차원을 꿰뚫었고, 잠시 후 회전이 잦아들며 서서히 진동이 더욱 강해졌다.
꽈르릉!!
모였던 회전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거대한 천둥소리를 울린다!! 장삼봉 진인이 무림을 활보하던 무렵에 삼절무극장의 천둥소리를 들은 무림인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었고, 회전과 폭발을 자유자재로 하는 절기인 삼절무극장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가장 관통의 위력이 강한 게 분명했다.
고오오오 - !!
아니나 다를까, 천둥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검으로 베던 것보다 수십 배는 많은 차원이 한꺼번에 뚫려서 공허의 길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단숨에 멸혼보로 그 길을 향해 돌진했고, 마지막 차원의 균열을 뚫고 올라서자마자 코앞에 함선 가이아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이런…….]
나일라토프는 크게 당황한 듯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문 내부에서 외신을 만날 때를 대비해서 아껴둔 걸 쓸 수밖에 없겠구나! 아깝구나!]
치지징!
갑자기 내 몸 주변에 거대한 다섯 개의 원기둥이 떠올랐고 그 원기둥이 순식간에 내 움직임을 제약하는 듯했다.
‘제길! 당했다!’
역시 내가 도착할 걸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잠시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자 나일라토프가 말을 이었다.
[신성소멸주(Pillar of Divinity Annihilation). 수천만 년 동안 겨우 다섯 개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중급 신 따위는 1초 만에 소멸시킬 수 있지.]
“끄윽…….”
[상대의 신력과 신성을 모조리 소멸시킬 수 있는, 전 우주에서 나만이 개발한 발명품이다. 위대한 종족도 신성소멸주는 개발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자화자찬을 하는 나일라토프를 비웃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데다가 마치 전기로 온몸을 지지는 듯한 격통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 제기랄…….’
뭐 이딴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신조차 소멸시키는 과학발명품 같은 건 반칙 아냐?!
파지직
내가 전신에 고통을 느끼고 발버둥 치자 나일라토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 미쳤군. 이걸 버티는가? 대체 그 에너지의 정체는…….]
“나일라…… 토…… 프…….”
[겨우 30번 전생했는데 이 정도의 잠재력…… 백웅 네가 좀 더 성장하는 걸 지켜보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인정하마.]
“……”
[적수로서 경의를 표하지.]
그렇게 말한 나일라토프가 가이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이아. 마이크로 블랙홀을 필라 내부에 생성해라. 숫자는 무한으로. 확실히 그를 없앤다.]
[알겠습니다.]
…… 뭐?
투두두둥!
다음 순간 마치 눈앞의 풍경이 시꺼먼 물감에 물든 것처럼 변했고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 주변을 가득 메우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후 전신이 미친듯한 압박감 때문에 찢겨나갈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꾹 눌러 참았다.
“끄윽…… 으윽…….”
미, 미친놈…….
’나 하나를 죽이려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나는 전력을 다하는 나일라토프를 상대하는 게 수라의 길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속으로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삼황오제와 싸우더라도 이만큼 빡세지는 않을 텐데 너무 전투의 차원이 높아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일월지혼이 없었다면 아예 상대조차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투두둥
“……”
나는 실시간으로 계속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 블랙홀 덩어리들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라면 일월지혼이 끝나는 즉시 블랙홀에 찢겨 죽게 될 텐데 죽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저 나일라토프는 내가 갈가리 찢겨 죽어도 영육을 모아서 부활시키고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신급 괴물인 것이다. 예전에 당했던 것처럼 영겁토록 고문당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기에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옴을 알 수 있었다.
‘젠장…… 딱 한순간만…… 이 개 같은 신성소멸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순간만 틈이 나면 저놈을 이길 수 있는데!’
블랙홀 자체는 일월지혼으로 감당할 수 있지만 신성소멸주가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수천만년 동안 만들었다는 물건이니 이렇게 강력한 것도 이해가 갔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엿 같기만 할 뿐이었다. 삼황오제라 해도 이것에 당하면 일정시간 무력화될 수밖에 없으리라.
[아직 눈빛이 죽지 않았군. 아직도 역전을 바라고 있는가?]
“치사한 놈…… 맨몸으로 붙자……!!”
[싫다. 적수로서 경의를 표한다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다는 말이니 어설프게 상대할 이유가 없지.]
그렇게 말한 나일라토프가 순간 가이아의 선체 바깥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일라토프는 나를 쳐다보며 손을 내뻗었다.
“가이아. 신성소멸주 내부의 블랙홀을 한꺼번에 팽창시켜라. 마무리를 짓는다.”
[알겠습니다.]
제기랄!! 역전할 틈 좀 달라고! 안 그래도 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빡빡해!
방심조차 하지 않고 확인사살을 하려는 나일라토프의 태도에 나는 기가 질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제 내 몸 근처를 맴돌고 있는 마이크로 블랙홀들이 한꺼번에 부풀어 올라서 중력을 강화시키면 내가 가진 일월지혼의 힘이 한꺼번에 소모 당하고 말 것이다.
그때였다.
“방심했네.”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나일라토프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 소녀가 원기둥에 손을 뻗고 있었다.
