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481-1485화 (1,386/1,615)

나는 문득 떠오른 어이없는 상상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혜가(慧可)가 삼재심법의 창안자란 말인가?”

그,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아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정말 생각도 못 해본 일인데?

‘아, 아냐. 혜가 이전에도 삼재심법을 누군가 만들었을 수도 있지. 이렇게 단순한 심법을 혜가 이전에 아무도 못 만드는 게 말이 되겠어?’

나는 그 어이없는 상상에 고개를 팍 저으면서 계속 역근세수경을 읽었다.

“흠. 그러고 보니 주허(柱虛)에 원영(元靈)이 미치어 발념(發念)을 거 듭한다는 건 뭔 소리야…….”

원영이라는 단어는 무척 익숙하다. 원영신뿐만 아니라 사실 도가의 모든 내공이론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허나 발념은 처음 보는 표현이었고 해석조차 나와 있지 않아서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청양(靑陽)과 홍양(紅陽)이 거푸 개전하야 무생지의(無生之義)가 도야한다…… 음…… 파란 태양과 붉은 태양이 교차하기를 반복한다는 말인가? 거 참 초현실적인 광경이구만.”

나는 이 알 수 없는 문구들을 수십 번씩 읽으면서 이 뜻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읽기만 했고 급기야는 정독을 300번이나 하게 되었다. 2만여 자를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는 정독이었기에 이만큼 오는데 만도 적어도 일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탈력하고 말았다.

“제기랄. 대체 무슨 개소리야? 이건 진짜 몇 번을 봐도 개소리잖아!!”

결국 수련하다가 라면 끓여먹고 바지 말리면서 자다가 푸념 좀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 얘기 아냐?!

이게 무슨 영양가 있는 비급이라고!!

“…… 진정하자. 좀 더 잘 생각해 보자구…….”

나는 과거 역근세수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해줬던 기억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수백 년 전 어떤 강력한 마두(魔頭)가 역근세수경을 도적질하여 훔쳐갔소…… 그 마두의 역량은 절대 지경의 고수로 추측되어서 누구도 막지 못했소. 수치스러운 일이라 소림사 내에서 함구했을 뿐…… 그 역근세수경을 익힌 자는 산을 머리에 이고 옮길 수 있는 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소.]

신승의 이야기.

[역근세수경(易筋洗隨經)에 따르면, 그 신역이란 경지는 무신(武神)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들었소.]

[그건 사실 무공이라기보다는 대담집(對談集)에 가깝소. 무공의 전수는 금강대정신공으로 끝나며 역근세수경은 편하게 읽는 책의 형태요. 그리고 내가 알기로 역근세수경에는 신역의 절기에 대하여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소.]

2대 주지 도신의 이야기.

[네 녀석 왜 역근세수경은 찾다가 그만뒀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단서는 줬다. 나머지는 알아서 찾아봐라. 꼭 찾아.]

그리고 초무린의 이야기…….

“…….”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곱씹어보다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도신은 이걸 왜 대담집이라고 했던 거지? 화자(話者)는 혼자뿐인데.”

아무리 봐도 이건 대담집이 아니다. 미친 수련자 한 명이 절벽 폭포에서 혼자 쌩쑈를 하면서 넋두리나 하는 1인칭 시점에 불과하다. 이 역근세수경에서 상대라고 할 수 있는 누군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역절기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니 대체 어디에?!”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게 있을리가 없다.

도신의 이야기가 가장 모순되는 걸 깨달은 후 나는 초무린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이라는 건…….”

나는 뚫어져라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이게 가짜이면서 진짜라는 거겠지.”

그것밖에 없다.

미래에 인터넷 세계에 392만 개나 되는 텍스트파일이 있어서 죄다 가짜이거나 가짜 중에 1개만 진짜일거 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이것들 전부가 진짜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사신지혼의 수련 도중에 폭포의 환영을 봤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수백 년 전 소림사에서 역근세수경을 훔쳐간 절대지경의 마두가 이걸 필사해서 갖고 있었고…… 그게 어떤 경위로 500년 후 미래에는 필사되어 전 세계의 인터넷에 뿌려지게 된 건가. 그래서 전부 진짜라는 거겠지.’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틀림없어. 이 역근세수경은 진짜가 맞지만…….”

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책을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 있는 깨달음을 얻어 해석하지 못하면 도신이 말한 것처럼 신역절기나 진짜 내용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거야.”

세상에 이런 비급이 있을 수가 있다니!

혜가는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얻었길래 이런 걸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던 중 뭔가를 알아차렸다.

“…… 여기서는 안 돼. 청룡무관에 앉아서 이걸 백날 들여다봐야 할 수 있는 게 없겠군.”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백련교로 가야겠다.”

파앗!!

나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서 백련교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리고 본거지에서도 굉장히 깊은 곳에 있는 수신류의 요새로 들어가게 되었다.

슈웅

요새 안쪽에서도 익숙한 통로를 지나치자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쌓여 있는 장서고가 눈에 보였다. 나는 장서고에 발을 들이자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이렇게 책이 많다니…… 수백만 권은 되겠구나.”

나는 눈을 번득였다.

“여기라면 어쩌면 역근세수경을 해석할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

역근세수경을 생으로 연구하기에는 내 지식수준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지식수준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책이 필요한 것!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 책이 가장 많은 장소는 바로 수신류의 장서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황궁의 장서각에 갈 수도 있었지만, 거기에 있는 책보다는 여기의 책이 좀 더 처음 보는 게 많았다.

털썩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 한 권 한 권을 읽어보면서 역근세수경의 내용과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역근세수경의 2만 자 속에는 난생처음 보는 단어 같은 게 많았는데 이 수신류 장서각의 책에 유사한 단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은근히 무공서적도 많이 있군.’

