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486-1488화 (1,387/1,615)

나는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 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가 나를 경멸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모든 걸 부정당하며 끝까지 살아갔다.”

…….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날이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

전생능력을 얻은 그날 이후로도…… 줄곧…….

주륵

나는 나도 모르게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주륵 흐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분노(憤怒) 그 자체였다. 의분(義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때로는 분노에 명분 따윈 필요 없다.

“재능없는 놈은…… 죽으란 말이냐!!”

옳고 그른 건 상관없다.

이 세계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콰칭!!

그 순간 알 수 없는 압력이 깨어지며 도신의 몸이 크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도신은 무려 다섯 발자국이나 물러난 후 몸을 비틀거리며 중심을 찾았고, 나는 나를 감싸고 있던 심공의 압력이 단숨에 걷혀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금은 뭐였지?

내가 무슨 말을…….

“쿨럭!!”

도신은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놀라서 당황했다.

“도, 도신!”

“…… 그렇구려. 세계를 구하겠다는 허튼소리보다 더욱 솔직해졌구려.”

“…….”

그 순간 나는 도신의 얼굴에서 진짜 미소를 본 것 같았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당신의 마음이오,”

나의 진짜 마음?

나는 도신에게서 더 이상 공격 의지를 느낄 수 없었고 그 덕에 심공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몸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세상이 엿 같다는 게 내 진짜 마음인가…… 늘 생각하던 거라서 새삼스러운 것도 없구려.”

“전생자여. 그게 정녕 진공가향과 같은 마음 같소?”

“…… 비슷하지 않소?”

내 반문에 도신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달마의 진공가향이 벌어질 때. 나 또한 먼 곳에서 그 의식이 일어나는 걸 보고 있었소…… 내 스승 혜가가 진공가향의 의식을 방해하려 수많은 존재들이 강림하는 걸 보여주었고, 그에 대항하여 달마가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그 순간을 보았소.”

도신은 하늘을 바라보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달마는 분명 악령과 악신들에 대항해 인류를 구하려는 선(善)의 입장이었을 터…… 그러나 그가 끌어 모은 마력(魔方)은 너무도 극악(極惡)하여 도대체 누가 악인지 모를 지경이었소. 달마의 마기(魔氣)를 이기지 못한 [옛 지배자]가 터져 죽는 것마저 보았으니…….”

“…….”

“그 어마어마한 마력은 단지 수단으로만 모을 수 있는 게 아니었소. 존재 스스로가 모든 것의 파멸과 절망을 받아들이고 그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 한 존재할 수 없는 마력…… 달마는 타락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그의 정신상태는 완전한 파멸에 젖어 있었소.”

도신의 말대로 달마는 결판을 다음 전생으로 미룰 수도 있었는데 더 이상 전생하다가는 도저히 인간의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진공 가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그 사실을 달마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사자이자 달마의 손제자(孫弟子)에게서 듣자 진실성이 크게 느껴졌다.

도신이 말했다.

“당신의 그 마음은 달마와 비슷하지만 다르오. 씨알 하나 남기지 않는 파멸과 달리 당신은 모든 것이 공(空)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 것이오. 그러나 파멸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더라도 그걸 긍정할 수는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긴 하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마음이 다르다면 세계 또한 다른 것. 그리고 전생자가 이 세계에 [마음]을 불어넣어 자신의 뜻대로 바꿀 수 있는 존재라면…… 당신이 만들어내려는 세상은 달마의 진공가향과 는 다른 것이오. 그럴 수밖에 없다오.”

“……!!”

“당신은 그저 달마나 후대의 백련교 사상에 감화되어 진공가향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을 뿐…… 거기에 진정으로 공감하지는 않소.”

나는 도신의 말에 흠칫했다.

‘그런가…….’

전뇌자가 했던 말.

꼭 진공가향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말

그 말에 비추어보면 사실 ‘나만이 낼 수 있는 답’을 따로 찾으라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진 것이다. 백련교의 진공가향이 절대적 정답이 아닌 만큼, 나만의 정답을 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신에게 말했다.

“도신이여. 물어볼 게 있소.”

“말 하시오.”

“진실로 내가 염원한다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 또한 바꿀 수가 있겠소?”

‘힘’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건 지긋지긋하다.

약한 존재는 먹혀 버린다는 그 법칙 자체를 없애 버린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도신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단숨에 무척 깊은 경지에 이르렀구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대가 양극(兩極) 중 어느 곳에 도달하든 간에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양극?”

도신은 침착하게 말했다.

“혼돈의 극한에 도달하여 옥좌에 이르는 길…… 그리고 태허의 극한에 도달하여 무신지의(武神之意)에 이르는 길…… 그 어느 쪽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약육강식의 법칙만큼은 뭐라 할 수가 없구려.”

“어째서 그렇소?”

그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 세계의 근원이란 바로 혼돈. 태허가 혼돈에 반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만물의 매질이 비롯되는 것은 혼돈이오. 그리고 혼돈지몽(混范之夢)속에서 변화가 생겨나기 위한 동인(動因)이란 바로 강(强)과 약(弱)이오. 이 세계 전체가 위대한 ‘하나’가 아니기에 다수의 존재들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강약에 예속 될 수밖에 없는 것…….”

“…….”

“변화가 사라져 버린 세계. 그런 세계라면 강약이 무의미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게 성립하는 순간은 세계가 윤회하기 직전의 찰나뿐이겠지.”

“끙…… 무척 어려운 얘기구려.”

“그러하오? 결국 당신이라면 이 얘기를 학리(學理)가 아닌 실체로 받아들이게 될거요…… 당신이 [꿈을 꾸는 자]와 큰 연관이 있기에.”

그러더니 도신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실로 흥미롭소……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올 수 있다니…… 그대가 지닌 마음의 잠재력은 신(神)조차 따라잡기 힘든 것. 당신이 진정으로 눈을 뜨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가지 않는구려.”

