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489화 (1,388/1,615)

“그러나 공(空)에 비춰 생각하면 그것도 가능한 일이지. 너무 거대한 단위의 [굴레]라서 이해는 가지 않으나 그들에게 마음이 생겨날 인과(因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야.”

나는 수보리의 말이 어려웠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기에 혀를 찼다.

“허참…… 별 희한한 일이 다 있구려. 그럼 [가면]이라는 건 어둠이 만들어낸 도구이지만 성장하기에 따라서 자유가 될 수도 있고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종족이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요?”

“바로 그걸세. 그리고 나는 그 점에서 자네에게 질문하고 싶군.”

“무슨 질문이오?”

“[가면]은 목적을 가지고 위대한 존재가 만들어낸 ‘도구’일세. 그러면 그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

어, 그러게?

가면을 자꾸 도구라고 지칭하는 데 도구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째서 가면이라는 종족을 이 세상에 만들어낸 것인가?

나는 수보리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가면들이 재능을 갈고닦아서 강해지면 그놈들의 힘으로 [종말]에서 유리해지려고 그런 게 아니겠소?”

“글쎄. 그건 아닐세.”

“왜 아니오?”

“태허천존이나 홍균도인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 대다수의 가면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 여기 나만 하더라도 삼황오제랑 정면에서 싸우면 10초 만에 불타 죽겠지. 그리고 이런 나에게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놈이 많네. 재능이 천재적이라고 해봤자 우주적인 단위의 초월자들을 생각하면 하찮을 뿐이니까.”

“흐음.”

“나는 원래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네.”

“무엇이오?”

수보리는 양손의 깍지를 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배우]일세.”

“? 배우라고?”

“그렇네. 각자 다른 종족에서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 연기를 하는 배우. 인간성을 연기하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건 그 때문이지.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바로 생을 연기하는 것과 같아.”

나는 수보리의 말에 황당해서 말했다.

“…… 뭐하러 배우처럼 연기를 시킨단 말이오?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길래?”

“글쎄. 그건 너무 어려운 얘기라서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짐작하고 있는 게 있다네.”

“그게 무엇이오?”

“…….”

수보리가 잠시동안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정보는 이미 충분히 많이 줬네. 나는 이제 슬슬 자네의 대답을 듣고 싶군.”

“대답이라면…….”

“나를 전생동료로 받아들여 주겠나?”

“음!”

본론이 다시 끄집어 내졌다. 확실히 여태껏 수보리가 중대한 정보를 계속 말해준 것도 내게 이 제안의 답변을 듣기 위해서일 것이리라. 나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면]인 당신이 배신할까 봐 두렵소. 가면이 신뢰가 가지 않는 존재인 건 알잖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배신 같은 건 뭐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문제고…… 정작 중요한 건 당신이 전생동료가 되면 내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수보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이 공간에서의 300년 수행이 끝나고 나면 [큰 굴레]의 과거로 갈 것이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그 시기는 탁록시대의 과거요. 신화시대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장이지.”

“!!”

수보리가 깜짝 놀란 듯했다. 그는 당황한 듯 말했다.

“뭐라고? 그렇다는 건…… 인과율이 [큰 굴레]를 넘었다는 것…… 이 서(書)는 정말 대단한 존재군.”

“놀랄 게 그런 게 아니잖소? 거신족 전사장이나 삼황오제, 그리고 그에 준하는 신들이 날뛰는 시대에서 당신 하나 동료가 되어봤자 별 도움은 되지 않소.”

“흐음.”

“당신도 물론 강하겠지. 대라신선보다 더 강할 거요. 하지만 지금 내게는 어설픈 동료가 짐만 될 뿐이오.”

그러자 수보리는 내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일회용 노예나 하인으로 삼아도 될 텐데 신경을 많이 써 주는군. 동료로 받아들인 자가 죽는 건 보기 싫다는 건가?”

“멋대로 생각하시오.”

“후후, 하하하하…… 거절할 명분을 잘못 고른 것 같군.”

수보리는 껄껄 웃더니 갑자기 자신의 가면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가면을 떼 버렸다.

