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0권 9화
저벅
나는 치우의 정신체 쪽으로 한 걸음씩 옮기며 생각했다.
‘이곳에 흐르는 회백색 기류…… 이건…… 설마 옥좌 근처에서 느꼈던 그 기운인가?’
색깔만 보면 비슷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깊게 발을 들여 운무(雲霧)가 더욱 심해지자 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틀림없다…… 이건 혼연(渾然)의 기운이야!’
혼연!
그것은 바로 혼돈과 태허가 만나서 쌍소멸했을 때 출현하는 제 3의 성질을 지닌 힘이다. 그리고 옥좌 주변에는 그 혼연의 덩어리가 가득했으며, 황제 공손헌원 또한 혼연의 벽을 이용해서 자신의 본거지 주위를 방어하곤 했다. 나는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고 과거에도 혼연의 공기를 직접 들이마신 적이 있었기에 바로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위대한 종족은 혼연의 기운을 일부러 치우의 정신체를 봉인하는 곳에 뿌려두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가?
‘왜? 혼연의 기운에 어떤 효과가 있길래?’
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천마의 당에 혼연의 기운을 가득 채웠을 것인데 그 연유가 쉽사리 짐작가지 않았다. 나는 걸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에 기억이 닿았다.
‘맞아. 혼연의 공간 속에 있으면 혼돈의 존재는 피해를 입는다. 그런 속성이 있었어…….’
혼돈만이 혼연 속에서 피해를 입으며, 질서에 속하는 신격이나 보통 인간, 생명체들은 혼연 속에서 멀쩡하게 있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성질을 떠올리자 어째서 위대한 종족이 치우의 정신체의 주변에 혼연의 공기를 깔아두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치우의 봉인에 혼돈의 존재가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는 건 설마 치우를 깨우려는 존재들은 ‘혼돈’에 속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인가?
‘흠…… 아무튼 지금은 좀 더 걸어가 봐야겠어.’
아직까지 치우의 정신체에 도달하려면 꽤 거리가 남았다. 나는 머나먼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고, 경공으로 속도를 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경공술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수상쩍은 곳에서 섣불리 빠르게 움직이는 건 위험했기 때문이다.
‘좀 더 생각해보자. 신농의 말을…….’
내게 이 천마의 당을 가르쳐 준 신농. 그가 해준 말에 저 치우에 대한 단서가 있으리라.
[자네가 보았던 그것은 본체이지만 육체가 아니야. 그게 바로 치우의 정신일세.]
[천마의 당은 치우의 정신만 뽑아내어 가둬두는 장소.]
[혈맥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치우가 만들어놓은 마지막 한 수. 치우 본인도 당연히 자신의 본체를 찾아서 부활하는 걸 원하고 있으나, 일정한 조건이 만족 되면 자동으로 빙의하게끔 무의식에서 설정되어있는 주술(呪術)이라 할 수 있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세밀하게 떠오르며 그때의 상황을 기억해 냈다.
“…… 맞아. 그랬었지.”
그때 신농이 내게 천마의 당의 실체를 가르쳐준 이유는 다름아닌 서문혜 때문이었다.
‘치우는 자신의 혈맥을 이용해 자동으로 부활하는 주술을 걸어놓았던 거다.’
원래 치우든 신농이든 치우가 본체를 되찾아서 멀쩡히 부활하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혈맥이 이어진 가짜 육체로라도 부활하게끔 주술을 걸어놓고 있었다. 당연히 신농의 입장에서는 치우 부활을 바라고 자신의 힘까지 기꺼이 내줄 정도였지만 완벽하지 않은 치우의 부활은 싫었기에 내게 치우가 억지로 혈맥을 통해 부활하는 걸 막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다시 떠올린 나는 힐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치우의 정신체를 바라보았다.
“…… “
지금 떠오른 생각을 도저히 입 밖으로 내기 힘들다.
나는 한참이나 침묵하며 앞으로 걸어갔고, 드디어 치우의 정신체가 잔영이 아니라 온전히 본체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거리까지 다가갔다. 스산한 혼연의 안개조차도 내 시야를 가로막지 못했고 또한 가까이 다가갈수록 왜인지 몰라도 점점 몸이 떨렸다.
덜덜덜…….