수신류가 수천 년 동안 다른 유파를 박살내고 획득한 전리품 같은 걸까? 사대무류랑 별 상관없는 정파나 사파는 물론이요 마교나 혈교의 무공비급서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도 하나하나 꼼꼼히 읽으면서 역근세수경의 단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몇 년의 시간은 족히 흘렀고 나는 이 수 많은 장서각의 책 중에서 일 푼 정 도는 읽은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양이 많아서 탈력한 채 그 자리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 이런 미친…… 이렇게 책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이거 허송세월하는 거 아닌가?

허송세월도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차라리 이럴 시간에 사신지혼 수련이나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는 회의감에 빠져서 멍하니 있었는데 그때 내 손 주위에 한 권의 책이 잡히는 게 보였다.

“…… 백련교리서?”

백련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인가.

나는 무심하게 그 책을 집어들고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제는 속독능력도 굉장히 발달해 있었고 나는 한 식경 만에 교리서를 독파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 읽고는 아무 생각없이 책을 멀리로 던지려 하는 그때였다.

흠칫

“자, 잠깐?”

촤라락

나는 다시 한번 백련교리서를 펼쳐서 읽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전율이 일었다.

“처, 청양과 홍양…… 이라는 건…… 설마…… 삼제(三際)를 말하 는 거였나?!”

삼제!

그것은 바로 청양, 홍양, 백양의 삼양(三陽)이며 초제와 중제, 후제라 하였다. 백련교의 전통 제사의식에서는 초제와 중제 후제에 맞는 기일에 각각 제사를 지냈고 각 유파의 후계자들은 그 제사에 참여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던 명나라 시기에는 그 삼제의 의식이 많이 의미가 줄어들어서 그냥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쉬는 날 정도로 만신도들에게 기억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대무류의 연계가 깨져서 더 이상 삼제를 행할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틀림없다. 세상의 초기상태를 의미하는 청양, 그리고 현세를 의미하는 홍양!

청양과 홍양이라는 단어는 틀림없이 백련교 삼제에서 칭하는 삼기(三期)에 속하는 것이다!

“…….”

청양과 홍양이 교차하는 시기에 무생지의가 도래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바로 그때…….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인가.”

무생지의란 단어가 긴가민가했지만, 틀림없이 무생노모와 그 의지를 뜻하는 게 틀림없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나는 그 내밀한 뜻이 쉽사리 해석이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두 달 내내 연구하던 끝에 마침내 그 뜻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설마…… 이건…….’

지금 내 상황…….

[큰 굴레]를 돌려 과거로 온 상황 을 말하는 것인가?

나는 이게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양과 홍양이라는 표현이 삼제와 직결되어 있어서 결코 무시할 수도 없었다.

‘만일 이게 맞다면 혜가는 내가 과거로 오게 되리라는 것도 예측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게 가능한가?

신조차도 내가 큰 굴레를 돌려 과거로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건데.

“…….”

모르겠다. 내가 너무 생각이 과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무생지의라는 건 무생노모가 도래한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무생노모…… 위대한 [아버지]가 강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뜻인가.”

그러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이상한건 마찬가지다. 설마 [아버지]라는 존재가 [큰 굴레]의 혼란을 참지 못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강림한다는 것인가?

‘절대 아니지…….’

여태껏 전생하면서 모은 정보에 따르면 그 존재는 그렇게 성실하게 활동할 리가 없다. 아니,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신기루에 가깝다. 존재한다고는 알고 있으나 사실 30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나 조차도 그 존재의 면상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나 전생하면서 난장판을 만들었어도 본 적조차 없는 존재가 기껏 굴레가 뒤틀렸다 해서 그 귀한 면상을 들이밀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왠지 내 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설령 [아버지]가 강림한다 하더라도 그건 [큰 굴레]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라는 걸.

“…… 뭐지. 이렇게까지 선명한 감은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이 역근세수경을 공부하다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든다. 그건 읽고 또 읽다 보니 왠지 이 책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생각했다.

‘이 책이 예언서든 아니든 상관없어. 예언이나 들으려고 역근세수경을 편 건 아니니까. 단지 이 역근세수경을 이용해서 어떻게 마음을 수련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그렇다. 중요한 것은 마음수련!

[마음]을 수련하는 게 신역절기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직접적인 마음수련을 언급하는 이 역근세수경을 보게 된 것인데 수백 번은 읽었는데도 이걸로 무슨 수행을 하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끄으으응…….”

스승조차 없는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이나 앉아서 고민했다.

그러고는 무척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어디 한 번 책의 화자랑 똑같이 행동해 볼까!”

파밧

나는 역근세수경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폭포가 내리는 절벽을 찾았다. 그리고 약 삼백 리 떨어진 곳에서 물의 기운을 느껴 그런 장소를 발견한 후 폭포절벽의 정상에 올라가서 섰다.

쿠르르르

“여기서 한 번 떨어지면 된다 그거지.”

투웅!

나는 곧장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수면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어 씨발…… 얕잖아.’

콰과광

예상도 못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땅에 처박혔다. 왜냐하면 폭포수가 크게 떨어지는데도 밑에 고이는 물의 양이 적어서 굉장히 물이 얕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대로 땅에 처박힌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다행히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약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보통 무림인이라면 다 죽었겠군…….”

폭포에서 떨어졌는데도 뭔가 딱히 느껴지는 게 없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시 한번 폭포 위로 올라갔고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콰과과광

콰과광

그렇게 한 100번 정도 떨어졌을 때였다. 나는 아무리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다지만 슬슬 몸에 따가운 고통이 축적됨을 느끼고는 근처 바위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후우…… 이딴 걸로 뭐가 깨달아 질 리가 없지.”