투욱!

그러더니 수보리의 분신이 흰 가면을 내 쪽으로 건네는 자세를 취했다.

“?!”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소리가 내 귓전에 들려왔다.

[한 번 써보게.]

“…….”

이, 이거 써도 되는 건가?!

하지만 여기는 전뇌자의 공간이니 뭔 일 생기면 전뇌자가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수보리의 제안대로 가면을 들어서 내 얼굴에 써 보았다. 그리고 가면을 쓰는 순간이었다.

쿠오오오!!

“!!”

힘이!!

그 순간 ‘힘’ 그 자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광대한 기운이 내 몸에서 불꽃처럼 넘실거렸다. 화염처럼 일렁였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고 도리어 부드럽기까지 했다. 나는 이게 신력인가 싶었지만, 신력이라기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다른 능력처럼 느껴졌고, 확실한 건 이 힘의 잠재량은 굉장히 거대해서 놀랄 정도였다.

‘엄청나게 깨끗하고 정순(貞順)한 기운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생전 처음 보고 듣는 술법이 들어가 있었다. 그 술법의 가짓수는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이상하게도 이토록 방대한 양인데도 전혀 혼란스럽거나 헷갈리지 않았다.

[머리카락 분신술을 써 보게.]

스윽

나는 동시에 무려 3천여 자의 법문을 필요로 하는 강력한 대주문이 머릿속에 일렁이듯이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바로 이런 게 본격적인 대라신선급의 주술인 것이다!

그러나 그 대주문의 복잡한 체계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해석되었고 나는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에 술법의 체계를 불어넣어 그대로 머리카락을 뽑아서 앞으로 훅 하고 불었다.

퍼퍼펑!

다음 순간 눈앞에는 내 머리카락의 개수만큼 수십 개의 ‘나’ 자신의 분신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분신들이 나를 보고 동시에 깜짝 놀랐다.

“허억!!”

“허억!!”

“씨발!!”

“개새끼야!!”

“소똥아!”

“…….”

아 이게 대체 뭐냐고!!

수많은 ‘나’ 자신이 서로를 쳐다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수보리의 심언이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게 바로 내가 제천대성에게 전해준 궁극의 분신술, 모수분신(毛數分身)일세. 이 술법은 천계를 다 뒤져도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분신술이지.]

“모수분신…….”

[보통 분신술과는 달리 저 분신 하나하나에는 자아가 있네. 그리고 자아가 있는데도 정체성의 혼란도 겪지 않지.]

“정체성의 혼란이 없다고?”

바로 그때 분신 중 하나가 내 쪽으로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야 이 본체 개새끼야!! 너 진짜 죽을래?!”

“아니 왜!!”

분신은 자기 얼굴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이거 보라고!! 니 원래 얼굴이잖아!”

“…….”

“왜 잘생긴 복희 얼굴로 안 하고 이딴 메주 같은 얼굴로 만들고 지랄이야!”

그랬다. 분신들은 복희 얼굴이 아니라 바로 내 원래 얼굴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씨발 복희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러자 분신 백웅은 엄청나게 열 받아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아가리 닥쳐!! 니 얼굴이지만, 보고 있으면 괴롭지 않냐?!

“…….”

“난 존나 괴로워!!”

왜, 왠지 할 말이 없는데…….

“다음에 만들 때는 복희 얼굴로 만들어라! 알겠냐!!”

퍼엉

다음 순간 분신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수보리의 심언이 들려왔다.

[하하하. 자네의 업이 깊어서인가? 왠지 내가 쓰는 같은 술법보다 분신의 개성이 더 강렬하군.]

“웃지 마쇼. 아무튼 이건 대체 뭐요?”

[이미 이해했잖은가?]

“…….”

달칵

나는 가볍게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면을 벗는 순간, 흰 가면은 그대로 수보리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원래대로 돌아온 수보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가면]이지만 이름을 어둠에 의탁하지 않은 유일한 가면. 그렇기에 충돌 현상 없이 가면이 되어 내 능력을 자네에게 빌려줄 수 있네.”