나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는 걸 쳐다보았다. 나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엄청난 힘 때문에 본능적으로 겁을 먹었어.’
겁을 먹었다지만 내 정신은 침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절대지경의 기감, 그리고 의념천주와 육감이 동시에 내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소유자가 앞에 있으니 제발 조심하라는 경고! 더욱이 이 혼연 속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던 신력조차 모두 무(無)가 되었기에 육감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하…….”
아직도 거리가 100장은 넘게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만한 거리에서 봉인된 치우를 보고 본능적으로 겁을 느낄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인가? 지금의 나라면 삼황오제의 본체가 코앞에 있어도 전혀 떨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도!
‘아무래도 이 거리가 한계 같군.’
본능이 경고하는 게 갈수록 심해지고 떨림도 심해진다. 더 이상 접근할 경우 평정심을 절대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존재가 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본능 깊이 깨닫고 있었기에 나는 무리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에 나는 생각만 하던 걸 입 밖으로 꺼내었다.
“만일 이 세계에서 치우의 정신체를 봉인에서 풀어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발상!
하지만 나는 그걸 생각하니 정말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저 치우의 정신체는 육체의 모든 부위가 모이게 되면 저절로 봉인이 풀리게 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또한 만일에 모든 부위가 모이지 않더라도 치우의 혈맥이 존재한다면 그 혈맥을 통해 억지로 빙의해서 부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정신체의 봉인만 풀어 버리게 된다면?
당연히 치우의 육체는 모여 있지 않았고 치우의 혈맥인 서문혜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어떻게 되리라는 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정신체만 풀려나오면 그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치우의 정신체만 봉인에서 풀어서 치우의 영혼과 일대일로 대화하면 좋을 것 같은데.’
치우는 당연히 탁록대전의 당사자이며 우주의 패권을 판가름하는 대전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그는 황제 공손헌원의 비밀은 물론이고 자신이 어째서 그렇게 강력한지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 치우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엄청난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생각을 하면 책사들이 나보고 미친 짓 하지 말라며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 세계는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이런 미친 짓이 커다란 효율을 볼 수도 있다. 나는 수련하면서 최소 몇십 번은 죽었기에 이제 와서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고 이 정도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치우의 정보는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수련 후 탁록대전 시대로 복귀하게 되겠지만 정작 나는 치우가 어떤 놈이고 언제 어떤 식으로 출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정체도 모를 치우를 찾는다고 코끼리가 장님 더듬듯이 헤매다 보면 탁록시대에서도 교활한 존재들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기왕 하는 거라면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확실히 해 버리는 게 좋으리라!
‘그럼 우선 저 봉인부터 깨 볼까.’
치우의 정신체를 옭아매고 있는 수백만 개의 쇠사슬! 천지를 뒤덮고 있는 듯한 저 쇠사슬부터 어떻게든 해야만 치우의 정신체에 걸려 있는 주박을 깰 수 있으리라.
우우웅
나는 마음을 먹고는 슬며시 가지고 온 창을 들어서 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과거에 아수라가 내게 해 주었던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백련교주가 내게 설명해 준 혼연의 성질을 말해 주마.]
[혼연의 공간에 진입하면 그런 보패는 모조리 소멸될 거다. 또한 혼돈의 존재들도 즉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소멸하게 되지. 신기라 하더라도 혼돈의 힘에 기반한 신기 또한 예외가 없을 것이다. 모든 권능 또한 사용불가가 된다.]
[그리고 혼연에 물든 존재는 같은 혼연의 속성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지 않는다. 혼돈으로 공격하면 도리어 힘이 흡수되어 강해진다고 교주는 추측했지. 그러므로 사실상 그 공간 내에서는 [옛 지배자]조차도 파수병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소멸당할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암야참, 혹은 귀일무극참은 혼연의 속성을 무시하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상극까지는 아니지만 대등한 속성이기에 그런 것으로 보여. 그러므로 네가 언젠가 혼돈의 옥좌에 가게 될 일이 생긴다면 암야참을 극성으로 터득하거나 혹은 신역절기를 익혀야 해.]
확실히 그 말대로다. 딱히 보패를 갖고 오지 않아서 보패의 소멸은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신력들이 전부 소멸된 것처럼 하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간접적으로 사역하던 혼돈의 권능이나 단말들도 하나도 쓸 수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 혼돈의 힘은 철저히 무력화되어 있었다. 억지로 혼돈의 힘을 쓴다고 할지라도 모조리 흡수되어 버리리라.