그러면 폭포에서 떨어지는 행위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단 말인가? 역근세수경으로 마음을 수련하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 어, 그러고 보니. 폭포에서 떨어지는 게 전부가 아니었잖아.”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중얼거렸다. 내 머릿속에 역근세수경의 한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폭포수 아래 터를 잡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력을 수행하고 조사(祖事)의 염(念)을 깊이 수양하였나니, 하루는 깨달음을 얻어 폭포 속에서 잉어를 잡으려 뛰어 들었다가 낚싯줄이 발에 걸려 숨이 막히는 날이 있었다. 그리하여 폭(暴)이란 중주(重注)라, 삼염(三念)을 모아 상하단전에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였고…….]

…….

“잉어? 폭포에 잉어가 있었단 말이지.”

이 폭포는 너무 높고 험준해서 잉어 같은 게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폭포에 잉어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며 혼잣말을 했다.

“상식적으로 폭포에 어떻게 잉어가 있냐? 말도 안 돼. 아무리 잉어가 대충 아무 호수나 하천에서도 산다지만 폭포 속에 잉어가 있다는 건…….”

큰 폭포의 물줄기는 장난이 아니다. 내가 천하제일의 내공으로 호신강기를 펼쳐도 물의 압력 때문에 약간 움찔할 정도로 가공할 압력이 있었다. 고작해야 생선 따위가 그 물줄기를 이겨내고 폭포의 중턱에 존재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폭포수 밑의 연못이라 하기에는 폭포 속이라는 언급이 있었기에 이상했다.

하지만 왠지 저 ‘잉어’에 단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중얼거렸다.

“다시 수신류 서고로 가봐야겠다.”

타닷

나는 수신류 서고로 복귀해서는 바로 온갖 책을 뒤지면서 ‘잉어’에 관해 언급한 서적을 찾기 시작했다. 책이 무척 많아서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기에 나는 조급해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기 시작했다.

…….

그렇게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적어도 일천 권 이상 대충 읽으면서 뒤지던 중 나는 희한한 무공 비급서를 발견했다. 서고에서도 구석탱이에 있어서 여태껏 사람이 아무도 안 보는 장소에서 발견한 무공비급이었다.

잉어신공(魚里魚神功)

“…….”

이, 이건 뭐지? 세상에 이런 무공도 있단 말인가?

나는 약간 속으로 뜨악하며 안의 내용을 살폈다. 첫 장에서부터 저자의 소개가 있었다.

[나는 잉어신선(魚里魚神仙)동비락 (凍陣格)이라고 한다. 철권성존(鐵 奉聖尊) 무악과 함께 철혈성(鐵血城)을 일궈내고 나서 내 진신무공을 남길 필요를 느껴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잉어신선이라고?! 거 참 별호가 굉장하구만…….

‘철권성존 무악?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나는 신기해서 잉어신선 동비락의 무공을 꼼꼼하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잉어신공 중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잉어신공이 10성에 이르게 되면 등용문(登龍門)을 오를 수가 있으니, 나는 이 비법을 이용해 종종 곤륜산으로 가서 기화요초(奇花妖草)를 몰래 뜯어올 수 있었다. 철권성 존무악 그놈도 내가 준 기화요초의 영단이 아니었다면 내공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악 그놈은 잉어신공을 철혈성의 기본무공으로 하자는 내 제안에 학을 떼고 반대를 했으니 나는 속이 상하여 은퇴를 하게 된 것이다.]

“…….”

[연자여, 그대가 잉어를 사랑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잉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잉어신공을 12성까지 익혀서 나처럼 신선이 될 수도 있으리라.]

“결국 신선이 된 거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비락의 글에서 진짜 놀란 건 사실 그런 게 아니었다.

“등용문…… 곤륜산…… 그, 그래!! 그게 있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쳤다.

“천계!! 천계의 등용문!! 그거잖아!”

등용문!

그것은 지상에 있는 술법사나 도인들이 열심히 술수를 연마하여 천계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일종의 시험 이었다. 천계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는 그 등용문의 시험은 수십 수백 년마다 한 번씩 열리게 되어 있었으며, 그 시험에 통과한 자는 지선(地仙)이 되어 천계의 말단신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등용문이 도인들의 환상이라고 치부했으나 나는 그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망량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알려지기로 등용문은 ‘잉어’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서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사실은 그 잉어라는 건 천선이 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속세의 도인들을 은유하는 표현이었지만 속가에서도 등용문을 관용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폭포 속의 잉어라는 건 바로 천계의 등용문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럼 잉어를 잡으러 뛰어들었다가 낚싯줄에 발이 걸려 숨이 막히는 일이 있었다는 건?’

그러고 보니 천계의 등용문에도 천계의 감시인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망량의 말로 그 감시가 별로 철두철미하지는 않지만 신장(神將)과 지선들이 가끔씩 순찰 하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잉어신선 동비락은 그 순찰을 피해서 몰래 왔다갔다한 것일 테지만, 만일에 그 순찰에 걸렸다면…….

‘그렇구나. 역근세수경의 화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천계의 등용문을 올랐는데 거기에서 천계의 저항이나 순찰자와 마주쳐 버린 것이다. 전투를 하든 도주를 하든 별로 끝마무리가 좋지 않았겠지.’

근데 역근세수경의 화자는 왜 등용문을 오른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 이 책 안에 설명이 되어 있는 걸까?

‘폭(暴)이란 중주(重注)…… 이 말에도 뭔가 의미가 있다.’

폭발이란 무겁게(重) 붓는 것(注)…….

무엇을 어디에 붓길래 무겁게 붓는 다는 것일까?

나는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다가 문득 바로 뒷 구절에 생각이 미쳤다.