“눈을 뜬다니? 눈은 지금도 뜨고 있는데…….”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오.”

“심안(心眼)? 나는 이미 그 경지를 얻었소.”

도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술 경지를 말하는 것도 아니오.”

스으…….

도신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내 쪽으로 향했다. 내가 아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도신이 말했다.

“한 수를 받아내면 그대의 행적에 상관치 않겠다 하였으나, 이번에는 양해를 부탁드리겠소. 이 공간에서 나가주기를 부탁드리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도신의 의지가 무척 강경했지만 나는 그에게 미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말로 내가 [꿈]을 통해서 굴레 너머에 있는 어둠의 존재를 불러들인단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그걸 막을 도리가 없소?”

“그렇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꿈은 그 자체가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하오. 반대로 어째서 여태까지는 그게 잠잠했는지 모를 정도로…….”

“…….”

“[꿈 그 자체를 통제하는 존재가 막아주지 않는 이상 역근세수경에서 그 어둠의 고동을 막아낼 방법은 없소. 미안하외다.”

나는 도신의 뜻을 이해하며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해하오. 나야말로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다시 방문하게 될 것이오. 쫓아내는 대신이라 하긴 그렇지만 그대에게 마음의 눈에 대해 일러주겠소.”

츠츠츠츠

도신의 겁파공무가 무형의 기운을 띄고 내 쪽으로 바람처럼 흘러들어 온다.

도신의 청정한 말소리가 내 귀에 새겨졌다.

“기와 의념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느끼고…… 그로써 진정한 무위(無爲), 태허(太虛)에 도달하면 진정한 마음의 눈이 뜨이게 될지니…….”

투웅!

다음 순간 겁파공무의 심력(心方)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나는 방금 전과 달리 저항할 겨를도 없이 전신이 붕 하고 날아서 하늘 높이 떠 버리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기도 의념도 없는 세계에서 이토록 비현실적으로 강대한 힘을 쓸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멀리에서 도신의 혜광심어(意光心語)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대는 이미 신역의 초입에 들어있으니 머지않아 마음의 눈을 뜨게 될 것이오.]

* * *

번쩍!!

“……!!”

나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내가 마지막으로 금강경을 읽던 수신류의 서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게 정말로 현실인가?”

마치 꿈같다. 내가 금강경을 읽다가 난데없이 역근세수경의 세계로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도신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니?

‘으음. 생판 다른 경전인 금강경을 읽었는데도 역근세수경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건…… 인연이 있다면 들어오는 방법은 어떤 책이든 상관없다는 건가.’

역근세수경과 인과가 이어져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마음 수련이란 건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네.”

도신이 말하길 내 존재 자체가 강대한 무언가를 부른다고 하니 어쩔 도리는 없지만, 볼멘소리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기껏 수련 끝에 단서를 잡으려 했는데 수련할 기회 조차 주지 않았으니 어쩌라는 말인가?

그때였다.

어?”

우우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역근세수경의 서적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서기(端氣)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 기운을 보자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책을 집어서 읽었고, 초반부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은 백웅이다. 뇌신 인드라를 때려죽일 만한 힘을 쌓으려고 300년이나 수련을 하던 중 갑자기 역근세수경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 는데…….]

“?!”

뭐야?! 어째서 내 사정이 책에 쓰여 있는 거지?!

끝까지 읽어보자 내가 책 안에서 겪었던 일이 1인칭으로 쓰여 있었다. 또한 [나] 백웅이 도신과 마음을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으로 끝이 났는데, 더 뒷장을 보자 신기하게도 이두를 쓴 금강경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은 들어가 있는 자의 행동에 따라 변화하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하도록 하라.]

북원무제 야율봉이 써놓은 단서.

그 단서대로 책의 내용이 나의 행동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워서 책을 계속 읽었다. 아무리 보아도 내가 책에서 겪었던 일 그 자체였고, 누군가가 내 행동을 객관화시켜서 쓴 듯한 게 소름 돋았다.

“이야. 이럴 수가…… 음?”

나는 계속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상한 걸 발견했다.

[…… 하여 나는 책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나, 예측하지 못한 불청객이 있었다.]

[그 불청객은 본디 단의 일족의 주술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 이었지만, 인과가 기묘하게 연결되자 호기심을 느끼고 방문하려 하는 누군가였다.]

[밖으로 나간 ‘나’는 그자를 초대할 지 말지 선택하게 되리라. 그 이름 은 수보리(須菩提)이다…….]

“……!!”

뭐야?! 이 대목은 왜 추가된 거지? 나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서 눈만 끔벅 거리면서 몇 번이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거군…….”

해공제일 수보리라고 하는 존재가 단의 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 주고 계약하여 보호의 술(術)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자체로 역근세수경을 통해 전생자인 내게 인과율이 닿는 것이었으므로, 그 인과율의 흐름을 느끼고 호기심이 생긴 수보리가 내게 접촉을 하려 하는 것이다.

아마 지금은 천암비서에 방문해도 되냐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고, 그 요청이 내게까지 닿은 게 분명하다.

여기까지는 이해했지만 동시에 나는 오싹함이 들었다.

‘수보리라는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단지 보호술법이 발동한 것만으로 인과율의 흐름을 추적해서 천암비서 의 단말, 전뇌자가 발동한 [책의 세계]에 방문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놈이라고? 제천대성의 술법스승이란 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존재가 분명하다.

“일단 나가자.”

역근세수경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 한 건 아니다.

분명 도신의 겁파공무를 겪으면서 나는 뭔가를 느꼈고, 마음(心)이란 게 어떻게 공(空)이 되는지 어렴풋한 감각을 체득한 듯했다. 도신 또한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신역절기가 머지않았다고 내게 조언해준 것이리라.

나는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난 후 책을 들고 수신류의 서고를 나가서 청룡무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청룡무관에 도착했지만, 거기에는 심수력이 없었다.