전생검신 79권 17화

나는 수보리의 가면화 능력이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에는 내가 마치 수보리 그 자체가 된 것처럼 모든 경험과 지식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이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 강신(降神)과는 무척 다르군.”

“호오! 과연 전생자인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눈치를 챘나 보군.”

나는 수보리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신경험은 많소. 허나 가면을 쓰는 것은 그 어떤 강신과도 다르구려.”

“어떻게 다른가?”

“…… 완벽한 일체감이오. 굳이 표현하자면 보통 강신되었을 때는 강신당한 자가 내 몸의 틀에 맞게 힘을 짜낸다면, 가면을 쓸 경우에는 강신하려는 자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소. 마치 그 힘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일체화되는데…… 효율이 비교가 되지 않는군.”

“……!!”

수보리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강신을 해 본 것인가? 너무 정확하게 차이점을 짚어내서 할 말이 없을 정도군.”

“…….”

적어도 수백 번은 되는 거 같다…….

그러나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껴서 입을 닫기로 했다.

“맞네. 일반적인 상위존재의 강신과 달리 가면을 쓰는 건 자네의 자아와 충돌하지 않네. 우리는 처음부터 ‘도구’로 만들어졌기에 가면으로서 상대에게 협조만 할 수 있다면 힘을 더욱 상승시킬 수 있지.”

수보리가 말을 이었다.

“강신을 할 때는 상위존재의 힘이 10이고 자네가 1이라면 최대한 짜내어도 3 정도를 짜낼 수 있게 되어 있지. 인과율의 제약 때문에 결코 완벽한 힘을 꺼낼 수 없고 반절이라도 꺼낸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강신술사야.”

“가면을 쓸 때는 어떻게 다르오?”

수보리가 두 손을 들어서 서서히 합장을 하며 좁히는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자네의 힘이 1이고 내 힘이 1이라서 대등하다고 치지. 그리고 가면을 쓰게 되면…… 최소한 5 이상의 힘을 상승효과로 낼 수가 있네. 가면을 쓰면 힘의 증강효과가 합연산이 아니라 곱연산, 증폭(增爆)에 가까워지네. 왜냐하면 상반된 존재의 본질이 전혀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야.”

짜악!

수보리는 마침내 합장을 하더니 말했다.

“강신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의 효율이지.”

“으음!!”

그는 약간 신이 난 듯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나를 동료로 받아줄 만하지 않겠나?”

“…… 그러니까, 단순히 내가 당신을 가면으로 쓰게 되면 대라신선의 술법을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자신의 힘까지 증폭된다는 말이오?”

“그렇네. 단지 증폭되는 힘의 방향성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네. 가면을 쓴 자의 잠재능력을 건드리는 것이지만 나는 거기에 인위적으로 관여할 수 없어. 가면으로서의 속성과 자네의 본질이 감응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누구도 몰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된다.’

나는 수보리를 한 번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는 믿을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가 지금으로서는 의심을 거두고 동료로 받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합을 맞춰보고 나중에 정말 믿을만하다면 그때는 진짜 동료가 될 수 있으리라.

“좋소. 수보리 당신은 이제부터 내 동료요.”

“후후, 감사하군. 후회하지 않을 걸세.”

나는 조심스레 수보리에게 말했다.

“……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당신은 이 천암비서에 찾아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소? 사실 당신은 내가 지나쳐 온 과거의 [큰 굴레]에 있었던 것 같소만…….”

“그래. 나도 사실 그게 신경 쓰였다네. 자네가 속해 있는 현재의 굴레와는 다를 것이야. 하여 생각을 좀 해 보았는데…….”

수보리는 의자에 앉아서 빈 커피잔의 바닥을 몇 번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자네가 역근세수경을 얻은 회차에 존재했을 걸세. 나도 인간 세상을 가끔 염탐했었고 대웅제국의 이야기를 들었었거든.”

“그 말은…… 28회차라는 말이군.”

500년 후 미래의 대웅제국이 존재하며 황제 공손헌원의 야망에 맞서 싸운 삶!

수보리가 왠지 투덜댔다.