‘그 바로 다음 구절에서 삼염(三念)을 모아 상하단전에 올리고 내리길 반복하였다고 되어 있어. 즉 삼재심법이지. 그러면 설마 삼재심법의 운용법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삼재심법에 붓는다는 표현을 쓸 만한 운용이 있는 건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의 염상이 생각났다.

‘삼재심법은 천(天)의 백회혈(百會穴). 지(地)의 중완혈(中脫穴). 인(人)의 하단전(下丹田)으로 이어지는 3개의 혈도만을 운용한다. 일직선으로 딱 이어지게 되어 있지.’

그렇다면 천지인의 순서로 위에서 아래로 때려박듯이 강력한 기운을 하단전으로 밀어낸다면 ‘무겁게 붓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끄응.”

그러나 수련법은 생각났는데도 나는 섣불리 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굉장히 쉽고 단순하지만 이건 죽기 딱 좋은 기 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백회혈도 인체의 가장 취약한 급소이고 명치도 급소이고 하단전도 급소인데, 급소에서 급소로 급격히 강대한 기운을 쭉 내려 버리면 육체가 박살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딴식으로 내공을 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잠시 후 각오를 세우고는 기합을 내질렀다.

“간다!!”

쿠르르르

전신의 기운이 백회혈에 한 차례 맺히자 마치 머리가 터질것처럼 살짝 부풀었다. 너무 기가 막대해서 육체가 잘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기운을 단숨에 들이붓듯이 명치를 통해 하단전으로 가속시키며 내려보냈다.

쿠콰콰쾅

“아아아악.”

씨발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그 결과는 내장이 터지고 내 척추가 끊어지면서 죽는 것이었다. 나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잠시 후 숨이 끊어졌다.

* * *

‘백웅.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전뇌자의 어이없다는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단서라도 주던가.”

“전부터 말했잖아. 내가 수련공간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깊게 관여하고 있어서 더 이상 간섭하면 내가 위험해져.”

그렇게 대꾸한 전뇌자가 한숨을 쉬 었다.

“그래도 사소한 단서를 주자면…… 그 책 전체를 꼼꼼하게 훑어봐.”

* * *

번쩍

나는 눈을 떴다. 피웅덩이 속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꼼꼼하게 훑어보라니 무슨 소리야. 역근세수경만 몇천 번을 봤는데!”

더 이상 꼼꼼하게 볼 건덕지가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훑어본다는 행위와 꼼꼼하게 라는 수사가 서로 모순 아닌가?

하지만 별 수 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꼼꼼하게 읽으랬으니 다시 읽어볼까.”

그리고 나는 바로 역근세수경을 들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고, 그제서야 내 마음속에 밟히던 부분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이 부분이군.”

불경을 외우는 부분.

이 후렴구는 무슨 수를 써도 해석이 되지 않았기에 의문으로 남겼었고, 기껏해야 알 수 있는 건 이 불경 부분이 이두(吏讀)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두. 그것은 고려에서 한자의 음을 빌려서 표기한 체계.

또한 그 불경의 내용은 금강경(金剛經)을 약간 변형시켜서 이두로 표현한 것이었는데 금강경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불경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고 이게 왜 역근세수경에 들어가 있는지 늘 의아해하고 있었다.

‘전뇌자는 틀림없이 이 부분을 파고들라고 넌지시 단서를 준 거겠지.’

새로운 연구주제가 생긴 건 좋다. 나는 금강경이 왜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금강경은 분명 달마가 태어나기 전에 천축에서 만들어진 경전이다. 그래서 달마의 제자인 혜가가 금강경을 역근세수경 내에 수록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위화감이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역근세수경의 화자(話者)가 불제자라서 금강경을 넣은 걸까? 아닌 것 같은데…… 금강경…… 금강경이 중요한 것인가?’

나는 금강경이 어떤 내용인지를 되살려서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워낙 예전에 본 내용인 데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수신류 서고에서 불경이 모여 있는 곳을 뒤적거려서 금강경을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금강…… 금강…… 찾았다!”

금강마공(金鋼魔功)

“…….”

아니 수신류는 진짜 무슨 무공비급을 이렇게 많이 모아둔 거야? 잉어신공도 그렇고 별의별 곳에서 일반책과 함께 무공서적이 뒤섞여 나오는 게 신비할 지경이었다. 나는 금강마공의 책에 마른 피가 말라붙어 있는 걸 보고 이 책도 꽤나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련교주는 이 수신류의 책을 모두 20세 전에 독파했다고 했지. 그 정도의 책벌레이니 무공의 전문가일 수밖에 없었던 건가…….’

그렇게 한참을 삽질하던 중 나는 마침내 금강경의 원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금강경을 앉아서 탐독 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 수보리(煩善提)?”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금강경의 내용은 부처와 수보리라는 자가 서로 문답과 설파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금강경을 최초로 보았을 때가 망량 밑에서 글공부를 할 때였기에 그 당시에는 이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전생을 거치면서 이 수보리라는 이름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해동제일(海東第一) 수보리(須菩提).

나는 그 명성어린 이름을 되뇌이며 중얼거렸다.

“제천대성(齊天大聖)에게 술수를 가르친 스승.”

그 존재는 바로 제천대성의 술법스승!

나는 제천대성과 술을 마시면서 수보리에 대해 많이 듣곤 했었다.

[뭐? 내가 삼십육변신술 같은 굉장한 술수를 어디서 익혔냐고? 크크크…… 궁금하냐?]

[해동제일 수보리한테 배웠어.]

[스승인데 왜 경칭을 안 쓰냐고? 나참, 수보리가 자비가 넘쳐서 나같은 돌원숭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줄 아냐? 처음 마주쳤을 때 화과산 요괴무리를 토벌하겠다고 다짜고짜 술법으로 다 태워 버리려 하길래 목숨걸고 사흘밤낮을 싸웠다고. 그러다가 내 재능이 아깝다고 굳이 술법을 가르쳐주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심심해서 배워줬지.]