소녀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멀티버스 해킹(multivers hacking).”
화르르륵
콰광
그와 동시에 소녀의 손이 닿아 있던 원기둥은 물론 그 옆의 기둥 두 개가 한꺼번에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단숨에 신성소멸주 5개 중에서 3개가 파괴되자 나는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알 수 있었고, 나와 소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찰나지간이라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소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전뇌자(電腦子)는 나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다음 순간 전뇌자의 모습이 마찬가지로 불에 타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안 돼!!”
내가 경악할 때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1할의 데이터로 초차원 중첩체에 해킹을 성공하다니 과연 전뇌자군.”
우웅
나일라토프는 홀로그램으로 묶여 있는 전뇌자의 형상을 갑판 위에 소환했다.
“그럼 나머지 9할의 불안요소를 제거해야겠지.”
그러고는 그대로 자신의 손을 뻗어 전뇌자의 목을 부러뜨렸다.
뚜둑
“……!!”
그 순간 나는 일월지혼을 극도로 끌어올려서 나일라토프를 향해서 돌진했다. 그리고 그대로 섬광처럼 일섬을 베어내었다.
“이 새끼!!”
쿠콰콰쾅!!
격렬한 폭음과 함께 일월지혼을 머금은 무량단에 맞은 가이아의 동체가 크게 파괴되었다. 함선의 전면부가 전부 불에 타고 있었고 선체의 절반 이상이 뜯겨 나간 걸로 봐서 이 한 방으로 가이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분노를 참지 않고 다시 한번 무량단을 날렸다.
“으아아아아……!!”
쩌엉!
그러나 이번 공격은 가이아에게 먹히지 않았다. 어느새 가이아의 동체 주위에는 또다시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그 기류는 확실히 내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나일라토프는 다시 가이아 내부로 들어간 듯 웅웅거리는 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힘은 역시 총량이 정해져 있군. 처음보다 많이 약해졌어.]
“이 개새끼가!”
[아니, 어쩌면 그 힘은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서 비효율적으로 힘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치지징!
“크윽!!”
갑자기 차원의 시공간을 뚫고 두 개의 원기둥이 내 양옆에서 기묘한 장막을 쳐서 움직임을 봉쇄했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또다시 전신이 아교로 꽁꽁 묶인 답답한 기분이 들었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일라토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뇌자가 신성소멸주 3개를 부쉈어도 2개면 다시 자네를 잠시 묶어놓는 건 충분하지.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치지지직
마치 뭔가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시 내 주변에 마이크로 블랙홀이 소환되었다. 확실하게 내 잠력을 갉아먹어서 죽이려는 철저한 전술이었기에 나는 이를 부득거리며 갈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전뇌자가…… 그 밉살스러운 새끼가 죽었다고?
믿기지 않는다.
아니, 그걸 믿는다면…… 눈앞에 있는 저 나일라토프는 절대 살려둘 수 없어!!
“죽여 버린다!!!”
투두둑
그러자 일월지혼의 힘이 내 분노에 감응한 듯 갑자기 그 기운이 강해졌다. 그리고 강해진 기운 덕에 묶인 밧줄이 뜯어지듯이 점차 내 몸이 자유스러워지자 나일라토프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이런…… 정말 정체불명의 힘이군…… 그럼 마무리를 할 수밖에.]
구웅…….
철컹
잠시 후 가이아에서 둔중한 포신(砲身)이 모습을 드러내어서 그 주둥이를 내 쪽으로 향했다. 내가 희미한 눈으로 그 포신을 쳐다보자 나일라토프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는 이걸 한 번 본 적이 있겠지.]
“……
[제자는 먼 미래에 프로토타입을 겨우 완성한 모양이지만 스승인 나는 진작 다 만들어놓았다네. 혼돈의 신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무기니까.]
이어진 나일라토프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인류최종무기(Unitary Equation), 이걸로 마지막이다!]
번쩍 - !!
빛이 번뜩이고 나는 영락없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 공손헌원조차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인류최종무기!
내가 저걸 정면으로 맞고 살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 끝인가……!!
“……?”
[……?]
어라?
그러나 분명히 인류최종무기가 내 몸을 스쳐 지나갔는데도 나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나일라토프조차 당황했는지 순간 말을 잊은 듯했다.
‘기, 기회다!’
도리어 인류최종무기가 한 번 쓸고지나간 덕분에 마이크로 블랙홀이나 신성소멸주의 압력이 한순간 사라져 버린 듯했고, 나는 몸이 자유로워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일월지혼의 힘을 끌어올려서 검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내가 성난 눈으로 포효를 내지르며 일섬을 날렸다.
“죽어 - !!”
무량단!!
쿠콰콰쾅
“으아아아아!!”
콰과광
가이아가 산산이 부숴지면서 거대한 우주공간에 함선의 잔해가 흩날렸다. 겨우 두 번의 공격이었지만 확실하게 적을 작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동시에 나는 그냥 무량단으로는 씨도 안 먹힐 텐데 일월지혼을 실었다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인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꼈다.
‘굉장하다……!!’