그러나 이 공간에서 암야참이나 신역절기만은 상성을 무시하고 누구에게나 타격을 줄 수 있다.
‘나는 신역절기는 쓸 수 없지만…….’
편법으로나마 암야참은 쓸 수 있다.
이기어창(以氣御槍)
내 의지에 따라서 창이 둥실 떠올랐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이 공간에서 기와 내공, 의념은 멀쩡히 쓸 수가 있었다. 그렇게 치면 인간이 이 혼연의 공간에서 딱히 전력약화를 느낄 일은 없으리라. 그리고 요 4년간의 수련으로 창술이 진일보하여 이제 이기어창도 의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창을 띄운 후 모든 의지를 집중하여 눈을 반개하며 창에 선검(仙劍)을 덧씌웠다.
스스스스
의념을 없앤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창의 극(戟)이 시꺼멓게 물드는 게 눈에 보였다. 역시 아직은 이 ‘편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인 흑화(黑化)를 어쩔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집중해서 ‘고리’를 인식하려고 애썼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정신세계 너머의 원. 나는 여기까지 진행하면서 예전에 아수라에게 수련받을 때보다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모되는 집중력이나 자연스러움이 훨씬 진보한 게 틀림없다.
‘수백 년간 수련만 해서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륜(輪)을 거꾸로 돌리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바퀴가 빠르게 역회전을 하기 시작했고, 선검의 기운은 빠르게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정신이 잠시 아득한 경지로 향하는 그 순간, 허공에 띄워두었던 이기어창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방출되었다.
꾸웅!!
무려 백여 장 이상 떨어져 있었음에도 흑색 빛을 머금은 이기어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치우의 정신체를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의 연결고리 부분을 정확히 타격했다. 바로 이게 내가 이기어창을 선택한 이유였다.
‘의념으로 미리 목표를 정해놓고 이기어창을 고정해두면 암야참을 편법으로 써서 잠시 정신을 잃어도 목표에는 정확히 날아서 박히니까!’
그리고 특성상 암야참의 기운을 덧씌우기만 하면 모두 마찬가지 위력이니까, 기왕 하는 거 베기(斬)보다는 찌르기(尖)의 속성을 가진 이기어창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편법 암야참의 기운을 머금은 이기어창이 타격한 쇠사슬 부위가 갑자기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꽈앙!!!
후두둑…….
수백만 개의 쇠사슬 중 하나가 터져서 끊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치우를 옭아매는 주박이 상당히 약해진 듯, 그 많은 쇠사슬들이 갑자기 일제히 출렁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걸 보자 내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수백만 개를 다 부숴야 할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하나하나의 봉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번 헛점이 생기면 크게 타격을 입는 방식인 거야!’
저런 방식의 봉인은 일반적인 봉인보다 훨씬 강력한 대신 한 번 파해법을 들고 오면 훨씬 더 약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주술에 관한 지식도 꽤 늘어났기에 이제 이 정도 원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이게 천운 아닐까?
아무리 재수 좋게 무인 수련세계에 와서 쉽게 치우의 정신체를 대면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아수라에게 편법으로 암야참을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이렇게 치우의 봉인을 깨부술 수는 없었으리라.
뿐만아니라 지금 이 암야참 자체가 저 봉인을 부수는 완벽한 파해법처럼 느껴졌으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을까?
나는 신바람이 나서 다시 한번 이기어창으로 암야참을 날려서 쇠사슬을 부쉈다.
꽈광!!
다시 쇠사슬 덩어리들이 출렁거린다. 이번에는 꽤 타격이 갔는지 치우의 정신체도 움찔하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나는 두 번째 발사를 하자 갑자기 전신에 힘이 쭉 빠져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헥헥거렸다.
“헉…… 헉…… 역시 편법으로 쓰면 한 번에 힘을 많이 써 버리는군…….”
그것도 이기어창에 실어서 쏘는 식이라 소모가 더 심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앉아서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고는 다시 편법 암야참을 날렸다.
‘선검 사용횟수가 다 소모되겠지만 뭐 상관없어!’