[수보리는 지금 뭐하냐고? 나한테 술법을 다 가르치고 나서는 원래 차원계로 되돌아갔다.]

[수보리가 인간 아니었냐고? 당연히 아니지. 그놈은 신선도 아냐. 천계에는 속하지 않는데 따로 움직이는 초월적 존재 같은 거다. 그 정체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신선인 척 하기를 좋아하더라고…… 아마 진짜 힘을 내면 옥황상제로 수보리를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걸.]

“…….”

그래, 맞다…… 수보리는 그랬었지.

금강경이 석가세존과 수보리의 면담이며 설화라는 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뭐, 뭐야

수보리는 사람들이 전설이나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존했던 존재다.

그렇다면…….

수보리가 대화한 금강경 내의 ‘석가세존’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럼 석가모니 또한 신적인 존재인가?

‘음…… 그만큼이나 숭앙을 받는 존재가 신이 아니면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뭔가 이상해.’

나는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생자 달마와 그 제자인 혜가까지도 석가모니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달마의 목적은 진공가향을 일으켜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인데 석가모니 또한 신적인 존재라면 그런 존재를 숭앙한다는 게 가능한 것인가? 그럼에도 달마와 혜가는 평생동안 불법(佛法)을 전파하는 데 힘을 썼으며 석가세존 그 자체에는 별다른 비판이나 의구심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신이지만 신이 아닌 존재로 대했다는 뜻인가?

정말 부처라는 건 어떤 존재인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 부처가 어쨌든 간에 이 역근세수경에 금강경이 수록되어있는 건 사실이지. 왜 넣은 것일까?”

사실 이유를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해공제일 수보리와 부처에 대한 고민까지 연결되었지만 역근세수경에 금강경이 내포된 이유는 하나도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쳇.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일단 여러 번 읽어보자.’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이번에는 백 번은 더 읽는다는 생각으로 독파 해볼까!

나는 서고에 앉아서 금강경을 읽고 또 읽었다. 금강경은 역시 석가세존과 해공제일 수보리의 문답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그 문답이 읽는 자에게 철학적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었다. 나는 불법(佛法)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계속 읽다 보니 현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

나는 읽다가 기묘한 부분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걸 알 수 있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

석가는 삼천대천세계를 부수게 되면 작은 먼지가 되는데 그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를 수보리에게 물었고, 수보리는 그 숫자는 많으나 실존하지 않는다고 묘한 답변을 했다.

‘세계는 하나의 굴레로 칭할 수 있으나 그 굴레 자체가 세계는 아니라는 이야기…… 인가? 그런데 이건 왠지…… 왠지…….’

진공가향(眞空家鄕).

모든 것이 어둠에 휩싸여 무(無)로 되돌아가는 그 순간을 외우주에서 관찰했던 그때가 왜 생각나는 것일까?

설마 이건 깨달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형용한 게 아닌가?

두근…….

어두운 심장의 고동이 맥박친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깨달음이 내 내면에서 퍼져나가는 걸 느꼈는데, 이건 무공의 깨달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불경을 대하는 태도였으며 난데없이 이 세계의 진실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선 듯한 선각자(先覺者)로서의 실감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머리에서 큰 울림이 퍼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이성이 사라지면서 알 수 없는 기억의 공간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 았다.

‘이, 이건?’

가끔씩 느꼈던 누군가의 기억을 보는 건가?!

* * *

이건 환영인가?

[이젠 조금 지겹군.]

누군가가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두운 석재건축물의 내부에서 옥좌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형형한 안광을 흘리며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고, 석재건축물의 바깥에는 뇌우(雷雨)가 내리고 있었다.

츠츠츠츠

그의 손 위에는 다섯 개의 구(球)가 떠올라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구는 각자 다른 색깔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반투명했으며 그 안에 무언가가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중 황색(黃色)의 구체에 손을 뻗은 그자는 갑자기 구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칭!!

마치 유리구슬이 부서지듯 구체가 박살 난다. 그와 동시에 그 황색 구에 갇혀 있던 무언가의 영(靈)이 해방되어 버린 듯 피어올라서 뇌우 사이로 스며들듯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자는 물끄러미 영체가 사라지는 걸 보더니 이윽고 나머지 네 개의 구슬도 모조리 깨뜨려 버렸다.

콰칭!! 콰칭!! 콰칭!! 콰칭!!

스아아

모든 구슬이 깨지고 영이 풀려나가 옥좌에 앉은 자는 마치 예술작품이 라도 감상하듯 그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취미군. 삼황오제와 전륜성왕을 모두 봉인하고 나서 또 풀어준다는 말인가?”

나는 그 목소리가 무척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석재건축물의 입구에서 저벅 하고 걸어들어오는 자를 보던 옥좌의 존재가 어둠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무의미하지 않은가…… 다음 판에서 더 유리해지고자 설정해놓은 법칙이…… 안락함 속에서 도리어 인간의 가능성을 옥죄일 줄은…… 이제 종말을 앞두었으니 무료할 따 름이다』

“…….”

[나의 가장 강력한 동료여.... 무슨 말을 하고자 찾아왔나?]

그 말에 흰옷을 입은 그 존재는 창을 살짝 땅으로 늘어뜨리더니 말했다.

“너는 우리 모두와 힘을 합쳐서 니알라토텝을 봉인했다. 그걸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었나? 어째서 종말의 예정이 멈추지 않는지를 들으러 왔다.”

[…… 후후, 우리 모두라…… 크흐흐.]

광기에 물든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 존재는 잠시 후 뜻밖의 말을 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한 건 그저 가면 하나를 없앤 것에 지나지 않지.]