일월지혼이 이 정도의 힘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가이아의 잔해가 부유하는 동안에 나는 일월지혼의 힘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차렸다.
‘……아직, 전뇌자가 소멸했다는 보장은 없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월지혼의 힘이여.
전뇌자를 내 앞에 데려와다오!!
총천연색의 끈이 내 양손에 감돈다.
나는 손을 휘저으면서 무채색의 흐름이 인도하는 대로 내 소망을 담아서 끌어모으는 동작을 취했고, 잠시 후 내 앞에는 딱 사람의 손바닥만 한 금속 조각이 나타나 있었다.
“……”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서 그 조각을 손에 집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힘을 거의 다 잃어버린 전뇌자의 지금 모습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다행이다…….’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던 내 눈앞에 나일라토프의 모습이 나타났다.
슈욱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스앗!
나는 빠르게 접근해서 나일라토프의 목에 그대로 칼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놈이 분신이나 환영이 아니라 본체라는 걸 단숨에 알 수 있었고, 이제 칼로 목을 베기만 하면 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일라토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어라.”
나일라토프는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실수했어. 그냥 마이크로 블랙홀을 펼친 채 놔두었다면 무조건 이겼을 텐데…… 자네의 그 힘이 혼돈의 권능일 거라는 확신 때문에……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에 인류최종무기를 쓴 탓에…….”
나는 놈의 말을 듣자 또다시 열 받아서 이를 으득 악물었다.
“지고 나서 변명하는 거냐?”
“그냥 과학자로서 자네에게 말해주고 싶을 뿐이네.”
나일라토프가 자신의 깨진 안경을 우주공간에 내다 버리며 말했다.
“자네의 그 힘…… 그건…… 혼돈의 힘이 아니라는 걸.”
“……
“날 죽이기 전에 말해주게…… 그 힘은 대체 무엇인가. 그 정도의 힘이 혼돈의 권능이 아니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나는 나일라토프가 가이아가 파괴된 상태에서도 도망칠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일라토프가 생에 연연하지 않고 굳이 내 앞에 나타나서 목을 들이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기심.
‘과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기지 못하고 철저히 행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게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나일라토프를 왠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직이 대답했다.
“일월지혼. 백련교 사신지혼에서 일월의 그릇을 얻은 결과다.”
“일월……? 그릇? 설마 그건가…….”
그 말을 들은 나일라토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광소를 터뜨렸다.
“후후…… 하하하하!! 그래, 그런가!! 그러면 다 이해가 가는군!!”
나는 나일라토프의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일월지혼에 대해 뭔가 아는 거냐?”
나일라토프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내 꿈을 짓밟은 자에게는 그리 가르쳐주고 싶지 않군.”
“……
“농담일세. 반대로 경의를 표해서 단서 정도는 주지.”
나일라토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힘을 궁극으로 끌어올릴수록 너는 진공가향(眞空家鄕)에…….”
그때였다.
마치 시간이 단절된 듯한 아주 잠깐의 한순간 -
시꺼먼 책(冊) 한 권이 갑작스레 나타나서는 나일라토프의 몸을 감싸듯이 크게 책장을 양면으로 펼치고 있었다.
“어?”
나일라토프가 반사신경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 바로 그때, 그 책은 그대로 닫혔다.
퍼억!
무언가가 피범벅이 되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
주르르륵…….
닫혀 버린 책의 책장 사이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나일라토프를 파리 잡듯이……?’
저 책은 대체 무엇인가?
그 어둠의 책이 굳게 입을 닫은 채 마치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고, 나는 잠시동안 그 압박감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놈한테 반격할 수 있을까?
정적 속에서 나는 아직도 내게 일월지혼의 힘이 감돌고 있으며 유지되는 중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거의 다 소모되어서 언제 꺼질지 모르는 힘이었다.
‘이런…… 제기랄…….’
저건 대체 또 뭐야?
내가 초조해하고 있을 때 시꺼먼 책의 근처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윽
새하얗고 거대한 손.
그러나 그 손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고,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외계(外界)의 존재가 분명했다.
나조차도 그 손의 형태를 보는 순간 마치 전신이 덜컹거리는 듯한 끔찍한 공포가 몸을 자극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큰 형태는 인간의 것처럼 생겼지만 그 손의 피부나 질감, 그리고 이계의 눈동자가 박혀 있는 걸 보면 진정한 괴물 중의 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틀림없다.
저것은 격외(格外)의 존재다.
“……!!”
손은 그대로 어둠의 책을 집었다.
그러고는 도로 사라지려 할 때 나는 빠르게 공포를 이겨내고는 외쳤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손은 멈칫했다. 마치 의외라는 기색이 느껴졌고, 손의 주인이 내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기척이 보였다.
우웅
그리고 한순간 [고동]이 울려 퍼졌다.
인간의 말은커녕 그 어떠한 대화방식도 아니었지만 - 그 고동은 내 머릿속에 직관적인 의미를 그대로 전달했다.
슈욱…….
잠시 후 손과 함께 어둠의 책이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지자, 나는 마지막에 울렸던 고동의 소리를 되새기게 되었다.
“……
그 고동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나는 굴레 바깥에 있는 사서(司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