‘아직 백두산의 탐색이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어차피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탐색이므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는 대신에 청룡무관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눈이란 무엇인가?

나는 신역의 초입에 발을 디디는 중이라는데 정말 그 마음의 눈을 각성하면 신역절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는 명상수련을 며칠 내내 하다가 마음이 복잡해져서 씻고 잠을 청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침상에서 자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잠을 잘 필요는 없었지만 역근세수경의 세계에서 의식주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이 생각나자 괜히 한숨 자보고 싶어진 것이다.

‘가끔은 잠을 자는 것 자체가 유희 라니까…….’

나는 머지않아 쿨쿨 잠들었다.

* * *

“백웅. 잘 왔어.”

전뇌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나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전뇌자가 말했다.

“당신이라면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 세계에 방문하려는 이단의 존재가 있어. 한 번 만나볼 거야?”

“…… 아, 아니, 잠깐잠깐…….”

나는 당황해서 손을 허우적대며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감정을 진정시킨 후 침착하게 말했다.

“전뇌자. 그러니까…… 나…… 죽은 거냐?”

“응. 그래서 여기 온 거잖아.”

“…….”

잠자는 사이에 세계가 멸망했단 말 인가?

나는 전뇌자에게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죽었다고?”

“응.”

“미친소리 하지 마. 저 세계에는 나와 심수력밖에 없다면서? 그리고 심수력은 백두산으로 떠났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

내가 성을 내자 전뇌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커피잔을 내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내가 당신이 죽지 않았는데도 여기로 끌고 올 이유는 없어. 알고 있잖아?”

“…….”

그것도 그렇다. 나는 화가 나기 보다는 어이없음을 느끼며 맥이 풀려서 말했다.

“그래, 그렇다 치자고. 그럼 내가 왜 죽었는지 이유 정도는 알려줄 수 있냐?”

“세계가 한 순간에 멸망했어.”

“……!!”

“당신이 감지하지 못한 이유는 그것 때문일거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암살한 건 아닐 테지.”

“세계가 멸망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세계가 멸망하면서 내가 덤으로 죽었기 때문에 여기 왔다는 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은 되지만 뜬금없이 세계가 멸망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전뇌자는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간섭을 줄일수록 당신이 그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수련효과가 커져. 그래서 이유를 굳이 내 입으로 말해주기보다는 당신이 직접 찾아내기를 권하겠어.”

“그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지금 내가 세계가 멸망한 이유를 알려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인과율을 침해해서 그 세계에 간섭한 셈이 되어서 남은 수련 기간이 더 줄어들게 된다는 말이야.”

“……그런 법칙도 있었냐.”

“나는 천암비서의 단말일 뿐이야. 내 재량으로 당신이 수련할 세계를 만들었지만, 근본적으로 인과율을 초월하는 건 불가능해. 당신이 수련하는 그곳도 인과율에 묶어 있으니, 인과율에 순응할수록 이득을 보고 아니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어.”

냉담하게 말한 전뇌자는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이 세계에 방문하려는 이단의 존재가 있어. 당신은 그를 만나볼 생각이 있냐고 묻고 있는 거야.”

“…….”

“거부하면 그냥 문을 닫아걸고 내쫓을 거야. 만나겠다면 이 공간에 초대해서 당신과 대화할 수 있게 해줄게.”

“그놈이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올 수는 있나?”

내 질문에 전뇌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가 상위존재이기는 하지만 절대 천암비서를 상대로 그럴 수는 없어. 그자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듯해.”

“흐음…… 그놈의 이름이 뭔데?”

“당신이 역근세수경에서 확인했던 그 존재야.”

“……!!”

나는 전뇌자의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어떤 놈을 만나게 되는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리가 안 좋다지만 역근세수경에서 겪었던 생생한 경험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유추하지 못할 수는 없다.

'흐음. 재미있군…….'

어차피 수련도 잠시 벽에 막힌 상태에서 정보수집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놈과 이야기한 다음에는 나를 되살려 줘.”

“알았어. 그자와 대면할 때 내가 같이 있으면 좋겠어?”

“맘대로 해. 어차피 다 볼 수 있잖아.”

“그럼 내 모습은 없애둘게.”

그렇게 말한 후 전뇌자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가고는 탁자 곁으로 갔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서 문이 하나 생겨났고, 전뇌자는 서서히 문고리를 잡아서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낯선 신발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동시에 전뇌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낯선 이방인이 완전히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읏차.”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 이방인은 빙긋 웃이며 내게 말을 걸었다.

“반갑네! 백웅.”

그 자의 모습은 외계종족이나 [지배자]가 아닌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천축의 현자와 같은 흰 천옷 을 입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불타를 섬기는 백호상(白毫相)으로 보이는 흰 점이 있었다. 전형적인 천축의 불자(佛者)처럼 보였으며 그런 복장과 달리 생김새는 무척 아름다웠다.

남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양! 나는 그가 현실세계의 기준으로는 절세미남이거나 절세미녀라 불릴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외모가 지극히 인공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치 복희같군…….’

내가 내심 중얼거릴 때 이방인이 말했다.

“이렇게 초대해줘서 정말 감사하네. 자네가 거부했다면 나는 꼼짝없이 문전박대당했을 걸세.”

싱글거리며 웃는 낯이었지만 나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퉁명스레 말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요? 나는 당신을 처음 보는데.”

“흠, 다 짐작하고 있을 텐데 시치미를 떼는가?”

“시치미?”

“내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건 역근세수경에 걸려 있던 단(檀)의 일족 의 보호주술이 사실 내 힘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단의 일족은 주술의 모형을 이두라는 글자로 제공했을 뿐 그 안의 알맹이는 전적으로 나와의 계약으로 성립된 거지. 그래서 인과율이 선명하게 이어져 있으니, 자네가 역근세수경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네.”

“…….”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는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오. 불청객을 기껏 호의로 들여보냈는데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무례하게 제 할 말만 하는 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오.”