어차피 수련만 하다 죽는 세계에서 선검 아껴서 뭣에 쓰겠냐고!
원래라면 강적을 만날까 봐 선검을 아껴두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다!
콰과광
그렇게 서너 번을 두들겼을 때였다.
“다섯 발 째……!!”
내가 이기어창을 날리는 순간, 목표인 쇠사슬에 공격이 닿기 직전에 갑자기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쩌저정!!
투확
“……?!”
내가 날린 이기어창이 소멸했다!
어둠의 방어막 같은 게 갑자기 생겨나더니 창을 통째로 없애면서 그 충격도 소멸시킨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놀라고 있을 때, 내 눈앞에 기이한 존재가 소환되기 시작했다.
슈슈슉
[침입자 확인. 종족명 ‘인간’으로 판별을 완료했습니다.]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마치 표범처럼 생긴 삼안(三眼)의 생물이었다. 눈이 동그래서 귀엽게 보였지만 사실 저게 감정 없는 기계 같은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생물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외쳤다.
“너, 너는 선지자 종족의 17등급 무기를 사용할 때 나타났던 그 표범 아니냐?!”
정말 오랜만에 본다!
하지만 ‘나인교주 토벌’이라는 정말 인상적인 사건 때 봤던 놈이었기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무기에 탑재된 인공지능일 뿐이겠지만 저 녀석의 모습은 몇십 회차가 지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삼안의 표범이 말했다.
[침입자여. 인과율을 이용한 변칙공격을 멈춰주십시오.]
“…… “
[왕(王)과의 교신을 시도하는 중…… 반응 없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흐음.”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다니?
나는 난데없이 왕과의 교신 얘기가 나오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곧 예전에 선지자와 얘기할 때의 상황을 알아채고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일족의 왕인 선지자에게 요구할 게 있으면 요구하라고 연결 중인 거군!’
그러나 이곳은 그저 수련세계일 뿐이므로 백날천날 저래 봤자 선지자한테 연결될 리는 만무하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씨익 웃으며 삼안의 표범에게 말했다.
“이봐. 선지자는 연락을 안 받을 거 같은데 내 요구조건부터 들어 볼래?”
[말씀하십시오.]
“선지자 종족에 대한 비밀을 다 말해줘야겠어. 그렇게 하면 치우의 봉인을 공격하지 않겠다.”
저놈은 보나마나 봉인을 수호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는 선지자 종족의 파수꾼이나 인공지능일 것이다. 아무런 생명체도 없는 이 세계에 소환된 걸 보면 틀림없이 ‘의지있는 생명체’로 인식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저놈을 상대로 선지자 종족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면 훨씬 저항이 약할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삼안의 표범은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말했다.
[원하는 비밀을 말씀해 주십시오.]
됐다!!
선지자 종족의 비밀을 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됐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티를 내지 않고 점잖게 말했다.
“선지자 일족의 목적은 뭐지? 놈들은 무엇을 위해서 행동하냐.”
이걸 알아야겠다.
여태껏 30번이나 전생하면서도 놈들의 목적이 명확하지 않아서 궁금했던 차였던 것이다.
[일족의 영원한 번영입니다.]
“…… 아니, 그건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 거 말고 이 세상에서 그…… 공허(空虛)의 힘을 끌어쓰는 이유가 뭐냐고.”
복희가 얼마 전에 탁록시대의 선지자를 소환해서 그에게 공허지력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추궁받은 적이 있었다. 선지자는 별일 아니라고 어물쩍 넘겨 버렸지만 사실 그 공허지력이라는 게 선지자 일족의 가장 큰 약점이자 비밀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자 삼안의 표범이 눈을 깜박이며 고양이 같은 자세로 앉더니 말했다.
[아카샤 에너지(虛空之力)를 이용해 허공록(虛空錄)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허공록의 역사편찬작업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허공록의 사도가 출현할 경우 그에게 몰래 에너지를 제공해서 지상의 임무수행을 돕고 있습니다.]
“……?!”
[답변이 되셨다면 공격을 멈추는 데 동의하고 봉인지에서 퇴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아니 잠깐만! 잠깐만!! 머리에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나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꾹 누른 채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 그러니까…… 역사편찬작업이라는 게 대체 뭐야? 허공록은 외신인데 그런 것도 하나?”