“커피를 다 마셨는데 채워주지 않는가? 왠지 야박하구나.”

그러나 수보리의 빈 커피잔은 채워지지 않았다. 전뇌자가 안 채워주자 수보리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몇 회차인가?”

“30번째 삶이오.”

“그럼 2번이나 굴레를 지나친 셈이군. 허면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물어보고 싶네만…….”

“뭘 물어볼 생각이오?”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자네가 있는 탁록대전의 시대가 수만 년 전이라고 친다면, 자네가 멀쩡히 수만 년을 살아 원래 살던 시대까지 도달하게 되면 자네의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

나는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음…… 처음에 큰 굴레의 과거로 올 때는 전뇌자가 시간이 지나면 모두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말해줬소. 과거에서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그건 뭔가 이상한 얘기군?”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수보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꾸했다.

“내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이미 자네의 동료들을 정상적으로 시간이 흘러서 만날 가능성은 무(無)일세. 자네가 [큰 굴레]의 과거로 온 순간 모든 게 틀어졌네.”

“……!!”

“길가의 돌멩이가 한 뼘을 더 움직였다는 식의 변화만 이루어져도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할 수 있네. 인과(因果)란 무량대수(無量大數)를 넘어서는 잠재력을 갖고 있으며 신조차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것일세. 허나 자네는 이미 [큰 굴레]의 과거로 넘어와서 많은 일을 행했겠지. 자네의 동료들은 해당 시간대에 도착할 경우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을 걸세.”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수보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순간 머리가 홱 도는 것 같았다.

“개소리하지 마!!”

덥썩!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수보리의 멱살을 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보리의 멱살을 잡은 채 말했다.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지랄이오!”

“진정하게. 나는 그저 논리적으로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니.”

“…….”

너무 흥분했군…….

내가 멱살을 잡은 손을 풀자 수보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가 수많은 변인으로 인해 바뀌어 버리면 자네의 동료들이 존재하는 ‘미래’를 향해 도착할 가능성이 천문학적으로 낮아진다는 말일세. 자네의 동료들이 이미 소멸해 버렸다는 게 아니고, 그저 자네가 그 미래를 향해 도달하기 힘들 뿐이야.”

“…… 그게 무슨 소리요? 어려운데 설명 좀 쉽게 해 주시오.”

“흐음. 이걸 보게.”

슈슛

수보리가 자신의 손에 커다란 막대기를 소환해서 쥐었다. 그리고 막대기로 바닥에 선을 긋자, 마치 시꺼먼 먹물이 그대로 바닥에 죽죽 그이는 것처럼 보였다. 수보리는 점 하나를 찍고는 말했다.

“자네가 [큰 굴레]의 과거에 도달한 시점은 바로 이 한 점일세. 그리고 그 점에서 행동을 시작한 순간 인(因)이 발생하는데, 과(果)는 1개가 아니야.”

죽 죽 죽…….

수보리는 그 점에서부터 무려 10개의 선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그렸다. 그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편의상 10개만 그렸지만 실제로는 자네의 행동 한 번에 수천억 개가 넘는 미래가 생겨날 수도 있네. 왜냐하면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미래의 세계는 무한대겁(無限大劫)만큼의 개수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무한대겁만큼의 가능성에서 또다시 무한대겁이 파생되니…….”

투웅!

수보리가 바닥을 막대기로 한 번 치자, 바닥에 무수히 많은 선이 퍼져나갔다. 이윽고 그 선은 너무나 많아져서 마치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 나갈 것처럼 보였고, 잠시 후 방의 한 면이 사라지더니 지평선이 새로이 생겨났다. 그리고 선 때문에 지평선이 새까매진 게 보였다.

“자네는 이 억겁과도 같은 확률을 뚫고 동료들이 존재할 단 1개의 미래를 찾아가야만 해. 이건 사실상 무(無)와 다름없지.”

“…….”

“실제로는 수많은 [옛 지배자]들이 쟁투를 벌이면서 [작은 굴레]를 멋대로 움직여대기 때문에 더 복잡할 걸세.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네가 원래 살던 시대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이야.”