“어허!! 그렇군. 이거 실례했네.”

상대는 꽤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 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의 힘만 보면 여지없이 신격 (神格)이기에 인간세상의 예의 따위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네. 내 무례함을 용서해주게.”

“웃기는 얘기군. 신들끼리도 예의를 잘 차리지 않소?”

“하하하…… 내가 죄인이 되었군.”

그는 껄껄 웃더니 다소곳이 천축의 것으로 보이는 인사예절을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수보리(須菩提)라고 하는 자 일세. 세상에서 가진 별호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이며, 불도(佛道)에 귀의하여 수천 년을 보냈다네.”

“…….”

그렇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해공제일 수보리!

공(空)에 대한 대담을 세상에 설파했으며 금강경(金剛經)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한 명이라 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제천대성의 말에 따르면 그의 술법스승이기도 했다. 바로 그 해공제일 수보리가 역근세수경에 보호술법을 거는 데 도움을 주면서 이곳까지 따라 들어올 수 있는 인과율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건 표면의 사실 뿐이다. 눈앞의 수보리라고 하는 자가 도대체 무엇이며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과 마찬가 지였다. 나는 눈앞의 수보리를 경계 하며 말했다.

“당신이 제천대성에게 술법을 가르친 존재라고 들었소. 맞소?”

수보리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네. 본인이 말해주던가?”

“그렇소만.”

“아마 그의 말이 다 사실일걸세. 나는 그저 화과산에 괴물원숭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그를 제압하러 갔는데, 뜻밖에 그의 힘이 몹시 강했지. 아무래도 그 당시에는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못 이길 것 같았어. 그래서…….”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제천대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술법을 가르친 것일세.”

“……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멍하니 되물었다.

“무슨 소리요? 제천대성을 약화시켰다고?”

“그렇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제천대성은 어마어마한 분신술을 쓸 수 있고 그 모든 술법이 그의 강대한 힘의 원천이 되고 있소. 당신이 그 술법들을 가르쳤다면 제천대성을 강화시켰을 뿐 술법을 배워서 약해졌다는 게 말이 되는 거요?”

“후후. 내가 제천대성에게 가르친 술법은 총 72종의 둔갑술과 10종의 비술(秘術), 그리고 3종의 천외마술(天外魔術)일세. 그 모든 것이 대라 신선급의 술수이지만…….”

순간 수보리는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익혔기에 그는 약해졌네. 내가 의도한 대로야.”

“엥…….”

이 새끼 미쳤나? 그 강력한 술법을 배웠는데 왜 약해진다는 소리야?

내가 이해가 안 되어서 어리둥절 해하자 수보리가 말했다.

“나를 초대해준 후의(厚意)에 보답 하기 위해 쉽게 말해주지. 쉽게 말하자면, 제천대성 미후왕은 술법을 배우지 않았을 때 원래보다 열 배는 강했다는 말일세.”

“……!!”

“내 이름을 걸고 진실일세.”

뭐, 뭐라고?!

진짜란 말인가?

나는 눈앞의 수보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황당해서 외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대라신선급의 술법을 익히는 만큼 강력해질 수밖에 없는데…….”

“대라신선급의 술법이라는 건 그 술법을 쓰면 대라신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소리지. 헌데 백웅 그대가 보았던 제천대성의 잠재력은 겨우 대라신선 수준이던가?”

“…….”

“내가 토벌하고자 찾아갔을 때 갓 마주쳤던 미후왕의 실력은 말이지…… 내가 도저히 그를 당해낼 수가 없어서 무려 수십 번이나 목숨을 날렸다네. 내가 특수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소멸당했을 거야. 진정으로 요괴왕(妖怪王)에 어울리는 힘을 갖고 있었지.”

수보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그는 자기가 가진 힘을 통제하기 힘들어했어. 잘못했다간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실제로도 그는 예전에 저질러 버렸…….”

뭔가 말하려던 수보리가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라신선의 술법을 전수해주는 대신 태초에 갖고 있던 힘의 일부를 봉인시키는 계약을 맺은 것일세.”

“……!!”

“그대가 여태 보아왔던 미후왕은 스스로 금제를 걸고 크게 약해진 모습일세. 일부러 독을 먹은 채 세상에 맞춰준 거지.”

“…….”

믿을 수가 없다. 제천대성이 술법을 안 배웠을 때 더 강했다니?! 하지만 수보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잠시 후 경악을 수습하고는 경계의 눈초리로 수보리를 보며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제천대성을 약화시킨 거지? 본인이 동의했다 하지만 술법의 독을 권유한 건 바로 당신 아닌가.”

“제천대성은 결국 술법의 독에 긴고아까지 차서 약화 될 만큼 약화됐는데도 혼자 힘으로 옥황상제를 죽였네. 그자가 원래 힘을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괴물이었을지 상상이 가나? 그가 폭주라도 했으면 전 세계가 멸망했을 테니 나는 세상을 지킨 의인일세.”

“자기 입으로 의인이라는 자 치고 진짜 의인은 보지 못했는데.”

“흐흐흐…….”

수보리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더니 말했다.

“물론 이건 그냥 입에 발린 소리지. 사실은 세계에 선택받은 그 천혜의 존재를 질투하여 봉인을 걸었을 뿐일세.”

“…….”

“나로서는 절대로 얻지 못할 힘이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수보리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놈인지는 대충 알 것 같군.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소?”

“오, 그거 좋지.”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을 말하시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요구하자 그는 흠, 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목적은 하나일세. 자네가 다음 번에 전생(轉生)한다면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 주는 것.”

“……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 있군.”

“역근세수경에서 있었던 일은 다 알고 있네. 물론 자네가 전생한다면 다시 모르게 되겠지만…… 그 경우를 대비해서 자네에게 제안하는 걸세.”

“이해가 되지 않는군. 내 동료가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전생하면서 내 옆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나는 다소 거칠게 말했다. 왠지 눈앞의 수보리가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보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거야. 떡고물! 전생자 옆에서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다면 세상에 앙복하지 않을 존재가 대체 어딨겠나?”