“가면일지언정 그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가면. 그렇다면 당연히 종말도 멈춰야 하지 않는가.”

스윽

흰옷의 존재는 창을 옥좌로 향하며 약간의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속인 것인가?”

[정말 속은 건 나였다…… 니알라토텝에게 속았지…….]

옥좌의 존재가 이윽고 권태로운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째 가면’의 진짜 비밀은 놈조차도 몰랐다는 것…… 자기자신조차 속이는 진정한 외신이 바로 기어 오는 혼돈이라는 것…… 그게 이번 패배의 이유다.]

[곧 다음 전생(轉生)이 시작되겠군…….]

후두두둑…….

석재건축물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천공의 어둠이 더욱 뻗어 나오며 세계가 부숴지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세계의 멸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리라.

옥좌의 존재는 창을 든 사내를 향 해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진소청』

* * *

“!!”

번뜩!

나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며 땀이 흥건하게 맺히는 걸 알아챘다.

‘바, 방금 그건?’

너무 생생한 기억!

하지만 그 기억 속의 화자는 도저히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옥좌에 앉은 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옥좌에 앉은 자와 대화하던 누군가의 정체였다.

“진소청이 왜?”

진소청이 니알라토텝을 쓰러뜨리는데 참여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아, 아니 전혀 그런 적이 없는데? 니알라토텝을 쓰러뜨리기는커녕 황제를 상대하는 것만도 힘들어서 죽겠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냐! 이건 내 기억이 아니라고!’

이 기억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왜 하필 금강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자마자 이런 기억이 나타난 거지?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그 순간 알 수가 있었다.

‘옥좌에 있던 자가 내뿜던 흉흉한 기운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말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그자가 흘려내던 가공할 어둠의 기운이 내 심령(心靈)을 휩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이 머금고 있던 형질이 사실은 수백 개나 되는 악랄한 주문(脫文)들이 뭉친 마도(魔道)의 궁극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치치칭!!

갑자기 내 피부에 새겨져 있던 세쓰(seth)의 기운이 마치 혈관처럼 돋아나면서 빛을 일으켰다. 나는 난데없이 내 피부에서 세쓰가 명동하는 걸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존재가 펼치던 그 기운…… 그건…… 세피로트의 나무도 포함하고 있었던 거다!’

느껴진다.

이 감각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그 어둠의 힘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어둠의 힘은 무공과는 달리 마치 나의 천성(天性)과 직결 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마치 만상지투처럼 익히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으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저 기억 속의 힘을 얻기만 하면…… 얼마나 강해질까?

흑웅만으로도 그 정도였는데 저 마도의 결정체를 시전할 수 있으면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강자가 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런 생각에 마치 홀린 듯이 감각을 따라서 기억의 흐름을 따라 가려 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 * *

꾸웅!

범종(楚鐘)이 울리는 듯한 소리!

그 청량하면서도 마치 내부를 진탕 시키는 듯한 격렬한 진동에 나는 덜덜 떨면서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스스스

나는 어느새 또 다른 환영의 세계에 진입해 있었다.

이 환영의 세계는 방금 전과 달리 익숙했다.

빛조차 없는 새벽의 폭포 절벽 위에서 나는 염주를 든 채 서 있었다.

나는 이게 바로 역근세수경의 화자(話者)가 처해 있던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에 사신지혼의 길을 찾았을 때 보았던 환영과 똑같은 것이다.

촤좌좌좌

발밑에 차가운 수류가 세차게 지나가면서 냉기가 전신에 오한을 들게 한다. 나는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아까 보았던 옥좌의 환영이 마치 꿈결과 같았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현실인 것 같았고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모르겠어…… 근데 내가 왜 역근세수경의 화자가 된 거지? 화자는 따로 있는 거 아니었나?’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 기억은 대체 무슨 의미로 내게 출현한 것일까?

그때 내 눈앞에 시뻘건 글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자들을 살펴보았고 이내 그 정체를 알아채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 이건, 금강경 부분의 이두(吏讀)…….”

이두로 쓰여진 시뻘건 변형자들이 마치 내 몸을 둘러싸듯이 맴돌고 있었다. 어째서 시뻘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주술적인 보호의 의미로 보였다. 이 글자들이 나를 보호 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때였다.

마음(心)이란 공(空)인가?

눈앞에 글자가 맺혀서 화두(話頭)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화두를 보자 이게 또 무슨 선문답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고, 일단 이 폭포에서 벗어나려고 마음먹었다.

움찔

‘으윽…… 움직이지 않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폭포절벽 위에 서 있는 상태가 고정되어 있었 다. 그 어떠한 신력이나 무공도 쓸 수가 없었고 그저 염주알을 굴리면서 눈앞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의 전뇌공간에 갇혔을 때와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선문답을 풀어야만 이 공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으니 마음 또한 공(空)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불경의 언어로 대충 말하면 통과할 수 있겠지!

딱 봐도 그럴듯하잖아!

…….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 이게 아닌가?’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 게 일단 아무거나 말해보았다.

“마음은 색(色)이다.”

“마음은 생각이다?”

“마음은 마음이다……

“마음이 뭐 어쨌다고…….”

……

나는 그렇게 수천 번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도 안 맞는 것 같자 그만 짜증이 나서 생각했다.

‘에잇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저번처럼 의지력만으로 이 상태를 벗어나겠어!!’

고오오오

강력한 의념을 끌어내 보았지만 역시나 이상하게도 의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메피스토 펠레스의 전뇌공간을 어떻게 탈출했었지? 제기랄. 그때 어떻게 한 건지 생각이 안나…….’

딱 그 때같은 느낌인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 때는 단순히 용을 쓴 걸 넘어서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한 방 먹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의지가 한 곳에 집중되었던 것 같은데…….