수보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는 그가 만들어낸 선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전뇌자는 당연히 그리될 거라 했소. 난 전뇌자의 말만 믿었는데…… 녀석이 날 속였다는 건가?”

“그건 모르겠군. 헌데 논리적으론 이상하다는 얘기야. 이 수많은 무한대겁의 갈래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면 도착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음.”

확실히 이건 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순간 전뇌자가 생각이 나서 소리를 높여서 불렀다.

“전뇌자!! 나와 봐. 물어볼 게 있어.”

…….

“어? 뭐야.”

전뇌자가 나오지 않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저 이 공간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왜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대신에 잠시 후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웬 허름한 갈색 코트를 입은 청안의 늙은 백인이 의자에 앉은 채 나타났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외알안경을 쓴 그 노인은 자신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미안하오. 지금 전뇌자가 자리를 비웠기에 임시로 대신해서 나왔소.”

“당신은?”

“메피스토펠레스요.”

“…… 아?!”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그의 모습을 다시 살펴봤는데, 확실히 28회차에서 봤던 프리메이슨의 그랜드마스터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뇌공간에서 보았던 그 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저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너 그때 전뇌공간에서 나한테 져서 자살했잖아!”

메피스토펠레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어사이드 프로그램이 발동했었던 건 맞소. 허나 그 때 전뇌자가 내 프로그램이 침입해서 나를 흡수하고 내 연산능력을 가져가 나를 보조인공지능으로 삼았소.”

“뭐라고…….”

“그 후 전뇌자가 천암비서의 단말이 되면서 나 또한 그를 돕는 부관리자가 된 것이오.”

“…….”

뜻밖의 구면을 보게 되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아무튼 좋아. 전뇌자는 왜 자리에 없는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있었잖아.”

“[꿈]의 심처(深處)까지 나일라토프가 거의 다 도달해 버렸소. 그래서 그를 막으러 갔소.”

“나일라토프가?”

메피스토펠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과학’의 가면, 나일라토프는 최상위 신에 버금가는 존재. 전뇌자라 해도 나일라토프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소. 그래서 당분간 전뇌자 대신에 보조단말인 내가 당신의 수련세계에서 부활을 담당하겠소.”

“잠깐…… 그 말은…… 지금 전뇌자가 나일라토프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소.”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나일라토프의 기함, 가이아가 갖고 있는 힘이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전뇌자라고 해도 나일라토프를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인 것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냐?”

“없소. 전뇌자는 내게 일을 맡기면서 자신의 승패와 관계없이 수련세계의 시한이 끝나면 당신을 원래 있던 탁록대전의 시대로 돌려보내라 했소.”

“으음.”

전뇌자한테도 위기가 올 수 있다니 생경하다.

‘전뇌자한테 방법을 물어볼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에이, 그래도 눈앞에 있는 놈도 똑똑하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질문했다.

“이봐. 우리의 대화를 너도 들었을 건데, 내가 [큰 굴레]의 미래로 가서 내 동료들을 만나는 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가능한 거지?”

그 말에 메피스토펠레스는 힐끔 수보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흔한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를 논하는 거군. 허나 천암비서는 타임 패러독스의 모순에서 자유로우니 그건 걱정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요.”

“어째서? 수보리의 말대로 무한대겁의 가짓수가 존재하지 않나?”

“당연히 존재하지. 그 때문에 현대 과학에서는 다중우주와 평행우주를 들어 그 가짓수를 설명하곤 했소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일 뿐.”

메피스토펠레스가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슥 하고 손을 들어서 바닥에 그려져 있던 선을 가리켰다.

“이 수형도(樹形圖)는 언뜻 진실처럼 보이지만 중대한 전제가 틀려 있소. 전생자 백웅의 경우에는 적용할 수가 없소.”

그 말에 수보리가 약간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뭐가 틀렸다는 건가?”

“이 수형도의 전제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선형(線形)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게 바로 틀렸소.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천암비서 그 자체가 주인을 매개로 하여 업(業)을 형성하고 있다는 원리를 간과하고 있지.”

“…….”