“…….”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 말게. 자네 도 전생자라는 게 어떤 위치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세상에서 가장 위 대해질 수도 있는 존재에게 전력으 로 친해지려는 건 일견 당연하지 않 는가.”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내 마음이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봤을 때 딱히 친해지고 싶은 자가 아니오.”

“호오, 그런가?”

“썩 꺼지시오. 제천대성의 정보를 준 걸 고려해서 무조건 죽이지는 않을 테니…….”

내가 축객령을 내렸지만 수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는 음험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래도 말인가?”

촤악

그 순간 수보리의 아름다운 용모가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표현한 건 그의 얼굴 부분이 완전히 사라져서 인식불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혼돈 그 자체가 수보리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고, 내가 경악하는 순간 그는 서서히 한쪽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었다.

슈욱!

그러자 수보리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얼굴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크게 놀라서 의자에서 번쩍 일어서고 말았다.

“……한(漢) 고조……유방(劉邦)!!”

한나라를 세운 호걸이자 영웅, 한 고조 유방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내가 그 역사상의 인물의 얼굴을 아는 이유는 다른 까닭이 아니었다. 직접 본 적이 있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인지 수보리는 나직이 말했다.

“예상이 맞았군. 역시 자네는 이 자를 직접 맞닥뜨린 적이 있는 거군. 하긴 제천대성과 그렇게 친할 정도의 전생자라면 천계 태허천존의 비밀을 깊게 파지 않았을 리가 없지.”

수보리의 추리력 또한 나름 대단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딴 거에 놀랄 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를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네놈은…….”

“그래. 바로 자네가 짐작하는 대로 일세. 이 얼굴은 역사 속에서 그자 가 취했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고 따라한 것뿐이지. 어차피 본질은 비슷하니까.”

“…….”

수보리는 다시 자신의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말했다.

“내가 바로 불법(佛法)의 [가면]인 수보리.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 가면의 모든 정보를 넘겨주고 배신하는 대신 전생자의 동료가 되기를 원하네.”

나는 수보리의 말에 놀라 잠시 멈춰있다가 이윽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가면에 대한 정보라고?”

“그렇네.”

“미안하지만 그게 거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가면 이 전 우주에 얼마나 퍼져 있는지도 모르고 제각각 천차만별인데 그 정보를 얻어서 어디에 쓴다는 거지? 그리고 가면에 대한 정보를 알든 모르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아.”

“호오…… 생각보다 가면과 대적해 본 경험이 많나 보군…….”

뭔가 감탄하듯 중얼거리던 수보리가 말을 이었다.

“그 말대로일세. 아마 가장 강력한 가면인 니알라토텝 조차도 전 우주에 얼마나 많은 가면이 뿌려져 있는 지는 모르겠지. 그리고 내가 전 우주의 가면에 대한 정보를 다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일세.”

“할 말 끝났지? 이제 나가.”

“하지만 자네가 가면에 대해서 이 것만큼은 모를거라 생각하네.”

“뭐?”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가면은 진짜 가면으로 변할 수가 있네. 자신의 본질을 각성한 경우에만.”

“…… 그건 뭔 소리냐?”

“후후, 역시 그런가. 몇 번을 전생 한 건지는 몰라도 이런 건 수백 번 전생해도 알기 힘들겠지. 그 어떤 가면도 이 능력을 쓰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테니까.”

뭔가 즐겁다는 듯 웃던 수보리가 자신의 얼굴에 다시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우리 같은 존재를 일컬어 [가면] 이라고 하는 건 그저 비유가 아니라 는 소리지.”

츠츠츠츠

다시 한번 수보리의 얼굴이 혼돈으로 물들었다. 그러고는 수보리가 마치 심음(心音)처럼 들리는 괴이한 소리를 울렸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자 강력한 [힘]이 퍼져나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 이건, 주문이군!’

마법이나 주술 중에는 굳이 육성이나 성대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있었는데 이것도 그런 주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주문이 울려 퍼진 후 갑자기 수보리의 몸이 녹아내리듯이 서서히 분리되었고, 잠시 후에는 똑같이 생긴 수보리의 분신이 바로 옆에 하나 더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새로이 나타난 분신은 본체와 달리 얼굴이 혼돈으로 물들어있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왜 자기랑 똑같은 분신을 만든 거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수보리의 본체가 크게 대성(大聲)을 터뜨렸다.

*#$&@*% - !!

알 수 없는 외계언어인가 싶었지만 그게 언어가 아닌 신언(神言)이라는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말 그 자체에서 신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성이 터진 후 갑자기 수보리의 몸은 엄청난 속도로 축소되었고, 종래에는 새하얀 가면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

덥석

그리고 수보리가 사전에 만들어냈던 분신이 그 새하얀 가면을 받더니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서 썼다. 가면을 쓴 수보리가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가면으로 변화시켜서 누군가가 장착하게 만들 수 있다네.”

“…….”

세상에…… 가면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나는 생전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얼떨떨해서 말했다.

“…… 저, 정말 처음 보는군. 근데 지금 당신은 분신이요 본체요?”

분신이 본체를 가면으로 만들어서 썼으면 대체 뭐라고 봐야 하는 거지?

내가 질문하자 가면을 쓴 수보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본체일세. 내 자신을 나누었을 뿐 분신이 가면을 썼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지. 어차피 가면을 쓴 순간 나는 이 분신을 지배해서 내 자신의 몸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이미 분신과 합일해 버렸네.”

“흐음.”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문제를 내겠네.”

이어진 수보리의 말은 내가 고민을 하게끔 만들었다.

“내 자신의 분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의 가면을 쓰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소? 지는 자는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길 테니까.”

“그래. 정확히는 세 가지 양상이 일어나지.”

“세 가지 양상?”

“지배, 파괴, 공존.”

