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검신 80권 2화
영겁토록 고통받는다고!
그 말에 심수력은 물론이고 다른 동료들도 흠칫했다. 신녀의 말이 그저 은유가 아니라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림에서 활동할 때는 잘 몰랐으나, 호월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어둠에 숨어 있던 사악한 존재들과 자주 싸워오면서 세계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영겁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면 그건 가감없는 진실일 것이리라.
그러자 황하신룡은 왜인지 심수력의 눈치를 보았다.
“…… 너,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
“허험…….”
심수력은 수십 년이나 호적수로 지내온 황하신룡의 속내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하기 싫다!
근데 눈앞의 저놈에게는 지기 싫다!
먼저 포기한다고 얘기를 꺼내면 나도 따라서 못 이기는 척 포기하고 싶다!
‘씨부럴 새끼가…….’
사실 심수력도 같은 마음이었다. 황하신룡이 먼저 얘기를 안 꺼냈으면 그가 말했으리라.
‘지기 싫어!!’
그러나 심수력은 알 수 없는 반골정신 때문에 호기롭게 외치고 말았다.
“쫄리냐?! 나는 하나도 안 쫄았는데!”
심수력은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정작 그 자신도 입 밖으로 내뱉고는 후회하고 만 것이다. 허나 물은 엎질러진 후였고 황하신룡 또한 험상궂은 표정으로 변했다.
“뭐, 뭣이!! 나도 영겁의 고통 따윈 아무렇지 않거든!!”
“오냐! 해 보자.”
“질 줄 알고.”
흠칫
두 사람이 열을 올리자 옆에 있던 도성 강유찬과 마령천녀 임소영도 흠칫했다. 사실 그들 또한 영겁의 고통이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때문에 적지 않게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 네 명의 모습을 보던 신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광룡의 힘을 그냥 해방시켜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광룡의 힘을 나누어 받으라는 건 이 세상에 어떻게든 풀어놓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입니다.”
“아하! 그런 방법이…….”
신녀의 이어진 말에 네 사람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만일에 광룡이 해방된다면 새로운 사신(邪神),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존재로서 강림하게 됩니다. 세상에 원초적으로 존재치 않았던 재앙이 난데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세계가 최소한 열 번은 멸망하겠지만 그것조차도 천상의 지배자들이 해결해야 할 업. 그렇게 하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허억.”
“당신들이 지키고 싶은 것이 인간세계에 있습니까? 그걸 생각하고 결정해주십시오.”
“…….”
“…….”
그들은 좀 더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세상을 지키기 위하여 광룡의 업을 짊어지고 영겁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인가? 과연 자신들이 그렇게 영웅적인 존재였던가? 사실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디 강함을 추구하는 무림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심수력은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강하게 말했다.
“인간 세상 같은 건 관계없소! 본 적도 없는 새끼들이 죽든 말든 내가 알게 뭐란 말이오! 허나 어쨌든 광룡의 힘을 나누어 받지 않으면 스승이 더욱 고통받는다는 사실 또한 존재하지 않소?”
“그렇지요.”
심수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허울 좋게 인간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지 않겠소. 그러나 내게 또 다른 경지를 알려준 스승에 대한 무인으로서의 의리를 지키겠소!”
그 순간 네 사람의 마음이 일치했다.
의리!!
그것보다 더욱 무림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없는 것이다. 네 사람의 얼굴에 의지가 감돌자 신녀는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호월 사형…… 당신은 좋은 제자들을 두었군요.”
***
잠시 후 신녀는 삼 장 크기의 큰 원(圓)을 그렸다. 커다란 원을 그린 신녀는 네 사람에게 말했다.
“각자 사방위를 점하여 가부좌를 취하세요.”
그들이 신녀가 시키는 대로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앉자, 신녀는 호월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에 흉측하게 돋아 있는 묵린에 손을 뻗었다.
스스스스
그러자 묵린이 크게 줄어들어서 주먹만 한 크기로 작아졌다. 임시방편으로 호월의 증세를 가라앉힌 신녀가 그의 몸을 옮겨 큰 원의 중심에 혼절해 있는 호월을 올려두었고, 신녀는 잠시 안쓰러운 눈으로 호월을 내려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연기가 흘러나오면 그 연기를 호흡하여 몸에 흡수하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신녀의 섬섬옥수가 호월의 정수리에 얹어졌다.
“광룡의 힘이여. 그 본질을 드러내거라.”