“선험적(先驗的)인 궤적이 업(業)의 형태로 존재하고, 마치 추체험을 하듯이 과거의 인과를 미래에 덧붙이는 게 가능하오. 백웅이여, 과거 전뇌자가 양자전정(量子剪定, Quantum pruning)을 행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소?”

“야, 양자전정? 어…… 그게 뭐였더라…….”

나는 메피스토텔레스가 나를 지목해서 말하자 당황하다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내가 자리를 비웠는데도 안 비운 것처럼 모든 이들의 인식을 속일 수 있었던 전뇌자의 기술 아냐?”

“그렇소. 그것은 전뇌자가 연산력을 이용해서 모든 이의 관측계를 조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소. 그리고 천암비서의 단말이 된 지금은 천암비서의 힘으로 전 우주에 양자전정을 행할 수가 있소.”

“……?”

뭔 개소리다냐?

너무 어려워서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수보리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 이해는 했지만…… 정녕 괴물같구나. 일개 서(書)가 어찌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저 위대한브라흐마조차도 비슷한 행위를 시도하려다 봉인 당할 뻔했는데…… 그것도 서 그 자체가 아닌 단말 따위가 전 세계의 인식을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수보리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런 수보리를 보고는 약간 화가 나서 말했다.

“아니 또 왜 당신들끼리만 알아먹는 얘기를…… 나도 좀 알아먹게 설명해 달라고!!”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손 위에 사과를 소환했다.

“백웅. 이 사과를 한 번 받아보시오.”

메피스토펠레스가 내게 사과를 던지자 나는 가볍게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메피스토펠레스가 또 한 번 사과를 소환하더니 던지려는 시늉을 했다.

움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사과를 던지지 않았다.

나는 영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과를 당신에게 던진 미래와 던지지 않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지. 여기까지가 바로 양자역학이지만…… 당신은 방금 내가 사과를 던지려 한다고 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소. 그건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오.”

“그건 그렇지.”

“허나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오. 선이 아니라 원(圓)이며, 무한한 굴레를 돌아서 회귀(回歸)하게 되어있는 것. 다시 말하자면 이 무수한 선은 사실 현재, 과거, 미래에 걸쳐서 한 번씩 그려진 적이 있었다는 소리요. 여기에 비춰서 보자면, 사실 미래도 과거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는 거요. 시간은 귀일(歸一)하게 되나니.”

“…….”

“천암비서에겐 그런 능력이 있소. 시공간이 사실 선형이 아니라 원(圓)이라는 점…… 그걸 이용해서 궤도를 읽어내어 해당하는 좌표에만 인과율이 이어지도록 지정이 가능하오. 전뇌자가 당신을 미래의 동료들에게 돌려보내는 방법이란 바로 이것이지.”

모르겠다.

이 새끼가 대체 뭐라는 거냐?

내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자 옆에 있던 수보리가 툭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서의 능력만으로 큰 굴레 전체의 인식과 업을 조작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네. 최소한의 매개체는 있어야 할 텐데?”

“그대의 말이 맞소. 그 매개물은 탁록의 시대에서 백웅이 찾아야만 하오.”

메피스토펠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웅이 탁록대전의 시대에서 제약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물을 손에 넣게 되면 동료들을 만나는 게 가능할 것이오. 그 시공간을 매개로 하여 당신의 동료를 소환하든 당신이 그 시대로 가든 선택할 수 있게 되오.”

“……!!”

“전뇌자가 나중에 말해주려 한 모양이지만 비상사태이므로 그녀의 복안을 미리 말씀드리겠소.”

그런 유물이 있다고?!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수보리가 탐탁지 않은 듯 말했다.

“으음, 그런 보물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하나밖에 없네만…… 설마 그건가?”

“수보리.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물이 뭔지 알고 있소?”

“세상에 수많은 신이 있고 유물이 있지만 그런 유물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아니, 그 신 이외에는 아무도 그런 걸 갖고 있지 못하다네.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내가 하는 말일세.”

“그게 뭐요?”

이어진 말에 나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명경(冥鏡). 명계 최고의 보물만이 제약 없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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