수보리는 세 손가락을 내밀며 하나 하나 꼽기 시작했다.

“지배라고 하는 건 말 그대로 의지력 싸움에서 이긴 쪽이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거야. 일시적으로 상대의 정신을 지배해서 그 능력을 잠시 쓸 수 있게 되지. 또 하나는 파괴인데 둘의 의지력이 백중세일 경우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야. 가면과 상대방 모두가 견디지 못하고 둘 다 파괴되 어서 재기불가능이 되지.”

“공존은 뭐요?”

“그건 무척 희귀한 현상인데 가면과 상대가 서로를 인정하여 자아를 각자 유지한 채 힘을 공유하는데 동의하는 현상일세. 이 경우 둘의 힘이 몇 제곱이나 증폭되어서 훨씬 강력해지게 되지.”

“호오!”

“허나 이건 없다고 봐도 좋을 거야. 우주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 수보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했다.

“허나 사실 [가면]들은 이 3가지 경우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아. 왜냐 하면 [가면]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 을 갖고 있고 자아가 강렬하기에 일부러 자신을 가면으로 만드는 능력을 굳이 쓰려 하지 않거든.”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자기를 가면으로 만들어서 동료를 강화시켜서 삶을 도모하지 않겠소?”

“설마? 죽으면 죽지 왜 그러겠나. [가면]이 갖고 있는 자아와 오만함 이라는 건 자네 생각보다 더욱 자존 광대하다네.”

“…….”

하긴 여태 [가면]이었던 놈들의 행적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우리가 살면서 신경 쓰는 건 바로 4번째 경우일세.”

“그게 무엇이오?”

“흡수(吸收)일세. 이게 가장 무섭기 때문에 가면들이 가면화를 시도 하지 않는 것이고 자네가 전생하면서 가면화를 본 적이 없는 걸세.”

“……?”

나는 수보리의 말을 듣자 의아해서 반문했다.

“무슨 소리요? 앞서 3가지 경우 중에서 ‘지배’라는 게 있었는데 그게 흡수와 같은 게 아니오?”

“다르네. 왜냐하면 지배 현상이 일 어나는 건 일시적이기 때문이야. [가면]은 결코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어떤 지배관계든 오래 유지 될 수 없고, 결국 가면이 폭발하든 가면을 지배하던 자가 폭발하든 둘 다 파멸이 찾아온다네. 하지만 흡수는 달라.”

“어떻게 다른 거요?”

“지배 현상과 달리 흡수 현상이 일 어나는 건 바로 [가면]이 [가면]을 쓸 경우뿐이라네.”

“……!!”

“오직 가면만이 다른 가면의 능력을 완전히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가면 이외의 존재는 가면을 흡수할 수 없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 신투지존!!’

나는 그의 설명을 듣자마자 내가 외우주에서 봤던 신투지존이 생각났다. 신투지존은 종막의 순간에 난데 없이 자아를 빼앗겨 버렸고 나는 뜬금없이 신투지존의 몸을 차지한 니알라토텝을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그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수보리의 말을 들으니까 이해가 갔다.

신투지존은 그 때 다른 [가면]인 니알라토텝에게 흡수당한 것이다!

내가 놀라워하고 있자 수보리가 말했다.

“표정을 보니 왠지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

“우리가 가면화를 했다가 실패해서 누군가에게 잠시 지배당하더라도 그건 큰 문제가 아냐. 왜냐하면 우리는 가면으로서 파괴되더라도 결국 거대한 [어둠]의 품으로 되돌아가서 언젠가 되살아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가면]으로서 [가면]에게 흡수당하게 되면 두 번 다 시 부활할 수 없게 되지.”

“…… 뭐라고? 흡수 이외의 경우에는 부활도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뜻밖의 정보에 놀라서 반문했다. 그러자 수보리는 왠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미소를 짓다가 말했다.

“궁금하지?”

“그렇소.”

“궁금하면 날 동료로 받아주게. 그러면 알고 있는 건 다 말해줄 수 있네.”

“아니 젠장할…….”

본론이 튀어나오자 나는 예상했음에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만큼 수보리가 내놓는 정보가 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보로 장사하는데 뭐하러 밑천을 다 까겠나? 후후.”

그것도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괜히 심술이 생겨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젠장. 나는 전생자요. 지금 당장 당신을 내치더라도 다음번에 똑같은 걸 또 시도해서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당신의 내면에 있는 정보를 다 끄집어낼 수 있소!”

“호오, 맞는 말일세. 확실히 [큰 굴레]를 이용해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대항할 방법은 없지.”

유들유들하게 말하던 수보리가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니 어쩔 수 없군. 그럼 비장의 정보를 내놓을 테니 단판승부로 나를 동료로 삼을지 말지를 정하는 건 어떤가?”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후후, 자네가 그렇게 약은 인간이라면 그렇겠지. 허나 그렇게까지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신역에 도달한 도신 대사가 자네를 정중하게 대할 리가 없지.”

“…….”

“왜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는 정도 (正道)를 걸으려 노력하는 전생자야.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답하려 한다는 거지. 나는 자네가 그런 인간이라는 데 판돈을 걸겠네.”

“지랄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지만 이내 마음이 복잡해짐을 느끼며 말했다.

“대체 내 동료가 되서 무슨 떡고물을 얻어먹으려고?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아무리 떡고물을 얻어먹어 봐야 당신은 [큰 굴레]가 한 번만 지나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오. 심지어 내 동료 중에는 기억전승에 염증을 느껴서 동료로 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자도 있을 정도요. 미친 듯이 어려운 전투를 영겁토록 할 수도 있는데 뭐가 좋다는 거지?”

그러자 수보리가 불쑥 말했다.

“자네가 이기면?”

“뭐?”

“승산이 극히 낮기야 하겠지만 자네가 결국 [큰 굴레]의 답을 찾아내서 모든 외신을 타도하거나 옥좌에 오르는 경우엔 어떻게 된다 생각하는가? 그 경우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될 것이고 자네의 전생동료들은 어마어마한 보상을 손에 넣게 될 걸세.”