우드득! 우득!
그와 동시에 호월의 몸이 마치 발작하듯 기계적으로 뒤틀렸고, 호월의 몸에서 마치 묵연(墨煙)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묵연은 시꺼멓기보다는 흐릿하게 사람이 보일 정도로 옅었기에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스스스…….
‘시작이군.’
그리고 사방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심수력은 그 묵연을 호흡했는데, 그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크흐으으윽!!”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란 말인가!!
쿠콰콰콰
경맥이 떨리고 단전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심수력은 마치 조그마한 방에 홍수의 물이 쏟아지듯 자신의 전신사해에 어마어마한 힘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단지 한 모금일 뿐이었는데도 자신의 내공을 초월하여 그 수십 배나 되는 순수한 힘이 꽉꽉 들어찬 것이다. 도저히 내공심법으로도 흡수하기는커녕 잠시 후 몸이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에 심수력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크으으윽…….”
“으윽…….”
그런 건 심수력만이 아닌지 네 명의 제자들은 모두 괴로워하고 있었다. 묵연을 더 흡수하기는커녕 조금만 더 호흡해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신녀는 당황했다.
“과연 진체(眞體)의 힘…… 용린의 힘이 다 나온 것도 아니고 극히 일부만 나왔는데 인세 절대지경의 고수들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건가!!”
그 말에 심수력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저 말대로라면 지금 자신들이 흡수한 묵연의 힘은 말 그대로 일 푼 이하의 극미한 수준이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이, 이게 스승이 늘 말했던 우주적 존재의 힘?!’
심수력은 뒤늦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의 호기를 살려 도전해 보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이런 용린의 힘을 평소에 감당하고 있었던 호월 또한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월이 빌리고 있던 이 힘의 원래 소유주는 절대지경이 백만 명이 몰려와도 숨결 한 번에 없애 버릴만한 능력자였으리라.
“시, 신녀님. 도저히 이대로는…….”
“어쩔 수 없군요. 의식 중간에 쓰려 했지만…….”
신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합장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신의 눈을 떴다.
“위대한 큰 굴레여. 일월명왕(日月明王)의 힘을 빌리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우우우 -
심수력은 아까 보았던 신녀의 머리 뒤편의 후광이 다시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신녀에게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부처가 바로 신녀가 [작은 굴레]를 되돌리는 힘의 근간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부처의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손이 자신의 정수리에 얹어지는 순간, 심수력은 모든 오욕칠정이 가라앉으며 자신의 단전이 순식간에 넓혀지더니 이윽고 자신의 내면에 소우주(小宇宙)가 발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날뛰고 있던 엄청난 기운이 순식간에 그 공(空)의 내면으로 사라지자 그는 물론이고 다른 네 명의 제자들도 무척 편해진 것 같았다.
‘이제…… 할만하군…….’
심수력과 다른 세 명은 몰아일체의 경지에 들어가서 묵연을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부처의 힘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고 지금 최대한 묵연을 흡수해야만 한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묵연이 꽤 흡수되자 여태껏 묵린 때문에 힘들어하던 호월의 안색에 조금이지만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식을 주도하고 있던 신녀는 갈수록 안색이 파리해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바로 그때였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수습하지 못할걸.”
생소하지만 이젠 익숙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씨발!! 이 목소리는…….’
심수력은 갑자기 집중력이 깨지고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부처의 가호가 도와주고 있다고 해도 이 묵연의 힘은 여전히 장난이 아니었으므로 조금만 집중이 깨지면 곧장 몸이 부풀어 올라 터지고 말 것이다.
원의 중심에서 호월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던 신녀가 그에게 대꾸했다.
“하은천. 당신은 사형의 손에 심장이 꿰뚫려서 죽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죠?”
역시!!
단의 일족의 수장이자 호월이 이 지경이 되는데 일조한 원수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젠장…… 저놈을 죽여야 하는데!’
심수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당장 뒤편에 있을 하은천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호법의식 중이라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심수력이 듣고 있을 수밖에 없을 때 하은천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목숨이 여러 개야. 사실상 불사신이지. 뭐, 이 세상에서도 대술법사들은 종종 이러지 않던가?”
“아니오. 당신이 쓰는 불사의 능력은 술법이 아닙니다. 미래에 발달하게 될 과학의 힘으로 사특한 술수를 부리고 있군요.”
“바로 알아차리네? 정답이야.”
“여기엔 어떻게 들어온 거죠?”