‘잠깐…….’

마음이라고?

“…… 그렇구나.”

나는 잠시 후 이 역근세수경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 수련의 공간…… 이 역근세수경은 처음부터 이러려고 만들어진 거였나.”

그렇다.

역근세수경을 읽다가 깨달음을 얻은 자는 저절로 이 공간에 들어와서 화자(話者)가 되는 것이고, 마음을 수련해서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心)은 공(空)인가?

나는 이 공간에서 눈앞의 화두를 풀어야만 나갈 수 있으며, 이 자체가 마음수련이라고 생각하자 좀 더 진지하게 변하게 되었다.

‘평소처럼 단순히 함정을 빠져나가는 느낌으로 접근하면 안 돼. 이것도 수련인 거야.’

다만 너무나도 붕 떠 있는 형이상학적인 화두였으므로, 나는 일단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해보기로 마음먹 었다.

‘마음이 공이다…… 마음은 비어 있는가…… 원래 이 화두는 불가(佛家)의 선(禪)에서 나온 것이니 공(空)을 단순히 비어 있다고 해석하진 않아.’

불승들은 공(空)이란 본성(本性)이라고 해석하곤 했다. 자기 자신의 길들여지지 않은 천성, 그 자체가 공이며 인간의 사리사욕과 지혜로 공을 길들이거나 해석했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마음이 공이라는 걸 깨닫는 게 모든 선(禪) 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그동안 수천 번의 해답을 말하면서 이미 수도 없이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 내가 이제 와서 이 정도 불가 이론을 모르겠는가? 허나 아무리 그럴듯한 답을 내놓아도 눈앞의 화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럴듯해봤자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그럴듯한 이치(理致)를 남에게서 글줄로 배워 입으로 주워섬겨 봤자 그건 진정한 깨달음은 될 수 없는 법! 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은 척했기에 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천하제일의 무학(武學)을 무공비급만으로 배워봤자 결국 몸으로 한 번도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 작자는 삼류에 불과한 것과 같다. 그리고 무공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고 불법의 깨달음은 마음을 갈고닦는 것이니, 나는 이 화두를 불경의 이치로만 접근하는 게 아니라 직접 내 마음수련의 결과로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비어 있다.

비어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마음이 공(空)이 아닐 경우 무엇이 틀린 건가? 어째서 마음이 공이라는 게 진실인가?’

왜 선승(禪僧)들은 마음이 공이라고 하는 결론을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일까?

그자들 또한 그냥 불경에 있는 글빨만 주워섬기는 게 아닌가?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의문을 가지며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무공에 천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불법을 연구하는 승려들도 당연히 천재가 있었을 것이고 역사상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불법에 입문해 불법을 닦았을 터인데 그 결론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절세무공이 있을 경우 초심자가 그 절세무공에 의문을 제기해봤자 씨도 안 먹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존에 연구된 진리를 생각하 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기본도 안 되어 있으면서 생각할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는 초심자가 아니다. 적어도 무공이라는 방면에 있어서는 절대자의 경지에 가까워져 있으며 내 깨달음은 당연히 마음의 깨달음과도 통해 있다. 비록 선과 화두가 자주 접하지 못했던 분야라 하더라도 내가 수백 년간 닦아왔던 수양이 거기에 접근하지 못할 정도는 절대 아닌 것이다.

‘비어 있다(空)…… 그건 마치 내가 십만 번 베기를 하거나 무아지경에 수련을 거듭했던 그 당시에 느꼈던 감각과 같은 게 아닌가.’

심기체(心技體)의 합일(合一)이란 무인들이 늘 유지하기를 바라는 경지이지만 저 당시에는 심기체가 거의 무너졌다. 인간의 체력을 수십 배나 넘어선 미친 수련을 하면서 안 죽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는데 심기체의 균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몰아지경에서 무인이 생사의 고비를 넘을 때는 당연히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공허감을 느낀다. 나는 몇 번이나 느꼈던 그 감각…… 그것도 공(空)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 일단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러면 무인의 입장에서 마음이 공 이 아니면 무엇이 곤란한 것인가?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자아(自我)조차 무념(無念)의 상태에 접어들어 있을 때는 당연히 공(空),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상태가 공이 아니라면 이상한 거지! 그래서 승려들은 공이라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 것인가?’

일견 이해가 간다. 무림인들도 그 ‘비워 버리는’ 몰아일체의 상태를 당연히 공(空)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깨달음을 해석하기가 힘들다. 동시에 나는 무인의 관점에서 이게 무슨 말인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다 비워 버리는 허허로운 상태에서도 오로지 마음(心)만은 남는다. 그래서 마음(心)은 공(空)인 것인가!’

의념도 체력도 집중력도 다 사라져 버린 극한 탈력의 상태.

그 상태에서도 내 마음만큼은 더욱 오롯이 남아 마치 천주(天柱)에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무인(武人)의 공(空)이다.

…… 원래라면 여기서 내가 다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정답이라고 말해 버렸으리라.

그러나 나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게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단지 평소에 무의식중에 생각 하고 있던 것을 언어화(言語化) 시켰을 뿐이다. 나는 마음수련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종에서는 색(色)이란 존재이자 유존(有存)를 의미하고 공(空)과 분리된 개념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무인에게 있어서 색(色)이란…….’

바로 무공(武功)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색(色)이 유(有)를 의미한다면 무인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는 유(有)란 본질적으로 무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공이 없는 자가 어찌 무인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 순간 나는 하나의 구절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보통사람들도 웬만하면 알 정도로 그 유명한 글귀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무공을 익히는 자는 일념(一念)으로 연마하게 되면 언젠가 반드시 공(空)의 경지를 겪게 되며, 그 공(空)의 경지 또한 무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틀리지 않다. 도리어 이렇게까지 맞아떨어지는 게 소름 돋을 정도다.