“…….”

“어차피 이대로 살아가 봤자 남는 건 [계시]와 [종말] 뿐. 그렇다고 계시를 들으러 끼어들어 가기에도 일개 [가면]으로서는 아무런 자격도 없지. 그럴 바에야 전생자의 동료가 되어서 최후의 승리를 노려보겠다는 것뿐일세. 나름 절실한 심정으로 찾아왔다네.”

“허어…….”

나는 황당해서 입을 벌렸다. 이렇게까지 계산을 해서 자기가 먼저 동료가 되겠다고 찾아온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계산을 해 놓고 내 동료가 된 경우야 있었지만 수보리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동시에 나는 눈앞의 수보리가 그렇게까지 사악한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신투지존을 처음 봤을 때처럼 반정반사(半正半邪)에 걸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어디 얘기나 좀 들어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시오. 괜찮은 정보라면 당신을 동료로 받아주겠소.”

“그럼 두 가지를 일단 말해주지.”

수보리는 탁자 쪽으로 걸어가서 의자 위에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셔서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첫 번째, 가면은 부활할 수 있네. 뭐라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가면]들이 파괴되면 회귀(回歸)를 하는 장소가 있어. 그리고 그 장소에서 긴 시간 동안 어둠의 힘을 받아 회복하다가 나오고 싶을 때 나오게 되지. 물론 그 부활의지가 우리 자신의 의지인지, 위대한 어둠의 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신(神)과 같군. [가면]들은 불멸자라는 말이구려.”

“그렇네. [옛 지배자]처럼 [가면]도 완전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어. 다만 신과 달리 우리는 되살아날 때 이전의 [이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쓸 수가 없게 되지.”

“이름?”

“[가면]이 약속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걸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나?”

나는 과거 태허천존과 홍균도인의 예시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허천존도 자기 이름을 못 걸었고 흥균도인 또한 그랬지. 홍균도인이 그 사실을 확실히 말해줬소.”

홍균도인의 이름을 들은 수보리가 흠칫 놀랐다.

“홍균도인한테 그런 얘기까지 들었나? 그 강력한 [가면]한테? 허…… 도대체 몇 번 전생한 거지?”

“30번이오.”

수보리는 완전히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 뭐라고? 고작 30번만에…….”

“고작이라니. 30번 죽는 동안 얼마 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알기나 하시오?”

“말도 안 되는 일이군. 보통 인간은 30번 죽는 동안 인간계에서 무림지존 놀이나 할 텐데 설마 세계의 비밀을 거기까지…….”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중얼거리던 수보리가 문득 눈에서 빛을 내며 말했다.

“그래. 아무튼 그렇지. [가면]은 원래 이름을 걸지 못해. 하지만 나는 방금 전에 이름을 걸지 않았나?”

“……?!”

어 그렇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는 말했다.

“같은 [가면]인 태허천존도 홍균도인도 못 하는 일인데 왜 당신은 할 수 있소?”

“…….”

“일단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름]을 걸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 부정하고 사악한 존재라서?”

“후후. 웬만한 가면보다 수천 배는 사악한 [옛 지배자]들도 잘만 이름을 거는데 왜 굳이.”

“사악하고 아니고는 [이름]을 거는 데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이름]의 소유권일세.”

“소유권?”

내가 반문하자 수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신처럼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대신 그 모든 이름의 소유권이 [어둠]에 맡겨져 있네. 부활할 때 기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쓸 수 없 는 이유는 한 번 빌려 갔던 이름을 [어둠]에 되돌려주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름을 잊어버리고 못 쓴다는 건, 기존의 기억이 남아는 있지만, 예전에 쌓았던 힘과 수련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야. 진정한 신과 달리 한없이 불완전한 불멸이라고 할 수 있지.”

“……!!”

“태허천존도 홍균도인도 마찬가지야. 그들의 이름은 모든 가면이 모이는 근원의 [어둠]에 저당 잡혀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없는 걸세. 따지고 보면 가면을 탄생하게 한 근원의 어둠이 우리에게 생(生)을 부여하는 대신에 일시적으로 빌려준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맞네.”

“음…… 남한테 빌린 거라서 함부로 내세울 수가 없다 그 말이구려.”

“맞네.”

나는 수보리의 말을 이해하려고 한참을 고민하다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름을 걸 수 있는 건…….”

스윽

수보리는 합장을 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깨달음을 얻어서 불법(佛法)에 귀의하였고 내 이름의 소유권을 [어둠]에서 부처에게 옮기는 데 성공했네. 그렇기에 나는 다른 가면들과 달리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할 수 있는 것일세.”

“……?!”

“불법의 가면이 얻는 특권이라고 할까.”

그런 게 되는 건가?!

나는 그 순간 앗 하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자, 잠깐. 그렇다면 정말로 부처라는 존재가 있단 말이오?!”

진짜?!

그런 [신]이 있는 거야?!

그러자 수보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 금강경을 읽지 않았나? 내가 석가세존과 대화를 했던 내용을 담아놓았지.”

“…….”

“그럼 다시 묻지. 자네는 부처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는가?”

“어…… 솔직히 그런 신이 있는데 내가 여태 왜 보지 못했을까 의심스럽게 생각했소! 외신도 보고 [옛 지배자]도 별의별 놈을 다 보았는데 세상의 종말을 수십 번이나 보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무척 불경하군. 하지만 전생자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겠지.”

“끄응.”

불경하다는 말에 내가 괜히 찔려서 움찔하자 이윽고 수보리가 껄껄 웃 었다.

“후후후하하하…… 너무 쉽게 놀려 먹을 수 있군. 하하하하.”

“…… 뭐요?”

“하하…… 자네 생각대로 부처는 [신]이 아니야. 그러나 웬만한 신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일세. 모든 불교(佛敎)의 교인들이 평생에 걸쳐 [굴레]의 초월을 추구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는가.”