하은천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몇 걸음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대꾸했다.
“신녀 당신은 정말 대단해. [작은 굴레]도 조작할 수 있고 이렇게 이차원(異次元)을 창조할 수도 있다니…… 사실상 신(神)의 반열에 올라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이차원을 숨겨놓을 수 있다니, 그래서 찾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
“어떻게 그 정도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되나?”
“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군요. 어떻게 들어온 건가요?”
“뭐, 이 녀석 덕분이지.”
위이이잉
무언가 기계가 움직여서 떠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심수력의 귀에 하은천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새겨지듯 들려왔다.
“레무리아 황제의 유물인 레무리아 코덱스(Lemuria Codex). 이건 상대방이 어떤 차원으로 도망쳐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설령 명계로 튀어도 알 수 있으니 성능 대단하지? 그래서 좌표 찍고 왔어.”
“…… 레무리아. 초고대문명의 유산이군요. 그런 걸 어떻게 당신이 갖고 있는 건가요?”
“외계인이 침공해 왔을 때 인류가 이 코덱스에 의존해서 싸웠거든. 내가 이 세계에 올 때도 갖고 왔었고. 그래서 여기서도 레무리아 대륙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흉신이 있는 곳과 딱 붙어 있어서 곤란하게 됐지 뭐야…… 하아.”
왠지 한숨을 내쉬던 하은천이 말했다.
“아무튼 그 의식 계속 진행할 건가? 다 같이 죽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
“당신은 현명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 않았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흐음, 다 알아듣는데 모르는 척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늘 귀찮다고…….”
하은천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목숨 하나를 버리면서 호월 교주의 몸에 꽂아 넣은 건 인류최종무기(Unitary Equation)의 프로토타입이야. 인류최종무기라는 건 혼돈의 완벽한 극상성이기 때문에 힘의 강약과 관계없이 순수한 혼돈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은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있지. 사실 이건 나중에 따로 쓸 놈이 있어서 그걸 위해서 계속 차징(charging)만 해두고 있었는데 호월이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써 버렸다고.”
“…….”
“그런데 호월 교주는 꿈쩍도 안 하더라고. 도리어 내가 역공을 맞고 죽었지. 그러고도 모자라서 내가 수천 년 동안 모았던 전력을 싹 다 쓸어 버렸으니…… 이걸 복구하려면 천 년 갖고 될지 모르겠군, 젠장할.”
하은천이 진짜 화가 난 듯 툴툴거리자 신녀가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본론이 무엇인가요? 당신이 하는 말이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는데.”
“이미 다 알아들었잖아? 혼돈의 완벽한 극상성인 인류최종무기를 맞았어도 호월은 그저 힘의 통제를 잃었을 뿐 타격을 전혀 입지 않았어. 그 말은…….”
하은천은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다가와서 심수력의 곁으로 왔다. 심수력은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공격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난장판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호월이 무조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은천의 손가락이 묵연을 흘리고 있는 호월을 향했다.
“이 광룡의 진짜 실체는 순수한 혼돈의 존재가 아니야. 도리어 이 광룡과 호월을 묶고 있던 연결고리가 혼돈에 속해 있었지. 그렇기 때문에 인류최종무기도 안 먹혔던 거고. 그걸 알아차리니까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눈치챌 수가 있었다.”
“……!!”
하은천이 실쭉 웃는 듯했다.
“이봐……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한 거야? 달마가 전해준 건가?”
“알아차렸으면 이제 우리를 공격해서 없앨 생각인가요?”
“…….”
하은천은 호월의 바로 앞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호월을 쳐다보는 듯했다. 어째서인지 하은천은 묵연을 맡아도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말했다.
“아니. 이길 수는 있겠지만 당신은 또다시 [작은 굴레]를 조작할 테니 너무 성가셔. 신들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그렇게 막 돌리는 게 두렵지도 않나? 하긴 뭐 달마의 제자가 그런 거 신경 쓸 리가 없지.”
뭔가 중얼거리던 하은천이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는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도움을 줄 테니 서로 협의를 해 보자고 찾아온 거야.”
“어쩌자는 거죠?”
“이미 이 광룡의 힘은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어. 지금은 뭔가 놀라운 술수로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술수는 의식 중간에 쓸 생각이었지? 틀림없이 광룡의 힘을 다 흡수하지 못하고 도중에 신녀 당신은 물론이고 여기 네 명도 다 개죽음당할 거야.”