물론 경전을 연구하는 진짜 불승이 내가 이런 식으로 공의 이치를 갖다 대는 걸 보면 어이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럴듯한 경전의 이치가 아니라,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마음의 깨달음이다. 뒤죽박죽이고 엉망일지언정 나는 내 마음이 향하는 것을 옳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동시에 나는 생각이 더욱 깊은 곳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 하지만…… 어째서 모든 게 사라진 그 극한의 상태에서도 어째서 마음(心)만은 남게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숱하게 무공의 황홀경과 공의 경지를 느낀 바 있지만, 이성은 예전에 사라져 버리고 의념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그 상태에서 어찌하여 마음만큼은 남게 되는 걸까?

‘마음은 공(空)…… 하지만 마음은 도대체 뭐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단순한 걸 왜 고민하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직접 황홀한 공의 경지를 느껴 본 적 있는 자로서 그렇게 단순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십만 번 베기나 뇌영검법 십만 번을 할 때 극한 중의 극한에 도달하는 그 당시에 나는 내공도 의념도 아예 쓸 수가 없었다. 이성조차 남지 않은 상태에서 악을 부려서 계속 고비를 버텨 넘었고 어느 순간 악조차 쓸 수 없게 되었다. 대뇌에서 생각을 할 수 없으니 내가 이걸 왜 하는지조차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空)은 존재한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형태로 존재 한다.

심지어 그 상태는 만일 그 당시에 내가 머리통이 날아가서 죽었다 하더라도 계속하여 공이라는 상태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때 이미 생(生)과 사(死)란 중요하지 않게 되고 무(武)라는 실체에만 자아가 녹아 있는 것 같다. 마음과 생각이 다른 것이라는 걸 그때만큼 절실히 느낄 때는 따로 존재치 않았다.

마음이란 뭘까?

나는 과거 아수라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생각을 만들어내는 뇌조차도 필수 조건이 아니지. 육체는 마음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란 소리야. 하지만 그럼 무엇이 필멸자의 ‘마음’을 만들어내는 거냐고.]

[이렇듯 마음이 구성되는데 물질이 전혀 필요 없는 거라고 한다면, 돌덩어리나 마음을 가진 존재의 차이는 어디서 구분되는 거지? 돌덩어리에는 왜 마음이 없냐.]

…….

돌덩어리에는 왜 마음이 없을까.

동시에 나는 망량의 조언을 떠올렸다.

[마음이란 유심론(뺘心論)의 세계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마음(心)이며 식(識)일 뿐. 마음이 존재하기에 물질의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 말을 확장시켜서 생각한다면, 존재가 인식하지 않는 범위의 세계는 관측하기 전에는 존재치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소?]

[인식하지 않는 곳에는 마음이 존재치 않으니까. 마음과 식(識)이 없으면 물질도 없지. 그게 유심론에 따르면 합리적일 수도 있소.]

인식하고 있는 곳에 마음의 인지(認知)가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 세상 전체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공이라 함은…… 사실 이 세계 전체가 공(空) 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마음이, 인식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면 그 세계의 구성이 결국 공에 도달한다는 게 이 세상이 사실 무(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게 말이 될까?

뻔히 이 세상에 유중유(有中有)가 가득 차있는데 만유(萬有)가 즉 만무(萬無)과 같다고?

전제와 결론이 아예 맞지 않는 모순 그 자체였고 인과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존재(有)가 비존재(無)와 같다는 이야기는 대체 왜 하는 것일까?

‘아!’

그러나 나는 이윽고 그게 성립되는 경우도 있다는 걸 경험에서 추측할 수 있었다.

‘꿈(夢)의 세계라면 그게 가능한데!’

그렇다.

이 세계가 [꿈]이라고 하는 영역이라 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사실 무(無)라는 것도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 세계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산하사직도에 들어갔을 때의 경험을 생각해본다면, 꿈의 주민들은 각성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꿈속의 존재라는 걸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신기하다.

불교의 깨달음에 구애받지 않고 전생의 경험으로 공(空)을 해석할 수 도 있다니?

나는 동시에 이런 깨달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음은 공이고…… 이 세상 또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건.”

나는 이윽고 뜻밖의 결론을 내게 되었고 그 말을 한 내 자신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또한 [꿈]을 구성하는 것이다!

…… 왜 이런 결론이 되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절대자의 백일몽(白日夢)이라고 할지라도, 그 백일몽을 구성하는 것은 마음(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그 마음은 [누구]의 마음인가?

‘그러고 보니 망량선사도 그렇고 그 누구도 내게 말해준 적이 없군.’

[꿈]의 세계.

그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

그걸 수없이 오가면서도 생각했던 것…….

이 세계가 꿈이라면 도대체 누구의 꿈이란 말인가?

꿈을 꾸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왜인지 수천조 번은 생각했던 것만 같은 절실한 일념(一念)이 무의식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무아지경이 난데없이 찾아오면서 단 하나의 염상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었다.

‘꿈을 꾸고 있는 자는 그 자신도 꿈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기에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경계를 짓는 것조차 하찮은 인위(人爲)일 뿐.

실로 어리석도다.

“어…….”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전혀 상관없는 얘기인데…….

나는 잠시 이 생각을 왜 한 것인지 의아해서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원제로 되돌아와서는 생각 했다.

“아무튼 마음은 공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모든 게 사라졌을 때 마음만이 남는 이유도 간단해.”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 세계의 만유(萬有)는 마음이었으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은 그저 마음의 일부일 뿐이었고, [전체]에서 아무리 부분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유(全有)가 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많이 소유 하고 있어도 그 소유는 공(空)의 일부분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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