“신이 아니면 무엇이오?”

“자네도 깨달은 법리(法理). 공(空)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순환…….”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또 다른 세계의 비밀에 접어들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 원리 자체가 외신(外神)보다 더한 힘을 갖게 되는 것…… [큰 굴레]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굴레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법리를 일컬어 석가세존이자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수보리의 말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어…… 그러니까 부처는 신이 아니라 법칙 같은 거다 그 말이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겠군. 그렇게까지 단순하진 않네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 뭔가 이해가 안 가는군.”

“뭐가 이해가 안 가는가?”

“당신이 불법의 가면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불교를 연구하는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오? 그렇게 딱 맞춰서 자기 재능을 알 수 있는 건가?”

“운명이 이끄는 것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알게 된 거라네.”

수보리는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말했다.

“나는 [가면]으로 자아를 인지하기 전에는 평범한 천재였네. 뭘 해도 잘했는데 그 와중에 불도(佛道)의 길이 마음에 들어서 승려가 되었는데, 고승(高僧)의 반열에 이르고 나서야 본질을 각성하며 깨달았지. 이건 내 자유의지가 아니었다고.”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가면]을 탄생하게 한 [어둠]이라는 게 당신에게 불법을 연구하는 길로 가게끔 유도했다는 말이오?”

“정확하네. 내가 자유의지로 승려가 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예비 되어 있었던 걸세. 사실은 그것이야 말로 [가면]들이 절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네…….”

수보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면은 제각기 특화된 재능 하나씩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만 정작 그 재능을 개화하고 가면의 자아를 각성할 때는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느끼네. 처음부터 우리는 그 재능 하나를 갈고닦기 위해 태어난 것 이고 마치 누군가의 꼭두각시와 같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야.”

“…….”

“인생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면 멀쩡했던 [가면]들도 선악의 경계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가면다운 존재로 변해 버리지. 한없이 음험하고 음모를 사랑하는 그 존재처럼 말이야…….”

뭔가 섬뜩한 얘기다.

내가 수보리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수보리가 말했다.

“아무튼 공(空)을 깨달아 [이름]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나니 그제서야 가면이 갖고 있던 어둠을 떨칠 수가 있더군. [이름]도 자유자재로 걸 수 있게 되었고, 내 술법 또한 크게 향상되었어. 그리고 [가면]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도 깨달을 수가 있었네.”

“차이점? 가면의 정신과 육체는 사실 원래 그 종족과 다를 게 없다고 알고 있소만.”

“그렇네. 아무것도 다를 게 없지. [옛 지배자]조차도 [가면]을 판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같은 [가면]끼리도 서로를 알아보는 게 힘드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지.”

“그게 뭐요?”

“인간성(人間性)일세.”

“?”

인간성?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오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의아해서 말했다.

“인간성이 왜? 나는 여러 가면들을 보아왔지만, 그들도 보통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느끼고 마음과 정신이 있었소. 그들이 인간성이 없다는 건 좀 이상한 소리군.”

“후후, 자네가 말한 게 바로 다른 존재들이 [가면]에 대해서 하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야.”

“뭐요?”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가면]이 발휘하는 인간성은 그게 아무리 절실하든 간에 모두 연기(演技)일세.”

“여, 연기?”

“그래. [가면]이 느끼는 인간성은 다른 이들이 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네. 감정, 표현, 희로애락애오욕…… 그 모든 걸 사실 아무것도 공감하지 못해. 그러나 공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보다 더 확실하게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게 가능하지. 왜냐하면 [가면]에게는 그걸 연기할 능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야.”

“…….”

“인간 세상에도 비슷하게 연기를 하는 선천적 공감부재자가 있는 모양이지만 [가면]과 다른 점은 그 연기력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세. [가면]의 연기는 자기 스스로마저 속일 수가 있기 때문이네. 인간의 수준에서는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야. 나조차도 부처에게 이름을 맡기고 나서야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으니까.”

“!!”

“근본적으로 [가면]은 마음이 없는 존재일세.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야.”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놀라워졌다. [가면]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한 정보를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윽고 뭔가 이상하다 는 걸 깨달았다.

“음, 잠깐…… 그건 좀…… 이상하구려!”

“어떤 점이 이상한가?”

“신투지존!! 천하제일의 도둑인 신투지존 또한 가면이었소. 그러나 그는 신역절기를 얻어 무신백좌의 일원이 되었는데, 신역절기란 결국 ‘마음’의 경지를 최고로 갈고닦아야 도달할 수 있는 것! 당신의 말대로라면 마음이 없는 존재가 신역절기를 얻은 셈인데 말이 안 되지 않소?”

“흐흐. 그게 바로 재밌는 점이지.”

수보리가 힐쭉 웃더니 말했다.

“[가면]은 본디 마음이 없으나 재능을 키워 성장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어. 보다시피 나도 그런 경우이지 않은가? 신투지존은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가 아닐까 싶군. 하지만 이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뭐가 말이 안 된단 말이오?”

“[가면]이란 결국 어둠이 세상에 흩뿌린 마음 없는 도구일 뿐이야. 마음을 거세한 채 마음을 연기하는 그런 존재에게는 마음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게 맞지 않은가? 심지어 [이름]마저 누군가에게 뺏겨서 예속 당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소.”

“이걸 보게.”

뽁!

갑자기 수보리가 내 쪽으로 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몇가닥 뽑았다. 그는 머리카락을 손바닥 위에 올려 내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 머리카락에 마음이 있나?”

“…….”

“보통은 없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에게 마음이 생겼다는 건 머리카락에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니…….”

이어진 수보리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길가의 돌멩이, 스쳐 가는 바람, 혹은 시간 그 자체에 마음이 생겼다는 것과 진배없네. 무생물에게 자연적으로 마음이 부여된 것과 같아.”

“?!”

“그러나 공(空)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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