하은천이 자못 과장된 몸짓을 하며 자기자신을 가리켰다.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지. 여기서 터지면 광룡이 틀림없이 악신으로 변해서 세상에 현신할 텐데 난 감당 못 해. 신들조차도 [작은 굴레] 움직인다고 막을 수 없는 일이야. 왜냐하면 부활하게 될 광룡은 웬만한 [옛 지배자]보다 훨씬 강할 테니까. 당신도 알잖아?”
“…….”
신녀는 말없이 긍정하는 듯했다. 그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사실은 바로 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 이걸 수습할 방법은 하나뿐이야. 일반 차원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광룡의 힘을 보내버리는 것.”
“…… 설마.”
“눈치챘나 보군. 달마의 제자인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제가 그런 방법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무엇보다도, 그곳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
하은천이 신녀 쪽을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레무리아 코덱스는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어. 그래서, 지구에 그 [문]이 열린 것도 같이 목격했지. 그리고 테라포밍된 곳으로 도피하기 전에 문의 좌표를 저장하는 데 성공했지…….”
“…….”
“어디까지나 [갈 수는] 있어. 생존이야 보장할 수 없지만 말이야. 어때?”
신녀는 침묵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
신녀가 말했다.
“당신이 숨기고 있는 다중우주를 건너는 무기를 제공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하은천이 크게 당황했다.
“뭐?! 그런 거 없는데…….”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힘을 이용했고, 지금은 윤회포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기지에 잠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하은천이 마뜩잖은 듯 말했다.
“그 [눈]…… 역시 신의 영역이군. 그걸로 내 마음을 읽은 건가?”
“그래요. 이제야 그 코덱스로 마음을 방어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젠장. 윤회포를 써서 뭘 할려고? 윤회포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긴 하는가?”
“알아요. 달마의 제자인 제가 설마 모르겠습니까? 어쩌면 당신보다 진짜 사용법을 잘 알고 있는 건 저일 겁니다.”
“…….”
하은천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신녀는 합장을 한 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방해되는 우리를 공익(公益)의 명목으로 이 세계에서 치워 버릴 생각이죠. 하지만 스승님이 사라진 이 세상에 희미한 희망조차 없다 생각된다면…… 저는 세계의 멸망도 감수하겠습니다.”
그러자 하은천은 약간 본심이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 좋아. 만만찮은 상대구만.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슈웅
하은천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윤회포’라는 걸 들고 왔고, 그 윤회포라는 게 자신들을 겨누는 게 보였다. 심수력은 적의 무기가 자신들을 향해 포구를 향한다는 사실에 큰 불안감을 느꼈으나 신녀가 호월의 제자들을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신녀시여. 저 개새끼를 정말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아요. 처음 생각했던 계획과는 많이 달라져 버렸어요.”
신녀는 천천히 심수력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는…… 당신들이 미륵(彌勒)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번쩍 -
이윽고 윤회포가 발사되었다.
***
“…… 여기까지가 내 기억이야.”
“…….”
나는 심수력의 과거 이야기를 듣자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후반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단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급히 심수력에게 질문했다.
“시, 심수력. 인류최종무기, 레무리아, 윤회포, 이런 단어가 뭔지 알고 있소?”
“아니? 그냥 대화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야. 신녀는 그게 뭔지 다 알고 있었던 거 같지만 나는 몰라. 자네는 알고 있나?”
“…… 알고 있소.”
인류최종무기, 그것은 바로 십이율주 하은천이 28회차의 종막에 나타나서 황제 공손헌원에게 꽂아 넣었던 비밀무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심수력의 회상 속에서 호월의 실종에 연관되어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호월이 인류최종무기를 맞고도 일단은 멀쩡했었다니!
또한 레무리아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공린이 받은 아틀란티스 판게아의 반지. 그 반지를 받을 때 아틀란티스의 지배자였던 오레이칼코스의 영이 레무리아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한때 초고대문명으로서 칼파, 멤피스 등과 함께 번영했지만 [옛 지배자] 때문에 하루아침에 멸망해 버린 레무리아 문명! 그리고 그 레무리아 문명의 유산을 십이율주가 찾고 있다는 얘기 또한 들어본 적이 있었다.
‘흠. 근데 레무리아 코덱스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군?’
마지막으로 윤회포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십이율주가 다중우주를 넘는 데 썼다고 말했던 그 윤회포는 내가 난데없이 우주의 최후에 가까운 순간으로 가서 파우스트 박사를 만나고 [옥좌]까지 보았던 계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게 연결된다.