[데이터베이스에는 전지(全知)가 전능(全能)을 이기기 위한 사전작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초대 왕부터 현재까지 줄곧 진행되어 오는 프로젝트입니다. 허공록이 아카샤 에너지를 일족에 제공해주면 일족은 아카샤 에너지를 이용해 기록을 저장 및 보존하며 동시에 각 종족의 기록을 도서관에 기록하는 계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
[또한 아카샤 에너지를 이용한 무기는 모든 [옛 지배자]를 격퇴할 수 있으므로 궁극적인 19등급 무기를 이용해 종말의 대전(大戰)을 제압할 계획이 있습니다.]
“뭐, 뭐? 19등급?”
나는 어이가 없어서 크게 반문했다.
“야! 너네 18등급까지밖에 없다면서!! 17등급도 준 왕족급이고 18등급은 왕만 쓸 수 있대서 나한테는 17등급만 빌려줬잖아! 이 새끼들 거짓말 했냐!”
[거짓말이 아닙니다. 19등급 무기는 현재 제작 중이며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 제기랄!! 뭐 이런…….”
선지자 이 새끼!!
엄청 쎈 무기를 몰래 만들고 있었단 말이냐?!
“그, 그 19등급 무기는 얼마나 쎈데? 완성되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인지 알고 있냐?”
[위력은 측정불가이기에 언급할 수 없습니다. 기밀사항이 아니라 현재 왕족조차 완성시의 위력을 추측하지 못합니다. 다만 종말에 나타날 모든 [옛 지배자]와 성좌들을 한순간에 제압할 위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그 무기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봐.”
[왕실(王實)의 가장 깊은 비밀창고에 있습니다.]
“그 창고에 들어가는 법은?”
“왕(王)만이 지니고 있는 열쇠를 이용하면 창고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 “
선지자가 갖고 있는 왕실의 열쇠만 있으면 19등급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거구만?
나는 순간 못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좋아, 그러면 또 물어볼 게 있…….”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
투두두둑!!
갑자기 저 앞에 있던 치우의 정신체가 크게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미미한 꿈틀거림과는 달리 확실히 몸을 용틀임하듯 꼬는 모습이었고, 완전히 자유를 얻고자 발버둥 치는 형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갑자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
뭐, 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완전체 공손헌원을 보았을 때나 느꼈던 그 압박감이 다시 되살아나자 나는 일순간 당혹감을 느꼈다. 문제는 이 압박감조차도 아직 봉인이 안 풀렸다는 뜻이었다. 즉 진짜 봉인이 풀려나면 그 위력은…….
치지지직
눈앞에 있던 삼안의 표범의 모습이 흐려지며 말했다.
[위험…… 봉인이…… 파괴…… 위험…… 정신체…… 빙의를 시도 중…… 시공간 봉쇄 트리거…… 작…….동…….]
그때 저 멀리에 있던 거신의 눈이 바로 나를 향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눈을 보자마자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얼어붙는 것을 느꼈고 정신이 완전히 제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수한 [힘] 그 자체.
마치 은하계 앞에 티끌만 한 인간이 서 있는 것 같은 처절한 무력감이 몸을 휩쓸었다.
[받아라.]
번쩍!
거신의 눈이 빛남과 동시에 의식이 흐려졌다.
찌지지직
무언가가 찢겨나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백색 화면이 내 눈앞에 가득 들어찼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
“백웅. 정신 차리게.”
나는 심수력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여긴…….”
“자네를 급히 그곳에서 구해왔네.”
“설마 치우가 폭주했소?”
“아니. 다만 계속 꿈틀거리고 있더군.”
“…… “
치우의 봉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닌 듯하다.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머리를 휘휘 젓고는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군. 죽지도 않았고 봉인되지도 않았으니.”
“……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자네…… 거울 좀 보겠나?”
거울?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신력으로 거울을 만들어서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음. 너무 놀라지 말게.”
“안 놀라게 생겼소?!”
“…… 난 뭐 그러려니 하겠네. 요괴도 많이 봤고 이족도 많이 봤으니까.”
“아니 씨발…… 이, 이건…….”
나는 울부짖었다.
“왜 갑자기 뿔이 달렸냐고!!”
그렇다.
난데없이 내 이마에 작지만, 뿔이 돋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