틀림없이 심수력은 하은천을 만났던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심수력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근데 그 윤회포라는 게 빛난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아. 분명히 그 이후로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만큼은 기억이 안 나거든. 최후의 순간도 따로 있었던 것 같아.”
“무슨 말이오? 광룡의 힘과 함께 다른 세계로 날려간 후에도 생존해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렇네. 어딘가를 스승과 함께 한참 동안 떠돌았던 것 같은데…… 끄응…… 뭔가 기억이 안 나.”
나는 심수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오. 엄청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소.”
십이율주는 원래 고대부터 훨씬 많은 전력들을 쌓아놓고 있었지만 호월 때문에 그 전력을 한차례 크게 소모해 버린 것이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최선을 다해 세력을 복구했으나 그 기대가 예상에 미치지 못했던 게 분명하리라. 그리고 십이율주가 윤회포를 이용해서 호월과 4대제자들을 다른 세계로 보낸 게 사실이라면 또 한 가지 사실이 추론이 가능했다.
‘십이율주는 틀림없이 호월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정해놓고 그걸 전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녀와 하은천, 두 사람은 틀림없이 호월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심수력이 말했다.
“나는…… 그 치우의 심장을 보자마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했다네. 과거의 기억도 다 떠올랐고 저걸 부수지 못해서 몰살당했던 그 처참한 기억을 떠올리니 울분이 치솟더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심장을 깨부숴 버렸는데 그 순간 세상에 멸망했던 것이야. 수련을 하고 있던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이군.”
“미안할 게 뭐가 있소. 그 덕분에 나도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는데.”
“허허. 전생자라서 그런지 그릇이 아주 넓군.”
“아무튼 그 일은 일단 이걸로 끝난 거 같소. 당신의 남은 기억도 점차 되찾지 않겠소?”
“…… 그러면 좋겠는데.”
왠지 불안해하는 심수력을 보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성격과 안 어울리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오? 기억을 되찾는 게 싫소?”
“아니…… 그게 아니라…… 음…… 그냥 내 감인데…….”
그는 자신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기억을 되찾으면 엄청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구만…….”
“……?”
“아니 뭐. 잘 될 걸세.”
“실없는 소리하지 말고 일단 앞으로의 일부터 생각해봅시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제 뭘 할 건가?”
나는 뭘 묻냐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수련이지!”
“자네 말대로라면 금강경의 수련도 정보는 얻었으나 실패로 끝난 게 아닌가? 마지막에 봤을 때는 수련할 방향을 영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이제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겐가.”
“실패가 아니오. 나는 심득(心得)을 얻었소.”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마음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걸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수련할 방향은 이미 정해졌소이다.”
“그런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데…….”
그러자 심수력이 씩 하고 웃었다.
“별거 아니네. 어쩐지 자네가 어느 순간부터 즐기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군.”
“즐긴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겠지.”
“…….”
즐긴다…….
그 순간 나는 얼마 전에 겪었던 실패를 떠올렸다.
[의념(意念)이 검법(劍法)을 잡아먹어 버리는구나.]
내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육합검법의 변초를 무진장 수련하는 동안 얻게 된 깨달음. 내 마음대로 즐겁게 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 실패에서 마냥 즐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호되게 얻어맞은 기억이 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힘’을 깨달은 지금은 그 실패를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 정말 나는 그때 즐겼던 것인가?
즐긴다(樂)는 것 또한 오욕칠정의 하나이며 표면에 드러나는 의지이다.
하지만 즐기는 것(樂) 또한 공(空)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즐긴다는 건 무엇일까?
“…….”
퉁!!
나는 나도 모르게 뛰쳐나가 수련장에서 진각을 밟으며 정권을 펼쳤다. 정권과 함께 대기가 크게 떨리며 장중한 기세가 자연에 몰아쳤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방금 이것은 무념(無念)에 최대한 가까이하여 펼쳐낸 일권이며 태극권의 첫 초식이다.
여기에는 감정도 의지도 없는가?
하지만 감정도 의지도 없는 무념이라면 그게 락(樂)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뭔가를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다음 순간 내가 무의식으로 태극권을 펼친 이유를 깨닫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위(無爲).”
장삼봉이 내게 강제로 깨닫게 해 준 그 영역.
그걸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내 것으로 만들 때가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